이보영      01091198211      polarislkh@naver.com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지은이 : 강산
출판사 : 알토북스
출판일 : 2026년 05월



  • “왜 사람이 바뀌어도 늘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고,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줄곧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자신의 성격이나 능력 부족으로 해석해 왔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참아야 하며, 더 노력해야 한다고 믿으며 마음속 깊이 고통을 구겨 넣는다. 하지만 저자는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인간은 왜 항상 충돌하는가?
    같은 세계지만, 모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는 『명상록』에, 하루를 시작하며 이런 말을 스스로 반복하라고 적었다.

    "오늘도 나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배은망덕하며, 교만하고, 술수를 쓰고,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기록은 타인을 비난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마주칠 고통이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전제하기 위한 자기 점검에 가깝다.

    주목할 점은 이 글이 절대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가 남긴 개인적 메모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을 거느린 인물조차도, 인간관계의 피로와 갈등을 일상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현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질문은 "왜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다양한 성향과 가치관이 뒤섞인 환경에서는 오해와 불편이 반복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좌절로 받아들이기보다, 예상 가능한 변수로 처리할 수 있을 때 감정적 소모는 줄어든다.

    결국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모든 차이를 이해하거나 포용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처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에 오래 머물지 않는 판단력이다. 관계의 어려움을 제거하려 하기보다, 그것이 삶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회복의 속도를 높이는 태도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도 자기 한계를 넘어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며, 누구나 자기 안목과 수준의 범위 안에서만 세계를 해석한다"라고 말한다. 이 명제 역시 아우렐리우스의 글과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인간 비판이 아니라, 그의 인식론을 요약하는 문장이라 볼 수 있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각 개인의 지적 수준, 경험, 성향을 통과한 표상으로서만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자기중심성은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구조적 조건이다. 누구든 자신에게 직접적인 흥미를 주는 것, 자신의 이해관계나 자존심과 연결되는 일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반대로 자신의 욕구나 세계관을 자극하지 않는 정보는, 그것이 아무리 합리적이거나 정당하더라도 쉽게 무시한다. 결국 타인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그 사람의 세계관과 인식 수준을 반영할 뿐, 보편적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사이의 오해와 상처는 필연적이다. 서로 다른 가정, 사회, 문화 속에서 형성된 개인들이 동일한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면, 타인의 무례함이나 공격성은 상대가 의도적으로 악의를 품어서라기보다, 그가 가진 세계의 해석 틀이 그렇게 작동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이 구조적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타인의 언행을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여지를 확보할 수 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전해지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무학(無學) 대사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태조가 무학대사의 얼굴을 돼지에 비유하자, 무학대사는 태연히 태조를 부처에 비유하며 응수한다. 그가 덧붙인 말,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로 보인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재치가 아니다. 이는 인간이 타인을 바라볼 때 언제나 자신의 내적 상태와 인식 틀을 투사한다는 사실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입하자면, "판단"이란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판단자의 표상을 노출시키는 행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타인의 험담이나 비난 역시 그 자체로 나에 대한 진술이기보다, 발화자의 세계관과 성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자료다. 따라서 반복적으로 불쾌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중요한 질문은 "저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가 아니라 "저 사람의 인식 구조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이다. 이 질문은 감정을 삭이고, 대응을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 되돌려 놓는다.

    인식의 거리 두기로 상황을 재해석하라
    쇼펜하우어적 처세는 여기서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만약 상대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정적 설득 대신 명확한 경계 설정이 필요하다. 반대로 특별한 가치가 없는 관계라면,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며 가르칠 이유는 없다. 인간의 본성은 단기간에 변하지 않으며, 같은 인식 구조는 유사한 행동을 반복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냉정함이지, 비관이 아니다.

    결국 타인의 말과 행동에 덜 상처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정의 무감각이 아니라, 인식의 재배치다. 상대의 언행을 나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가진 세계의 해석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분노와 적개심은 자연스럽게 약화된다. 

    무례한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지 않는 법
    일상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충돌이나 불편한 관계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 필요 없다. 모든 자극에 반응하는 태도는 오히려 판단력을 흐리고,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의미 없는 마찰을 굳이 분석하거나 해결하려 들기보다, 더 이상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리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관심과 반응은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관계는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정리의 대상이 된다. 지속적으로 불쾌감만을 유발하고 상호 존중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관계라면, 합리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 모든 관계를 이어나갈 이유는 없으며, 평온함은 때로 관계를 확장하는 데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접촉을 줄이는 데서 확보된다.

    인간관계에서 반복되는 무례와 오해, 실망은 제거해야 할 예외가 아니라 처음부터 감안해야 할 조건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하루를 시작하며 자신에게 경계의 말을 되뇌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바꾸려는 기대나 관계를 이상화하려는 태도는, 현실과의 불필요한 마찰만 키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을 선별하거나 이해하려 애쓰는 일이 아니라, 해석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다. 타인의 언행을 개인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조건으로 처리할 수 있을 때 감정은 과도하게 소모되지 않는다. 무례에 반응하지 않는 태도는 도덕적 우월이 아니라, 에너지 관리를 위함이다.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더 많은 것을 감내하는 힘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 개입하지 않는 판단력이다. 삶의 안정은 타인을 설득하는 데서가 아니라, 어디까지 관여하고 어디서 물러설지를 명확히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열등감은 어디서 발현되는가?
    질투의 사회학
    직장 조직에서 유능하거나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사람이 등장할 때, 그 반응이 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기존의 평가 기준과 암묵적인 서열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환경에서는, 탁월한 개인의 출현 자체가 비교의 구조를 흔들기 때문이다. 이때 문제는 그 사람이 무엇을 잘했는가가 아니라, 그의 존재로 인해 기존의 기준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 구성원들은 탁월한 사람의 성과를 정면으로 평가하기보다, 비교 상황 자체를 흐리는 방향을 택한다. 성과를 축소하거나, 평가를 미루고,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반응을 개인의 성격 문제로 보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개인이 등장하는 순간, 다수는 그것을 환영하기보다 억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뛰어난 개인이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면, 평균에 기대어 있던 다수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이 불안정성을 제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기준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비교가 성립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작동하는 감정이 바로 "열등감"이다. 그러나 열등감은 개인적인 시기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이 스스로 설정해 온 "안전한 평균"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조정 장치라 할 수 있다. 평균이 기준이 되는 환경에서는, 그 기준을 넘어서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불편한 변수가 된다. 질투와 배제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작동한다.

    쇼펜하우어는 그 근본 원인을 인간 존재를 지배하는 "의지"의 성격에서 찾는다. 각 개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며, 그 과정에서 타인의 성취는 곧바로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된다. 동일한 공간에서 여러 의지가 동시에 작동하는 한, 경쟁과 충돌들은 구조적으로 불가피하다. 특히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협력보다 비교가 먼저 작동하기 쉽고, 그 결과 갈등은 반복된다. 그의 염세적 세계관에서 인간 사회는 조화로운 공동체라기보다, 상호 견제와 충돌이 일상화된 전장에 가깝다. 개인들은 타인의 결함을 드러내는 데 능숙하며, 성취보다는 실패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질투"는 이 과정에서 타인의 불행을 통해 상대적 안정을 확보하려는 심리적 전략으로 작동한다. 결국 불완전하고 자기중심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탁월함이 언제나 환영받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직장"이라는 제한된 경쟁 환경에서 이러한 메커니즘은 어쩌면 개인 간의 일상적 상호작용 속에서 보다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다음 사례는 언젠가 후배가 내게 상담을 요청했던 내용으로, 질투가 개인의 불만과 좌절을 왜곡된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있다.

    한 조직에서 근무하던 B는 동료 A에게 새로운 제도로 인해 업무 부담이 증가했다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B의 불만이 제도 자체를 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당 제도의 변화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심리적, 실질적 영향을 받지 않는 A를 향해 B는 "당신은 능력도 없는데 제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보니 운이 좋다"라는 식의 일방적 평가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이 발언은 사실관계에 근거한 판단이라기보다,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감정의 전가라 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점은 A의 실제 위치다. A는 제도의 설계자도 아니었고, 특별한 수혜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B는 자신의 불편함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들여다보지 못한 채,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대상을 선택해 감정을 방출했다. 이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외부 대상에게 전가하는 전형적인 심리적 투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에 익숙한 사람은,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유사한 대상을 찾아 분노를 배출하는 경향을 보인다. 표적이 바뀔 뿐, 구조는 유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질투의 이면에는 강한 열등감과 자기방어 본능이 결합되어 있다. B는 자신보다 어린 A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이 불편함을 완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대의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A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격하할수록, B는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감각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투는 이처럼 자기 인식의 균형을 임시로 회복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탁월함을 향한 집단의 불안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타인의 공적(功績)을 대하는 태도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타인의 성취를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공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중 후자가 심리적으로 훨씬 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선택을 반복한다고 설명한다. B의 태도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상대의 역량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보다, 왜곡된 평가를 통해 자신의 불안을 관리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왜곡은 판단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투사해 해석하는 상태를 "지혜의 결여"로 보았다. B는 제도의 구조적 문제나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오로지 감정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따라 A를 평가하고 불만 욕구를 배설했다. 이는 단순한 사실 판단의 오류를 넘어, 조직 내 관계를 불필요하게 훼손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의 도덕 철학에 따르면, 인간 행위의 동기는 이기심, 악의, 동정심으로 나뉜다. B의 행동은 자신의 불쾌를 해소하기 위해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가한 것으로, 이기심과 악의가 결합된 전형적인 반도덕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감정의 소용돌이에 묶어두는 선택을 한 셈이다.

    이 사례는 질투에 휘말린 상태에서의 행동이 조직 생활에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감정이 판단을 앞설 때, 모든 상황을 공격을 위한 빌미로 해석하고, 무고한 대상을 원인으로 지목하기 쉽다.

    따라서 A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설명이나 반박이 아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순간, 문제의 초점은 사실 관계에서 벗어나 감정싸움으로 변질된다. 상대의 발언이 단순한 화풀이인지, 의도를 가진 탐색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무엇이라 답하든 해석은 왜곡될 가능성이 크고, 대응 자체가 또 다른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질투로 인한 공격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개인일수록, 이러한 투사의 대상이 되기 쉽다.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듯, 뛰어난 개인의 진가는 즉각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다. 탁월함은 대개 오랜 시간에 걸쳐, ""마지못한 승인""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이 점을 인식한다면, 남의 질투와 몰이해에 과도하게 반응할 이유는 줄어든다. 중요한 것은 즉각적인 인정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유지하며 일관되게 나아가는 태도다. 질투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장기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다. 조직 내의 소음은 결국 사라지지만, 축적된 실력과 판단력은 남는다.


    바꿀 수 없는 것과 조정 가능한 것
    자유는 선택이 아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 자신을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로 이해해 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우리는 흔히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간다고 믿지만, 그 선택이 어디까지 자유로운지는 좀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에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운명은 초월적인 힘이나 신의 계획이 아니다. 그것은 미리 쓰인 각본도, 외부에서 강제로 내려오는 명령도 아니다. 그의 철학에서 "운명"이란 개인의 불편적인 성격과, 그 성격이 맞닥뜨리는 외부 조건이 인과적으로 결합한 결과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운명은 어떤 사건이 발생한 뒤에 붙는 이름이지, 사건을 미리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다.

    이 관점은 흔히 "사마라에서의 약속(Appointment in Samarra)"에서 잘 드러난다. 바그다드의 한 하인은 시장에서 죽음의 사신을 마주치고, 자신이 위협받았다고 믿은 나머지 공포에 휩싸여 사마라로 도망친다. 그러나 그날 밤, 주인이 죽음의 사신을 만나 항의하자 사신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하인을 위협한 적이 없소. 다만 오늘 밤 사마라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직 바그다드에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을 뿐이오."

    이 이야기에서 하인을 사마라로 이끈 것은 죽음의 사신이 아니라, 하인의 성격과 반응 방식이었다. 위협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즉각 도망치는 성향이 그를 스스로 약속된 장소로 데려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면, 운명은 외부에서 덮쳐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자리한 성격이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인간의 성격을 매우 엄격하게 규정한다. 성격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며, 후천적인 교육이나 이성적 결단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결심을 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같은 반응 패턴을 반복할 뿐이다. 외부 조건은 달라질 수 있어도,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틀은 거의 변하지 않는데, 그것이 바로 "성격"이다.

    이 점에서 운명은 흔히 생각하듯 부모, 출생 환경, 사회적 조건 같은 외부 요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똑같은 몰락의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원망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자신을 소모하고, 어떤 사람은 비교적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른 경로를 택한다. 삶을 결정짓는 것은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 조건에 반응하는 성격이다. 그러니 비극을 연장시키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대하는 동일한 반응의 반복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적 자유: 필연성을 껴안는 지혜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중요한 구분을 제시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성격을 바꾸거나 다른 존재가 될 자유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 행동이 만들어 내는 결과 역시 우연으로 볼 수 없다. 자유가 없다는 사실은 면죄부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성격에 대한 인식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그는 인간의 분투를 종종 "바람과 노"의 비유로 설명한다. 삶의 조건이라는 바람이 순풍일 때는 노를 젓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지만, 역풍이나 회오리바람 앞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걸음을 면하기 어렵다. 이는 외부 조건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을 단순히 떠밀리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을 "지각 있는 존재"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지만, 인식의 자유는 남아 있다. 그는 벼룩에 물렸다고 신에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생활을 점검하고 환경을 조정하라고 말한다. 이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피한 결과를 미리 피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뜻한다.

    이성은 성격을 바꾸지 못하지만, 성격이 불리하게 작동할 상황을 예측하고 회피할 수는 있다. 생애를 돌아볼 때 반복되는 실패의 패턴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 안에서 작동해 온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깨달음이 자유를 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같은 함정에 무작정 다시 빠지지 않을 지혜를 제공한다.

    이 지점에서 운명과 자유의지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인간은 분명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언제나 불변의 성격과 주어진 동기의 결합 속에서 이루어진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결정론적 동기론"이라 부른다. 동일한 조건에서 다른 선택이 이루어지려면, 상황이 달라지거나 행위의 주체가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상정하는 "다른 가능성"은 모두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착각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철학이 단순한 체념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술적 관조, 타인에 대한 연민, 그리고 욕망을 약화시키는 태도를 통해 의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운명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 시선을 획득하는 일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자유란 의지를 마음대로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의지가 만들어 내는 필연성을 인식하고, 거기에 무의미한 기대를 덧붙이지 않는 태도다. 세계는 여전히 인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성격은 변하지 않으며, 고통은 반복된다. 다만 그 구조를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더 이상 운명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지 않는다.

    이처럼 그의 자유의지론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어디까지 자유롭지 않은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과도한 기대와 헛된 후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최소한의 여백이 생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자유는, 선택의 전능함이 아니라 필연성에 대한 명료한 인식 속에서만 성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