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2주차 |
BOOK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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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단행본 ![]() 펄럭이는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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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은이), 한지원 (옮긴이) 출판 윌북 출간 202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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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요약 보기![]() 펄럭이는 세계사 세계 곳곳의 삼색기 18세기가 끝나가던 1789년과 1799년 사이, 프랑스는 대격변의 물결에 휩쓸렸다. 절대군주제는 사라졌고 여러 나라가 혁명전쟁에 시달렸다. 이 장은 유럽을 완전히 뒤집어놓고 지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그린 프랑스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깃발 애호가들 사이에서 프랑스혁명은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 유명한 프랑스 삼색기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삼색기는 전 세계 혁명가의 이성과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고 다수의 주권국 국기에 실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비할 만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국기는 영국의 유니언잭이 유일한데, 영국 국기가 식민지 확장을 통해 위상을 다졌다면 프랑스 국기는 삼색기가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원칙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삼색기의 기원은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과 관련이 깊다. 파리 시민은 프랑스 왕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고, 이 사건이 프랑스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혁명군은 파리의 상징색인 파랑과 빨강으로 된 모표를 모자에 달고 다녔다. 그해 혁명군의 압박에 못 이겨 소집된 국민 제헌의회는 단순화 된 도안의 국기를 채택했다. 프랑스가 과거와의 단절을 꾀한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리는 도안이었다.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중앙의 흰색이 파리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인민을 상징하는 빨간색에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헌법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은 국민이 군주를 통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처음 몇 년간은 삼색기의 줄무늬 순서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빨강, 하양, 파랑 순이었다. 그러다 프랑스대혁명으로 탄생한 제1공화국은 1794년에 삼색기를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기로 채택하였는데, 이때 순서가 반대로 되며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파리 시기의 색 배열을 반영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미적 취향의 문제였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은 인권에 대한 높은 이상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공포정치로 바뀌고 말았다. 파리의 단두대는 거의 하루도 쉴 날이 없었고 공공의 적을 바지선에 태워 센강으로 데려가 대포를 쏘기도 했다. 1795년부터 프랑스를 통치한 집정부는 공포정치의 종식을 목표로 삼았지만 1799년 나폴레옹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집권 후 국기를 손보기도 했다. 원래는 줄무늬 폭의 비율이 파랑 30, 하양 33, 빨강 37로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같은 폭으로 조정한 것이다. 이제 다시 나폴레옹 이후의 프랑스로 돌아가보자. 왕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곧바로 프랑스 국기는 혁명군을 대표하는 삼색기로 돌아왔다. 그러다 1871년 사회주의 자치 정부인 파리코뮌이 72일간 권력을 장악하면서 프랑스의 삼색기는 다시 한번 공식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이 기간에 프랑스 국기는 아무 무늬 없는 빨간색 깃발이었다. 그 이후로 빨간색은 공산주의를 상징하게 되었으니 프랑스 국기가 소련과 중국 국기를 앞서간 셈이다. 프랑스 국기와 관련한 또 다른 돌발 사건은 1873년에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기학의 세계에서 상당히 이례적인데, 대부분의 경우 국기는 역사적 사건의 결과일 뿐이지 원인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해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와 파리코뮌을 타도하고 왕정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의회는 부르봉 왕가의 후손인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왕위를 제안했는데, 앙리는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거부하며 다시 백합기를 국기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의회는 삼색기 정중앙의 흰 줄무늬 속에 백합 문양을 넣어 혁명과 절대군주제의 상징을 모두 포함시키거나, 삼색기를 국기로 그대로 두는 대신 백합기를 왕기로 사용하라는 절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샹보르 백작에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샹보르 백작은 왕좌를 거절했고 왕정 복구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파리에 가면 어두운 색조와 밝은 색조로 된 두 종류의 프랑스 국기가 거리에 걸려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1976년에는 원래 것보다 밝은 색조가 사용된 삼색기가 도입되었는데, 밝은 색상이 텔레비전 화면발을 좀 더 잘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 정부는 밝은 색조의 국기를 주로 사용해왔다. 그러다 2021년에 들어서면서 마크롱 대통령이 느닷없이 원래대로 어두운 색조의 국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기억하자는 상징적인 제스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제는 미디어가 색을 한결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니언잭 영국 국기의 기원은 십자군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기 속 십자가는 영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상징한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흰 십자가를 사용했지만, 언제부턴가 잉글랜드군은 붉은 십자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헨리의 아들인 사자심왕 리처드가 제3차 십자군 원정부터 성 조지를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를 채택했다고 하는데, 그 무렵 성 조지가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군대를 꾸리는 데 있는 돈을 다 쏟아붓다시피 했지만, 함께 출정한 거의 모든 나라와 분쟁을 일으키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특히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관계는 그가 리처드의 동생과 결혼하기를 거부한 뒤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와의 다툼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아크레가 함락된 후에 일어났다. 아크레 성벽에 예루살렘 왕국, 잉글랜드, 프랑스의 국기와 함께 레오폴트 공작의 깃발이 걸리자 리처드가 레오폴트의 깃발을 치워버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깃발 사건은 국기가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마침내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리처드를 레오폴트가 생포한 것이 이 사건 때문이라고 전해지니 말이다.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의 국민은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거액을 모금해야 했다. 영국 국기의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준 다음 사건은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직계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발생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공식적으로는 별개의 나라로 남아 있었음에도 같은 군주를 모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연합을 상징하는 깃발은 영국의 성 조지 십자가를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루 십자가 위에 겹쳐 그려졌다. 성경에 따르면 성 앤드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제자로 등장하여 첫 번째 부름을 받은 앤드루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 앤드루는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의 십자가는 직선 2개가 대각선으로 교차한 X자 모양이었다. 둘 중 어떤 십자가를 위에 놓을지는 순전히 미학적 관점에서만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동등하게 맺어진 연합이었지만 사실은 잉글랜드가 약간 더 우세했다. 1606년 잉글랜드의 십자가가 스코틀랜드 십자가 위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당시 대다수 스코틀랜드 사람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였다. 스코틀랜드가 붉은 십자가 위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비공식 연합기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선박은 이 비공식 깃발을 휘날리며 항해했다고 한다. 이 깃발은 돛대에 매다는 작은 기, 즉 잭(jack)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니 유니언잭이라는 명칭은 해상 용어에 뿌리를 둔 셈이다. 반세기 후인 1649년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발발했다.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지주 출신인 청교도파 올리버 크롬웰이 스스로에게 호국경, 즉 왕을 대신하는 섭정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을 부여하며 권력을 잡았다. 그 뒤로 잉글랜드는 11년 동안 공화국 체제를 유지했고 유니언잭 대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십자가가 서로 대각선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배치된 형태의 깃발을 국기로 사용했다. 문장학에서는 이런 디자인을 4분할(quartering)이라고 부른다. 영국 국기는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가 합쳐져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을 이루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잉글랜드의 성 조지 십자가와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루 십자가에 더해 성 패트릭을 상징하는 아일랜드의 붉은 십자가가 추가된 형태였다. 새 국기에 다시 하프가 추가되기를 바랐던 아일랜드 국민으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복잡한 국기에 하프까지 넣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영국 문장학자들의 결정은 아마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영국 국기에는 더 이상의 변화가 없었다. 깃발에 십자가가 등장한다면 깃발에 그려진 십자가는 국기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덴마크 국기는 덴마크어로 단네브로라고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국기로 빨간 바탕에 흰 스칸디나비아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1000여 년 전, 덴마크 왕 하랄드 블루투스 고름손은 기독교를 덴마크의 공식 종교로 지정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자면 우리가 아는 블루투스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이 왕에게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하랄드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일한 것처럼 이 기술이 모든 장치를 통합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덴마크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벌인 전쟁은 야만인의 싸움이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행한 거룩한 행위로 여겨지게 되었다. 1219년 덴마크는 탈린 근처에서 비기독교 국가였던 에스토니아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덴마크가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흰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뚝 떨어지자, 용기를 얻은 덴마크군이 결국 승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렇게 빨간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기가 왕실 깃발로 채택되었다. 좀 더 세속적으로 보자면, 덴마크 국기의 십자가는 사자심왕 리처드의 제3차 십자군 원정 시절에 만들어진 잉글랜드 국기의 성 조지 십자가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칭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왼쪽으로 치우친 스칸디나비아 십자가가 다소 못마땅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 디자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마디하자면, 원래 덴마크 국기는 엄밀히 말해 직사각형이 아니었다. 비둘기 꽁지 모양의 꼬리가 2개 달린 오각형 형태로 주로 선박에 내걸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다분히 대칭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단네브로의 놀라운 점은 이 국기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그 긴 역사 동안 공식적으로 도안이 변경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덴마크 기업들이 제품 포장에 국기를 즐겨 사용하는 것도 당연하다. 덴마크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나라다. 이 국가를 이루는 440개 이상의 섬 중 하나인 그린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다. 또한 지금은 독일 땅이 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도 과거에 덴마크가 보유했다. 이 영토의 역사는 덴마크와 독일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20세기 초 독일은 이 지역에 사는 덴마크인을 대상으로 덴마크 국기 게양을 금지했다. 그러자 덴마크 농부들은 특별한 품종의 돼지를 길러 덴마크 항거 돼지(Danish Protest Pig)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등에 커다란 흰 줄무늬가 들어간 이 붉은 돼지들은 아니나 다를까 덴마크 국기를 빼닮았다. 덴마크는 국기법 또한 상당히 이례적이다. 통상적으로 각 나라는 국기 모독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데, 덴마크의 경우에는 세계 모든 나라의 국기 화형식을 금지하면서도 자국 국기에 대해서는 예외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일장기 모독죄는 없으나 외국 국기 모독죄는 있다. 혹자는 평화로운 이 북유럽 나라의 국기를 불태울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06년 덴마크 국기는 세계에서 화형식을 가장 많이 당한 국기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미국의 성조기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덴마크의 한 신문사가 예언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싣자 급진주의 이슬람 단체들이 이에 항의하며 세계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던 탓이다. 이웃 나라 스웨덴의 국기도 덴마크 국기와 비슷한 기원 설화를 가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12세기경 스웨덴은 한 전투에서 핀란드를 무찔렀다. 처음에는 스웨덴이 지고 있었는데, 스웨덴 왕이 푸른 하늘에서 태양의 십자가를 본 후 전세가 역전되었다고 전해진다. 뭐, 어쨌든 이 이야기가 덴마크 쪽 이야기보다는 좀 더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한다. 구름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보는 건 꽤 흔한 일이니 말이다. 단네브로처럼 스웨덴 국기도 변화가 거의 없는 국기의 역사를 자랑한다. 유일한 예외는 스웨덴이 약 100년간 노르웨이와 동맹을 맺었던 19세기뿐이다. 그때 이 두 나라의 국기는 영국 국기와 비슷하게 십자가들이 뒤섞인 모양이 되었다. 그러다가 왼쪽 상단 귀퉁이에 이 연합의 상징을 넣는 방식의 절충안이 나오게 되었는데, 스웨덴 사람들은 이를 영 탐탁지 않게 여겨 청어, 비트, 사과를 버무린 스웨덴 전통 요리를 뜻하는 실살라텐이라 불렀다. 연합이 깨진 뒤 스웨덴은 옛 국기를 되찾았지만, 색깔은 진청색에서 좀 더 연한 청색으로 변경했다 아메리칸 드림 미국 국기는 독립선언 1년 뒤인 1777년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국기를 구성하는 13개의 별과 줄무늬는 이 연합에 처음 합류했던 영국 식민지 열세 곳을 상징한다. 놀라운 점은 동인도 회사의 깃발에 그려진 줄무늬도 우연의 일치로 13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음모론을 믿는 세력은 동인도 회사의 설립자들이 숫자 13을 신성시하는 프리메이슨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미국에는 50개의 주가 있다. 미국 국기는 세계에서 가장 자주 바뀐 국기로 현재 27번째 디자인이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뀐 것은 1959년 하와이가 미국에 50번째 주로 편입된 뒤다. 백악관에서 별 50개가 모두 포함된 국기 공모전을 개최하자 미국 전역에서 1500개가 넘는 도안이 제출되었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도안을 만든 이는 최소 세 명이었다. 그중에는 학교 과제로 이 도안을 준비한 로버트 헤프트라고 하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헤프트가 이 과제로 B-를 받아 항의하자, 선생님은 헤프트의 도안을 국회로 보내 채택되면 점수를 올려주겠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현실이 되면서 성적을 A로 올릴 수 있었다. 미국 국기의 별 개수가 더 늘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2017년에는 푸에르토리코의 미국 주 편입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이에 참여한 주민의 97퍼센트가 찬성표를 던졌다. 또 한 2020년에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51번째 주로 정하자는 법안이 의회 표결에 부쳐졌다. 워싱턴 시장은 이를 환영하며 별51개가 그려진 미국 국기를 거리에 게양하기도 했다. 이 안은 당론에 따라 가결되었지만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정을 받았다. 미국 국기와 관련된 유명한 역사적 인물 중에는 윌리엄 드라이버라는 사람이 있다. 1824년 드라이버는 한 상선의 선장으로 일했는데, 항해할 때마다 늘 국기를 걸고 다니며 이를 올드 글로리라 불렀다. 시간이 흘러 은퇴하면서 고향인 남부의 테네시주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도 휴일이면 언제든 국기를 게양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테네시주는 연방을 탈퇴하여 북부의 주들과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드라이버의 두 아들은 남부를 위해 싸우러 갔지만, 그 자신은 북부에 신의를 지켰다. 남부 사람들 이 집에 들이닥쳐 국기를 빼앗으려 했을 때도 드라이버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내줄 수 없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에는 국기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침대 덮개 안쪽에 꿰매놓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국기를 끔찍이 아낀 드라이버의 사연이 유명세를 타면서 미국 국기는 올드 글로리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미국 국기에 사용된 색상을 지칭하는 이름인 올드 글로리 레드와 올드 글로리 블루도 드라이버의 사연에서 유래했다. 자체 색명을 지닌 다른 깃발로는 유엔기와 인도 국기가 있다. 미국 국기의 또 다른 비공식 명칭은 성조기(Stars and Stripes)로, 이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시인인 프랜시스 스콧 키가 쓴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키는 전쟁이 한창이던 1814년 어느 밤, 볼티모어항의 맥헨리 요새가 포격을 받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요새 위로 당당하게 나부끼던 미국 국기에 영감을 받아 맥헨리 요새의 방어(Defence of Fort McHenry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고 한다. 여기에 영국의 작곡가 존 스태퍼드 스미스가 만들었으며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술 노래의 선율이 더해져 애국가로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는 미 해군의 공식 군가로 쓰였고, 1931년에는 미합중국의 국가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육각별의 세계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자 다음 날 아랍 5개국은 즉시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당시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고 유대인과 아랍인 간 분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새 국기를 채택한 것은 전쟁에 접어든지 다섯 달째 되는 그해 말이었다. 흰 바탕에 다윗의 별과 2개의 푸른 줄이 들어간 국기였다. 이스라엘이 건국될 무렵에 육각별은 이미 유대 민족의 상징이 되었지만, 이스라엘 국기는 지금과는 꽤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테오도르 헤르츨이 하루 일곱 시간 노동을 상징하는 황금빛 육각별 7개를 다윗의 별과 함께 원형으로 배치할 것을 제안했었으니 말이다. 당시 진보적으로 여겨지던 사회주의 사상에 이스라엘 역시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취지였다. 국가 지도자들은 다윗의 별을 국기에 넣는 것에 대해 유보적이었다. 다른 나라에 사는 유대인이 다윗의 별을 사용하다가 거주 국가에 신의를 다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이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지금의 이스라엘 국기가 탄생했다. 다윗의 별은 유대인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이들이 수 세기 동안 겪은 박해와도 관련이 깊다. 가장 유명하고도 끔찍한 사례는 유대인에게 노란 다윗의 별을 달게 한 나치 독일의 소행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짓을 저지른 건 히틀러가 처음이 아니었다. 중세에도 종교적, 민족적 이방인을 식별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노란 다윗의 별을 달게 한 적이 있었다. 13세기에 공표된 교황 칙령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는 기독교 남성이 유대인 여성과 관계를 맺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했다. 이스라엘 국기의 푸른색은 유대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이 기도할 때 걸치는 술 달린 솔인 탈리트에도 흰색과 푸른색 줄무늬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푸른색 염료를 특정 달팽이에서 얻었는데, 이는 토라에도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 이 염료를 제조하는 비법은 오래전에 소실되었지만, 소수의 과학자가 마침내 그 과정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 달팽이에서 추출한 염료는 파란색에서 보라색에 이르기까지 색조가 다양했다. 만약 다른 달팽이가 사용되었더라면 이스라엘 국기는 파란색이 아닌 보라색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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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표 달성의 실제적 실행 도구 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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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임채연, 신동헌 (지은이) 출판 호이테북스 출간 202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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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함에 편안함을 느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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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벤 알드리지 (지은이), 정시윤 (옮긴이) 출판 파인북 출간 202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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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한 장 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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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공자 출판 일상이상 출간 202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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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S & BRIEF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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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성형 AI: 현대 직장에서 비전과 현실의 균형 맞추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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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의 급성장 속에서 대형 언어 모델(LLM)의 실제 직무 활용에 대한 기대와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조직들은 LLM 통합 시 지식 수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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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A] 생성형 AI가 제품 개발에 미치는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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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혁신 그룹들이 점점 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아이디어 발상과 창의성 향상, 시장 및 고객 인사이트 확보, 복잡한 시스템에 사용하기 쉬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