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4주차 |
BOOK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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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식탁 위의 권력, 미식 경제학 |
저자 쑤친 (지은이), 김가경 (옮긴이) 출판 이든서재 출간 202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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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요약 보기![]() 식탁 위의 권력 미식 경제학 수요와 공급의 힘 샤퀴테리(Charcuterie) _ 유럽 미식가의 애환이 빚어낸 향신료 무역 향신료는 영어로 Spice인데 이는 약품이라는 뜻의 라틴어 species에서 유래했다. 향신료의 다른 표현은 양념이다. 이는 먹었을 때 약처럼 몸에 이롭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글자 약념에서 비롯되었다. 비싸지만 소량으로도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이라는 단어를 써서 향신료를 표현한 것을 보면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향신료가 얼마나 귀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향신료란 향긋하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열매, 뿌리, 줄기, 나무껍질로 이루어진 수많은 조미료의 총칭이다. 회향, 팔각, 계피, 후추, 정향 및 백두구 등을 향신료의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에는 더없이 평범하고 저렴한 가격대의 향신료들이지만, 과거 유럽에서는 한때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각광받았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말린 식물의 부산물들은 유럽 일대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쓴 역사책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는 “후추는 로마의 최고급 요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원료"라고 쓰여 있다. 즉, 당시의 후추는 오늘날의 소금이나 간장처럼 주방 요리의 필수품이면서 부유한 귀족들이나 소비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대 로마의 요리책인데 『레코퀴나리아, De Re Coquinaria』에는 500가지 이상의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록된 거의 모든 조리법에는 빠짐없이 "후추를 약간 넣어라"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다. 그만큼 당시 후추의 위상은 소금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요리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음식에 후추만 조금 넣어도 확실히 더 풍미가 살고 향미가 증진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럽인들이 후추에 열광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심이 들 것이다. 이는 당시 그들의 비참한 생활환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처한 환경을 면밀히 이해한다면 향신료에 대한 그들의 갈망에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유럽 대륙의 대부분 지역은 겨울이 극도로 추워 가축을 먹일 수 있는 사료의 선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한랭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무가 있었지만, 관상용 식물에 불과해 사람도 먹지 않고 가축도 먹이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겨울에 소와 양을 비롯한 가축을 먹일 충분한 여물이 없어 겨울이 오기 전 가축 대부분을 도살해야만 했다. 따라서 긴 혹한기에 신선한 고기를 맛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소나 양보다 생존력이 강한 돼지를 기르는 양돈업이 인기가 많았다. 돼지의 IQ는 80 정도(세 살 아이 수준)로 다른 동물에 비해 지능이 높은 편이며, 생존력이 강해 추운 겨울, 산에 방사하여도 인간의 보살핌 없이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유럽인들은 겨울이 되면 돼지를 산에 풀어놓고 봄이 오길 기다렸는데, 풀어 놓은 돼지를 다시 만날 때는 이미 몰라볼 정도로 통통하게 살이 쪄있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에서는 추수의 끝과 겨울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1월 11일 성 마르틴의 날(St. Martins Day)에 마치 의식처럼 기르던 가축을 도축했다. 성 마르틴의 날 이후 총 40일 동안 제례적 금식 기간을 가졌는데 이 기간에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했다. 40일의 재계가 끝나면 사람들은 다 같이 먹고 마시는 카니발 축제를 열어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연례행사 때문에 11월 11일에 도축된 가축은 최소 40일이 지난 후에야 식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도축된 고기의 육질이 상하지 않도록 과량의 소금을 사용하여 절이는 식문화가 있었는데 이런 음식을 샤퀴테리(Charcuterie)라고 부른다. 샤퀴테리를 만들 때는 고기가 수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생물이 번식하지 않도록 적정량의 소금을 넣어야 한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으면 육질이 질겨지고 짜서 먹기 어렵다. 간신히 삼킨다 해도 견딜 수 없는 갈증으로 물을 많이 마셔야만 한다. "당신은 내가 이 짜디짠 고기들에 얼마나 물렸을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소금에 절인 생선, 소금에 절인 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신선한 고기가 얼마나 그리울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15세기의 한 불쌍한 학자가 문헌에 남긴 샤퀴테리에 관한 기록이다. 40일간의 고달픈 금식 기간이 끝나면 이들을 기다리는 건 이 짜디짠 샤퀴테리뿐이다. 채소를 먹으려면 6개월 뒤 찾아오는 여름을 기다려야 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겨울이 지나가도 사정은 바로 나아지지 않는다. 유럽인들이 넘어야 하는 춘궁기는 겨울 못지않게 힘들기 때문이다. 여름채소는 아직 싹도 트지 않았고, 오늘날에는 흔하디흔한 토마토, 감자, 호박, 옥수수와 같은 채소는 아직 유럽에 이르지 못한 채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소심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봄이 와도 먹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샤퀴테리뿐이다. 하지만 우리 먹보 인류가 가만히 앉아서 그 고통을 견디고만 있겠는가? 유럽의 먹보 인류는 겨울과 봄에 더 맛있는 삶을 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신선한 고기가 없다면 샤퀴테리를 더 맛있게 만들면 그만인 것이다. 공작 가문의 한 요리사는 우연히 샤퀴테리에 향신료를 첨가하며 의도치 않게 인류 케이터링 역사에 변화를 일으켰다. “더 이상 이렇게 먹고는 못 살겠다. 맨날 먹는 이 짠 고기 말고 맛있는 것 좀 해줄 수 있겠나?” “공작님, 제가 최근에 만든 비책이 하나 있습니다.” “어서 말해보게.” “소금에 절인 고기에 후추를 조금 넣어 구우니 풍미가 훨씬 좋아졌습니다.” “후추? 그게 무엇인가?” “후추는 동양에 전해진 신비한 향신료입니다.” “그럼 많이 넣어 보게.” “하지만 그것은 매우 비쌉니다.” “내가 돈이 부족한 사람인가? 다 넣어주게나. 술에도 넣고, 수프에도 넣고,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에 다 넣으란 말일세!” “알겠습니다.” 짠 소금에 절인 육포가 중세 시대의 사람들에게 악몽과 같은 존재였다면, 향신료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단꿈을 꾸게 도와주는 동시에 캄캄한 유럽 미식 세계의 앞날을 밝게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대자연이 선물해 준 향신료는 유럽인들의 혀끝을 자극해 거대한 향신료 시장을 개척하도록 부추겼다. 처음에는 소금에 절인 말린 고기에 향신료를 첨가하여 향을 돋우는 정도였으나, 차츰 신선한 고기와 채소 샐러드 등의 요리에도 응용하여 향신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후추, 계피, 회향 및 기타 향신료를 첨가한 요리가 이전의 요리에 비해 훨씬 풍미와 향미가 증진된다고 느꼈다. 이에 사람들의 향신료 사용 범위는 거의 변태적 수준에 이르렀다. 하늘을 나는 것이나 땅 위를 걷는 것, 물속을 헤엄치는 것 등등 어떤 먹거리든 가리지 않고 모두 향신료와 함께 조리했다. 어떤 요리도 향신료가 빠지고서는 완성되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유럽 미식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메뉴를 보면 실로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소, 닭에서 시작해서 백조, 거위, 꿩, 메추리, 자고새, 도요새, 화미조, 참새까지 식용으로 쓰였던 재료의 범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화폐 전쟁 범선 무역 _ 유럽과 중국의 무력 충돌 유럽의 미식가들은 더 맛있는 음식과 향신료를 찾기 위해 대항해 시대를 촉진했다. 탐험가들은 앞다투어 신비로운 동방을 찾아 떠났고, 그 과정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탐험가 중 일부는 병으로 사망하고, 일부는 도중에 실종되거나 조난당할 정도로 항해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천만했다. 길을 잘못 들어선 콜럼버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바다는 언제나 예측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향신료의 원산지를 찾은 함대도 있었다.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이끄는 함대도 그중 하나이다. 마젤란이 사망한 후 그의 부하들이 이끄는 선단은 1521년 말루쿠 제도에 입항했다. 말루쿠 제도는 정향, 육두구, 후추 등의 최고급 향신료가 풍부한 곳이다. 인도, 중국, 아랍 상인들은 이곳을 향신료 군도라고 부르며 오랫동안 무역을 이어왔다. 스페인은 이곳에 무역을 위한 거점 기지를 구축하려 했으나 이미 앞서 도착한 포르투갈과 충돌을 해야만 했다. 막강한 포르투갈과의 전투에서 스페인은 맥을 못 췄고, 여러 번의 시도를 했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언젠가 반드시 되찾겠다는 설욕의 꿈을 안은 채 4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향신료 군도를 점령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한 5척의 범선과 수천 명에 달하는 인원을 파견했다. 이 함대를 이끄는 선장의 이름은 미구엘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다. 스페인, 중국 무역에 눈을 뜨다 스페인의 레가스피 원정대는 먼저 필리핀의 세부에 도착해 캠프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발 빠른 포르투갈은 이미 이 소식을 간파하고 작은 부대를 파견해 스페인 함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목표는 스페인군이 지쳐서 스스로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가스피는 이러한 포르투갈의 방해 공작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향신료 제도를 점령하기 위해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라는 성동격서(聲東擊西)작전을 폈다. 한편으로는 포르투갈인의 시선을 잡아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돌격대를 이끌고 조용히 향신료 제도에 접근하여 공격한 것이다. 돌격대 대원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로, 그중에는 스페인 군인 100명과 50명 이상의 현지 가이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가스피는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틈을 타 향신료 제도에 접근하여 섬을 탈환하려 했다. 돌격대는 북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항해하여 다음 날 향신료 제도와 매우 가까운 민도로섬(Mindoro, 필리핀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보급품을 구매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곳에 명나라의 무역 함대가 와 있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오직 마르코 폴로의 책에만 등장하는 신비한 동양인들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곳에서 생산된 비단과 도자기는 매우 정교해 유럽에서도 최고급 물품으로 꼽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나라의 무역 선단은 과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알고 보니 이들은 매년 계절풍을 따라 필리핀을 왕래했으며, 가장 자주 들르는 곳이 민도로섬이었다. 이곳은 명나라와 가까워 그들이 배에 싣고 온 도자기와 비단, 향신료 등의 상품을 필리핀의 금과 밀랍 등의 물품과 교환할 수 있었다. 명나라 상선이 올 때마다 현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소장한 금과 은을 꺼내 거래를 시작했다. 레가스피는 중국인들이 거래하는 비단과 도자기, 차와 향신료 등이 모두 스페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물품들을 들여오면 스페인에서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레가스피는 일단 행동에 나섰다. 그는 먼저 두 척의 작은 범선에 부하들을 태워 명나라 상인을 만나러 보냈다. 목적은 안면을 터서 협력 의지를 표현하고 무역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레가스피는 대원들이 출발하기 전, 그들에게 명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니 절대 경솔히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들은 밤새 이동해 동이 트기 전, 민도로섬에 정박해 있는 명나라의 대형 범선을 발견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스페인의 작은 범선이 나타나자마자 명나라 상인들은 이들을 약탈을 노린 해적이라고 여겨, 무기를 들고 징과 북을 두드려댄 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결사 항전의 자세를 취했다. 스페인 선원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스페인 선원들은 훈련된 해군이었고,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상대할 나라는 포르투갈 빼고는 없었다. 친화를 위해 접근했지만 명나라의 호전적 대응에 스페인 선원들은 전투태세로 돌변했다. 명나라 상인들은 단지 겁을 주려는 목적이었지만 예상 외로 전투는 상당히 격렬해지고 말았다. 화력이 강한 활강총으로 무장한 스페인 선원들은 이내 명나라 상선에 올라 상인의 절반을 살해했다. 운 좋게 살아난 상인들은 목숨이라도 구하자는 심정으로 갑판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전쟁에 능숙하지 않은 것이 상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시작할 때는 당당하게 허세를 부리다가 끝에는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모습에 스페인 선원들은 중국 상인들을 하찮은 존재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첫인상은 서양 열강이 중국을 깔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벌어질 마닐라 중국인 대학살의 복선이 되었다. 레가스피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가 모두 끝난 뒤였다. 레가스피는 스페인 선원들의 무모한 행동에 매우 화가 났다. 이는 그가 줄곧 주장해 온 우호적인 협상의 원칙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남은 명나라 상인들에게 사과하며 그들을 모두 석방했다. 명나라의 범선 두 척 중 한 척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다른 한 척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당시 명나라의 범선은 매우 크고 넓어 유럽의 함선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페인 선단 중 누구도 이 큰 범선을 수리하기는 버거웠다. 레가스피는 진심 어린 사과의 표시로 명나라 범선을 끌고 주둔지까지 이동해 수리한 후,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후 이들은 다음 해에 다시 이곳에서 무역을 하기로 약속했다. 전투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이 일은 새로운 무역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조심스러운 첫 거래 : 스페인과 중국의 범선 무역 스페인 사람들은 명나라 상인과의 무역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아쉽게도 막상 거래를 제안할 만한 자국의 마땅한 상품을 찾지 못했다. 당시 대명 왕조가 세계에 남긴 인상은 매우 강하고 부유했기에 상대적으로 낙후된 유럽은 압도적인 국력 앞에 초라함을 느껴야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문득 지난번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명나라 상인들이 은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은을 가지고 가면 원활한 거래가 성사되어 비단과 도자기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명나라 상인들도 비슷한 고민에 휩싸였다. 스페인과는 첫 거래라 그들이 어떤 것을 좋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명나라 상인들은 큰 고심 끝에 범선 3척에 비단, 차, 도자기 등의 전통적인 무역 물품을 가득 실었다. 약속한 해에 명나라 상선 3척이 필리핀에 나타났다. 스페인 사람들은 명나라 상선이 싣고 온 정교한 상품에 매우 만족하여, 선적해 온 상품을 전량 구매했다. 명나라 상인 역시 배에 한가득 실린 은을 보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들의 첫 거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명나라 상인들은 범선 3척의 상품을 모두 팔고 스페인 은화를 가득 실은 뒤 귀환했다. 이번 무역에서 벌어들인 은화면 싣고 왔던 물품의 5배를 다시 구매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스페인 사람들도 들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별 쓸모가 없었던 은으로 귀한 비단과 도자기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금본위제가 시행되고 있어서, 주요 통화는 금이었다. 은은 단지 부차적인 보충 화폐였을 뿐이다. 그때부터 점점 더 많은 명나라 상선이 필리핀을 향해 출항했고, 스페인 사람들과의 무역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비단, 도자기, 차를 가득 싣고 온 범선은 떠날 때는 은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Win-Win 무역의 모델이며,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범선 무역이다. 감자와 산업혁명 산업혁명 _ 산업혁명을 이끈 원동력, 감자 1584년,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충신이자 탐험가였던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은 아메리카 탐험에서 돌아올 때 감자 몇 뿌리를 가져와 자신의 뒷마당에 심었다. 그리고 영국 황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감자에 꽃이 피면 그중 몇 그루의 예쁜 꽃을 뿌리째 뽑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가져다 바쳤다. 영국인들이 요리에 서툴다는 사실은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공공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감자의 영예가 바닥으로 추락한 것도 역시 형편없는 영국인의 요리 실력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기근에 시달리는 영국에 감자를 보급하기 위해 왕실의 요리사를 불러 감자 파티를 준비시켰다. 자신이 직접 나서 상류층 사이에 감자를 알리면 자연스레 민간에 퍼져 나갈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궁정 요리사는 감자라는 작물을 처음 보았다. 난생처음 접하는 식재료에 적잖이 당황하였지만, 자신의 솜씨만 믿고 자신 있게 요리를 시작했다. 매우 신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푸른 감자 줄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부분이 식용 부분이라고 생각한 그는 뿌리 부분의 둥근 감자를 잘라 쓰레기통에 버리고, 감자 줄기로 수프를 만들었다. 이 감자 줄기로 만든 수프는 여왕의 연회 상에 올라갔고, 다행히 맛이 좋아 감자 줄기 수프는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감자의 잎과 줄기에 독성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 음식을 먹은 귀족과 여왕은 모두 식중독 증세를 보이며, 줄줄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만 했다. 솔라닌에 중독된 것이다. 솔라닌은 위장 장애와 신경 장애를 일으키는 독성이다. 솔라닌에 중독되면 식중독, 구토, 설사, 현기증, 두통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심하면 저체온증, 환각 증상,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감자를 처음 접한 궁정요리사가 감자 싹에 솔라닌이라는 독성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 벌어진 촌극이었다. 솔라닌 중독으로 호되게 고생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이후로 감자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고, 감자를 절대로 영국 왕실 주방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으로 감자는 영국에서 유독성 식품의 대명사가 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결국, 영국의 감자 보급은 그만큼 늦어졌다. 1845년, 아일랜드의 감자 역병은 대기근을 초래했다.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 식민지에 속했기 때문에 기근 문제는 당시 영국 총리였던 로버트 필 경(Sir. Robert Peel)이 직면한 큰 난제였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주식인 감자는 모두 땅에서 썩어버렸고, 수천 명의 아일랜드 사람들은 굶주림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영국 정부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현재 직면한 이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것뿐이었다. 그중 미국이 가장 유력했다. 당시 미국은 독립한지 70년이 지났고, 광활한 땅에서 생산된 식량은 굶주린 아일랜드인들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는 오랫동안 시행된 곡물법이 곡물 수입을 가로막았다. 곡물법은 영국 본토의 곡물 가격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수입 곡물에 높은 세금을 부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수입 곡물 가격을 기형적으로 인상하는 것과 같은 격인데, 이를 통해 수입 곡물 판매량을 감소시키고, 현지 곡물의 시장 점유율을 유지해 외국 곡물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도록 하는 영국 우선 주위 차원의 법률이었다. 만약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곡물을 수입하여 적당한 가격에 유통하려 한다면 먼저 이 곡물법부터 폐지해야만 했다. 이 법이 유지되는 한, 미국에서 수입하는 모든 곡물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정작 가장 시급한 아일랜드인들을 구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영국의 귀족과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곡물법 폐지를 강경하게 반대했다. 곡물법이 폐지되면 외국의 저렴한 곡물이 영국에 대량으로 유입돼 국내의 곡물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귀족, 농장주, 상인, 평민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법률 폐지 여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감자 역병으로 인한 위기와 논쟁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자국에서 필요로 하는 곡식을 직접 재배하는 것과 해외로부터 수입해서 충당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경제적일지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곡물법이 폐지되면 영국은 해외에서 저렴하고 품질 좋은 곡물을 수입할 수 있고, 잉여 토지를 이용해 더 많은 제조 공장을 건설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동시에 농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노동력을 공산품 생산에 투입할 수 있다. 1846년 5월, 긴 고심 끝에 영국은 결국 곡물법을 폐지하기에 이른다. 그 배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영국의 제25·28대 총리를 역임한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웰링턴 공작(Dukeof Wellington)이다. 웰링턴 공작은 영국 육군 최고의 지휘관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대륙 봉쇄령을 돌파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를 끝낸 명장이다. 웰링턴 공작은 귀족과 농장주들을 설득하여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게 했고, 결국 곡물법 폐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영국의 곡물 수입의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미국의 옥수수, 밀 등 농산물이 영국으로 들어왔고, 이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현지 곡물을 대체했다. 해외로부터 충분한 식량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자, 영국은 농업에서 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많은 농지가 공장으로 변했으며, 농민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1900년까지 영국은 밀의 수요 중 80%를 수입에 의존하였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노동 인구의 10% 미만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국이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은 이후 수 백 년 동안 근현대의 많은 성취와 사건의 근간이 되어 인류 역사의 발전을 촉진했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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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 돈 버는 상가 망하는 상가 |
저자 이홍규 (지은이) 출판 매일경제신문사 출간 202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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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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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천하이센 (지은이), 박영란 (옮긴이) 출판 더페이지 출간 202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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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컴퓨터로 철학하기 |
저자 대니얼 림 (지은이), 변정수 (옮긴이) 출판 이상북스 출간 202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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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S & BRIEF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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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트렌드 ![]() AI 시대의 주도권: 조직 성숙도를 결정짓는 리더십의 역할 |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의 등장은 경영진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커다란 압박을 안겨주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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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브리핑스 ![]() 현금이 사라지면 감각도 사라진다, 디지털 결제의 그림자 |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카카오페이, 삼성페이, 네이버페이 등 간편결제 서비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