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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7월 2주차 |
BOOK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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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
저자 나이토 히로후미 (지은이), 서수지 (옮긴이) 출판 사람과나무사이 출간 202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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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요약 보기![]() 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World History of WINE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를 추동한 알코올음료 와인 쌀로 술을 빚어 마신 역사보다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마신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 와인은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실제로 벼농사 문화권 사람들이 쌀로 술을 빚어 마신 역사보다 몇몇 특정 지역민이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마신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 인류가 언제부터 와인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수천 년을 넘어 1만 년에 가깝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추정이다. 이는 고대 인류 문명 태동기에 이미 본격적인 와인 양조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와인은 어디에서 탄생했을까? 와인 발상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캅카스(Caucasus) 의 조지아(구 그루지야)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와인을 양조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조지아에는 기원전 60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와인 관련 유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에서 출토된 도기 항아리 유물을 정밀 분석한 결과, 그 항아리가 와인 양조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조지아와 함께 유력한 와인 발상지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아르메니아에는 기원전 4000년 무렵 유적으로 추정되는 와인 양조장이 남아 있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인이 역사상 최초로 와인 양조를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이란의 자그로스산맥(Zagros Mountains) 일대에서 와인 양조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는 지리적으로 서로 가깝다. 어디에서 최초로 와인이 탄생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 한 것은 와인 양조가 서아시아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의 와인 생산력과 와인 문화는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를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했다. 고대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을 매개 삼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와인 양조 기술을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집트 땅에서는 와인 양조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고대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은 와인을 사랑했다. 이 두 고대 문명은 고도로 발전한 음식 문화와 당시로선 최첨단이라 할 만한 농업 기술을 보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순한 과일음료의 하나인 포도 주스를 와인이라는 수준 높은 알코올음료로 변화시키는 공정은 당대인들에게 마술처럼 여겨졌다. 체계적인 지식과 축적된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와인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포도 과즙이 우연히 자연 발효해 와인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와인을 생산하려면 체계적인 지식과 축적된 경험, 문화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 섣불리 포도 주스를 와인으로 변화시키려 하면 실패할 위험이 크다. 아무리 애쓰고 수고를 아끼지 않아도 시큼털털해서 마시기 힘든 평범한 액체만 만들어질 뿐이다. 게다가 한꺼번에 많은 양의 와인을 생산하려면 야생 포도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포도 재배 기술을 갖춰야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인류 최초의 도시가 탄생했다. 이후 기원전 25세기 무렵 수메르인이 세운 우르 제1왕조가 번영했다. 그와 비슷한 시대 고대 이집트에서도 통일 왕조가 탄생해 파라오가 안정적으로 통합을 이뤄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집트도 메소포타미아도 고대에는 문자를 발명할 만큼 고도로 발전한 문명을 이룩했기에 수준 높은 와인 양조 기술과 와인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World History of WINE 와인을 정치에 교묘히 활용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유럽의 패권자였던 카롤루스 대제는 왜 와인 양조에 온 힘을 기울였을까 프랑크 왕국의 군주 카롤루스 대제는 세계사만이 아니라 와인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프랑스에서는 그를 샤를마뉴로 부르고 라틴어권에서는 카롤루스로 부르는데, 여기에 대제를 붙여 카롤루스 대제로 지칭하기도 한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로마제국이 붕괴한 이후 조각조각 나뉜 서유럽 세계를 재통합한 인물이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8세기 후반이다. 그는 로마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반도에서 랑고바르드족과 싸워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동방에서는 유목 민족인 아바르족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작센 지방 공략을 시작으로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북부를 프랑크 왕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후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렸다. 유럽을 평정한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 12월 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Leo III, 재위 795~816)가 씌워주는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렀다. 크리스마스에 열려 이 대관식은 800년의 크리스마스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이때부터 카롤루스 대제는 로마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당대 유럽의 패권자였던 카롤루스 대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는 한편으로 자기 왕국 안에서 와인 양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왕국 전역에 세워진 교회에 토지를 하사하고 와인 양조를 독려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직접 발 벗고 나서 와인 양조 방식까지 세세하게 지도하는 등 철저히 관리하고 감독했다. 또 포도를 발로 밟아 으깨어 과즙을 내는 방식을 금지하기도 했다. 당시는 포도 압착기가 없어 이 명령에 따르지 않는 농가도 많았기에, 그의 명령은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는 비현실적인 조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와인 양조에 위생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와인을 신성한 음료로 거듭날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또한 그는 위생을 고려해 와인을 가죽 부대에 저장하는 관습도 금지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와인 유통에도 손을 댔다. 그는 와인 생산자가 여행객에게 와인을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또한 와인 산업 활성화 조치의 하나로, 와인 생산자는 여행객이 와인 판매점임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간판처럼 내걸어야 한다는 규정을 마련했다. 오스트리아 빈(Wien)의 선술집 호이리게(Heurige)에서는 지금도 간판 위에 소나무 가지를 걸어 와인을 판매하는 곳임을 알리는 방식으로 손님을 끌고 있다. 사과주를 좋아한 카롤루스 대제가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 이유 카롤루스 대제는 왜 그토록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열을 올렸을까? 어떤 역사학자에 따르면 카롤루스 대제는 와인이 아닌 사과주를 좋아했다고 한다. 만약 그의 주장이 옳다면 카롤루스 대제가 와인을 유독 좋아했으며, 훌륭한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 양조를 장려하고 와인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설은 사실과 약간 다를 수도 있다. 아마도 카롤루스 대제는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독교와 함께 와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듯하다. 그의 통치시기에 거대한 왕국으로 급성장한 프랑크 왕국은 마치 어른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지만 미숙한 청소년처럼 여전히 불안정했다. 이 덩치 크고 불안정한 왕국을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제국을 효율적이고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로마 교황의 보호자임을 자처하고, 각지의 교회를 포섭해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던 게 아닐까. 카롤루스 대제는 교회를 중심으로 와인 생산을 독려하고 와인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 연장선에서 포도밭 개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포도 농사, 와인 양조가 활발해져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 과정에서 카롤루스 대제가 성정이 거칠고 다루기 힘든 게르만족을 포도 농사와 와인 생산에 적응시켜 온순한 기질로 변화시키는 부수적 효과도 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World History of WINE 프랑스혁명의 기폭제가 된 와인 입시세 와인이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다는데?! 대다수 사람이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으로 시작됐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그보다 이른 시점에 지펴졌다. 당시 민중의 습격 사건은 바스티유 감옥 외에도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민중은 여러 지역의 입시세를 징수하는 성문을 습격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민중은 입시세 징수소가 설치된 성문 세관을 공격하고 때려 부수었다. 파리 시내로 들어오는 와인에 높은 세금을 부과한 입시세의 과도한 세율이 파리 시 민이 지닌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1789년 6월에 일어난 입시세 징수소 습격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고,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흘 전인 7월 11일 이후 대중은 눈에 띄게 과격해졌다. 파리 시내의 카바레 경영자들은 시민들에게 값싼 가격에 와인을 판매하며 선동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카바레 경영자도 시민도 모두 와인에 부과되는 세금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그들이 목이 터져라 외친 구호는 "3수 와인 만세! 12수 와인을 타도하자!"였다. 습격에 나선 파리 시민들은 와인을 약탈해 서로 나눠 마시며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연대감을 키웠다. 그리고 그 기세가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식량 부족이라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경제적 요인이 더해지며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직접적인 동기는 와인이 제공한 셈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와인값의 두세 배나 되는 세금이 부과되는 상황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마실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명품 와인을 왕과 귀족들이 물 마시듯 마시는 상황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시민들은 와인 평등을 추구하며 와인에 부과된 세금 철폐를 목청껏 외쳤다. 와인에 함유된 타닌 성분은 사람을 이성적으로 만들어주고 평등심을 고취하는 미묘한 효능을 지녔다. 그와 더불어 와인의 알코올은 사람 사이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연대감을 키워주며, 과격한 언동을 하도록 부추긴다. 이런 맥락에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처럼 프랑스 혁명은 와인이 이끌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프랑스 혁명은 시민들에게 와인 낙원을 만들어주는 데 실패했다. 혁명 정부 역시 만만치 않은 액수의 세금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세관 사무소도 재건되었다. 혁명 정부는 와인에 취한 시민들의 습격 사건을 혁명의 숭고한 이념에 반하는 불경한 행위로 간주했다.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혁명은 와인 입시세를 징수하는 성문 습격이 아니라 정치범이 수감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로 바뀌어 전해졌을 개연성이 높다. 와인 입시세는 프랑스 혁명이 끝난 1791년에 폐지되었으나 1798년에 부활한 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사라졌다. World History of WINE 프랑스 와인을 세계 최고 반열에 올려놓은 나폴레옹 3세 작가 빅토르 위고가 제안한 와인 입시세 폐지안이 의회 표결을 거쳐 통과되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2월 혁명이 발발했다. 1848년의 일이다. 2월 혁명의 여파로 오를레앙 가문의 국왕 루이 필리프 1세 (Louis Philippe, 재위 1830~1848)는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프랑스 왕정은 무너졌다. 파리에서는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2월 혁명은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중소 자본가와 노동자는 나름대로 역량을 갖추었음에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그들의 쌓일 대로 쌓인 울분이 봇물 터지듯 터져나오며 단숨에 왕정 타도의 기치를 내건 뚜렷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성난 파도와 같은 혁명의 물결 속에는 급진적인 공화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와인은 파리 2월 혁명을 뒷받침해준 또 하나의 주요한 요소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 시민들은 와인 입시세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와인 입시세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고, 입시세 징수소 습격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 등 굵직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구도가 파리 2월 혁명에서도 전개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한때 폐지되었던 와인 입시세가 부활했다. 파리 시민들의 불만은 밑 닫힌 독에 엽전 쌓이듯 쌓여갔고, 루이 필리프 1세의 왕정이 더는 갈 곳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르자 소요 사태로 폭발했다. "혁명 만세! 와인 입시세를 타도하자!" 시위대는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왕정을 규탄했다. 2월 혁명 후 파리 시민들은 와인에 취한 듯 들뜬 분위기 속에서 연대감을 다졌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 투쟁의 길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는 개혁 연회라는 이름의 파티가 큰 인기를 끌었다. 1847년 7월 이후 상황이다. 당시에는 대중 집회가 금지되었기에 연회를 빙자한 정부 반대 집회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민들은 일정 금액의 참가비를 내고, 함께 와인을 마시며 정치적 열정을 불태웠다. 이 개혁 연회가 흥행에 성공하자 그 연장선에서 시민 연대가 만들어졌다. 이후 시위는 점점 더 과격한 양상을 띠었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2월 혁명 속으로 돌진했다. 이런 첨예한 상황 속에서도 제2공화정은 와인 입시세를 폐지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황제 나폴레옹 3세(Charles Louis Napoleon Bonaparte, 루이 나폴레옹, 재위 1852~870)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은 혁명 후 혼란이 도가니 속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이는 1852년 12월 2일의 일이다. 그 이듬해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거쳐 황제로 즉위했다. 의회에서는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제안한 입시세 폐지안을 의원들의 표결을 거쳐 통과시켰다.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발발한 다음 날인 12월 3일의 일이다. 그럼에도 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 시대에는 와인 입시세가 폐지되지 않았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가 새롭게 프랑스 정치권에 등장할 때부터 그를 독재자로 보았다. 위고는 망명지에서 나폴레옹 3세를 규탄하는 글을 열심히 썼다. 당시 그가 남긴 여러 글과 작품에는 와인 입시세 폐지 안건이 폐기되며 합리적인 비용으로 술 마실 권리를 박탈당해 생긴 울분과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녹아 있지 않을까. World History of WINE 보르도ㆍ부르고뉴 절대 신화를 무너뜨린 캘리포니아 와인 캘리포니아 와인이 보르도ㆍ부르고뉴 절대 신화를 무너뜨린 역사적인 사건 파리 심판 196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은 전 세계 최대 와인 소비국으로 떠올랐으며, 우수한 와인 생산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갔다. 그러던 중 역사학자들에게 미국을 와인 강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파리 심판(Judgment of Paris) 사건이 일어났다. 1976년의 일이다. 세기의 대결인 파리 심판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명품 와인과 미국 캘리포니아산 와인을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로 맛과 향기, 품질을 겨룬 뒤 평가자들의 채점을 통해 어느 쪽이 나은지 결정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참고로, 파리(Paris)를 뜻하는 영어 단어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파리스(Paris)의 이름 철자가 같아서 말장난처럼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별칭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이 대결에서 보르도의 샤토 무통 로칠드와 샤토 오브리옹 등이 프랑스산 레드와인으로 제공되었다. 부르고뉴의 명문 와이너리는 화이트와인을 선보였다. 테이스팅 심사위원으로는 모두 프랑스인이 초빙되었다. 미슐랭 별 세 개 레스토랑 오너와 소믈리에,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저명한 와이너리 경영자급 인사 등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와인 업계 거물들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대결에서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세계 최고 명성을 자랑하는 보르도와 부르고뉴를 제치고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모두 캘리포니아산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말하자면, 프랑스 와인에 통달한 프랑스인 심사위원들이 자국의 명품 브랜드 와인보다 당시 존재감이 거의 없던 무명 캘리포니아 와인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승리는 당시 미국을 달군 와인 열기의 승리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와인 열기가 뜨거워진 1960년대에 프랑스 와인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와인 애호가들이 직접 포도 농사를 짓고, 와이너리를 세우고, 와인을 양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와인에 심취했으며, 도전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열정을 와인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오늘날까지 세계적 명성을 유지하는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는 이 시기 미국 와인 제조업자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는 단순히 프랑스 와인 양조법을 모방하는 수준에 만족할 수 없어 최신 설비와 기술로 선진적인 와인 양조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재질의 어떤 통에 담아야 이상적인 와인이 만들어질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수많은 재질과 모양의 통을 구해 직접 시험했다. 로버트 몬다비로 대표되는 캘리포니아 와인이 일으킨 변화와 혁신은 그로부터 얼마 후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난 기술 혁신의 선구자 격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1990년대 이후 실리콘밸리에는 IT 기술 개발에 집중해 스마트폰을 개발한 글로벌 기업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 페이스북(현재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등 이색적인 천재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그들이 개발한 IT 기술이 평범한 일반인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발전한 것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에서도 급진적인 진화가 이루어졌다. 프랑스 와인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도전에 충격적으로 패배하며 침체기에 들어섰다. 보르도의 유명 샤토와 부르고뉴의 저명한 생산자들이 높은 인지도만 믿고 현실에 안주해 변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 아닐까. 프랑스 와인 생산자들은 프랑스 와인의 압도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평소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며 무시해온 신대륙에서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보르도, 부르고뉴, 샹파뉴 와인이야말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강자라고 믿어왔다. 그 믿음이 파리 심판의 치욕적인 패배로 단번에 산산이 부서졌다. 프랑스 5대 샤토 소유주 중에는 자존심이 짓밟히는 뼈아픈 사건을 겸허히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다. 바로 샤토 무통 로칠드의 소유주 필리프 드 로칠드(Philippe de Rothschild)다. 로칠드는 로버트 몬다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오퍼스 원 와이너리(Opus One Winery)를 합병 형식으로 발족했다. 이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와인이 오퍼스 원이다. 이 와인의 라벨에는 두 창업자의 옆얼굴이 실루엣으로 그려져 있다. 파리 심판은 세계 각지의 와인 생산자들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기의 대결 이후 세계 각지에서 프랑스 와인, 캘리포니아 와인에 뒤지지 않는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됐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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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 한국형 모멘텀 투자 실전 매매법 |
저자 이가근 (지은이) 출판 메이트북스 출간 202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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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 채소·과일식 레시피 |
저자 조승우 (지은이), 이지연 (감수), 정연주 출판 서사원 출간 202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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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쇼펜하우어 철학 수업 |
저자 김선희 (지은이) 출판 메이트북스 출간 202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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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 우리 아이는 미국 온라인 스쿨에서 공부합니다 |
저자 김지영 (지은이) 출판 서사원 출간 202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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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 나에겐 너무 어려운 스몰토크 |
저자 피트 웜비 (지은이), 임슬애 (옮긴이) 출판 윌북 출간 202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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