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3월 2주차

BOOK SUMMARY


 인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저자 김성수
출판 지상의책
출간 2026.01
100개의 물질로 읽는 생명과 우주, 인류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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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우주로부터

수소 원자 : 가장 작은 원자
우주의 시작, 물질의 시작
우주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완벽한 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분야에서 고대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해온 일이라곤 단지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와 당대 사회의 문화를 기반으로 자신들만의 가설을 세워 어림잡아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우주론은 워낙 거대한 담론이었고, 과거에는 거대 과학의 가설 검증을 위한 측정이 불가능했기에 우주의 기원은 과학이 아닌 종교가 주로 다루는 논제였다.

그러나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상상의 영역에 있던 우주라는 대상을 관찰과 사고, 검증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빅뱅 이론(Big Bang theory)이라는, 이름만큼이나 폭발적으로 대중적인 우주론이다. 북극에 가서 북쪽이 어디인가요?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빅뱅이 일어나기 전 우주를 구성하는 화학물질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화학물질 또한 우주의 시작, 즉 빅뱅 이후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빅뱅으로 생성된 기본 입자들이 모이면서 화학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원자(atom)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다.

수소 원자의 모양
빅뱅 이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벨기에 신부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itre)가 불꽃놀이에 비유한 우주 최초의 대폭발은 138억 년 전쯤 일어났다고 한다. 이때 생성된 쿼크(quark)와 이들을 강력하게 묶어주는 글루온(gluon)이 서로 뭉치면서 원자를 구성하는 주요 입자 중 하나인 양성자(proton)를 형성하였다. 한편 전자(electron)는 이미 빅뱅 이후 세상에 태어나 갓 태어난 우주 속을 활발히 떠돌고 있었다. 초기 우주의 온도는 무지막지하게 뜨거웠기 때문에 양성자와 전자는 정신없이 개별 활동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대략 38만 년이 지난 이후 우주가 충분히 식고 나자, 더 이상 홀로 돌아다니기에는 불안정해진 양성자의 양(+)전하와 전자의 음(-)전하 사이의 정전기적 인력이 작용하면서 비로소 양성자 하나와 전자 하나가 함께 어우러지게 되었다. 이러한 재결합반응의 결과, 전기적 중성의 원자가 만들어졌으니, 곧 수소 원자(hydrogen atom)의 탄생이었다.

애석하게도 인류가 원자 속 음양의 조화를 이해하기에는 원자의 크기가 너무나도 작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원자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는 가운데 1897년과 1917년에 각각 원자를 구성하는 주요 입자인 전자와 양성자가 발견되면서, 학자들은 서로 다른 전하를 가진 두 입자가 어떤 형태로 원자 내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중 수소 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에 주목한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전자가 마치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처럼 공전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지만 실험적으로 잘 들어맞는 모델을 제안했고, 그의 이름을 딴 파동 방정식으로 유명한 독일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자신의 양자역학 이론을 수소 원자에 적용했을 때 보어 모델의 결과와 완벽히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우주의 기원과 함께 탄생한 물질세계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인 수소 원자가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와 원리를 이해하는 길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고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헬륨 기체 : 최초의 비활성기체
우주의 첫 핵융합
빅뱅 이후 우주에 흩뿌려진 중수소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직 우주가 차갑게 식기 전이었으니 중수소는 더 안정해지기 위해 강한 핵력을 통해서 또 다른 양성자, 혹은 중성자를 더부살이 회원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고심 끝에 중수소 핵이 고른 동반자는 양성자였고, 이로써 양성자 2개를 가진 원자핵이 우주 최초로 만들어졌다. 2개의 가벼운 원자핵이 반응하여 보다 무거운 원자핵 하나가 만들어지는 현상을 핵융합(nuclear fusion)이라고 하는데, 질량수만 늘어났던 중수소 핵의 융합과는 달리 원자번호까지 늘어나는 핵융합이 빅뱅 직후에 일어난 것이었다. 여기에 전자 2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질량수 3의 원자를 헬륨(belium)-3(3He)라고 부른다.

애석하게도 3He의 원자핵은 중수소의 바람만큼 안정하지 못했다. 양성자는 짝을 이뤄 2개씩 있는데, 중성자만 1개 홀로 있으니 불안할 만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주가 식기 전 수많은 반응을 거친 결과 중성자 하나가 3He에 추가되면서 헬륨-4가 만들어졌는데, 정말이지 양성자와 중성자가 2개씩 짝을 이룬 4He의 원자핵은 3He에 비해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그 결과 우주에는 4He가 3He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존재하며, 빅뱅이 일어난 지 138억 년이 지난 지금은 온 우주의 질량 중 24%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인공 태양의 꿈
헬륨을 만드는 핵융합 과정은 지구를 따스하게 비춰주는 태양에서 매 순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중심부 온도가 섭씨 1,500만 도에 달하는 태양의 주성분은 수소 원자이며, 빅뱅 직후에 비하면 한참 서늘한 이 정도 온도에서는 태곳적만큼 빠르지는 않더라도 수소 원자들이 헬륨을 융합해 낸다.

그런데 핵융합 반응 후에 생성된 헬륨의 질량은 약 0.7% 손실된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위배되는 이런 상황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 문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주창한 특수 상대성 이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E=mc2으로 표현되는 질량 에너지 등가원리에 의해 해결된다. 질량은 곧 에너지이므로 손실된 질량은 광속의 제곱을 곱한 만큼의 에너지로 전환됨으로써 질량이 보존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광속이 2,998×10의 8제곱m/s 정도로 무척 빠르기 때문에 웬만한 질량결손도 막대한 양의 에너지 방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태양의 핵융합 도중 일어나는 질량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발생한 에너지는 약 8분 20초 뒤에 지구에 도달하고, 그 덕분에 우리는 환하고 따뜻한 낮을 누릴 수 있다.

기술과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인류가 해마다 필요로 하는 에너지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화석연료를 대신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이고도 친환경적인 대안들이 제시되었지만,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는 궁극의 기술은 다름 아닌 태양의 핵융합 발전이다. 헬륨을 합성하기 위한 재료인 수소는 물의 형태로 지구상에 풍부한 데다가 발전 과정에서 환경오염 물질이 발생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생산 가능한 에너지양이 막대하다. 석유 1g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약 4만J(줄)이라면, 수소 연료 1g은 무려 35억 J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과거 빅뱅의 환경을 닮은 초고온 환경을 조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지만, 핵융합 기술이 성공하여 지구상에 인공 태양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인류는 에너지 문제에서 해방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백한 푸른 점, 지구
외핵 : 지구 자기장 방어막의 원천
지구의 핵
국제천문연맹 LAU의 정의에 따르면 태양계를 도는 행성은 총 8개다. 이 중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은 금속과 암석으로, 목성과 토성은 수소 기체(H2)와 헬륨(He)으로, 그리고 천왕성과 해왕성은 물(H2O)과 암모니아(NH3), 메테인(CH4)이 얼어붙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구성 물질에 차이가 생기는 가장 큰 원인은 태양과 행성 간 거리 때문이다. 태양 가까이 있는 행성에서는 끓는점이 낮은 물질들이 행성의 중력을 극복하고 외부로 이탈한다. 그래서 수성부터 화성까지의 행성을 구성하는 주요 물질들은 그 정도 온도에서는 기화하지 않는 금속과 암석이다. 한편 밀도가 높은 금속은 중심부에 더 가까이 가라앉아 핵을 형성하고, 금속보다 밀도가 낮은 암석은 핵 주변에서 맨틀(mantle)을 형성한다. 이때 지구의 핵을 구성하는 주요 금속 원소는 철(Fe)과 니켈(Ni)인데, 우주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안정적인 금속이 중심부를 선점한 탓이다.

그런데 지구 탄생 5억 년 후, 지구의 형태에 변화가 생겼다. 차가운 우주와 접촉하고 있던 맨틀 가장 바깥쪽이 비교적 빠르게 식어 지각이 형성된 것이다. 반지름이 6,400km에 달하는 지구에 대략 30km 정도의 두께를 가진 암석 껍질이 생겨버린 것인데, 이 얇은 껍질이 보온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추운 날 신문지 한 장 덮는 것이 안 덮는 것보다는 훨씬 따뜻한 것처럼 말이다. 지각이 형성되면서 중심부 온도는 더디게 내려갔고, 그 결과 지구 핵은 섭씨 4,000도 이상의 온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온도에서 Fe, Ni는 모두 용융하여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단, 1936년 덴마크 지진학자 잉에 레만(Inge Lehmann)이 더 높은 압력이 작용하는 중심부에서는 금속들이 응고되어 고체로 존재하는 것을 밝혀냄에 따라, 금속이 액체로 존재하는 부분을 외핵(outer core), 고체로 존재하는 부분을 내핵(inner core)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 지구적 전자기 유도 현상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자기 자신도 중심축을 따라 자전하고 있다. 모든 자전하는 물체에는 전향력이라고 하는 일종의 관성이 작용하는데, 이 힘에 따라 액체 상태의 Fe, Ni는 지구 내부의 외핵에서 대류하고 있다. 다이너모이론(dynamo theory)에 따르면, 이 대류가 지구 주위 자기장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 나침반의 N극과 S극이 각각 북극과 남극을 가리키는 것이다. 과연 영국 물리학자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가 말한 대로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이다.”

지구 자기장은 탐험가와 새들의 나침반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태양으로부터 태양풍이라고 하는 강력한 플라스마(plasma) 흐름이 지구를 향해 쏟아지는데, 외핵이 만들어 낸 지구 자기장에 의해 태양풍은 진행 방향이 크게 꺾여 대기권으로 직접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약간의 입자들만이 극지방으로 모여들면서 대기와 충돌하고, 이 과정에서 오로라(Aurora)라는 찬란한 빛의 파티가 벌어진다. 만일 외핵이 없어 지구 자기장이 없었다면, 태양풍은 오존(O3)층을 파괴하고 대기층을 지속적으로 우주 공간으로 흩어트렸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행성 자기장이 약했기 때문에 척박한 땅이 되어버린 화성처럼 지구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철석 : 쇠붙이가 달라붙는 광석
철기 시대의 시작
기술 발전에 힘입어 제련을 위해 때는 불의 온도가 점차 높아졌고, 그 결과 고대 사람들은 구리보다 녹는점이 높은 금속들도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금속은 철(Fe)이다. 광석으로부터 얻어낸 순수한 철은 매우 약한 재료였지만, 숯불 위에서 탄소를 머금게 된 강철 (steel)은 강했다. 또한 달궜다가 급격히 식히는 작업인 담금질은 강철 제품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물론 세상에는 철보다 단단하면서도 강한 금속이 있지만, 철이 인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다른 어떤 금속들보다 산화물 광석이 지각에 풍부하게 묻혀 있으면서도 비교적 수월한 제련 과정을 통해 금속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철광석은 자철석(magnetite, Fe3O4)과 적철석(hematite, Fe2O4)이다. 산화물에서 산소(0)는 ?2가의 음이온(O2-) 형태이므로, 적철석은 광석을 구성하는 모든 철이 +3가의 양이온(Fe3+)으로 존재하지만, 자철석의 경우 Fe2+와 Fe3+가 1:2의 비율로 존재한다.

자석의 발견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물건을 자석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석은 전자이므로, 수많은 전자를 가지고 있는 원자와 분자 역시 기본적으로는 자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물질이 천성적으로 지닌 자석의 성질, 즉 자성은 보통 다른 자석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자석 끝에 클립을 붙이면 그 클립 끝에 또 다른 클립이 붙게 되는데, 이는 자석에 붙은 클립이 순간 자성을 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석이 사라지면 클립의 일시적 자성은 즉시 사라지고 클립은 언제 뭐가 좋아 붙었냐는 듯 우수수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몇몇 물질들은 주변에 자석이 없더라도 여전히 자성을 잃지 않아 영구적인 자석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성질을 강자성(ferromagnetism)이라 부르는데, 자철석은 강자성을 가진 대표적인 물질로 지금도 냉장고 자석 같은 곳에 널리 쓰이고 있다. 자석과 자철석을 의미하는 영단어인 magnet과 magnetite가 자철석이 풍부하게 묻혀 있었다는 그리스 마그네시아 현의 이름에서 온 것을 보면, 강자성을 보이는 자석과 자철석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가느다란 자철석 바늘이 특정 방향을 향해 정렬되는 것은 고대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 현상은 거대한 자석인 지구가 만들어 낸 자기장이 강자성을 가진 자철석과 상호작용하여 자철석이 가리키는 방향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들은 자철석 바늘의 방향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방위를 결정하였는데, 북쪽을 가리키는 자철석 바늘의 한쪽 끝을 N극, 남쪽을 가리키는 다른 끝을 S극이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침반은 요즘 널리 쓰이는 위성항법장치인 GPS가 개발되기 전에는 항해와 지리 탐사를 위한 필수품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별의 자손이다
엽록소 : 광합성의 필수 색소
붉은빛 흡수
붉은색과 노란색, 보라색 등등 다양한 색깔을 뽐내는 꽃잎을 즐기다가 녹음이 가득한 숲과 잔디밭을 보노라면 왜 우리 주변의 식물들은 죄다 녹색투성이일까 궁금증이 들 만도 하다. 나뭇잎에 존재하는 색소가 녹색을 띠는 엽록소(chlorophyll)라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들어와서 잘 알고 있지만, 세상에 다른 색소도 많건만 왜 하필이면 엽록소여야 했을까?

식물은 광합성을 해서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데, 한 곳에 뿌리박힌 채 자리를 옮겨 다닐 수 없으므로 주어진 위치에서 한정된 태양빛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한편 태양빛은 지구에 들어오면서 여러 저항을 받게 되는데, 그중 가시광선은 대기 중 질소(N2) 및 산소(O2) 분자에 의해 산란된다. 산란되는 정도는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심해지므로 지표면으로 쏟아지는 가시광선 중에서 가장 센 빛은 파장이 긴 붉은빛이다. 그렇다면 식물 입장에서는 광합성 효율을 최고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른 빛보다는 붉은빛을 가장 잘 흡수하는 분자를 보유하는 것이 생존에 당연히 유리하다. 그래서 붉은빛을 잘 흡수하는 엽록소 분자가 광합성을 담당하는 나뭇잎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보색이 보인다
그렇다면 엽록소는 어떻게 해서 붉은빛을 흡수하는 것일까? 그 비밀은 엽록소 분자의 전자 에너지 구조에 숨어 있다. 각 집마다 아파트 층수로 표현되는 높이 차이가 있는 것처럼, 전자들이 자리 잡는 분자 오비탈에는 에너지 높이 차이가 존재한다. 한편 우리가 전망대가 위치한 높은 빌딩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입장료를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듯, 전자가 A라는 오비탈에서 그보다 에너지 수준이 높은 B라는 오비탈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A와 B사이 간격만큼의 에너지를 지불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그 에너지는 외부로부터 벌어와야 하는데, 가시광선이 바로 좋은 지불 수단이 된다. 전자가 외부의 가시광선을 흡수함으로써 더 높은 오비탈로 이사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서 스스로 빛나는 물질이 아닌 이상, 색깔을 띠고 있는 모든 물질은 외부의 가시광선을 흡수한다. 검은색은 파장 영역대의 모든 가시광선을 흡수하고, 흰색은 반대로 모든 영역대의 가시광선을 반사한다. 한편, 분자가 특정한 색깔의 빛만 흡수하면 그 색깔이 아닌 빛들은 반사되어 사람의 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시신경을 통해 시각 정보를 전달받은 대뇌는 이 분자를 흡수한 색깔의 보색으로 인식한다. 식물은 가장 높은 광합성 효율을 확보하기 위해 그저 붉은빛을 잘 흡수하는 분자를 나뭇잎에 도입했을 따름이지만, 그 결과 인간에게는 나뭇잎이 붉은색의 보색인 녹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노란색 분자는 남색을, 빨간색 분자는 초록색을 주로 흡수한다.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물감들이 사실은 정확하게 그 색깔의 보색을 흡수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색깔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닌 : 유전 정보를 품은 염기 분자
부전자전의 과학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옛날 사람들은 정확히 무엇 때문에 부전자전이 실현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많은 사람들은 피를 통해 자신의 형질이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완두콩을 재배하며 유전 원리를 깨달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사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이후 다수의 과학자들은 생명체에 유전을 담당하는 특수한 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피도 단백질도 아닌 염색체(chromosome)라는 것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핵심은 염색체를 구성하고 있는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그러니까 DNA이라는 존재였다.

DNA는 1869년 스위스 화학자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는 백혈구 속 단백질을 연구하다가 뜻밖에도 인(P)과 질소(N)를 가지고 있으나 황(S)이 없는 거대한 분자를 발견했다. 훗날 핵산(nudeic acid)이라고 불리게 된 이 분자의 구조는 미국의 화학자 피버스 레빈(Phoebus Levene)에 의해 비교적 명확하게 밝혀진다. 레빈에 따르면 핵산은 뉴클레오타이드(nucleotide)가 중합되어 연결된 고분자다. 여기서 뉴클레오타이드는 인산기(-OPO32-)과 5탄당인 리보스(ribose), 그리고 4종류의 서로 다른 염기 분자가 결합해 있다. 바로 아데닌(adenine, A), 구아닌(guanine, G), 사이토신(cytosine, C), 타이민(thymine, T)이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
개체의 형질이 DNA에 기록된 방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뉴클레오타이드에 붙은 4종의 염기 분자들이 나열된 순서, 즉 서열이다. 손발의 크기라든지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는 취향 모두 놀랍게도 A, G, C, T의 긴 나열로 표현 가능한 것이다. 1997년에 개봉한 SF 영화인 가타카는 유전 성향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극 중의 우주항공회사이자 이 영화 제목이기도 한 Gattaca는 모두 염기 분자를 나타내는 알파벳의 조합으로만 되어있다는 점에서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특성을 결정하는 상상 속 어두운 미래의 모습을 특별히 더 부각시킨다.

한편 아데닌과 구아닌은 N을 포함한 탄소화합물 고리 두 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퓨린(purine)계열 분자이고, 사이토신과 타이민은 N을 포함한 탄소화합물 고리인 피리미딘(pyrimidine)계열 분자다. 퓨린과 피리미딘 사이에는 물(H2O)이나 암모니아(NH3)에서 볼 수 있는 수소결합이 가능한데, 아데닌은 화학구조상 사이토신과는 수소결합을 잘 이루지 못하지만, 타이민과는 마치 열쇠와 자물쇠처럼 구조가 딱 들어맞아 강한 결합이 가능하다. 반대로 같은 퓨린 계열 염기인 구아닌은 구조상 타이민과는 결합하기 불리하지만 사이토신과는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DNA 속에서 A-T, G-C는 항상 짝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훗날 이러한 화학적 정보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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