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3주차

BOOK SUMMARY


 인문 

내 인생의 가우디

저자 유승준
출판 성안당
출간 2026.03
가우디의 건축으로 읽는 삶의 철학

도서요약 보기



레이알 광장 가로등_ 왜 그래야만 하는가?

세계 건축계를 뒤흔들어 놓을 천재의 등장
안토니 플라시드 길롑 가우디 이 코르네트. 이토록 긴 이름을 가진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카탈루냐의 작은 도시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다섯 남매 중 막내였지만, 태어났을 때 두 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연달아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 찾아온 막내였으니, 부모에게 그는 기쁨과 위안이면서 동시에 그만큼 연민과 불안도 뒤따랐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서둘러 세례를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바람과 달리 가우디는 병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할 정도로 심한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았으며 폐병까지 달고 살았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육체를 옭아매는 질병.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어지는 형벌 같은 환경 속에서 가우디는 스스로 내면을 다스리고 세상을 관조하는 심성을 기르게 된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몸까지 허약했기에 그는 친구들보다 늦게 학교에 들어갔고, 노새를 타고 학교에 오가는 날이 많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수업보다 관심을 가진 건 아버지의 대장간이었다. 아버지 프란시스코 가우디는 구리를 세공하는 대장장이였다. 뜨거운 화롯불에 구리 또는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황동을 녹여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가우디가 건축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것처럼 자신도 아버지 뒤를 이어 뛰어난 대장장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우디는 틈만 나면 대장간으로 가서 아버지가 구리와 황동으로 냄비나 솥 등을 만드는 걸 지켜봤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으로 가지 않고 대장간으로 가기 일쑤였다. 덩어리 상태인 구리와 황동이 아버지의 수많은 담금질과 망치질을 거쳐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마법 같은 과정을 지켜보며 창작의 희열 또는 신기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학교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음에도 그림 그리기와 기하학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대대로 이어져 온 장인의 손길과 정신이 가우디에게 태생부터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2기생이었던 가우디는 1878년 마침내 건축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가우디의 출현은 바르셀로나를 넘어 세계 건축계를 뒤흔들어놓을 천재의 등장이었다. 그는 설계에서 시공까지 건축의 전 과정을 자신이 결정하고 참여하고 확인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일도, 대충 적당히 하는 일도, 중간에서 타협하는 일도 없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무슨 주의나 양식이나 사조에 연연하거나 구속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기 가슴과 머리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믿었다. 그를 지탱해 주는 건 광활한 대자연의 위용과 카탈루냐의 강인한 민족성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숭고한 신앙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그의 건축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가우디만의 장르가 되었다.


카사 비센스_집은 가족이 사는 작은 나라다
꽃과 새와 곤충과 식물의 낙원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그토록 원하던 건축사 자격증을 손에 넣은 뒤 보란 듯이 건축사무소까지 차렸지만, 가우디에게는 이렇다 할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식솔과 함께 먹고살 일이 막막해진 가우디는 다른 건축가의 조수로 일하거나 의자, 책상, 장식장 등 가구 만드는 일을 했다. 나무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쇠를 다루는 것 못지않았다.

가우디가 제대로 된 건축을 하게 된 건 서른한 살 때인 1883년이었다. 주식과 통화 중개인으로 알려진 마누엘 비센스 이 몬타네르(Manuel Vicens i Montaner, 1836~1895)의 의뢰를 받아 그의 여름 별장을 짓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처음 제안받은 것은 가우디가 건축학교를 졸업하던 1878년이었다. 가우디는 들뜬 마음으로 야심차게 초기 계획을 세웠지만, 의뢰인의 사정으로 건축은 한동안 미뤄졌고, 1883년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가우디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 실력을 쏟아부어 비센스의 별장을 완성했다. 이것이 그의 첫 건축물, 카사 비센스(Casa Vicens)다. 대다수 여행 책자와 자료에는 비센스가 타일 제조업자였으며, 그 덕분에 가우디가 카사 비센스를 건축할 때 값비싼 타일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카사 비센스는 그라시아 거리에서 카탈루냐 광장 반대 방향으로 가다 보면 구엘 공원 못 미쳐 카롤리나스 거리 주택가 골목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지하철 3호선 폰타나(Fontana) 역에서 가깝고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도 되지만, 숙소가 그라시아 거리 인근이면 걸어가도 그리 멀지 않다. 좁은 골목의 여러 건물 사이에서 카사 비센스를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알록달록한 색채의 화려한 외벽과 옥상에 우뚝 솟은 굴뚝과 첨탑이 단번에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레고 블록을 쌓아 올린 것도 같고, 가톨릭이 국교였던 스페인에서는 흔하지 않은 이슬람 사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이곳은 개인이 생활하는 공간이었기에 매년 5월 22일 리타 성녀를 기념하는 축일 단 하루만 일반인들에게 개방해 왔다. 그러다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2015년 안도라 모라반 은행에서 이 건물을 인수했고, 복원을 거쳐 2017년 11월부터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하면 원하는 시간에 이 별장을 방문할 수 있다.

가우디 건축에 관한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카사 비센스의 외관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건물의 구조가 곡선보다는 직선이 압도적으로 많은 까닭이다. 가우디 하면 자연스러운 곡선이 맨 처음 연상되는데, 왜 이 건물은 대부분 직선을 사용한 것일까?

카사 비센스를 설계하고 시공할 당시 가우디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아직 그의 건축 철학이 무르익지 않은 때였다. 학생 시절, 가우디는 동양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건축학교에서 인도, 중국, 일본 등 동양 미술을 소개한 사진을 보며 흠뻑 빠져든 것이다. 여기에는 한때 스페인을 정복했던 무어인(Moor)이 남긴 기념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했던 무어인들이 그라나다에 지은 알람브라 궁전에도 심취했다. 이때 받은 영감들이 모두 반영된 건축물이 카사 비센스다. 자연주의와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무데하르 양식까지 더해졌다.

무데하르는 13~16세기에 걸쳐 에스파냐에서 발달한 이슬람풍의 그리스도교 건축 양식을 일컫는다.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이 이슬람 건축과 융합되어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에스파냐 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탄생한 것이다. 직선이 두드러지고 기둥을 많이 사용하며 평면에 타일 장식을 한 무데하르 건축은 벽돌이나 석고를 이용해 구조를 만든 다음 호화로운 아라베스크 무늬와 말굽 모양의 아치가 있는 공간을 연출했다. 이 모두를 종합한 가우디는 여기에 자신만의 자유로운 변형을 가미했다.

가우디는 건축학교를 졸업할 무렵 직접 쓴 작업 노트에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다.

장식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풍부한 색채이다. 식물, 지질, 지형, 동물의 왕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계에서 단조롭거나 단일한 색상은 보이지 않는다. 색의 대조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상당히 선명하다. 건축 부재의 일부나 전체에 의무적으로 색을 입혀야 한다. 이 색채도 시간의 손길이 닿으면 특유의 아름다움을 입게 되고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겠지.

이 같은 생각은 그의 첫 건축물에 오롯이 적용되었다.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건축이 이어지면서 가우디의 건축 기법과 철학은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카사 비센스는 아직 연마되지 않은 청년 가우디의 패기와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건축을 감상하는 선행조건, 슬픔을 아는 것
아름다운 가우디의 첫 건축물 카사 비센스, 그는 이 집을 짓는 동안 행복했을까? 건축가로서 처음 짓는 집이었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리라. 당연히 의욕과 패기,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건축주나 일을 맡은 여러 분야의 장인, 인부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마찰은 있었겠지만,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속내가 마냥 가볍고 밝기만 했을까? 집을 짓는 내내 그는 가족을 떠올렸을 것이다. 너무 일찍 곁을 떠난 어머니, 얼굴조차 보지 못한 두 형,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형 프란세스크, 그리고 조카를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진 누나까지. 그의 눈앞에는 늘 가족의 얼굴이 아른거렸을 것이다. 그에게는 온 가족이 한데 모여 행복한 시간을 보낸 기억이 없었다. 가난했고, 고단했다. 자신의 손으로 지은 멋진 집에서 가족이 모여 따뜻한 음식을 먹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단란한 모습을 상상하며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을 위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집을 지어 나갔으리라.

집에 대한 가우디의 생각은 남다른 것이었다. 1878년 초, 그는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집은 가족이 사는 작은 나라다. 독립된 가족은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고, 집이 없는 가족은 임대 주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소유한 집은 모국이고 임대 주택은 이주한 땅이다. 자기가 사는 집이 모든 사람에게 이상적인 집이다. 가족 없는 집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는 가족이 사는 집을 카탈루냐어로 카사 파이랄(Casa Pairal), 즉 닻을 내리고 있는 배 같은 집이라고 불렀다. 가족과 집을 향한 그의 애틋한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위스 출신의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슬픔을 아는 것이 건축을 감상하는 특별한 선행조건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고통과 대화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약간은 슬퍼야 건물들이 우리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질 수 있다.

젊은 가우디가 호기롭게 지어 올린 건축의 눈부신 아름다움 너머로 드러나지 않은 그의 고통과 슬픔까지 느낄 수 있다면, 카사 비센스는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내 마음속에 머무는 집이 될 것이다.


구엘 저택_지중해의 태양을 담아낸 집
구엘과의 운명적인 만남
1878년은 가우디에게 희비가 교차한 한 해였다. 무사히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가로등 제작 문제로 바르셀로나시 의회와 갈등을 겪으면서 공공 건축 작업의 길이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 갑부인 비센스의 요청으로 여름 별장을 짓게 되었으나 이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미뤄지기만 했다. 이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가우디를 전폭적으로 믿고 후원하게 될 은인이자 동지인 구엘을 만난 것이다.

가우디는 1878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상품 진열대를 만들었다. 자신이 단골로 다니는 남성 패션 전문점인 코메야 장갑상점 주인 에스테바 코메야로부터 작업 의뢰를 받은 것이다. 당대 최고의 장인이었던 에우달드 푼티의 작업실에서 가우디가 만든 상품 진열대를 본 에스테바 코메야는 대만족이었다.

가우디는 중요한 행사에 출품할 상품을 진열하게 될 장에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재료를 동원했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장식 기술을 망라했다. 학교에 제출할 과제물이 아니었기에 어떤 계약도 없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한껏 발휘했다. 이 진열대 하나가 가우디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일 때문에 만국박람회를 몇 차례 둘러보던 구엘의 눈에 상품이 아닌 진열대가 들어온 것이다. 막대한 부를 소유했던 구엘은 단지 돈 많은 부자, 즉 부르주아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귀족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자면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품격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품격은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과 파격성을 갖춘 실력 있는 건축가를 찾던 그의 눈을 가우디의 진열대가 단박에 사로잡은 것이다.

스페인관에 전시된 가우디 작품을 보고 감명받은 구엘은 만국박람회가 끝난 어느 날 푼티의 작업실을 불쑥 찾아왔다. 가우디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첫 만남에서부터 둘은 의기투합했다. 서로가 상대방의 진심과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가우디보다 여섯 살 위인 구엘은 그날부터 죽는 날까지 둘의 우정을 간직했다. 그는 건축을 의뢰하고 지갑을 여는 사람이었기에 언제나 갑의 위치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 흔한 갑질을 한 적은 없었다. 구엘은 항상 가우디를 존중했고 마음속 깊이 그를 존경했다.

에우세비 구엘 이 바치갈루피,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구엘의 아버지 조안 구엘 이 페레르는 쿠바에서 노예 상인으로 많은 돈을 번 다음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뛰어난 수완으로 직물 사업 등을 일구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제노바의 고대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구엘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집안의 부를 더 늘렸다.

구엘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와 문화계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법학, 경제학, 응용과학 등을 공부해 박학다식했던 그는 과학자, 문인,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많은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틈틈이 책을 번역하거나 저술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그는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폭넓은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통해 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우디와 구엘은 통하는 데가 많았다. 두 사람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지중해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으며, 조국 카탈루냐의 위대한 부활을 갈망했다. 구엘은 다복한 가정에서 편안한 일상을 누린 데 반해 가우디는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집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엘은 자신이 가진 환상과 이미지를 놀랍도록 실제로 구현해 내는 가우디 덕분에 귀족의 품격을 확보할 수 있었고, 가우디는 자본의 한계와 건축주의 변덕이라는 악조건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의 건축 철학과 미학을 온전히 구체화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4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구엘은 자기 농장의 경비실과 마구간, 파빌리온 등의 설계를 가우디에게 맡겼으며, 장인의 처남인 막시모 디아스 데 키하노를 소개해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코미야스에 그의 별장인 엘 카프리초를 건축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다. 붉은 벽돌의 중후함과 세라믹 타일의 화려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엘 카프리초는 가우디 초기 건축의 교과서와 같다. 구엘은 가우디의 작품 모두를 마음에 들어 했다.

마침내 그는 가우디에게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모티브가 될 자기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도심 속의 작은 궁전인 구엘 저택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양대 가문은 구엘 가문과 장인이 속한 코미야스 가문이었다. 장인에 이어 코미야스 가문의 두 번째 후작이 된 자신의 매형이 람블라스 거리 인근에 으리으리한 자태의 모하 궁전이라는 집을 건축했다. 구엘은 이를 압도할 만한 집을 짓고 싶었고, 가우디라면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대대로 살던 집과 연결된 곳에 세워질 새 저택은 독특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연회용 주택이었다.

가우디 건축의 완벽한 실험실
가우디는 존재감 없는 것들로 건물 꼭대기를 장식하는 걸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지붕은 인간이 건축한 집과 신이 창조한 자연이 만나는 곳이기에 그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옥상에는 여러 모양의 굴뚝과 환기탑 20개가 놓여 있다. 재료도 유리, 대리석, 도자기, 벽돌 등 다양하다. 카사 비센스에는 사각형 타일에 무늬를 입혀 사용했으나 구엘 저택에서는 타일을 조각내 붙여서 사용하는 트렌카디스 기법을 선보였다. 정중앙에는 사암을 쌓아 올린 탑 조형물이 보인다. 낮에는 지중해의 태양을, 밤에는 등불의 빛을 실내로 전달하는 장치다. 맨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 아래는 박쥐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카탈루냐인들에게 박쥐는 행운을 상징한다. 박쥐 날개 뒤에는 톱니바퀴가 달려 있다. 이는 구엘의 경제적 성공을 상징하는 공장을 의미한다. 박쥐와 톱니바퀴는 풍향계 역할을 했다. 맨 아래 보이는 건 태양이다. 지중해의 태양을 건물 전체에 녹여내기 위해 가우디는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극적인 장치로 연결했다.

카사 비센스가 경쾌한 왈츠 같은 집이라면 구엘 저택은 중후한 교향곡 같은 집이다. 구엘 저택을 둘러보며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을 떠올렸다. 무려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만들어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헝가리 후작 에스테르하지가(家)에서 30년 넘게 궁정악장으로 일하며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유럽 최대의 영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에스테르하지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그가 만든 수많은 명곡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만나 불후의 명곡을 남길 수 있었던 것처럼 가우디 역시 구엘을 만나 건축의 신으로 불릴 만한 걸작을 빚어낼 수 있었다. 그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구엘 저택은 가우디가 어떤 구애도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던 완벽한 실험실이었다.


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_ 신을 사랑하듯 건축을 사랑하다
가난한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
삼십 대 초반에 일을 시작한 가우디는 칠십 대 중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아낌없이 바쳤다. 43년은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 세월 동안 가우디의 신앙과 영성은 더욱 깊어졌고 건축 기법과 기술은 끊임없이 진보했으며, 성경과 전례에 대한 이해는 사제나 학자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곳곳에는 이처럼 농익은 그의 내공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공사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성당 건축비를 오로지 신도들의 기부금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기부금이 모이면 공사가 진행되었고, 자금이 바닥나면 공사는 멈췄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계획은 가우디의 머릿속에 있었고, 시간은 인간의 계산이 아니라 신의 셈법에 맡겨져 있었다.

이처럼 지지부진한 성당 건축과 달리 매우 빠르게 지어진 건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제를 위한 공간도, 기부자들을 위한 건물도 아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매진하는 노동자들과 인근에 사는 취약 계층의 자녀들을 무상으로 교육하기 위한 부속학교였다.

비극의 주간 사건이 광풍처럼 바르셀로나를 휩쓸고 지나간 1909년 가을 무렵,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 봉안당의 초대 주임 신부였던 길 파레스 이 빌라사우는 가우디에게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가우디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성당 건축을 위해 애쓰는 많은 노동자의 자녀들이 공사장 주변을 배회하거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며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 아파하던 차였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즉각 일을 추진했다. 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금조차 늘 부족한 형편이었기에 학교 공사 비용은 결국 가우디의 사재로 충당해야 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저예산 건축이었지만 가우디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학교 건물을 지었다.

가로 10m, 세로 20m 규모에 단층으로 건립된 이 학교에는 교실 세 개와 홀, 미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외벽에는 화장실이 딸린 구조였다. 카탈루냐 전통에 따라 세 겹의 벽돌로 마감한 외벽 위로 물결 모양의 지붕이 부드럽게 덮여 있는 외관이 인상적이다. 건물 바깥에는 야외 교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세 개의 공간이 철제 퍼걸러로 덮여 있었다. 퍼걸러(Pergola)란 야외에 설치하는 개방형 구조물로 햇빛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다. 나무나 쇠를 가로 세로로 얹어 놓고 등나무 같은 덩굴성 식물을 올려 자라게 한 정자나 길을 가리킨다. 저렴한 자재를 사용해 단순하고 소박하게 지었지만,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꽃피우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넉넉하고 자유로운 기품이 건물 전체에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건축가가 이 학교를 저예산 건축의 모델로 삼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우디는 성당 곁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상교육 학교를 짓게 된 일을 무척 보람 있게 여겼다.

1909년 11월 15일 개교한 이 초등학교는 길 파레스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의 헌신으로 아이들에게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공부하며 지력을 키웠고, 운동장에서 뛰놀며 체력을 길렀다.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공공연히 체벌이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그러나 길 파레스 교장은 이를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몬테소리의 진보적 교육 방식과 자유로운 교수법을 학교에 적용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던 학교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을 때 심각한 피해를 겪고 말았다. 시위대의 습격으로 건물은 불타고, 학습에 필요한 소중한 자료들이 전부 소실된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 해체와 재건축, 철거를 거친 끝에 학교는 2009년에 다시 지어졌고, 현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부속학교의 역사를 기리는 복합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성당 내부에서 수난의 파사드 출입문으로 나와 외벽을 감상한 후 오른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지하로 내려가기 전 복원된 부속학교 건물을 볼 수 있다. 해체와 재건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처음 학교가 세워졌던 부지는 성당 건축을 위해 사용되었고, 학교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록 가우디가 맨 처음 지어 올린 건물이 아니고 장소도 바뀌었지만,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공간이기에 이곳을 둘러보는 일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피카소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은 가우디를 부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며 돈을 버는 부르주아 건축가라고 폄훼했지만,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묵묵히 자기 지갑을 열었을 뿐 아니라 신이 주신 재능을 유감없이 사용했다. 가우디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었다. 건축 그 자체였고, 그 건축을 맡긴 궁극의 의뢰인, 곧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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