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 의무론 (라틴어 원전 완역본)
 
지은이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은이), 박문재 (옮긴이)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5년 02월




  • 기원전 44년, 키케로는 공화정의 위기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 깊이 성찰한 『의무론』을 집필하였습니다. 공직자의 도덕적 책임과 정의로운 행동의 원칙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고전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실천적 지침을 제시합니다. 


    키케로 의무론


    도덕적 올바름

    내 아들 마르쿠스야, 네가 아테네에 머물며 크라티포스에게 배운 지 어느덧 일 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스승과 도시가 지닌 최고의 권위를 통해 철학의 규칙과 원리를 충분히 익혔으리라 믿는다. 스승은 지식으로, 도시는 모범으로 너를 성장시켰을 테니 말이다. 나는 철학을 공부할 때뿐만 아니라 말하는 법을 연습할 때에도 항상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사용하며 실력을 키우고자 했는데, 너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두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공부하기를 권한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우리 로마인들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고 자부한다. 덕분에 그리스어를 잘 모르는 이들은 물론 아는 이들까지도 말하기와 사고력에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너는 이 시대의 철학자들 중 최고의 인물에게 수학하고 있으며, 원한다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때까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소요학파는 둘 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따르므로 우리의 저술과 그들의 저술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쓴 책들을 읽을 때, 나를 개의치 말고 그 책들이 너에게 도움이 되는지 스스로 판단해보아라. 어쨌든 내가 쓴 책들을 읽는다면 라틴어 실력이 확실히 향상될 것이다. 내 말이 오만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철학적 지식에서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연설가로서 적절한 말을 제때에 쓸 줄 아는 능력만큼은 내게도 있단다. 이 기술을 갈고닦는 데 평생을 바쳤으니, 이 정도는 말해도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내 아들 키케로야. 네가 나의 연설문뿐만 아니라 내가 연설문만큼이나 많이 쓴 철학책들도 열심히 읽기를 간곡히 권한다. 연설문에서 더 큰 힘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냉철하고 절제된 형태의 연설인 철학책의 문체도 익혀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리스인 중에서 대중연설과 냉철한 토론 두 분야를 모두 공들여 연구하고 행하여 성공한 사람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바로 팔레론 출신의 데메트리오스다. 그는 날카로운 논쟁가이자 테오프라스토스'의 제자답게 격정적이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연설가였다. 내가 두 분야에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일지만, 나는 분명 두 분야를 모두 추구해왔단다.


    물론 플라톤이 대중연설을 하고자 했다면 매우 장중하면서도 유창하게 연설을 했을 것이고, 데모스테네스도 플라톤에게 배운 것을 계속 연구하여 발표했다면 수사학적으로 훌륭하고 뛰어난 글을 써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 몰두하느라 서로를 경시했다.


    나는 지금 네게 무언가를 쓰기로 결심했으니 다른 많은 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네 나이와 내 권위에 비추어 가장 적합한 글을 쓰고자 한다. 철학자들이 철학에서 중요하고 유용한 주제들을 치밀하고 풍부하게 논의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의무에 관해 전하고 가르친 내용이 가장 널리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듯하구나.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대중적인 일이든 집안일이든, 네 자신에 관한 일이든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이든, 삶의 어느 부분도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은 모두 의무를 행하는 데 달려 있는 반면,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삶은 의무를 소홀히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모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다루는 문제다. 의무에 관해 가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선악을 규정할 때 모든 의무를 왜곡하는 일부 철학 학파들이 있다. 그들은 최고선이 미덕과 무관하다고 보며, 최고선을 판단하는 기준도 미덕이나 도덕적 올바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로 삼는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입장을 고수하여 마음속에 종종 생겨나는 본성적인 선조차 물리친다면, 그들에게서 우정이나 정의감 혹은 후히 나누어주는 심성은 자라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고통을 최고악으로 여기는 이들에게서 용기를,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이들에게서 절제를 기대할 수 없다.


    너무나 명백해 논의할 필요조차 없지만, 나는 다른 자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이 철학 학파들이 자기 입장을 고집한다면, 의무에 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또는 주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철학 학파들만이 의무에 관한 확고하고 안정적이며 본성에 부합한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의무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곳은 스토아학파, 아카데미아학파, 소요학과뿐이다. 아리스톤, 피론, 에릴로스의 견해는 이미 오래 전에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겼더라면 의무에 관해 논의할 권리를 여전히 가졌을 것이고, 의무가 무엇인지 더 깊이 탐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논의할 때 가능하면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따르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겠다.


    여러 가지 의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어느 의무를 우선시할지 비교 결정해야 할 때는, 가장 큰 호의를 베푼 조국과 부모에 대한 의무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두 번째로 중요한 우선순위는 우리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자식과 가솔들이며, 세 번째는 평소 자주 왕래하며 장래의 운명을 함께할 가능성이 높은 친족들이다.


    따라서 내가 방금 언급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최대한 베풀어야 한다. 삶을 영위하는 데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논의, 대화, 격려와 위로, 때로는 질책도 필요하며, 이러한 모든 것은 우정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사람들 간의 유대 중에서도 뜻이 맞아 결속된 우정이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준단다.


    이 모든 의무를 이행할 때는 개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개개인이 우리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필요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지므로 그때그때 누구에게 먼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곡물을 수확할 때는 형제나 친구보다 이웃을 먼저 도와야 하지만, 법정에서 변호할 때는 친족이나 친구를 우선시해야 한다. 따라서 의무를 이행할 때마다 이러한 요소들을 꼼꼼히 고려하고 각 상황의 가중치를 적절히 계산하여, 최종적으로 각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훈련을 하고 이를 습관화해야 한다.


    그러나 의사나 장군, 대중연설가가 이론적으로 기술을 익혔다 하더라도 실무와 경험이 없으면 크게 칭송받을 수 없는 것처럼, 의무를 이행할 때도 단순히 원칙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실무와 경험이 중요하다.



    유익함

    이제 우리는 '유익함'이라 부르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원래의 뜻에서 벗어나 잘못 사용되고 왜곡되어 점차 도덕적 올바름과 유익함이 서로 분리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르더라도 유익하지 않을 수 있고,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더라도 유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의 삶에서 이보다 더 해로운 생각은 있을 수 없다.


    최고의 권위를 지닌 철학자들은 세 가지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여 이렇게 말한다. 정의로운 것은 모두 유익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은 모두 정의롭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은 모두 유익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영악하고 능수능란한 자들을 부러워하여 그들이 보이는 악덕을 지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속임수와 악행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올바른 생각과 정의로운 행동을 통해서만 자신이 바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막연한 기대가 확실한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 중 일부는 금과 은을 비롯한 땅에서 산출되는 무생물, 즉 생명이 없는 것들이고, 일부는 고유한 본능과 욕망을 지닌 생물, 즉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들 중 일부는 이성이 없고, 일부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말과 소 같은 가축이나 벌에는 이성이 없지만, 인간은 이들을 잘 활용하여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반면, 이성을 사용하는 존재는 신과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 신들과 사이좋게 지내려면 신들을 잘 섬기고 경건하게 살아야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존재는 신들과 가장 가깝고 신들에 버금가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고 방해되는 존재 역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들을 제외하면 인간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존재는 결국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 없는 존재들은 대부분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지며, 인간의 손과 기술이 닿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관리와 경영이 없었다면 그것을 활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관리, 항해, 농사, 곡물을 비롯한 각종 작물의 수확과 저장 등은 모두 인간의 노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남는 것을 수출하고 부족한 것을 수입하는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노동과 손길이 없었다면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돌들을 땅에서 파내지 못했을 것이며, 땅 속 깊이 숨겨져 있는 철과 동과 금과 은을 캐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공동생활을 통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서로 돕는 법을 배웠다. 만약 이와 같은 협력이 없었다면 인류가 처음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더위를 피하기 위한 집들을 마련할 수 있었겠느냐? 또한 폭풍이나 지진으로 파손되거나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진 집들을 수리할 수 있었겠느냐?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상수도, 운하, 관개 설비, 방파제, 인공 항구 같은 시설들을 갖출 수 있었겠느냐? 이런 예들과 그 외 여러 사례를 보면, 인간의 손길과 노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생명이 없는 것들이 주는 생산물과 유익을 분명히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끝으로,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짐승들에게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이로운 것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 다양한 짐승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인간이었다. 지금도 인간의 노동이 없다면 짐승을 먹이거나 길들이거나 보호하지 못했을 것이고, 때맞추어 그들에게서 이로운 것을 얻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해로운 짐승들을 죽이고, 이용할 수 있는 짐승들을 포획한다.


    내가 수많은 기술을 열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기술 없이는 인간의 삶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술이 인간을 보살피지 않았다면, 어떻게 병자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사람들이 건강의 기쁨을 누리며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 이러한 기술들 덕분에 인간의 삶은 짐승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도시들은 결코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도시들이 세워지면서 법과 관습이 생겼고, 그로 인해 권리의 공평한 분배와 확실한 생활 규율도 자리 잡았다. 이러한 질서가 확립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순화되고 염치가 생겼다. 결과적으로 삶은 더 안전해졌고,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고 주고받음으로써 부족한 것이 없게 되었다.


    한편 사람들이 뜻을 모아 협력함으로써 큰 유익을 얻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재앙보다 더 끔찍한 일도 없단다. 위대한 소요학파 철학자 디카이아르코스는 인간의 파멸에 대해 쓴 책에서 홍수, 전염병, 황폐화, 야생 짐승들의 습격 등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 다양한 원인을 수집하여 제시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원인들로 인한 사망자보다 전쟁이나 폭동과 같은 인간 간의 충돌로 인해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로써 분명해진 사실은 사람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것도 사람이며,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것도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는 미덕의 고유한 기능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그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생명이 없는 자원을 이용하고 짐승들을 부려 인간의 삶에 유익하게 하려면 기술을 사용하는 노동이 필요하다. 반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우리의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만들려면 뛰어난 사람들의 지혜와 미덕이 필수적이다.


    모든 미덕은 통상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는 각 상황에서 참되고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 그에 합당한 것은 무엇인지, 그 결과와 원인 그리고 그것을 유발하는 것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둘째는 그리스인들이 '파토스'라고 부르는 정신적 혼란과 동요를 잠재우고, '호르메'라 부르는 충동을 이성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절하고 지혜롭게 활용하여 협력을 통해 우리의 본성이 필요로 하는 자원을 풍족하게 모으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려 하는 자들을 공정과 인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응징하는 것이다.



    도덕적 올바름과 유익함의 상충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의무는 스토아학파에서 '이차적 도덕적 올바름'이라고 칭하는 의무들이다. 즉 현자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인류 전체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의무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덕들은 선천적으로 미덕에 이끌리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데키우스 부자나 스키피오 형제는 용기 있는 사람들로 기억되고, 파브리키우스나 아리스티데스7는 의인으로 불리지만, 전자가 보여준 용기의 모범이나 후자가 보여준 정의로움의 모범은 현자의 모범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들 중 누구도 우리가 현자라고 인정할 만큼 충분히 현명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현자로 인정받았고 그렇게 불렸던 마르쿠스 카토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도 실은 완전한 현자가 아니었다. 저 일곱 현인조차 진정한 의미의 현자가 아니었으며, 다만 평균적 의무를 꾸준히 실천하여 현자와 비슷한 면모를 지니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도덕적 올바름이 유익함과 상충된다고 여기며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즉 일반적으로 도덕적 올바름이자 명예로움이라고 불리는 것을 금전적 이득과 비교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현자들이 고유한 의미의 진정한 도덕적 올바름을 살피고 지켜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수준에서 도덕적 올바름을 살피고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미덕을 통해 이루어온 진보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 이 진보는 의무를 지킴으로써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들을 통해 지속된다.


    반면에 금전적 이득과 자신의 편익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며, 도덕적 올바름이 그보다 우월하거나 중요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올바름을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비교하고 저울질한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파나이티오스가 말했듯이, 도덕적 올바름과 유익함이 상충할 때, 사람들은 그 둘을 비교하고 저울질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단지 "그러곤 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도덕적인 올바름보다 유익함을 우선시하는 것만이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둘을 비교하고 저울질하며 어떻게 할지 주저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지고 저울질한다고 생각하느냐? 사람들은 자신이 하려는 행동의 성격에 의문이 들 때, 이를 비교하고 저울질하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일반적으로는 도덕적으로 부끄럽게 여겨지는 행동이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 때가 종종 있다. 이를 좀 더 폭넓게 적용할 예를 들어보겠다. 예를 들어 살인, 특히 가까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악행이 있겠느냐? 하지만 자신과 가까운 참주를 죽였다면, 그가 과연 악행을 저질렀다고 죄책감을 느끼겠느냐?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모든 고귀한 행위 중에서도 참주를 처단하는 것을 최고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유익함이 도덕적 올바름을 압도한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도덕적인 올바름이 유익함을 수반했을 뿐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올바름과 우리가 말하는 유익함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때,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으려면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각 상황에서 이 기준을 따라 판단한다면, 의무를 실천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 기준은 스토아학파의 철학 체계와 가르침과 가장 잘 부합한다. 내가 이 책에서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 아카데미아학파와 한때 아카데미아학파와 같은 길을 걸었던 너희 소요학파는 도덕적인 올바름을 유익함보다 더 우위에 두지 않느냐? 하지만 이 문제를 가장 훌륭하게 논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라 해도 유익하지 않을 수 있고, 유익한 것이라 해도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은 무엇이든 유익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유익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Insert into User_Gumi_Real_Tbl (SiteCode, Account, DomesticNo, RegistDate,morning) Values ('gurye220603', '','CE20057','202505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