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분 장자
 
지은이 : 장자 (지은이), 한덕수 (옮긴이)
출판사 : 메디치미디어
출판일 : 2024년 11월




  • 복잡한 주석 없이도 원전을 즐길 수 있도록 완역 후 초역과 해설을 곁들여 하루 10분씩 읽기 좋게 구성되었습니다. 장자의 광대하면서도 기상천외한 사유와 역설을 통해 사고의 유연성을 기르고 자유로운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루 10분 장자


    양생주

    앎의 작용은 끝이 없다

    양은 기른다는 뜻이니, 양생주는 삶을 길러주는 주인이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자신을 온전히 보전하는 삶을 말한다. 유가에서는 수신을 말하는 반면 장자는 양생을 말하고 있다. 즉 공맹은 목숨을 버려서라도 올바른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장자는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므로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오래 사는 것에만 방점을 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양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 함께 하고 있음이며 마음이나 지각은 신경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몸과 마음은 생명체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몸과 마음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언제나 자연을 따르고 사물을 거스르지 않아야 인간의 생명력은 활성화되고 삶은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얽매임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본장의 취지다.


    변치 않는 도리를 따른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앎의 작용은 무한하다. 유한한 인생으로 무한한 지혜를 따른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생명의 유한성을 무시하고 앎이 가리키는 대로 끝없이 달려간다면,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잘 알면서도 여전히 지혜와 지식을 믿고 그것에 속박되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식의 작용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여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악이라는 것도 명예나 형벌을 기준으로 설정한 평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중정에 따라 무위자연의 변치 않는 도리를 행한다면 몸을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으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고, 자식을 길러낼 수 있으며, 주어진 수명인 천명을 다할 수 있다.


    백정에게도 도가 있다

    언젠가 소를 잘 잡기로 유명한 포정(백정)이 문혜왕에게 진상하기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포정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에 힘을 주면서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반드시 살과 뼈가 떨어져 나갔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삭삭 울리고 쉭쉭 소리를 내는데 모두가 음률에 맞았고, 그 동작은 상림의 춤과 같았으며, 절도는 요임금의 음악에 들어맞았다. 이를 지켜보던 문혜왕이 감탄하며 물었다.


    문혜왕: 과연 대단하구나. 재주가 어쩌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포정: 방금 보신 것은 재주가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소를 해체할 때는 보이는 것이 전부다 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이 멈추면 정신이 움직이게 됩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큰 틈새로 들이밀고, 큰 구멍을 왕래하듯이 칼을 찌릅니다. 소 본연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닿지 않을뿐더러 뼈에도 닿지 않습니다.


    여타의 훌륭한 백정들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힘줄이나 근육에 칼을 대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쓰는 이 칼은 19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칼날은 숫돌에서 막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지만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새로 집어넣으니 칼질이 춤을 추듯이 되면서도 오히려 여유로워집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났어도 제 칼은 새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는 저도 긴장을 합니다. 그때는 행동을 천천히 하면서 칼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우수수 떨어져서 마치 흙더미처럼 쌓입니다. 그러면 주위를 둘러보고 흡족한 마음으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습니다.


    문혜왕: 참으로 훌륭하다. 나는 오늘 포정을 만나서 삶을 기르는 방법인 양생을 터득했도다.



    대종사

    크게 높여야 할 스승

    대종사란 위대하고 으뜸이 되는 스승으로서 크게 높여야 할 참된 스승을 가리킨다. 굴곡진 인생을 살아가면서 훌륭한 스승이나 멘토를 만나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스승은 사람이 아니다. 위대한 스승이란 도를 말하며, 도는 작은 지혜에 속박되지 않는 무위자연을 말한다. 노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고 하였다.


    장자는 노자의 이러한 사상을 계승하여 무위자연이야말로 인간이 법도로 삼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찍이 서경에서는 능자득사자왕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스승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왕이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스승을 얻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도를 터득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렇게 도를 터득해서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왕 노릇을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자연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보고 있다.


    진인의 한계는 알 수 없다

    참된 사람을 진인이라고 한다. 진인이 있어야만 참된 앎이 있게 된다. 옛날의 진인은 작은 일에도 거스르지 않고, 달성을 기뻐하지 않으며, 인위적인 노력으로 일을 꾀하지 않았다.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고 성공해도 만족하지 않는다. 절벽 끝에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빠져도 젖지 않으며, 불속으로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 지혜가 승화되어 도의 경지에 이르면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옛날의 진인은 잠을 자도 꿈꾸지 않고 깨어나도 근심이 없었다. 먹어도 맛에 이끌리지 않고 숨은 깊이 쉬었다. 보통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숨을 쉬지만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쉬었다. 남에게 굴복당한 사람은 목에서 나는 소리가 마치 물건을 토해내는 것 같고, 욕심이 지나친 사람은 타고난 기틀이 천박하여 힘을 고갈시킨다.


    진인은 삶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을 기피하지 않는다. 세상에 나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의연하게 오고 갈 따름이다. 삶을 자연의 현상으로 여기며 죽음에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주어진 삶을 살다가 때가 되면 일체를 망각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마음으로 도를 버리지 않고 인위로 하늘을 돕지 않으니 이를 일러 진인이라고 한다. 진인의 마음은 무심하고 얼굴은 고요하며 이마는 넓고 편편하다. 추상처럼 엄하고 봄날처럼 온화하여 감정의 움직임은 계절이 바뀌듯이 자연스럽다. 정신은 바깥 사물과 조화를 이루어 무한한 자유를 누리지만 그 한계는 알 수 없다.


    자연과 다투지 않는다

    진인은 그 모습이 지극히 높아도 무너지는 일이 없고, 어딘가 부족한 듯하지만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편안하게 행동하여 고고한 듯하지만 고집하지 않고, 공허하게 텅 비어 있지만 가벼운 법이 없다. 즐거워한다고 해서 진정한 기쁨이라 말할 수 없고, 세상일을 재촉하는 것 같지만 자연의 도리에 따를 뿐이다. 얼굴에는 윤기가 더해가고, 사색으로 침묵하는 것은 무아의 경지에서 노닐기 때문이다.


    진인은 법을 형식으로 여기고, 예의를 날개로 여기며, 지식으로 때를 따르고, 덕으로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 법을 형식으로 여긴다는 것은 죽이는 일에 신중하고, 예의를 날개로 여긴다는 것은 세속의 규범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으며, 지식으로 때를 따른다는 것은 필연적인 움직임에 순응하는 것이고, 덕으로 자연의 섭리에 따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덕을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참되려면 힘써 행실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도 한결같고 싫어하는 것도 한결같아야 한다. 일치하는 것도 한결같고 불일치하는 것도 한결같아야 한다. 일치하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며, 불일치하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을 이기려 해서도 안 되고 자연과 다투려 해서도 안 된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한가지다

    밤낮이 바뀌는 것처럼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명령이다. 만물의 근본적인 법칙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어버이처럼 여기고 사랑하는데, 하물며 그 하늘을 만들어낸 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나라의 지배자인 임금은 높게 보고 목숨까지 바친다. 하물며 만물의 참 주재자인 도를 따르고 귀의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연못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진흙 위에 몸을 모아 서로의 거품으로 적셔준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돕고 사는 것보다 강물이나 호수를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면서 서로를 잊고 사는 편이 훨씬 더 좋다. 인간 역시도 속세의 범주 안에서 착한 것을 칭찬하고 악한 것을 비난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선악을 초월하여 도에 따라 사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롭다. 천지는 인간에게 형체를 부여하고 삶을 주어 우리를 수고롭게 하고, 늙게 만듦으로서 우리를 편안히 해주며, 죽음으로서 영원히 쉬게 하는 것이니, 삶을 긍정한다면 죽음도 긍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잘 사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


    천하를 천하 속에 감추다

    배는 깊은 골짜기에 감춰두고, 그물은 못 속에 감춰두고 어부는 안전하다고 믿는다. 힘이 있는 자가 어둠을 타고 훔쳐갈 수도 있는데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한다. 그처럼 작은 것을 큰 것 속에 감추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천하를 천하 속에 감추어둔다면 훔쳐도 달아날 데가 없으니 안전하다. 사람들은 인간의 형체를 얻었음을 기뻐하는데, 인간의 형체는 무한히 변화하는 것이니, 그 변화에 마음을 맡긴다면 기쁨은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체를 있는 그대로에 맡기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경지에서 노닌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일찍 죽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늙는 일에도 잘 대처하며, 시작하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끝맺는 일에도 잘 대처하면서 훌륭한 성인을 본받으려고 했다. 하물며 만물이 매여 있고 무한한 변화를 낳는 도를 본받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도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다.



    천지

    하늘과 땅은 조화를 이룬다

    천지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으로서 우주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 하지만 다스림은 오로지 도 하나뿐이다. 그래서 도를 통달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무위로 다스리는 것을 하늘이라 하고, 무위로 선양하는 것을 덕이라 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만 큰일에 속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작은 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다스림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스림은 잊는 것이니 사물도 잊고 하늘도 잊어라. 그것을 일러 자기를 잊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자기라는 존재를 잊고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항상 우쭐대는 놈이 화를 당한다. 예를 들어 대밭에서 닭들이 모이를 찾고 있으면, 숲 뒤에서는 살쾡이가 주린 배를 채우려고 노려본다. 그런데 살쾡이 밥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알을 낳는 암탉이 아니라 항상 장닭이다. 붉은 벼슬을 뽐내며 날개털의 윤기를 자랑할 때 낚아채 가기 때문이다. 암탉을 흘리려고 재주를 부리다가 제물이 되는 것이니, 내가 조금 있거나 안다고 우쭐대지 말아야 한다.


    사심이 없으면 귀신도 감복한다

    하늘과 땅은 비록 크지만 그 조화는 고르고, 만물은 종류가 많다고 하지만 그것의 다스림은 하나에 의한 것이다. 사람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그 주인은 임금 한 사람뿐이며, 임금이란 덕을 근본으로 삼고 하늘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무위로써 하였고, 하늘의 덕을 따랐다.


    도로써 직언을 살펴보면 천하의 임금은 바르게 되고, 도로써 명분을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의 뜻이 분명해지며, 도로써 능력을 살펴보면 천하의 관리들을 적합하게 쓸 수 있고, 도로써 모든 것을 광범위하게 살펴보면 만물의 기능을 잘 갖추게 할 수 있다.


    하늘과 통하여 만물을 운행하는 것이 도이며, 윗사람이 다스리는 것을 정사라 하고, 재능이 재주를 능가하는 것을 기교라고 한다. 따라서 기교는 정사로 지배하고, 정사는 의리로 지배해야 하며, 의리는 덕으로 지배하고, 덕은 도로서 지배해야 하며, 도는 하늘에 의하여 지배된다. 예전에 천하를 부양한 사람은 아무런 욕망이 없는데도 온 천하가 풍족하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만물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였는데도 백성들은 안정되었다. 옛 책에 이르기를 “하나를 통달하면 만사가 그물 안에 있고, 아무런 사심이 없게 하면 귀신도 감복한다”고 하였다.


    생사가 다르지 않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도라는 것은 만물을 싣고 덮어주는 것이므로 크고 광대하다. 그래서 군자는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무위로 다스리는 것을 하늘이라 하고, 무위로 선양하는 것을 덕이라 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하는 것을 크다고 하며, 행동이 남들과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너그러움이라 하고, 만 가지를 소유하되 똑같지 않은 것을 풍부하다고 한다. 덕을 이루는 것을 올바로 선다고 말하며, 덕을 이루는 것을 독립이라 말하고, 도에 따르는 것을 잘 갖추어졌다고 하며, 외물에 뜻이 꺾이지 않는 것을 온전하다고 한다. 군자로서 이 열 가지를 분명히 한다면 마음이 커질 것이며 만물은 종속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산에 금을 저장해두고 물속에 진주를 저장해둔 것과 같다. 그래서 재물을 이로움이라 생각하지 않고, 부귀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으며, 오래 사는 것에 매달리지 않고, 일찍 죽는 것을 애통해하지 않는다. 또한 그런 사람은 영달을 영화롭게 생각하지 않고, 궁핍한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으며, 한평생을 이익에 초월한 채 자기 분수대로 살아갈 것이다. 천하를 다스려도 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혹시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밝게 드러날 뿐이다. 그에게 만물은 한 몸이고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도라는 것은 연못처럼 편안하고 호수처럼 맑고 깊지만, 금석도 그것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돌과 쇠는 소리를 가졌지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 만물의 이러한 성질을 누가 정해주었던가? 크나큰 덕을 지닌 사람은 소박하게 행동하면서도 매사에 통달해 있다. 근본적인 지혜가 신통하므로 그 덕이 넓으며, 그 마음이 출현하는 것은 무언가에 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체는 도가 아니면 생성되지 않고, 모든 생성은 덕이 아니면 발현되지 않는다. 형체를 보존하면서 생성을 다하고, 덕을 세우면서 도를 환하게 밝힌다면 가히 큰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홀연히 나타나 갑자기 움직이는데도 만물이 따른다면 이 또한 큰 덕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도 보고 소리 없이도 듣는다. 까마득한 가운데서도 홀로 밝음을 보고, 소리 없는 가운데서도 홀로 조화의 소리를 듣는다. 깊고도 깊기에 사물을 안정시키고, 신묘하고 신령스러워서 정기를 안정시킨다. 모든 만물과 접촉함에 있어서는 지극한 무위로써 만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때에 따라 알맞은 자리를 찾아서 머무른다. 머무는 자리는 넓고도 좁으며, 길고도 짧고, 가깝고도 멀다.”



    천하

    도는 본래부터 하나다

    도는 모두를 포용한다

    공정하여 파당을 짓지 않고, 신뢰하여 사심을 갖지 않으며, 객관적이어서 주장하지 않고, 사물을 따르되 구별하지 않으며, 세속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지혜로서 계책하지 않으며, 사물을 자기 위주로 가리지 않고, 모두가 같이 간다. 옛날 도술을 닦은 사람 중에 이러한 것을 좋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팽몽과 전병, 신도가 그랬다.


    그들은 만물은 모두가 균등하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주장하기를 “하늘은 사람을 덮어주기는 하지만 실어주지는 못한다. 땅은 모든 사람을 실어주기는 하지만 덮어주지는 못한다. 위대한 도는 만물을 감싸줄 수는 있어도 분별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만물에는 가능한 것도 있지만 불가능한 것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장하기를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사물을 선택하면 모든 사물에 공평할 수 없게 되고, 말로 가르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도에 대해서 모두 다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다

    근본을 지극한 정신과 도라 하고, 사물은 조잡한 것이라 하며, 재물이 쌓여 있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홀로 담담하게 신명과 더불어 산다. 옛날의 도를 닦는 학술을 터득하여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관윤과 노자였다. 그들은 영원하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세워놓고 큰 도를 중심으로 삼았다. 부드럽고 겸손한 것으로 겉모양을 삼고, 공허함으로서 만물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실로 삼았다.


    관윤이 말하기를 "자신에게는 정해진 입장이 없지만, 외물의 형세에 따라 자신을 드러낸다. 움직임은 물과 같고, 고요함은 맑은 거울과 같으며, 호응하는 것은 메아리와 같다. 홀연히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청정하니 맑은 것 같다. 이런 경지에 동화가 되는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만, 의식적으로 이런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런 경지를 잃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남보다 앞서지 않고 뒤를 따랐다.


    현묘한 도에 도달하다

    황홀하고 적막하여 형체가 없고, 변화하여 일정함이 없으니,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천지와 함께 존재하고 신명에 따라 나아간다. 방방한데 어디로 갈 것이며, 순간인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만물이 모두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돌아갈 만한 곳이 없다. 옛날의 도술을 닦는 학문을 터득하여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장자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에 황당한 말과 종잡을 수 없는 말로 논하였다. 때로는 제멋대로였지만 치우치지 않았고, 한 가지 일에만 적용되는 견해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지금은 천하가 침체되고 혼탁하여 올바른 이론을 펼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때로는 상황에 맞는 말로 모든 사물에 대하여 논하고, 세상에서 중하게 여겨지는 말로 진실을 논하였으며, 다른 일이나 사물에 빗대어 광범위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였다. 홀로 천지와 더불어 정신을 왕래하면서도 만물을 내려다보지 않았으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세속에 순응하며 살아갔다.


    장자의 책은 괴이하고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지만, 사물을 따르므로 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의 표현은 신출귀몰하기는 하지만 파격적인 재미가 있다. 달리 가슴속에 꽉 들어찬 것들을 해소하고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용은 생명력이 있고 풍성하다.


    위로는 현묘한 도에 도달하여 조물주와 노닐고, 아래로는 생사를 벗어나고 시작과 끝이 없는 자를 벗하였던 것이다. 그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도는 광대하고도 탁 트였으며, 심원하고도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천지의 변화에 호응하면서 사물을 풀어헤칠 때는 그 도리에 다함이 없고, 사물이 올 때는 큰 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으므로 황홀하고 아득하여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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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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