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 가능성의 철학
 
지은이 : 아즈마 히로키
출판사 : 메디치미디어
출판일 : 2024년 09월




  • 21세기 사회는 공동체의 해체와 민주주의의 기능 상실로 위기에 처해 있으며, 코로나19는 이러한 문제를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비트겐슈타인과 솔 크립키의 철학에서 ‘정정 가능성’ 개념을 끌어내 기존 이념적 대립을 넘는 새로운 공동체 가능성을 제안합니다. 


    정정 가능성의 철학


    가족과 정정 가능성

    가족적인 것과 그 적

    오늘날의 정치는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고전적인 정치나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다툼이나 '친구'와 '적'이라는 대립에 관념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대립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관광객과 가족은 일상적 의미로 볼 때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관광객이라는 단어에는 호기심에 이끌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무책임한 소비자라는 인상이 풍긴다.


    가족이라는 말에서는 인생과 운명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가족은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으려니와 성인이 되면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데도 가족과 관광객이 손을 잡고 연대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전통적인 철학을 참조하여 이 둘의 연관성을 또렷한 언어로 기술하고자 한다. 관광객도 가족도 기존 철학이나 정치사상이 사유 대상으로 다루는 개념이 아니다. 그렇지만 《관광객의 철학》을 읽어본 독자라면 양자의 관계를 주목하는 일이 현재 공공성과 정의에 대한 사유에 대단히 풍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관광객과 가족이라는 개념은 본서를 출판한 2023년에 이르면 새로운 현실성(actuality)을 띠고 다가온다.


    2017년 《관광객의 철학》을 출판한 시점에는 이 두 단어가 철학이 다루는 주제로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관광객의 증가가 경제 분야에서 주목은 받았어도 사회의 양상을 바꾸는 현상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반대로 가족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은 단지 보수적인 시대착오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당시 관광객은 사회의 지속성과 별로 관계없는 가벼운 주제라고 받아들여졌고, 반대로 가족은 사회의 지속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무거운 주제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이 이 둘을 둘러싼 환경을 극적으로 바꾸어버렸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관광객은 스스럼없이 환영받는 존재였다.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관광산업의 성장에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긴급하지도 않는 이동으로 감염을 확산시키고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민폐 존재라는 이유로 돌연히 경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는 유학생과 외국인 노동자도 거의 반강제적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최근 3년 동안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관광객이 상징하는 가벼움=개방성을 부정하고 가족이 상징하는 무거움=폐쇄성으로 회귀함으로써 ‘감염증에 강한’ 사회를 구축하고자 시도해왔다. 이는 불가피한 선택지인 듯 보인다. 그렇지만 개방성을 버리고 폐쇄성으로 돌아간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단순하지 않을까? 관광객과 가족이 그렇게 확연하게 대립하는 개념일까? 아니, 애초에 열린 것은 위험하고 닫힌 것은 안심할 수 있다는 이분법은 얼마나 철학적으로 타당했던 것일까?


    2000년대 중반 우에노 지즈코는 일본의 기혼 여성에게 제안하기를 노후에는 이혼을 통해 남편과 자식에게 지나치게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 독거노인='나홀로 삶'을 선택하고, 공적 서비스가 필요해진 그들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행정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주장은 대체로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통용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남성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우에노 지즈코는 가족이 개인의 자유를 빼앗고 사회의 개혁도 저해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에 집착하기 때문에 공공의 실현이 가로막힌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을 들으면 일반 사람들은 흠칫한다. 실제로 우에노 지즈코는 '가족의 파괴'를 꾀하는 과격한 논자라고 비판받기 일쑤지만, 가족과 공공을 대립시키는 발상 자체는 그의 독창적 의견도 아니고 일본 진보주의의 고유한 견해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보주의를 넘어서 줄곧 특정한 사회사상의 전제였다고 할 수 있다.


    가족을 부정하는 역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철학사에서는 플라톤까지 소급할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유명한 저작을 남겼는데, '정의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인 이 책에서 이상적인 국가상과 인간상을 논하고 있다. 2,400년도 전에 쓰인 이 글은 오늘날의 사상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플라톤은 이 글에서 이미 사적 소유와 집단생활 문제에 관련해 가족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논의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러하다. 인간은 다양하고 능력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집단으로 생활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상호 결점을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탄생했다. 그러나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국가를 운영하는 전문가, 플라톤의 용어로는 '수호자'가 필요해진다. 그들을 어떻게 선발하고 육성하느냐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들은 자기 소유와 국가 소유를 구별하지 않는 환경에서 생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고유 재산과 고유 주거를 소유하지 않아야 하고 식사도 혼자 해서는 안 된다는 몇몇 금지 사항을 제시한다. 금지 대상에는 가족도 들어 있다. 수호자는 세습해서는 안 되고 모든 시민 중 계급과 성별에 상관없이 자질 하나만으로 선발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앞서나가는 제안이다.


    또한 수호자 중에는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성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아도 될까? 물론 된다. 그렇지만 가족을 꾸려서는 안 된다. 수호자는 특정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호자의 아이는 국가 전체의 아이로 길러져야 한다. 다시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자면, “모든 여성은 모든 남성이 공유한다. 누구라도 여성 한 명이 남성 한 명과 사적으로 동거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아이들도 공유해야 한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알아서도, 아이가 부모를 알아서도 안 된다"고 명확하게 혼인과 가족을 부정하고 있다. 수호자는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되듯 가족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만일을 위해 덧붙이자면, 이러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에 해당하는 모습이다. 플라톤은 모든 가족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절멸하고 만다.


    플라톤의 제안은 무척 과격한 나머지 상식적으로 결코 실현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의 이상은 후세의 사상을 규정해왔다. 근대 이상사회론의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살펴보자. 16세기에 쓰인 이 책은 상상 속 '유토피아' 방문기라는 형식을 빌려 온당한 사회상을 논의하고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섬에는 가족이 있고 결혼은 신성하다. 일견 플라톤이 논한 사회상과 달라 보이지만, 가족을 소박하게 긍정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가톨릭 신도인 그는 플라톤처럼 혼인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이 지닌 역사적 한계 안에서 그는 전통적 가족관을 달리 해석하고 세속적 공공성에 봉사하는 새로운 가족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렇게 보면 《유토피아》의 기술은 또 다른 모습을 띠고 다가온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섬의 가족은 플라톤의 수호자와 마찬가지로 재산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주거도 소유할 수 없고 식사도 다른 가족과 함께해야 한다. 가족끼리 오붓한 생활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허용할까? 가족의 의의는 무엇보다 직업의 계승에 있다. 자식은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다. 가족은 직업 교육의 단위가 된다. 직업을 물려받고 싶지 않은 아이는 어릴 때 가족을 떠나 다른 직업이 있는 다른 가족의 양자로 들어가야 한다. 인원수도 정해져 있다. 유토피아섬의 가정은 소수 인원의 친밀한 공간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성인이 10명 이상 16명이하이고, 농촌에서는 좀 더 다수로 정했다가 정원이 그보다 늘어나면 강제로 분산시킨다. 토머스 모어가 상정한 이상적인 가족은 확실히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는 해도 우리가 아는 가족과는 기능이 전혀 다르다.


    후대에 들어 기독교의 압력이 약해지면 가족은 또다시 확연하게 부정당한다. 18세기 중반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은 특정한 배우자나 정해진 가족이 없었을 것이라고 기술한다. 루소는 사회 상태가 인간에게 불행을 초래했다고 주장한 사상가였는데, 그가 말한 부정해야 할 사회에는 가족도 포함되었다.


    철학의 다른 관점도 도입해두자. 실제로 가족의 형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단순하나 고대 그리스, 근대 유럽, 일본의 가족은 각기 형태가 상당히 다르다. 또한 주지하다시피 가족의 다양성은 사회구조와 사상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


    가족의 다양성을 생각할 때 에마뉘엘 토드를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라 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영향력을 상실한 뒤 가장 주목할 만한 사회사상이라고 여겨진다.


    에마뉘엘 토드에 따르면 인류의 가족은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핵가족’, '직계가족', '공동체 가족'이 그것이다. 핵가족이란 일본의 도시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듯 부부와 자식이 있을 뿐인 작은 가족을 말한다. 이 형태에서는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하면 다른 세대를 꾸려 집을 떠나야 한다. 따라서 한 집에 늘 두 세대(부모와 자식)밖에 살지 않는다.


    직계가족이란 자식 한 명이 대를 이어 결혼 후에도 같은 세대에 머무르는 가족을 말한다. 따라서 한 집에 3세대가 동거할 때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구(舊)민법이 이 형태를 제도화했기에 에마뉘엘 토드의 저작은 직계가족이 지배적인 지역으로 일본을 분류했다.


    공동체 가족은 남녀의 역할이 다르고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세대로 들어가는 한편, 남자 형제는 다 결혼 후 같은 세대에 남는 가족을 말한다. 이 형태에서는 부부 한 쌍이 슬하에 둔 여러 자식의 처자가 한 지붕 아래 살아간다. 이른바 대가족을 상상하면 된다.


    이 분류 자체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새롭지 않다. 다만 예전에는 공동체 가족이 가장 원시적이고, 산업혁명과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의 유동성이 높아진 결과 지금은 핵가족이 일반화되었다고 믿는다.



    일반의지 다시 생각하기

    자연과 정정 가능성

    2020년대인 오늘날 세계에는 통치에서 불안정한 인간을 추방하고 정치적 의사 결정을 알고리즘과 빅데이터에 맡기는 편이 좋다는 사상이 대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인공지능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인민의 의지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만드는 중요한 테제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테제이기도 하다. 이때 상정하는 '인민의 의지', 즉 일반의지는 사실 소행적으로 발견한 통계 법칙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일반의지의 관념을 단순하게 파악하고 함께 있어야 할 정정 가능성의 계기를 삭제해버린다. 이 점을 나는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솔 크립키의 언어게임론을 가지고 보면 이제까지 살펴온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흡사 자연의 질서인 듯 인간 사회의 외부에 절대적으로 군림한다. 이는 게임할 때 규칙이 게임 플레이 외부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소는 시민이 일반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썼는데, 이것도 게임의 플레이어가 규칙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하다면 일반의지와 규칙은 단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통치를 잘하는 것, 게임을 잘하는 것은 절대적 존재에 접근하느냐 아니냐로 정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도 결함이 있다. 규칙은 플레이어를 제어하는 동시에 플레이어가 생성해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언어게임론이 명확하게 밝힌 점이다.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규칙이 플레이어 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의지가 특수의지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빅데이터를 통해 그 초월적 의지를 끌어내기만 한다면 이상적인 통치로 나아간다는 발상이 나온다.


    이 발상에는 루소의 갈등, 즉 일반의지는 특수의지를 초월하는 것(자연)인 동시에 특수의지에 의해 생성되는 것(사회)이기도 하다는 점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일반의지는 절대적 힘의 원천으로서 사회 외부에 군림하는 동시에 사회내부로부터 정정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얼핏 모순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제까지 반복해왔듯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게임의 규칙은 게임 플레이 외부에 존재한다. 플레이어는 규칙에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규칙 자체는 플레이어의 예상을 벗어난 플레이나 제안에 의해 유연하게 경신할 수도 있다. 이렇듯 게임은 정정 가능성에 의해 지속된다. 일반의지를 정적이고 계획 가능한 집합적 무의식이 아니라 동적이고 정정 가능한 언어게임으로 파악해야만 우리는 전체주의 경향을 저지하고 새롭고 원대하게 《사회계약론》의 구상을 미래에 펼칠 수 있다.


    일반의지는 인민 주권에 근거를 부여하는 절대적 힘의 원천인 동시에 항상 정정의 역동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 일반의지의 이중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소박하게 실체화함으로써 전위당의 지도, 독재자의 직감, '의식 높은' 시민의 숙의,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새로운 알고리즘 같은 것에 의해 '옳은'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고, 일반의지에 복종하면 정의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깃든 게임의 본질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민주주의는 손쉽게 폭력으로 변한다. 20세기 공산주의야말로 알기 쉬운 예일 것이며, 21세기 인공지능 민주주의도 새로운 예가 되어가고 있다.


    일반의지의 이념을 보충하는 정정 가능성의 사상적 싹은 루소 자신의 저작에도 감추어져 있다. 루소는 자연을 찬양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유명한 슬로건은 사실 그의 말이 아니다. 루소의 자연관은 훨씬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루소는 분명히 자연을 예찬했고 문명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글을 곰곰이 읽어보면 예찬하는 자연 안에 복합적인 뒤틀림이 숨어 있을 때가 적지 않다. 피그말리온이 전형적이다.


    도시 사람은 사교에 물들어 있고 자연스러운 사랑을 잊고 있다. 따라서 하다못해 시골 사람만이라도 그의 소설을 읽고 ‘부패’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루소는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기에 시골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러나 돌아가야 할 곳으로 설정한 자연은 처음부터 루소 자신이 말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골이 진정한 자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연일 수밖에 없듯 말이다. 나중에 논의하듯 신엘로이즈이 후반은 ‘만들어진 자연’을 주제로 삼는다. 자연의 위치는 실로 피그말리온이 만들어낸 갈라테이아와 같다.


    루소는 원래 창작을 부정하는 철학자였다. 창작이란 본질적으로 거짓을 지어내고 거짓의 유통은 자연을 왜곡하고 일반의지도 왜곡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소설을 쓰고 말았다. 그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로 친밀한 ‘소규모 사회’ 안에서만 유통하는 작품을 쓴다면 폐해도 최소화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신엘로이즈의 제2의 서문에 담은 내용이다.


    그러면 루소는 왜 무리하게 방어선을 그으면서까지 창작에 손을 담그고 말았을까. 다시 이 최초의 물음을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루소의 창작 동기에 대해서는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심리가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살펴왔듯 거기에는 특별히 사상적 문제의식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도 행복했다. 그런데 사회 상태로 이행하고 '말았다.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이행한 것은 결코 필연적이지도 않았고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그저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소행적으로 사회계약의 필연성을 재구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루소 철학의 핵심에 이러한 굴절이 담겨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말았다'의 과정은 결코 과거에 생겨난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생겨나고 있고 앞으로도 생겨날 수 있다. 루소는 《연극에 관해 달랑베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제네바에는 소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시민은 세르클 모임을 만들어 친밀하고 공화주의적인 관계를 즐긴다. 그런데 일단 극장을 설립해버리면 그들은 허식과 사교의 유혹에 빠지고 악덕에 물들어 건전한 통치를 왜곡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1750년대 중반 루소가 우려한 바였다. 그러므로 그는《연극에 관해 달랑베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았다'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악덕의 진행을 저지하기 위해 다른 대항 수단을 마련하려고 생각했다. 이때 떠오른 것이 신엘로이즈의 창작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추측한다.


    이 소설로 인위로 자연을 지키고 거짓으로 진실을 지키고 창작으로 순수한 사랑을 지킨다는 모순적인 과제를 떠안았다. 그래서 실화처럼 보이는 서간 형식의 연애소설 형식을 취했다. 이미 루소는 자연의 가치를 칭송하기만 하는 이론가가 아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위가 필요하다는 역설을 딛고 자연을 날조하려는 실천가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엘로이즈는 본서가 ‘정정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문제와 정면으로 맞붙은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정정 가능성이란 일반의지의 옳음, 오늘날 맥락으로 말하면 자연의 순수함이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소행적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다는 이중적 성격을 의미한다. 신엘로이즈의 집필은 분명히 그러한 이중적 실천의 산물이다.


    일반의지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다. 자연과 사랑도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다. 동시에 이들은 정정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 루소는 이렇듯 곤혹스러운 명제를 철학의 언어로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신엘로이즈를 통해 문학의 실천을 드러냈다. 이것이 본서의 결론이다. 클라랑을 경영하고 쥘리와 작위의 사랑을 나누려고 한 볼마르는 거짓 서간집의 출판으로 독자의 자연스러운 마음을 인위로 꾸며내려 한 루소의 자화상인 셈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없애야 비로소 자연은 ‘정정’할 수 있다. 그래야 자연은 인공적이고 소행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신엘로이즈에 감추어진 사상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자연과 진실의 절대성이라는 기반 위에 두려고 한 사회계약론의 구상, 나아가 이를 소박하게 계승한 전체주의의 인공지능 민주주의의 구상과 얼핏 보기에 매우 상반된다.


    가족과 가족이 아닌 자, 게임과 게임이 아닌 것의 구별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둣, 우리는 자연과 자연이 아닌 것, 사회와 사회가 아닌 것, 거짓과 거짓이 아닌 것,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 사회와 사회가 아닌 것, 거짓과 거짓이 아닌 것,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없다. 루소의 ‘작은 사회’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인공적 자연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종종 가족이든 국가든 기업이든 현재의 모습이 영원히 변치 않고 계속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 상황은 변한다. 가족이든 국가든 기업이든 얼마든지 모습이 바뀐다. 그 유연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지속을 보증한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변화를 환영한다. 하지만 자신이 영원하다고 믿던 것이 정정되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새롭게 쓰였을 때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루소가 묘사한 상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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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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