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파고든다. 이름 없는 선물, 조건 없는 배려, 말없이 건네는 돌봄을 통해 ‘증여’의 철학을 밝혀낸다.
교환과 효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주는 것’의 숨은 의미를 되짚는다. 철학, 과학, 문학, 심리학을 넘나드는 사유로 삶의 감춰진 작동 원리를 탐색하고, 결국 우리가 당연히 여긴 모든 일상이 증여였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 저자 지카우치 유타(? 悠太)
1985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교육자, 철학 연구자. 게이오기주쿠대학교 이공학부 수리과학과를 졸업했고, 니혼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전문 분야는 비트겐슈타인 철학. 현재 통합형 교육기관 ‘지창학사(知窓??)’의 강사로 가르치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부터 교양과 철학을 확립하며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지식의 융합’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는 저자의 첫 책으로 출간과 동시에 화제를 모으며 제29회 야마모토 시치헤이상 장려상, 기노쿠니야 인문대상 2021 5위, 독자가 선정하는 비즈니스서 그랑프리 2021 교양 부문 4위에 선정되었다. 그 외에 지은 책으로 『이타·돌봄·상처의 윤리학』이 있다.
■ 역자 김영현
출판 기획편집자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만들었고, 현재는 일본어 번역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1, 2』 『서로 다른 기념일』 『나를 돌보는 책』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목소리 순례』 『먹는 것과 싸는 것』 『마이너리티 디자인』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돌봄, 동기화, 자유』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 『빌어먹을 어른들의 세계』 『밑바닥에서 전합니다』 『몸은, 제멋대로 한다』 등이 있다.
■ 차례
시작하며
1장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의 정체
2장 주고받기의 한계
3장 증여가 ‘저주’로 변할 때
4장 산타클로스의 정체
5장 우리는 언어놀이 속에서 살아간다
6장 ‘상식에 대한 의심’을 의심하라
7장 세계와 다시 만나기 위한 ‘발산적 사고’
8장 이름 없는 영웅이 떠받치는 일상
9장 증여의 전달자
마치며
참고 문헌
언젠가 받은 적이 있지만, 그 순간엔 몰랐던 선물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선물’의 철학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삶의 의미와 타인과의 연결을 다시 불러냅니다.
증여의 세계: 이름 없는 선물이 지탱하는 일상의 철학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구조
우리는 익숙한 일상 속에서 수많은 ‘거래’를 하며 살아간다. 커피 한 잔, 택시 이용, 온라인 쇼핑. 모두가 자본주의의 언어인 ‘교환’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순간들, 가장 깊은 감정과 기억들은 이 교환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유 없이 받은 위로, 이름 없이 도착한 선물, 아무 조건 없이 건넨 돌봄. 이것들이 존재하는 세계에는 가격표도, 계약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며, ‘증여’라는 이름 아래 작동하는 또 다른 질서다.
증여는 시장의 교환 규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자본주의는 ‘주고 받는 것’에 철저하다. 반면 증여는 받는 사람조차 알지 못한 채 건네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증여는 종종 ‘사라진 채 존재’하며, 되짚어보는 과거 속에서야 그 의미를 드러낸다. 이 구조를 인식하는 순간, 인간 관계의 진짜 깊이는 드러난다.
이러한 비가시적 질서는 우리가 자주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사랑, 우정, 돌봄, 헌신처럼 익숙하지만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행동들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유 없이 걱정하고, 기꺼이 도와주고,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연대의 표현이며, 교환의 언어로는 환산할 수 없는 세계의 작동 원리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경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 일상의 윤리적 토대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증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증여는 하나의 ‘메시지’다. 단, 이 메시지는 발신인을 숨긴 채 도착하며, 수취인이 그것을 ‘선물’로 인식하는 순간에만 실체를 갖는다. ‘어릴 적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마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를 우리는 그 순간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기억 속 장면을 해석하면서, 비로소 그때의 기다림이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깨닫는다. 증여는 늘 과거형으로 존재하며, 해석과 인식이 뒤따라야만 완성된다.
이 지연된 인식이야말로 증여의 본질이다.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지 않으며, 상대의 효율적 반응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때로는 영영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증여는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것은 언제나 ‘이미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이며,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증여의 핵심은 '부채감'이 아니라 '자각'이다. 증여는 그것을 받았다고 인식한 이가 그 의미를 깨닫고, 또 다른 이에게 그것을 이어주는 과정에서 비로소 완결된다. 이는 일방적인 베풂이 아니라, 인간 간의 시간차 있는 소통이며 기억의 전달이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그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아무 조건 없이 무언가를 건네는 순간, 과거의 증여는 다시 살아난다. 이 연결고리가 만들어내는 삶의 의미야말로 증여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가치다.
낯선 신호, 낯익은 구조: 증여를 읽는 방법
증여는 일상의 균열, 혹은 ‘변칙현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과학에서 새로운 발견이 기존의 설명과 모순되는 현상에서 시작되듯, 증여 역시 일상적인 상식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순간에 출현한다. 이를 인식하는 능력은 단지 논리력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놀이의 감각, 상식을 구성하는 ‘세계상’을 들여다보는 민감한 통찰이 필요하다.
셜록 홈즈는 왓슨의 피부색과 자세 하나로 그의 직업과 이력을 유추해낸다. 이는 단순한 추리가 아니다. 세계의 표면에 드러난 단서를 기존의 지식과 접목시켜 낯선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군가의 무심한 말, 반복되는 행동, 또는 설명되지 않는 배려를 통해서 증여를 감지할 수 있다. 그건 ‘어딘가 이상한데 따뜻한’ 일종의 메시지다. 이것이 바로 증여를 읽는 법이며,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지형을 해석하는 유일한 지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은 수렴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즉, 기존 세계상에 기반하여 예상 밖의 현상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동시에 발산적 사고도 필요하다. 상식이라 여겼던 세계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기 시작할 때, 그간 보이지 않았던 증여의 구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상 속 사소한 불일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해석하려는 능력은 증여를 실현시키는 중요한 감각이다. 증여는 그 자체로 메시지를 품고 있는 코드이며, 우리는 그것을 해독하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이름 없는 영웅과 숨겨진 구조의 작동
자본주의는 ‘효율’과 ‘성과’를 요구한다. 이름을 남기고, 이익을 계산하며, 최대한 빠르게 결과를 도출한다. 그러나 증여는 이와 반대되는 방향에서 작동한다. 발신자는 종종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심지어 상대가 그것을 영영 깨닫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수취인이 그 증여를 ‘몰랐다’는 것은 곧 사회가 충분히 평화롭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매일 점검을 반복하는 전기 기술자,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는 방역 노동자, 이름도 없이 번역된 사회복지 시스템. 모두가 이름 없는 영웅들이다.
이들의 증여는 교환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을 강조하지 않으며, 때로는 그 행위가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사회는 유지되고, 삶은 평온하게 지속된다.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비범함, 그것이 증여의 조건이다.
이름 없는 영웅들은 한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선다. 그들은 구조의 일부이며,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우리가 익명 속에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구조는 자발적 희생이나 영웅주의와도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의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교환의 논리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조차 윤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증여의 시대를 여는 상상력
우리는 이제 삶의 의미를 묻는 시대에 서 있다. 더 빠른 인터넷, 더 많은 정보, 더 복잡한 알고리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믿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삶에서의 ‘보람’과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받은 무언가를 인식함으로써 시작된다. 증여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주어진 삶’에서 ‘살아 있는 삶’으로 나아간다.
교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증여는 무력해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증여는 바로 그 빈틈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 주목받지 못하는 관계, 인정받지 못한 수고. 그곳에서 작동하는 것이 증여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결함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숨은 기반이다.
이제 우리는 증여를 회복할 상상력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것은 초월적인 도덕이나 이상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그러나 너무 오래 간과되어온 가치다. '쓸모'와 '성과'를 기준으로 삼는 시대에서 벗어나, '이미 받은 것들'을 자각하고, 또 그것을 다른 이에게 조용히 건네는 삶의 방식. 이 새로운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오래된 미래다. 그리고 이 증여의 감각을 깨우는 순간, 우리는 기꺼이 또 하나의 이름 없는 선물이 된다.
* 핵심 메시지
증여는 교환이 아닌, 시간 차를 둔 감정의 전달이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일상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다. 증여를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타인에게 증여하는 존재로 변한다.
* 추천
인간관계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 철학적이면서도 따뜻한 통찰로 우리를 새로운 감각으로 이끈다. 자본주의의 틈에서 증여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모든 이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