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쇼펜하우어 철학 수업
 
지은이 : 김선희 (지은이)
출판사 : 메이트북스
출판일 : 2025년 06월




  • 쇼펜하우어가 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철학자일까요? 염세주의로 오해받는 그의 사상을 오늘의 삶에 맞닿게 풀어낸 글들과 함께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고 삶의 조건을 새롭게 정립하는 내면의 여정을 걸어봅시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쇼펜하우어 철학 수업



    인간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세 가지

    인간 운명의 차이를 근거 짓는 세 가지 근본규정

    삶의 지혜가 말하는 인간 주관의 운명

    인간은 누구나 운명의 차이를 만들고자 한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는 곧 인간을 의미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속한다. 필멸의 존재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인 신에 대비되는 인간의 자기규정이었다. 유한성은 인간의 오래된 운명에 속했고, 인간은 끝없이 자신의 운명에 도전함으로써 이 운명의 차이를 만들고자 해왔다. 따라서 인간이 지닌 유한한 운명의 동일성에서 차이를 내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도전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가장 오래 갈 운명에 속할 것이다.


    운명에 복종하며 동일한 삶을 살기보다는 운명의 차이를 만들어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도전이자 전투의 장소는 바로 인간 자신 내부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행복론,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을 샹포르의 잠언인 "행복은 얻기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행복을 얻기란 매우 어렵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얻기란 아예 불가능하다"라는 문구로 시작함으로써 인간이 얻기 어려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인간 자신의 내부임을 명시한다.


    인간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인간 자신의 정체성인 현존재다. 현존재로서 인간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이자 종점인 주관으로서 인간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바로 현존재 철학이자 주관철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도, 인간의 고통도 자신의 주관을 제대로 고찰할 때 그 정체가 제대로 드러난다. 주관은 정도의 문제이긴 하지만 쇼펜하우어 철학이 그의 주저『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삶의 진리라는 모습으로, 그의 명저 『소품과 여록』을 삶의 지혜라는 모습으로 드러내, 인생의 양극단을 하나의 모습으로 아우를 장소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현존재로서 인간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자, 이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장소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드는 것도 바로 인간 자신, 즉 주관이다. 인간의 주관은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이 덜 고통스럽고 더 행복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정복해 야 할 곳은 바로 인간 자신, 즉 주관의 정체다. 이 주관의 정체를 삶의 지혜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이다. 그리고 삶의 진리 차원에서 주관을 고찰하는 것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주관의 정체를 통해 인간의 운명의 차이를 가르는 세 가지 근본 규정으로 삶의 지혜를 제시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근본규정을 우리는 진심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 고찰은 우리가 좀 덜 고통스럽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기예를 위한 사용 설명서를 우리와 공유할 것이다.


    인간 운명의 차이는 세 가지 근본규정, 즉 '인간의 정체성, 인간이 가진 것, 인간이 표상한 것'에 근거한다. 규정이 아닌 근본규정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뿌리와 같기에 그 규정은 근본이자 근거 짓는 것이다. 뿌리가 뽑히면 식물이 살 수 없듯 이 인간의 삶은 이 세 가지에 의해서 근거 지어진다. 이 세 가지 근본규정에 의해 인간이라는 주관의 희로애락이 좌우된다.


    물론 이는 삶의 지혜 차원에 국한된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는 삶의 지혜인 행복론의 곳곳에 삶의 진리에 해당하는 철학적 용어들을 절제해서 사용한다.


    · 첫째 근본규정: 인간의 정체성(Was Einer ist),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

    · 둘째 근본규정: 인간이 가진 것(Was Einer hat)

    · 셋째 근본규정: 인간이 표상한 것(Was Einer vorstellt)


    쇼펜하우어가 인간 운명의 차이를 위한 세 가지 근거로서 인간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인격 이외에 인간의 소유물이나 인간의 표상을 넣은 것은 예상 밖의 선택이다. 특히 셋째 근본규정으로 인간 자신이 표상한 것, 즉 남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이 포함된 것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이 삶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답게 매우 경험적인 현실에 기반한다는 점을 예고한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론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지혜이자 기예를 구사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인간이 알아채고 챙겨야 하는 세 가지 근거는 인간의 정체성(광의의 인격), 인간의 소유물, 인간의 표상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삶이나 생존에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다.


    인간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인간의 정체성

    쇼펜하우어의 행복철학은 주관철학이다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첫째 근거가 정체성과 같은 인간 내적인 것인 이유는 쇼펜하우어 철학이 주관철학인 이유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 운명의 차이에 대한 세 가지 근거 중 한 가지는 인간 내부에 있고, 다른 두 가지는 인간 외부에 있다. 인간의 내부에 있든 인간 외부에 있든 이 세 가지가 인간의 주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한편 차이점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의 정체성인 인간의 인격은 인간의 주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데 비해 인간의 소유물이나 사회적 평판 등은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인간 주관의 운명에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세 가지의 영향력도 그 세 가지의 내용, 즉 이들의 부류의 실질적인 내용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의 운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운명인가가 더 중요하듯이, 인간이 주관이라는 점보다 어떤 주관인가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단지 주관철학자라는 것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어떤 주관철학자인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관도 주관 나름인 까닭이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식 주관철학은 그의 명저 『소품과 여록』뿐만 아니라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관통하는 중심 화두다.


    * 쇼펜하우어 주관철학, 4개의 얼굴과 4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고찰하는 현존재로서 인간이 고통을 겪는 이유는 주관에 있다. 전체 4개의 고찰로 이루어지는 그의 주저는 바로 인간의 주관이 어떤 주관인지, 그리하여 주관의 네 가지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특히 주관을 표상과 의지라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설명하는데, 표상에 대한 제1고찰과 의지에 대한 제1고찰을 각각 제1 권과 제2권에서 한다. 그리고 제3권과 제4권에서는 표상에 대한 제2고찰과 의지에 대한 제2고찰을 한다. 그는 표상과 의지에 대한 네 가지 고찰을 통해서 네 가지 주관과 더불어 네 가지 주관의 차이에 근거하는 네 가지 세계상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세계관이 세계 자체의 차이보다는 인간 주관의 차이에 의해서 더 좌우됨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네 가지 세계상 중 우리의 세계가 어디에 더 속하는지는 네 가지 주관 중에 어디에 더 속하는지에 의해 좌우된다. 『소품과 여록』의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즉 삶을 가능한 한 쾌적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기예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에서도 쇼펜하우어는 주관철학자로서의 변별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서도 인간의 주관을 현존재인 인간의 희로애락을 좌우하는 것으로 보고 세 가지 근본규정과 이들에 상응하는 세 가지 부류들을 통해서 고찰한다.


    행복을 만드는 염세철학이 가능한 것은 주관철학자로서 쇼펜하우어가 주관을 특정한 한 가지 규정으로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근거로 제시한 세 가지 모두를 인간 운명의 근본규정으로 본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인간의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데 동일하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이 우선순위, 즉 첫째 근본규정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둘째와 셋째 근본규정으로 소유물과 표상, 즉 타인의 시선을 두는 것은 그의 인생과 삶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중요한 결실이다.


    * T 인간 정체성의 양극단을 잇는 차가운 열정의 소유자

    문제는 '어떤 정체성인가, 그 정체성이 어떤 부류인가'이다. 인간의 근본규정의 야누스적 면모는 인격의 부류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정체성에 도덕적 성격, 지성, 지성의 함양뿐만 아니라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이 포함될 때, 이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광의의 인격에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성 못지않게 신체성도 포함함으로써 이분법의 한 극단만 취하거나 배제하는 게 아니라 양극단 모두를 취한다. 쇼펜하우어는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운명의 세 가지 근본규정이나 그 첫 규정에 해당하는 인격의 부류에서도 인간의 양극단을 이음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더불어 인간 행복의 풍요로운 스펙트럼을 준비한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현실에 대한 냉소적인 염세주의도 아니고 이상주의적 낙관론도 아니며, 현실에 진심이면서도 현실의 이면 또한 포기하지 않고 세밀하게 포착한다. 인간 운명의 차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인간과 세상이 지닌 정체성의 양면성을 가차 없이 들여다봄으로써 이 양극단을 잇는 차가운 열정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인간의 소유물

    가성비보다는 가심비가 더 중요해지는 사회

    현존재의 생존을 위해 가성비가 좋은 것도 필요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성비와 무관하게 가심비가 좋은 것도 필요하다.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수적 욕구인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욕구는 가성비 쪽에 해당할 것이다.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사치나 부귀영화와 같은 것은 가심비 쪽에 속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일상에서는 가성비 못지않게 가심비도 중요하다. 이제 가심비는 우리의 삶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 항목이다.


    우리의 생계 수단에 해당하는 가성비 소유물 외에도 우리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다만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심비성 소유물의 위상은 점점 더 올라가고 있다. 음식 자체가 아니라 어떤 음식인가가 중요해졌고, 입을 옷이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옷인가가, 살 집 자체가 아니라 어떤 집인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가성비와 가심비가 공존하는 시대, 가심비성 사물이 우세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양자를 우리 삶에서 어떻게 조율할지에 관한 것이다.


    인간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인간의 표상

    쇼펜하우어 철학의 시작,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P> 쇼펜하우어는 그의 주저의 시작을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표상이라는 개념은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출발 규정에 속하는 용어다. 세계는 단지 표상이 아니라 '나의 표상'이다. 쇼펜하우어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 중 하나인 표상이라는 개념을 그는 자신의 행복론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다. 주저에서 표상이 매우 이론적으로, 즉 삶의 진리와 관련해 고찰된다면, 행복론에서의 표상은 매우 실천적으로, 즉 삶의 지혜 차원에서 고찰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표상이라는 용어의 철학적 번역어를 그대로 살려서 '인간이 표상한 것Was Einer vorstellt'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주저에서 사용하는 표상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그의 행복론에서 사용하는 표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다.


    * 표상한 것 = 다른 사람이 표상한 것

    그러면 누군가가, 즉 인간이 표상한 것에 대해 다루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맥락을 따라가보자. 그는 인간이 표상한 것의 의미를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의견 속 우리 현존재'로 명시한다. 즉 '인간이 표상한 것'이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표상한 것', 즉 나의 친구일 수도 있고 버스나 전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동창이거나 가족일 수도 있는 타인이 표상한 나다. 바로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 속 현존재로서 나다. 다da가 '특정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현존재, 즉 다자인Dasein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인간은 어떤 시간이나 어떤 장소 그리고 어떤 상황에 영향받는 특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다da가 바로 타인의 생각이다. 인간은 타인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존재이자 타인이 표상한 나에게 연연해하는 존재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은 그 타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다. 나에 대해 타인이 표상한 것에 대해 내가 표상한다. 인간은 다양한 존재에 관해 표상하지만 유독 타인이 나에 관해 표상한 것에 대해서도 표상하곤 한다. 따라서 그의 주저에서처럼 그의 행복론에서도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라는 문장은 유효하다. 나에 관한 타인의 표상이 타인의 표상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한 나의 표상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은 사물 자체에 대한 순전한 나의 표상에서보다는 나에 관한 타인의 표상으로부터 더 영향을 받기도 한다.



    열심히 살았기에 더 지루하다

    궁핍을 면하자 나타나는 더 무서운 적, 지루함

    낯선 손님의 수수께끼,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궁핍이라는 적군과 싸우는 전략을 위해 끝도 없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보니 가난과 싸우는 데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기도 한다. 돈을 버는 방법, 경제적인 성장을 약속하는 수많은 정보와 지혜들이 넘쳐난다. 돈을 버느라 남는 시간이 없었으니 한가한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 없습니다' '바빠요' '빨리빨리'가 일상이었던 시절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궁핍을 모면한 순간, 궁핍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때, 찾아온 여유라는 손님의 방문은 처음에는 너무나 반갑고 설레는 경험이다.


    그러나 몇 날, 몇 주, 몇 달이 지나자, 주인은 슬그머니 불편하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이 손님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놀거리, 아니할 거리가 바닥이 난다. 주인은 이 손님이 언제 갈지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손님의 눈치만 보면서 지내는 그 시간의 흐름이 느리기 그지없다.


    손님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손님과 나 사이에 지루함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손님이 떠나길 기다린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차라리 시간이 남아도는 지금이 아니라 없어서 애탔던 그때로 되돌아가길 학수고대하게 된다. 생계 걱정에서 겨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인간은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났지만 새롭게 등장한 적인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그야말로 초보이자 문외한이다. '남는 시간이 없던 시절'의 끝과 '남는 시간이 많은 시절'의 시작 사이에 낀 인생은 이제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라는 전에 없던 숙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 여유의 과거 사진, 궁핍과의 싸움

    우리를 지배해온 대표 표상이자 삶의 모토는 '열심히 살기'였다. 그래서 가까스로 우리는 열심히 살 줄 알게 되었다. 가난과 빈곤에 노출된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는 끝없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노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선호하는 활동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노력이라는 습관을 우리 삶에 각인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는 매우 가혹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현존재로서 인간은 노력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자연은 인간에게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부여했다. 자연이 인간에게 그런 힘을 준 이유는 현존재로서 인간을 사방에서 죄어 오는 궁핍과의 전투를 위한 것이었다. 궁핍과의 싸움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말을 들어보자.


    "자연이 인간에게 무장시킨 힘의 본래 사명은 사방에서 그를 죄어오는 궁핍과의 싸움이다. "


    그러나 인간이 치르는 궁핍과의 싸움이 영원하지는 않다. 싸움의 과정도 언젠가는 끝난다. 물론 궁핍과의 싸움의 끝이 주는 평화로움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궁핍과의 싸움이 일단 잠잠해지면 할 일이 없어진 '힘'은 인간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여유라는 낯선 손님과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힘은 이제 궁핍과의 싸움에선 더 이상 쓸모가 없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존재하는 이 힘을 달리 써야 한다. 궁핍과의 싸움이 아니라 지루함과의 싸움을 위해 이 힘을 다시 활용해야 한다.


    지루함 해소를 위한 삶의 기예, 향유의 세 유형

    시간 죽이기 대신 시간 살리기 놀이, 향유의 조건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할 일 없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행하는 시간 때우기 또는 심지어 시간 죽이기의 소모적인 활동에서 벗어나 오히려 남는 시간을 살리는 삶의 지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여유로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때우거나 죽이지 않고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독자에게 제안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지닌 재생력, 신체적 자극, 정신적 감수성이라는 세 가지 근본 힘이 제공하는 놀이의 세 유형을 통해 가능한 향유다. 그런데 여기서 모두에게 분명히 해둬야 할 것으로 쇼펜하우어가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향유는 반드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조건부로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향유를 더 빈번하게 반복하면 우리가 더 행복할 수 있지만, 행복을 조건 짓는 힘의 종류가 더 고귀한 것일수록 행복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향유 놀이는 목적적 놀이가 아니기에 향유가 가진 고유한 힘의 위력은 출발지를 포함해 전체 과정에서 발생하며, 목적지라고 해서 특별히 더 강한 위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향유의 고유성은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고, 이 과정에서 생기는 향유의 맛은 자신의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부에 머문다. 향유를 음미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내적인 힘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전 과정 자체가 향유의 시간이자 음미의 시간이다.


    * 향유의 첫째 조건부: 대체 불가한 우리 자신의 힘 사용

    우리를 지루함으로부터 지켜줄 방어벽이 될 우리의 향유는 우리 외부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발원한다. 따라서 그 향유를 끌어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우리 자신밖에 없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향유를 만들어줄 수 없다. 우리 자신의 힘을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니 당연히 향유의 주체도 대상도 우리 자신이다. 이러한 향유는 오롯이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어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만이 그것을 만들 수 있고 나만이 그것을 만끽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힘의 사용을 조건부로 한다는 것은 향유에서 점한 우리 자신의 주요 위상을 명시하는 지점이다.


    만약 그 활동의 주체가 자신의 외부 누군가에 의해서 대체된다면 그 향유를 음미하는 것도 자신 외부의 그 존재로 대체될 것이다. 목적적 활동은 자신이 아닌 타자에 의해서 대체되어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지만 무목적적 활동인 놀이와 향유는 활동의 주체가 대체 불가능하다.


    활동 주체의 대체 불가능성은 바로 활동으로서 향유와 음미의 대체 불가능성에 비례함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주체가 향유나 음미하기를 원한다면 직접 그에 상응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향유와 음미의 주체가 되려면 그것에 상응하는 활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귀찮아도 귀찮음이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활동을 오롯이 나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다.


    * 향유의 둘째 조건부: 우리 자신의 힘의 고귀함 정도

    타자가 아닌 우리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우선 조건이지만, 더 중요한 관건은 우리가 사용하는 힘의 종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지루함에서의 자유로움의 강도나 정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힘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난다. 더 고귀한 종류의 힘을 사용할수록 향유의 지속적 반복이 더 가능하게 되어 더욱 행복해진다. 인간이 사용하는 힘의 차이에 따라서 우리 향유의 종류와 정도에도 차이가 생긴다. 이러한 차이는 자연스럽게 얻게 될 우리 행복의 종류와 정도의 차이도 수반할 것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힘의 차이에 따른 향유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을 기쁜 삶을 위한 기예로 바라보는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철학, 기쁨을 길들이다』에서 말하는 지혜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르누아르는 인간이 늘 추구해 마지않는 세 가지, 즉 쾌락, 행복, 기쁨의 차이를 주목한다.


    우선 르누아르는 쾌락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가장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경험이라고 한다. 쾌락은 어떤 욕구나 일상의 욕망을 충족할 때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의 암초는 일시성과 양면성이라는 한계에 있다. 예를 들자면 오감의 만족과 같은 쾌락은 한편으로는 일시적으로만 발생하며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지속되었을 경우 쾌락이 싫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쾌락에 비해 행복은 한층 포괄적이고 지속 가능한 쾌락이다. 따라서 쾌락이 없으면 행복도 없지만 진정 행복해지려면 쾌락을 분별하고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행복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쾌락이 아니라 자신이 적극적으로 분별하고 절제할 수 있는 기예를 습득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르누아르는 고대인들이 정의한 이상적인 행복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으로서 자족을 꼽는다. 자족이란 유쾌한 일은 유쾌한 대로, 불쾌한 일은 불쾌한 대로 누리는 능력에 속한다. 자족은 자신의 행복을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자유를 통해 얻는 것을 말한다.


    쾌락과 행복 이외에 르누와르가 새롭게 주목하는 것이 기쁨이다. 그는 기쁨을 생에 커다란 만족을 안겨주는 감정 혹은 정서로 본다. 기쁨이란 쾌락이나 행복과 달리 어떤 사건에 반응해 일정 시간 동안 일어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강렬한 경험이다. 기쁨은 우리의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는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책 『철학, 기쁨을 길들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쁨은 대개 확 솟아오르는 느낌이 있다. 기쁨은 강렬하게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고, 우리 몸을 에워싸고 장악한다. 우리는 기쁠 때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거나,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팔짝팔짝 뛰면서 노래를 한다.”


    르누와르가 구분한 쾌락, 행복, 기쁨의 비교를 통해 이와 같은 긍정적 경험이 인간 내적인 능력, 즉 신체적 능력이나 정신적 능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세 가지 근본 힘을 동물과 비교해볼 때, 셋째 힘, 즉 정신적 감수성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월등히 우세함을 강조한다. 반면 다른 두 가지 생리적인 힘인 재생력과 신체적 자극에서는 인간과 동물들이 같은 수준이거나 동물이 더 우세하다. 그러나 정신적 감수성은 동물에 비해 인간에게 있는 고유한 특징이자 보너스 같은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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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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