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지은이 : 존 스튜어트 밀 (지은이), 정영훈 (엮은이), 최기원 (옮긴이)
출판사 : 메이트북스
출판일 : 2025년 06월




  • 다수의 여론이 소수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각자가 자기 삶을 선택할 권리는 중요하며, 진리는 다양한 반론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왜 우리는 ‘자유’를 논해야 하는가?

    다수의 횡포를 막는 일, 그것이 자유의 출발점이다

    이 책의 주제는 흔히 말하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다.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시민적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 다. 쉽게 말해 '사회가 개인에게 어디까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권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가 핵심 주제다.


    다른 형태의 폭정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폭정'도 처음에는(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정부 당국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이유로 단순한 공권력의 위험으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려 깊은 이들은 곧 깨달았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폭군이 될 수 있음을. 즉 사회라는 집단이 그 구성원인 개인들을 억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사회가 가하는 억압은 단지 공직자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행위를 넘어서게 된다.


    사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이 되어 스스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 명령이 잘못된 것이거나 애초에 간섭해서는 안 될 개인의 고유한 영역까지 침범하게 되면, 그때 작동하는 억압은 여느 정치적 탄압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다. 극단적인 형벌이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회피하거나 벗어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억압은 법이나 제도가 아닌, 일상에 스며든 관습과 여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대를 통해 개인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고, 마침내는 인간의 영혼마저 얽매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정부 권력의 폭정으로부터 보호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여론과 감정의 폭정으로부터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사회는 법적 처벌이 아닌 다른 방식, 예컨대 도덕적 비난, 집단적 압박, 배제의 분위기 같은 수단으로 공동체의 생각과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마치 사회적 규범을 어긴 것처럼 낙인을 찍는다. 그 결과 사회는 공동체의 틀에 어울리지 않는 개성의 싹을 억누르거나 아예 틔우지 못하게 만들며,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의 성격과 삶의 방식을 사회의 기준에 맞춰 재단하려 한다.


    물론 사회 전체의 여론이 개인의 자유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간섭이 정당하게 허용될 수 있는 범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 선을 찾아내고 끊임없는 침해로부터 지켜내는 일, 바로 거기에 건강한 사회의 토대가 놓여 있다. 그것은 정치적 독재로부터 자유를 지키는 일만큼이나 절실하고도 본질적인 과제다.


    물론 이런 원칙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다음이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간섭 사이에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는 아직도 거의 모든 것이 미완성 상태다.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의 행동이 일정한 규범 아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형태로든 행위에 대한 기준은 필요하다. 법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법으로 다룰 수 없는 부분은 사회의 여론이 대신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본질적인 물음에 마주하게 된다. “과연 어떤 기준이 정당한 간섭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인간 사회가 아직도 풀지 못한 핵심 과제다.



    우리가 틀렸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가?

    비록 소수 의견일지라도 왜 침묵시켜서는 안 되는가?

    첫 번째 전제는, 억누르려는 그 의견이 실제로 옳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의견을 억제하려는 사람들은 그것이 틀렸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판단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 누구도 인류 전체를 대신해 '정답'을 단정할 권리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애초에 차단해버린다면, 자기 생각이 결코 틀릴 리 없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토론의 억압은, 자기 의견이 항상 옳다고 믿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익숙하게 들리는 말일지라도,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반론은 없다.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에서 판단을 내릴 때는 그 가능성에 제대로 된 무게를 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정작 자기 판단이 그 오류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확신하는 의견일수록 더 단단히 믿고, 심지어 경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항상 무한한 복종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신의 판단이 틀릴 리 없다는 확신 속에 살아간다. 반면 더 열린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 -자신의 의견이 반박당하거나 잘못했을 때 타인의 지적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 은 그러한 무한한 신뢰를 오직 자신이 존경하거나 의지하는 사람과 의견이 일치할 때에만 품는다.


    자기 판단에는 자신이 없어도, 세상이 하는 말은 별 의심 없이 믿는다. 어차피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틀려도 함께 틀리면 덜 부끄럽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다수’가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믿음이 진리인 양 받아들이고 안심해버리는 것이다.


    끊임없는 의심과 검증을 거쳐야 진리는 빛을 발한다

    어느 한쪽만 핵심적인 논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반대편은 그럴 수 없다면, 그 사회에서 유용성에 대한 논의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리 없다. 실제로 어떤 의견의 진실 여부를 따지는 것조차 법이나 여론이 따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의견의 유용성에 대한 이견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그나마 일부 반론이 허용된다 하더라도 ‘그 주장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식의 우회적 표현이나, '그 입장을 거부한다고 해서 큰 잘못은 아니다'는 식의 소극적 변명에 머무르기 쉽다. 즉 허용된 반론조차 본질적인논박이 아니라, 그저 예외를 조심스럽게 인정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가 어떤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의견이 세상에 나와 주장될 기회마저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이 무시될 때 어떤 해악이 뒤따르게 되는지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나는 지금 논의를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로 좁혀보려 한다. 그리고 나는 의도적으로 내 입장에서 가장 옹호하기 어려운 예시를 선택하려 한다. 다시 말해, 그 의견이 진실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회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그리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리는 다루려는 것이다.


    예컨대 신의 존재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혹은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도덕적 원칙들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면 어떨까? 애초에 그런 주제를 공론장의 논쟁거리로 끌어내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상대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입지를 내주는 셈이 된다. 그는 분명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그런 비판은 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으니, 침묵시켜야 마땅하다.” 그리고 비록 입 밖에 내지는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마음속으로는 그 말에 공감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당신은 신의 존재나 도덕의 핵심이라 할 만한 이런 믿음들조차 법적 보호를 받기에는 확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신에 대한 믿음 역시, 그것이 '확실하다' 고 단언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그 믿음은 의심이나 오류의 가능성을 허용해서는 안되는가?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떤 의견에 대해 확신하는 태도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주장이든 그에 대한 결론을 타인 대신 미리 내려버리고, 그와 반대되는 생각은 아예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는 태도에 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내 생각이 틀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전제를 담고 있으며, 이는 곧 '무오류를 가정하는 태도' 더 또한 어떤 의견이 부도덕하거나 불경하다고 여겨진다고 해서, 그 의견을 억압하려는 태도가 더 정당하거나 덜 위험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일수록 그 억압은 훨씬 더 심각한 해악을 초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야말로 한 시대의 사람들이 저지른 끔찍한 오류들이 후대의 놀라움과 경악을 자아내는 대표적 사례로 역사에 기록되곤 했던 순간들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기억하는 중대한 과오들 대부분이 바로 이런 식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틀린 의견이라도 왜 여전히 필요한가?

    반대 의견은 진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신념에 강한 확신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의견이 설령 참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만큼은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여전히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즉 어떤 주장이 참이라고 믿기만 하면, 그 근거를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심지어 가장 피상적인 반론조차 제대로 반박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신념이 권위를 통해 주입되기만 하면, 그에 대한 의문 제기는 쓸모없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환경에서는, 기존 통념을 신중하고 깊이 있게 반박하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통념이 영구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급하고 무지한 방식으로는 얼마든지 거부될 수 있다. 논의 자체를 완전히 가로막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토론이 시작되면 충분한 확신 없이 받아들인 믿음은 그럴듯한 반론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설령 어떤 의견이 참이고,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이 논증과 무관하게 -오히려 논증에 저항하는 하나의 편견처럼 굳어져 있다면- 그것은 이성적 존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라는 이름에 우연히 달라붙은 또 하나의 미신에 불과하다.


    인간의 지성과 판단력이 길러져야 한다면, 그 능력은 과연 어디에 가장 적절히 쓰여야 할까? 바로 자기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 그리고 스스로 의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주제들에서 발휘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이해력을 기른다’는 것이 지적 수양의 핵심이라면, 그것은 곧 '자신의 신념이 어떤 근거 위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그 주제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라면, 적어도 자주 제기되는 반론 정도는 스스로 명확히 반박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자신의 의견이 어떤 근거 위에 서 있는지를 가르치면 되는 것 아닌가? 반대 의견을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생각을 무조건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기하학을 배우는 사람들도 단순히 정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명 과정을 함께 이해하며 익히지 않는가. 그 내용에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맹목적 수용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말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기하학처럼 틀린 쪽에 말할 여지가 거의 없는 분야라면 그러한 방식의 가르침도 충분히 효과적일 수 있다. 수학적 진리가 지닌 특수성은, 모든 논거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점에 있다. 반론도 없고, 반론에 대한 반박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대부분의 주제에서 진리는 '서로 충돌하는 근거들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오늘날 '진리'로 받아들이는 이론들도, 과거의 대안들과 비교해 왜 더 설득력 있는 지를 스스로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반박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지닌 의견이 어떤 근거 위에 놓여 있는지를 정확히 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 종교, 정치, 사회적 관계, 그리고 삶의 실질적인 문제들처럼 훨씬 더 복잡한 주제로 시선을 돌릴 경우, 논쟁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의견의 논거는 겉보기에 타당한 반론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고대의 위대한 웅변가 중 한 사람인 키케로는 법정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더 깊이) 상대의 논리를 깊이 파고들었다고 전해진다. 키케로가 법정에서 쌓은 명성을 위해 실천한 바로 그 태도는, 진리를 탐구하고 좇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사유의 자세다.


    어떤 관점에 대해 자기 쪽 주장만 알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입장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논거가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아무도 그것을 반박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정작 그 자신이 직접 반대 논거를 꺾어보지 않았거나, 심지어 그 논거의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그는 어느 쪽 의견을 택해야 할지 판단할 아무런 토대와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모두에게 논의의 장이 열려 있어야 한다

    '상대방 주장을 직접 듣고 마주해야 한다'는 논지를 약화시키려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철학자나 신학자처럼 자신의 의견에 대한 찬반 근거를 모두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 " 또한 평범한 사람이 재치 있는 상대가 내놓는 왜곡된 말이나 궤변을 일일이 반박할 능력을 갖출 필요는 없다" 고 말할 것이다. 그는 그저 그런 주장들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항상 존재하니, 순진한 이들이 잘못된 말에 속지 않도록 반박만 되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즉 단순한 이들에게는 진리가 어떤 근거를 지니는지만 알려주면 되고, 나머지 복잡한 문제들은 권위자들에게 맡기면 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난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대신 해결해줄 교육받은 전문가들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설령 어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는 수준이 낮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해도, 여전히 자유로운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사람조차도, 반대되는 모든 의견이 충분히 검토되고 반박되었다는 합리적인 확신 없이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론이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그 주장에 대해 어떻게 제대로 반박할 수 있겠는가? 또한 반박이 충분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반대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불충분하다고 보여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충분함'이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



    자유의 원칙은 현실에서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자유의 원칙, 삶 속에서 시험대에 오르다

    원칙은 선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용할 수 있어야 비로소 힘을 가진다. 그 원칙들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는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디에 어떻게 끌어다 써도 실효성이 없다.


    지금부터 소개할 몇 가지 사례는, 그 원칙들이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작은 시도다. 여기서 다루려는 것은 이미 정립된 해답이 아니라, 원칙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단편적 장면들이다.


    이 사례들을 통해 이 글의 핵심을 이루는 두 가지 원칙(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각자는 자기 삶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것)이 실제 상황에서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으며, 어떤 지점에서 충돌하거나 균형이 요구되는지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두 원칙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적절한지 판단하기가 모호한 경우, 이 사례들이 그 균형을 가늠하는 작은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타인의 권익과 무관한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사회가 취할 수 있는 정당한 대응은 충고, 조언, 설득, 그리고 필요한 경우 회피에 한정된다. 둘째,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사회에 일정한 책임을 지며,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그에 따른 제재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해서, 그때마다 매번 사회가 개입할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목적을 좇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이익을 놓치게 되더라도, 그 자체로 비난받을 수는 없다. 그 목적이 정당하다면, 그로 인한 불이익 또한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해 충돌은 제도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제도가 존재하는 한 완전히 피하거나 제거하기는 어렵다.


    경쟁은 자유로워야 하되, 규제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치열한 직업 세계에서 성공한 사람, 고시나 자격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 원하는 목표를 놓고 경쟁해 끝내 선택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좌절과 헛된 노력, 실망을 딛고 그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따른다고 해서 개인의 도전 자체가 억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주저 없이 자신의 길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일정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이 그 고통을 이유로 법적이거나 도덕적인 보호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사회는 보지 않는다. 사회가 개입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경우뿐이다. 성공을 위해 사용된 수단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해치는 경우, 즉 사기나 배신, 폭력 같은 방식이 쓰였을 때다.


    거래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다. 어떤 사람이 상품을 대중에게 팔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는 타인의 이익은 물론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원칙적으로 사회의 통제 범주 안에 들어간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정부가 직접 가격을 정하고 그 제조 과정까지 간섭하는 것이 실제로 한때는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사회는 뼈저린 교훈을 깨달았다.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을 얻는 길은 단 하나, 즉 생산자와 판매자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소비자에게는 마음껏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무역’ 이라 불리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이 글이 내세우는 '개인의 자유'와 그 논리 구조는 다르지만 무게와 정당성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무역이나 상업적 생산에 대한 규제는 분명 하나의 제약이며, 모든 제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악(悪)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정당한 영역에 한정되어야 하며, 그 규제가 비판받는 이유 역시 기대한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적한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 정당성 또한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원칙은 자유무역의 주장과 직접 연결되지 않으며, 그 적용 범위 역시 경제 영역 전반으로 무제한 확장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식품의 혼합이나 위조를 막기 위한 공적 개입, 혹은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위생 조치나 안전 기준의 강제 등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경우 논의의 핵심은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조치가 실제로 '공익'에 부합하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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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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