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의 팡세
 
지은이 : 블레즈 파스칼 (지은이), 강현규 (엮은이), 이선미 (옮긴이)
출판사 : 메이트북스
출판일 : 2025년 07월




  • 팡세는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통찰한 파스칼의 철학적 고전으로, 여전히 현대인의 내면을 깊이 흔듭니다. 단편적이고 난해한 원문을 감정과 사유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해 독자의 이해를 도웁니다. 단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스스로를 직시하고 끝까지 사유할 용기의 가치를 만날 수 있습니다. 


    파스칼의 팡세


    인간은 누구보다 비참하고, 그래서 덧없다

    웃음거리가 되고도 혼자만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정작 혼자만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진실을 말하는 일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대개 미움을 사기 때문이다.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모시는 왕의 이익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왕에게 진실을 말해 이익을 가져다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비극은 분명 위로 갈수록, 즉 상류사회일수록 더 뚜렷하고 더 보편적이다. 그러나 하류사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랑은 언제나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은 끝없는 환상의 연속일 뿐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아첨하며 살아간다. 우리 면전에서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관계는 이런 상호 기만을 바탕으로 맺어질 뿐이다. 만약 자기가 없을 때 친구가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설령 그것이 악의 없이 한 솔직한 말이었다 해도 그 우정은 깨지고 말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가면을 쓴 존재일 뿐이며, 거짓과 위선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또한 남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도 피한다. 정의와 이성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이 모든 성향은 인간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는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을 바꾼 건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인과 결과를 들여다보라. 그 원인은 대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하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도 없는 미세한 '어떤 것'이 온 땅과 군주들, 군대와 전 세계를 뒤흔들기도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상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오만은 비참함을 앗아가는 괴물이다

    인간은 어떤 자리에 자신을 두어야 하는지 모른다. 인간은 분명 길을 잃었고, 본래 자리에서 떨어져 그 자리를 되찾을 수 없다.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지만, 아무 성과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길을 잃었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그 자리를 찾아갈 수도 없다. 결국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방황하며 이곳저곳을 더듬는다. 하지만 인간은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인간은 왜 늘 현재의 자기와 어긋나 멀어지는가?

    병든 몸은 새로운 욕망을 만든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는 '아프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지만, 막상 병이 들면 순순히 약을 받아들인다. 병이 그렇게 만든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 누리던 유흥이나 산책에 대한 욕망과 열정을 더 이상 품지 않는다. 그런 욕망은 병든 몸이 요구하는 상태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자연은 새로운 상황에 걸맞은 욕망과 열정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자연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이다. 두려움이란 현재의 상태에 존재하지도 않는 욕망을 끼워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늘 현재를 불행하게 한다

    자연은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에게 '행복할 법한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쾌락을 덧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그 쾌락을 실제로 얻게 되더라도, 그것이 곧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그 새로운 상태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또 다른 욕망을 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편적인 진리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확인해보아야 한다.


    불행을 걱정하다가 결국 만족을 잃는다

    우리는 너무나 불안해서, 지금의 상태가 망가지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어떤 것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실제로 많은 일들이 그렇게 무너질 수 있고, 과거에도 종종 그렇게 무너져왔다.


    그러나 불행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지금 주어진 행복을 기꺼이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한 요점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 요점이란 바로 '멈추지 않는 흐름'에 몸을 싣는 것이다.


    시간은 마음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기준 없이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과 기준이 분명한 사람의 차이는, 마치 시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시간을 다르게 느끼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두 시간이나 지났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고작 45분밖에 안 됐네"라고 말한다. 나는 내 시계를 보며 전자에게 "당신은 꽤 지루하셨나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후자에게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셨군요"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한 시간 반이 흐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상상으로 시간을 판단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내가 객관적인 시계(여기서 시계는 '객관적 기준'의 은유로 사용됨-옮긴이)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적절함을 넘는 휴식은 오히려 피로를 부른다

    정신이 정말로 피로할 때가 아니라면, 그저 기분 전환을 이유로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선 안 된다. 휴식은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만 주어져야 하며, 그때를 지나쳐 버리면 오히려 피로보다 더 큰 진력이 찾아온다.


    적절함을 넘는 휴식은 정신을 무디게 만들고, 도가 지나치면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는 상태에 이른다. 그것은 더 이상 회복이 아닌, 현실에 대한 탈출이 되어버린다.


    한편 간교한 욕망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도 않으면서 그 대가만을 요구한다. 쾌락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지불하는 화폐와 같지만, 그 쾌락조차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값만 치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셈이다.



    소유는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까?

    완전히 똑같은 건 자연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하다. 음색, 걸음걸이, 기침, 코 풀기, 재채기까지 모두가 서로 다르다. 사람들은 포도 같은 과일도 구분해낸다. 프랑스 와인의 포도 품종 이름인 뮈스카, 콩드리외, 데자르그, 접목종··· 우리는 그 차이를 알고 구별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한 가지에 똑같은 두 알의 포도가 열린 적이 있는가? 한 송이에 정확히 같은 두 알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나는 같은 일을 겪고도 똑같은 판단을 내린 적이 없다. 상황은 늘 조금씩 다르고, 내 감각도 언제나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화가처럼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바라보려 한다. 하지만 너무 멀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적당한 거리란 어느 정도일까? 그건, 당신의 감각으로 가늠해보라.


    인간은 존경받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낀다

    인간의 가장 비루한 본성은 '영예'를 좇는 데 있다. 그 영예는 곧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아간다 해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이성이 고귀하다고 믿기 때문에, 아무리 지상의 특권을 누려도 '이성의 질서'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면 허전함을 느낀다.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가장 유혹적인 지위이며, 어떤 유익이나 쾌락도 이 갈망을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지워지기 어려운 욕망이다.


    심지어 인간을 가장 멸시하고, 인간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이들조차도 결국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신뢰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본능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성으로는 인간의 천박함을 비웃지만, 그들 안의 더 강력한 본성은 여전히 인간의 위대함을 갈망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든 질서의 불완전함과 허상에 대하여

    타인에 대한 존경은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다

    진정한 존경이란 "당신을 위해 불편해지겠습니다"라는 태도다. 겉으로는 과장되거나 허황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정의다. 존경이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 불편이 당신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겠습니다. 게다가 이런 태도야말로, 어른과 상층을 구별하는 데 필요한 장치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존경이 아무 불편함도 없는 편안한 행위였다면, 누구나 모두를 존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른'과 '고위층'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경은 본질적으로 불편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회적 위계를 드러내는 기준이 된다.


    덕을 극단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악덕이 스며든다

    우리가 덕을 어느 한쪽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려 할 때, 그 지점에서 악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악덕은 때로는 '작은 무한'의 미세한 균열을 따라 조용히 덕 속으로 스며들고, 때로는 '큰 무한'에서 거대한 무리로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은 덕의 이름으로 길을 나섰지만, 어느새 악덕의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으며, 더 이상 참된 덕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완전함 그 자체마저 비난하게 된다.



    생각하는 갈대! 비참함과 위대함 사이의 인간

    생각하는 갈대, 그래서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인간의 육체적 나약함과 정신적 위대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광세」의 핵심 개념임-옮긴이)'다.


    그를 쓰러뜨리는 데 온 우주의 무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증기 한 줄기, 물방울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짓누른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우주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알고,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것도 인식하지만, 우주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존엄은 바로 '사유'에 있다. 우리는 이 사유를 통해 자신을 높여야 한다. 공간이나 시간처럼 우리가 결코 채울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바로 '생각하는 능력' 안에서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바로 도덕의 출발점이다.


    왜 우리는 그보다 그의 특성을 더 사랑할까?

    어떤 사람이 창가에 서서 길을 바라보는 중에 내가 지나간다고 하자. 그가 나를 보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는 특별히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그 사람의 미모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는 과연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만약 천연두가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 앗아간다면, 그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판단력이나 기억력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이 진정 '나'를 향한 사랑일까? 그럴 리 없다. 나는 그런 자질을 잃고도 여전히 나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육체 안에도, 정신 안에도 '나'의 본질은 없다. 우리는 소멸되기 쉬운 특성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만, 정작 그 특성이 아니라면 육체나 영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사람의 영혼을, 그 어떤 특징 없이도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고, 어쩌면 부당하기까지 하다.


    결국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특성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위나 직책 같은 '빌려온 특성' 으로 존경받는 사람을 함부로 경멸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결국 그러한 특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사도, 짐승도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다

    아내와 외아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커다란 분쟁에 고통스러워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고 고통이나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인다. 왜일까?


    놀랄 필요는 없다. 지금 막 상대가 공을 넘겼고, 그는 그 공을 받아 다시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득점을 위해 공이 떨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온 정신을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지금 그의 영혼은 오직 이 게임에만 점령되어 있다. 다른 모든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우주를 알고, 모든 것을 판단하며, 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이 인간이, 지금은 단지 토끼 한 마리를 쫓는 데 몰두해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늘 자신을 높이려 하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오히려 더 어리석어질 것이다. 그는 인간성 위에 존재하려고 애쓰겠지만, 결국 그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적은 일도, 많은 일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천사도 짐승도 아닌, 단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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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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