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을 의심하는 100가지 철학
 
지은이 : 오가와 히토시 (지은이), 곽현아 (옮긴이)
출판사 : 이든서재
출판일 : 2025년 08월




  • ‘당연하다고 믿어 온 모든 것이, 실은 무수한 가능성의 실마리일 뿐이라면 어떨까요?’ 어릴 때부터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철학자 오가와 히토시 교수는 AI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당연함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온 ‘상식’과 ‘관습’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100가지 철학적 기법을 알려 줍니다.


    당연한 것들을 의심하는 100가지 철학


    요소로 분해하라-데리다의 ‘탈구축’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주장한 '탈구축(deconstruction)'이란 사물을 처음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는 근대사회에서 편향된 가치관이 올바른 것으로 굳어졌다고 보았으며, 이 때문에 사회가 한계에 부딪힌다고 생각했다. 그 전형적인 사례로 남성우위사회나 유럽 중심주의, 식민지주의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서양의 근대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사람들의 태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탈구축'이라는 개념이다. 구축에서 벗어남, 즉 구조물을 해체하고 재구축한다는 의미다.


    구체적으로는 그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를 해체하고, 필요한 것만 모아 재구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약점이 되는 문제를 요소에서 제외할 수 있다. 이 같은 발상은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었는데, 특히 탈구축주의 건축이 유명하다. 건물이 꼭 사각형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해체한 뒤 필요한 요소만 주워 담으면 자연스럽게 그 건물의 콘셉트에 적합한 형태를 이룬다. 이런 방식을 통해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 탄생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 기존의 형태나 전제에만 집착해서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따라서 탈구축적 접근법을 통해 요소로 해체해 볼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탈구축,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일하는 방식에 탈구축적 접근법을 적용해 보시오.

    A. 우선 일이라는 개념에 포함된 요소를 열거해 보겠다. 예를 들면 수입이나 보람, 자아실현, 출세, 정체성, 커뮤니케이션, 사회공헌, 인간관계, 출퇴근, 잔업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나에게 필요한 요소만을 모아 탈구축적으로 접근해 보면, 나에게 보다 적합한 업무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내가 제2의 인생을 고려한다면 출세나 출퇴근, 잔업 같은 걸림돌이 되는 요소는 제외할 것이다. 그리고 보람이나 자아실현, 나아가 사회공헌을 최대한 중시하여 프리랜서로서 공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새로운 업무 방식을 선택하고 싶다.


    움직임으로 세상을 보라-들뢰즈의 '생성변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라고 주장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동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언뜻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끊임없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들뢰즈는 그러한 운동을 '생성변화'라고 불렀다.


    생성변화는 결코 수형도(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모든 경우를 점과 선만을 이용해 나뭇가지처럼 뻗어 그린 도형)처럼 논리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횡무진 생겨나는 비논리적인 주장이다. 이 때문에 들뢰즈는 수형도를 '나무', 생성변화를 '리좀(rhizome)'이라고 명명했다. '리좀'이란 땅속줄기의 일종인 뿌리형 구조를 의미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중심 없이 사방으로 뻗는 네트워크 상태를 일컫는다.


    사실 이 나무와 리좀은 인간의 두 가지 사고법이기도 하다. 줄기 틈에서 가지가 나뉘며 변해가는 나무는 로지컬 씽킹의 전형이다. 철저한 기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기준으로 하되 몇 가지 패턴이나 예외도 염두에 둔다. 이에 반해 리좀은 중심은 물론 시작도 끝도 없는 네트워크형 사고법이다. 각 부분이 자유롭게 연결되고, 결과적으로는 전체를 구성하는 인터넷 같은 이미지다. 여기에 새로운 개체가 접속하면 전체 성질이 달라진다. 이 때문에 '생성변화'라고 부른다. 이 생성변화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숨어 있다. 이처럼 사물을 동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세상의 가능성은 더욱 넓어질 것임이 틀림없다.


    들뢰즈의 생성변화,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언뜻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것을 생성변화의 과정이라고 인식해 보시오.

    A. 모든 일이 생성변화 과정이라고 한다면,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이른바 그 동적 흐름에서 일부분을 잘라낸 상태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눈앞에 있는 컴퓨터도 언뜻 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금씩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어떤 사물이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질이 변한다. 이를 개념적으로 보면 '소통'의 의미가 시대와 함께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각해 보자-메를로 퐁티의 '신체론'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 1961)는 신체가 나를 존재하게 만들지만, 내가 아닌 양면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신체의 '양의성이다. '양의성'이란 서로 다른 두 종류가 혼재되어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는 일단 주체와 객체가 혼재된 상태라고 생각해 보자. 또는 나와 외부 세상이 혼재되었다고 상상해 봐도 좋다. 사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근처만 둘러봐도 책상과 컴퓨터는 온전히 따로 존재한다. 이 세상에서 오직 신체만이 이 같은 특수성을 지닌다. 예컨대 우리가 몸을 만지면 그때 '만지는 주체인 손'과 '만져지는 대상인 몸'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신체 안에 혼재되어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신체를 움직일 때 반드시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의식한 것과 다르게 사물을 느끼거나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느낄 때도 있는데, 이는 실제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메를로 퐁티는 세상이 보낸 메시지를 신체가 먼저 수신하며, 그 메시지를 우리 의식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머리가 아닌 신체가 사고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현대의 생명과학에서는 장기나 세포가 사고한다는 가설이 나오기도 한다. 이제는 우리도 신체와 머리의 불균형을 개선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를로 퐁티의 신체론,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어떻게 하면 고민을 머리가 아닌 신체로 해결할 수 있을까?

    A. 일반적으로 고민거리는 머리로 생각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해결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때 몸으로 사고한다면 어떻게 될까?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면, 머리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온전히 이 고민거리는 몸에 맡겨야 한다. 그렇다면 신체를 평소와 다른 환경에 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몸이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컨대 숲이나 바다를 찾거나 온천 같은 곳에 가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민거리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은 실제로 신체가 사고하여 고민을 해결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해 보자-쿠키 슈죠의 '우연성'

    일본의 철학자 쿠키 슈죠(九鬼阁造, 1888~1941)는 '우연성'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쿠키는 '우연'이란 반드시 일어난다고 확정할 수 없는 일이며,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연이란 단순히 사건이 발생하는 횟수를 다루는 것에 불과한 확률론과는 전혀 다르다.


    쿠키는 우연성을 논리적 우연, 경험적 우연, 형이상학적 우연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알기 쉽게 설명해 보면 '논리적 우연'이란 법칙에 반하는 예외적 상황을 가리킨다. '경험적 우연'은 원칙대로라면 만날 일이 없는 두 가지 사물이 조우하는 상황이다. 마지막 '형이상학적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 우연히 존재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그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일이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쿠키는 지금 수중에 있는 그 우연성에 운명애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 우연은 운명이니 '사랑하자'라는 말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고방식은 쿠키 자신의 인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쿠키의 어머니는 쿠키를 임신했을 때 남편에게서 도망을 쳤고, 이로 인해 쿠키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생겼다. 쿠키는 우연히 주어진 복잡한 부자 관계로 인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듯하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로 '우연성'은 모든 사람에게 지금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논리인지도 모르겠다.


    쿠키 슈죠의 우연성,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지금 이미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을 우연한 존재라고 재인식해 보시오.

    A. 평소 우리는 주변에 있는 것이나 자기가 가진 것을 우연히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컨대 내 가방은 내가 샀으니, 여기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많은 가방 중에서 왜 그 가방이 내 품으로 오게 된 것일까? 이는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떤가? 갑자기 그 가방이 사랑스럽게 여겨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운명애'이다.


    시점을 분산해 보자-나나이의 '분산된 집중력'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 벤스 나나이(Bence Nanay, 1974~)는 "예술을 볼 때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작품에 주목하는 한편, 그 안에서 시점을 다양하게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검은 배경에 파란 샤프롱을 두른 남자만 존재하는 그림을 감상한다고 해 보자. 이 그림은 파란 샤프롱을 쓴 남자의 초상, 얀 반 에이크 작이라고 하는 실제 존재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냥 볼 때 우리의 시선은 파란 샤프롱으로만 향한다. 하지만 그 시선은 그저 파란색을 바라볼 뿐이지, 예술 작품 자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접한다'는 미적 경험을 위해서는 시점을 다양한 곳으로 분산시키고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파란 샤프롱 자체에도 음영이 있고, 얼굴색이나 배경과의 대비도 존재한다. 또 남자의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남자의 손가락은 어떤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지 주시해 보자.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본다면 하나하나의 형태가 나타내는 의미는 더욱 넓어지게 될 것이다. 나나이가 말한 것은 이처럼 대상에 집중하는 한편, '주의를 분산'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도 주의를 분산시켜 보면, 그 당연함이 다른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나이의 분산된 집중력,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홍미 없는 잡담에 분산된 집중력을 기울여서 어떤 것이든 참여의 가치를 발견해 보시오.

    A. 지금 말하는 내용은 사실 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고민 상담을 했던 내용이다. 잡담에 홍미가 없다는 여성에게 나나이의 철학을 소개한 다음, 직접 실천해 보게 했다. 예컨대 잡담 내용에 흥미가 없더라도 어딘가 자신이 흥미를 느낄 만한 부분이나 참고가 될 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는가로 집중의 정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물이건 여러 요소가 포함되는 만큼, 어떤 것이라도 특별한 가치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사고행복도 절약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 보자-오컴의 '면도날'

    '사고의 절약' 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사실 일상에서 종종 쓸데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 중세 철학자인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 1285~1347)이다. 이러한 사상을 '사고 절약의 원리', 또는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부른다.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근거나 원인을 탐구할 때, 그 일이 반드시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나 원인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무언가를 설명할 때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 오컴은 기독교 신앙을 명확하게 이론화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애매한 표현은 오히려 사족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불명확한 표현이나 불완전한 논리가 생겨날 만한 근거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마치 불필요한 부분을 면도날로 도려내자는 말과 유사했기에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리는 정확함을 기하려다 무심코 쓸데없는 가정을 짜 맞추기도 한다. “이외에도, ~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말이다. 불필요하게 사례를 나눈 탓에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결국은 중요한 일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본말전도 된다는 말이다. 즉, 사고의 절약은 단순한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관통하는 데 필요한 행위다.


    오컴의 면도날,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일상에서 사고를 낭비하는 부분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오.

    A. 평소 쓸데없는 사고로 낭비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다지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무언가를 전달할 때는 결국 상대방을 신경 쓰게 되므로 미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기 쉽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혹시 싫어하면'이라던가 '혹시 다른 것을 좋아하면'처럼 하지 않아도 될 시뮬레이션을 해 보는 일이 많은 듯하다. 그보다는 직접 결론만 전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보충하면 되니 말이다.


    '가치관의 차이는 초월할 수 있다'라고 믿자-가다머의 '지평 융합'

    가치관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쩌면 초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er, 1900~2002)의 '해석학'을 참고해 보자.


    '해석학'은 문장을 해석할 때 활용되는 사고방식인데, 그중에서도 '지평 융합'이라는 개념은 모든 대립에 응용할 수 있다. 가다머는 '사람들이 각자의 선입견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사물을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자신의 가치관을 '지평'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자신의 관점'과 비슷하다. 따라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그 지평을 융합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서로에게 제3의 지평이 성립되며, 이를 서로 나눌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 지평을 융합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때 가다머가 중시한 것이 바로 '역사성'이다.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연결되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현재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런 태도를 견지한다면 자신의 지평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열린 태도로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비로소 지평의 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지평의 융합을 통해 가치관 차이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깊게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다머의 지평 융합,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치관을 들어보고, 여기에 지평의 융합을 적용해 보시오.

    A. 나는 차별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이를 지평의 융합을 적용하여 이해해 보려 하겠다. 이때 역사성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를 차별하는 사람도 같은 인간이다. 차별 자체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무엇인가를 차별하는 계기가 된 과거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과거에 주목해 보면 차별한 사실 자체는 용서할 수 없어도, 그 사람이 어째서 차별하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태도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치관을 초월하기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보자-로크의 '경험론'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여러 사람이 같은 케이크를 먹고 있을 때 모두가 맛있다고 말한다면, 그 감각은 동일한 것일까? 이것이 실제로 같은 감각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17세기 영국 철학자인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이다. 로크는 영국의 '경험론'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진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을 의미)'라고 불리는 마음의 도화지에 관념을 써 내려간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 경험은 누구나 똑같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원래 물체의 성질은 물체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1차 성질(형태나 크기 등)과 인간이 오감으로 인식한 후에 존재하는 2차 성질(맛이나 냄새 등)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 2차 성질은 사람에 따라 다르므로 같은 색이나 맛을 표현하더라도 정말로 같은 감각인지는 판별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 쉽게 나타낸 것이 로크의 철학을 토대로 후대에 고안된 '역전 퀄리아(Inverted qualia)'라는 사고 실험이다. '퀄리아'란 현대 최신 철학 분야에서 의식과 관련해 논의하는 주관적 체험을 가리킨다. 같은 물리적 자극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다른 경험을 하는지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 하늘이 파랗네."라고 말할 때, 친구가 "응, 파랗네."라고 대답한다 해도, 두 사람이 같은 색으로 인지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즉, 진리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상식이 만인에게 통용되는 객관적인 상식인 것처럼 착각한다.


    로크의 경험론, 이렇게 활용해 보자

    Q. 역전 퀄리아를 전제로 삼으면 사람 간의 소통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A. 우리는 무심결에 모두 똑같이 사물을 느끼고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전 퀄리아에 의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과는 빨갛다고 해도, 그 빨강을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과 반드시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가 형성된다. 오히려 서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냉정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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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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