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신뢰
 
지은이 :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은이), 이초희 (옮긴이)
출판사 : 윌북
출판일 : 2025년 07월




  •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내면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단단한 확신을 이야기합니다. 타인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삶을 주도할 용기를 건네지요.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자기 신뢰


    본성과 운명의 법칙

    자기 신뢰

    위대한 인간은 자신을 믿는다

    모세, 플라톤, 밀턴의 가장 큰 장점은 이들이 책과 전통을 좇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사람은 시인과 성자의 창고에 머무는 불빛이 아니라 마음속을 가로지르는 불빛의 반짝임을 감지하고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불빛이 자기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을 무시한다. 우리는 모든 천재의 작업에서 스스로 거부한 생각을 발견한다. 이 생각들은 낯설고도 장엄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명랑하고 강직한 태도로 즉흥적인 인상을 따라가라고 가르친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낯선 사람이 우리가 내내 생각하고 느낀 것을 그대로 능수능란하게 말할 것이고 우리는 부끄럽게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강제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움의 과정에서 확신에 이르는 시기가 있다. 바로 부러움은 무지이고 모방은 자살 행위라는 것, 좋든 싫든 자신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온 세상이 좋은 것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주어진 땅에서 힘들게 노력하지 않으면 옥수수 한 알의 영양도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사람 안에 깃든 힘은 새로운 본성이며 그가 시도하기 전까지는 그 힘이 무엇이고 그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얼굴과 성격은 유달리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이렇게 기억이 새겨지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내재한 조화로움 때문이다. 빛이 내려오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눈이 그 빛을 증언한다.


    본성만큼 신성한 법칙은 없다

    내 본성만큼 신성한 법칙은 없다. 선과 악은 쉽게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바뀌는 이름일 뿐이다. 유일한 정의는 내 기질을 따르는 것이고 유일한 잘못은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명목뿐이거나 덧없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반대할 때도 자기 뜻을 밀고 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이름, 사회, 죽은 제도에 굴복하는지 생각하면 부끄럽다. 점잖고 말투가 세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옳다고 보기 힘든 말로 나를 간섭하고 흔든다. 그럼 나는 똑바로 일어서서 온 힘을 다해 투박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만일 악의와 허영이 자선이라는 옷을 입으면 그냥 넘어가야 할까? 분노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 노예제도 폐지라는 너그러운 대의명분을 들고 나에게 와서 바베이도스의 최근 소식을 전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서 댁의 아이나 나무꾼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성품을 기르고 겸손해지십시오. 품위를 지키십시오. 당신의 완고하고 야박한 야망을 저 먼 곳의 흑인들에 대한 엉뚱한 다정함으로 꾸미지 마시고요. 멀리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 가정에는 독이 됩니다.” 이런 말이 거칠고 버릇없게 들리겠지만 사랑을 가장하는 태도보다 진실이 낫다. 선에는 어느 정도 날카로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게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이 규칙을 지키려면 실제 삶에서도 지적인 생활에서도 고된 노력을 쏟아야 하지만 잘 지키면 위대함과 초라함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의무를 본인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나타날 테니 쉽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의견을 따라 사는 것은 쉽다. 고독한 가운데 자기 뜻을 따라 사는 것도 쉽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 고독한 독립의 완벽한 달콤함을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쓸모가 없다면 순응하지 말라는 이유는 이것이 힘을 흩트리기 때문이다. 이런 순응은 시간을 잡아먹고 당신의 특징적인 인상을 흐린다. 생명이 꺼진 교회에 계속 다니고 생명이 꺼진 성서 협회에 기부하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거대 정당에 투표하고 천박한 가정부처럼 거나한 식탁을 차린다면 이런 가림막 때문에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보기 힘들어진다. 당신 역시 너무 많은 힘을 빼앗겨 제대로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저 자기 일을 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 것이다. 자기 일을 하라. 그러면 스스로 강해질 것이다.


    위대해진다는 건 오해받는다는 뜻이다

    자기 신뢰를 위협하는 또 다른 공포는 우리의 일관성이다. 우리가 과거 행동이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리의 과거 행위 외에 우리의 궤적을 파악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왜 이런저런 공적인 자리에서 한 말에 모순되지 않으려고 이미 죽은 기억을 끌고 오는가? 자신에게 모순된다고 한들, 뭐가 어떤가? 지혜의 원칙은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억하는 행위 자체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천 개의 눈이 바라보는 현재로 과거를 데리고 와서 새로운 날을 사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는 신에게 인격이 있다는 걸 부인한다. 그러나 영혼에 숭고한 감정이 일어날 때는 신에게 형상과 색을 입히는 일이 되더라도 마음과 삶으로 그 감정을 받아들여라. 요셉이 음란한 여인의 손에 옷을 버리고 도망쳤듯이 당신의 논리를 버려라.


    어리석은 일관성은 초라한 정치인과 자선가와 성직자들의 숭배를 받는 속 좁은 도깨비와 같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 차라리 벽에 비친 그림자를 걱정하는 게 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바를 단호한 어조로 말하라. 모든 것이 오늘 말한 것과 달라도 상관없다. “이런, 그럼 오해를 살 텐데요.” 오해를 사는 게 그렇게 나쁜가? 피타고라스도 오해받았고 소크라테스와 예수와 루터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와 뉴턴도 오해받았고 살아 있던 모든 순수하고 현명한 정신은 모두 오해받았다. 위대해진다는 건 오해받는다는 뜻이다.


    어떤 종류의 행동이든 각자의 시간에 정직하고 자연스럽다면 합의에 이를 것이다. 하나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들은 아무리 다르게 보이더라도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조금 멀리 보거나 조금 높은 곳에서 보면 이런 작은 차이는 보이지 않고 하나의 경향이 이들을 모두 통합한다. 뛰어난 배는 지그재그로 방향을 수없이 바꾸며 나아간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항로를 보면 정해진 방향을 따라 곧게 펴진 것을 알 수 있다. 진실한 행동은 그 자체로 설명이 되고 다른 진실한 행동까지도 설명한다. 하지만 순응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독립적으로 행동하라. 그러면 이미 독립적으로 실행한 행동이 지금의 당신을 정당화할 것이다. 위대함은 미래에 호소한다. 타인의 눈을 냉소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다면 현재의 나를 떳떳하게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옳은 일을 이미 많이 한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지금 당장 행하라. 겉치레를 하찮게 여긴다면 언제나 올바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성품의 힘은 누적된다. 덕 있는 모든 지난날이 이 힘을 건강하게 해준다. 무엇이 의회와 전장의 영웅들을 위풍당당하게 만들어 우리의 상상력을 깨우는가? 바로 일련의 위대한 나날과 그 뒤를 따르는 승리에 대한 의식이다. 이 의식이 하나로 뭉쳐 앞서나가는 자에게 빛을 비춘다. 그는 천사와도 같은 사람들의 호위를 받고 있다. 이 의식이 채텀에게 우레와 같은 목소리를 주었고 워싱턴의 풍채에 위엄을 더했고 애덤스의 눈에 미국을 심었다. 명예를 높이 사는 이유는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예는 언제나 오랜 덕목이다. 오늘 숭배하는 명예는 오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명예를 사랑하고 명예에 경의를 표한다. 명예는 우리의 사랑과 경의를 가두는 덫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라 젊은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해도 티 없이 깨끗하고 오랜 혈통을 보여준다.


    강건함이 힘을 부른다

    젊은 연설가들은 이 시대의 열쇠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겠지만,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진짜 열쇠는 ‘무기력’이다. 인간은 대부분 언제나 무기력에 지배를 받으며 극히 일부의 빛나는 순간을 제외하면 중력, 관습, 두려움의 희생자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강한 자에게 힘을 준다. 대중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 행동하려는 습관도 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나타나는 결과는 없다. 어린아이와 성인 모두 그들 중 일부는 진심으로 게임에 임하며 소용돌이치는 세계로 뛰어들어 함께 휘몰아친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차가운 얼굴로 방관하거나 기운이 넘치고 유머와 활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끌려다니곤 한다. 사람이 가장 먼저 갖춰야 하는 부는 건강이다. 질병은 왜소한 정신을 낳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픈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자원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하고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도 흘러넘쳐 이웃을 돕고 타인의 필요를 채운다.


    강한 담력이 주는 이점은 노동, 예술, 협력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이런 이점은 온실을 짓지도 않고 관개나 개간을 하지도 않으며 거름을 뿌리지 않아도 다른 곳보다 풍요롭게 작물이 자라는 기후와도 같다. 이런 담대함은 뉴욕이나 콘스탄티노플처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지 않아도 자본, 재능, 노동력이 저절로 몰려드는 도시의 기회와 같다. 강한 담력에는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본과 재능, 노동력이 몰려간다. 마찬가지로 넓고 건강하고 폭넓은 이해력은 보이지 않는 강과 바다의 해안가에 놓인 것처럼 보이며, 그 물길 위에는 온종일 작은 배들이 흘러들어 온다.


    중요한 일에 힘을 집중하라

    성공은 항상 어떤 추가적인 힘 또는 긍정적인 힘과 함께 간다. 성공의 무게는 힘의 무게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 새로운 활력을 얻어 태어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방법을 그 대안으로 쓸 수 있다. 첫 번째는 잡다한 활동을 단호하게 끊고 힘을 하나 또는 몇 가지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다. 정원사가 나뭇가지를 구불구불 뭉쳐서 나도록 두지 않고 엄격한 가지치기로 나무의 수액을 한두 개의 튼튼한 가지로 흐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탁이 말했다. “네 운명을 키우지 말라. 네게 맡겨진 것이 상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인생에서 신중하게 지켜야 할 한 가지 선은 집중이고, 피해야 할 한 가지 악은 산만함이다. 그 산만함은 거칠든 훌륭하든, 재산과 그에 따른 걱정, 친구와 사교 생활, 정치, 음악, 잔치 무엇이든 상관없다. 즐거움만을 추구할 뿐인 장난감과 망상을 하나 없애고, 제자리로 돌아가 본분에 집중하는 것은 나와 세상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친구, 책, 그림, 하찮은 의무, 재능, 아침, 희망은 모두 우리 마음을 들뜨게 하고 좋은 자세와 곧은 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해물이다. 당신의 일을 선택해야 한다. 당신의 두뇌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버려야 한다. 그 방식만이 ‘아는 것’에서 ‘행하는 것’으로 도약할 수 있을 만큼의 활력을 쌓는다.


    집중은 정치, 전쟁, 무역 등 간단히 말해 모든 인간의 일을 잘 관리하는 비결이다. 뉴턴이 “어떻게 발견을 이룰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항상 마음을 먹고 있어서”라고 대답했다는 위대한 일화가 있다. 정치와 관련해서도 플루타르코스가 이런 말을 남겼다. “도시 전체에서 페리클레스가 절대 보이지 않던 유일한 곳은 시장과 의회 건물로 이어지는 거리였다. 그는 모든 연회 초대와 모든 즐거운 집회와 모임을 거절했다. 또한 통치 기간 내내 친구와 한 식탁에 앉은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도 많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끈기 있게 노력하지만 재빠르게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흘러가는 세상사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최선의 결정을 내리면 가장 좋겠지만, 어떤 결정이든 내리지 않는 것보다 낫다. 어떤 지점에 도달하는 데는 스무 가지 길이 있고 가장 짧은 길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일단은 아무것이라도 하나 선택해 당장 출발하라.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즉시 가져올 수 있는 정신력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그 지식을 꺼내는 데 오래 걸리는 열두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인물이다.


    습관과 반복이 힘을 키운다

    기질의 두 번째 대체물은 훈련, 즉 습관과 반복의 힘이다. 도로를 달릴 때는 평범한 말이 경주용 말보다 더 낫다. 화학에서 느리지만 연속적인 갈바닉 흐름은 순간적이지만 강한 전기 스파크와 동등한 힘을 내며, 예술에서도 더 나은 작용을 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꾸준한 훈련으로 강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순간으로 응축하는 대신 같은 양의 힘을 오랜 시간에 걸쳐 분산시켜야 한다. 금덩이 1온스와 금박 1온스의 가치는 같다.


    자연이 던지는 장애물은 너무나 대단한 것이기에 우리는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생각을 표현하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환경과 물질의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아마추어는 숙련된 실무자를 상대할 수 없다. 피아노를 매일 여섯 시간씩 치면 손가락 놀림이 쉬워지고, 그림을 매일 여섯 시간씩 그리면 기름, 황토, 붓 같은 거친 재료를 잘 다룰 수 있다. 거장들은 건반을 짚는 손 모양만 봐도 음악을 잘 아는지 알아본다. 악기를 배우는 건 그만큼 어렵고 중요하다. 기술자는 수천 번의 조작을 통해 도구 사용법을 배우고, 사무원은 끝없이 더하고 나누며 계산 기술을 배운다. 나는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자주 경험했던 것처럼 문학계에서 신뢰받는 사람들, 즉 출판업자, 편집자, 대학 학장과 교수, 주교가 결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보통은 지적으로 평범하거나 수준이 낮으며 일하는 재능이 있는 일종의 상업 활동가들임을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힘을 수익이 나는 지점으로 정확히 밀어붙이거나, 꾸준히 일함으로써, 더 뛰어난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는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혼과 우주의 법칙

    초영혼

    진정한 개혁은 영혼에 길을 내는 일이다

    우리는 인간의 삶이 비참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비참함을 어떻게 알았는가? 우리의 이런 불안과 오랜 불만의 근거는 무엇인가? 결핍과 무지에 대한 보편적인 감각은 영혼의 거대한 요구를 보여주는 섬세한 암시 아닐까? 왜 사람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역사가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다고 느끼는가? 왜 인간에 대해 하는 말은 늘 시간이 지나면 낡고 무가치한 형이상학이 되는가? 6000년 동안 내려온 철학은 영혼의 방과 창고를 살살이 탐색하지 못했다. 그 모든 실험에도 결국 풀 수 없는 잔여물이 남아 있다. 인간은 그 근원이 감춰진 하나의 흐름이다. 우리 존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에게 흘러내려온다. 아무리 정확하게 계산하는 사람이라도 다음 순간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요인이 모든 것을 어그러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치 못한다. 나는 매 순간 일어나는 사건이 내 의지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조화, 즉 초영혼 안에서 모든 개별적 인간 존재는 하나가 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공통의 마음은 경배가 되며, 모든 올바른 행동은 복종이 된다. 그 강력한 실재는 우리의 속임수와 재주를 무력화시키고, 모두가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하며, 혀가 아닌 인격으로 말하게 한다.


    또한 초영혼은 언제든 우리 생각과 행동에 스며들어와 지혜와 덕과 힘과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시간을 따라 분열 속에서 조각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전체의 영혼이 있고 지혜로운 침묵과 보편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모든 부분과 입자는 초영혼과 동등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바로 영원한 하나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며 모든 복을 얻을 수 있는 이 깊은 힘은 항상 자족적이고 완벽할 뿐 아니라 보는 행위, 보이는 사물, 보는 사람과 볼거리, 주체와 객체를 하나로 만든다. 우리는 해, 달, 동물, 나무처럼 세상을 조각조각 바라보지만 빛나는 부분들의 전체는 영혼이다.


    영혼은 우리 존재의 배경에 누구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도 없는 광대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면이나 뒤에서 우리를 통과해 만물을 비추는 빛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모든 것이 빛임을 인식시킨다. 인간은 모든 지혜와 선이 깃들어 있는 성전의 외벽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인간이라고 말하는 먹고 마시고 심고 세는 존재는 우리가 아는 바와 달리 인간을 대표하지 않고 왜곡되게 표현한다.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행동으로 영혼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영혼이 지성으로 호흡할 때 그것은 천재성이고, 영혼이 의지로 호흡할 때 그것은 덕이며, 정서를 타고 흐를 때 그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지성이 스스로 뭔가가 되려고 하는 순간 무지가 시작되고, 의지가 스스로 뭔가가 되려고 하는 순간 쇄약해지기 시작한다. 모든 개혁의 목적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한 사람 안에 영혼의 길을 내는 것, 즉 우리가 영혼에 순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진정한 천재는 자기 안에서 나온다

    위대하면서도 단순한 정신과 대화를 나누면 문학은 단지 단어 놀이처럼 보인다. 가장 단순한 표현이야말로 가장 귀한 글이 되지만, 그것들은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온 우주를 품고 있으면서도 땅에서 조약돌 몇 개를 줍거나 작은 병에 공기를 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치장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꾸밈없는 진실, 솔직한 고백, 전지적 확신으로 마주해야 한다.


    이런 영혼은 신이 인간을 대하듯 우리를 대한다. 그는 신처럼 위엄 있게 땅 위를 걷고 우리의 재주와 자비심, 심지어 미덕까지도 무심하게 받아들이며 오히려 그 미덕도 단지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그들의 혈관에 우리의 미덕이 흐르고 그들 자신에게 신들의 아버지와 같은 초월적인 고귀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솔직한 형제애는 작가들이 서로 아첨하고 위로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에 해를 입히는 행위를 날카롭게 질책한다. 이들은 아첨하지 않는다.


    행복은 존재의 핵심이다

    진정으로 당신을 위한 것은 결국 당신을 찾아온다. 친구를 찾으러 뛰어다닌다면 발은 뛰어도 마음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만일 친구를 찾지 못하더라도 그를 찾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최선의 결과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있는 힘이 친구에게도 있어서,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면, 그 힘이 두 사람을 반드시 만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모든 사상이 자신의 마음을 향해 계시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장 고귀한 존재는 그의 내면에 산다. 의무감이 그의 마음에 있다면 자연의 근원도 그곳에 있다. 하지만 위대한 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면 예수가 말한 대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한다”. 겁쟁이에게 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신앙 고백과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차단하고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직접 기도를 마치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기도조차도 해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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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