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에 대하여 (라틴어 원전 완역본)
 
지은이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은이), 박문재 (옮긴이)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5년 08월




  • 분노, 불안, 절망에 흔들리는 시대.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우리는 어디서 배워야 할까요? 로마 제국의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습니다. “철학은 인생의 상처를 치유하는 연고다.” 고전은 오래된 책이 아니라, 지금도 작동하는 통찰이지요. 세네카의 문장은 내면이 무너질 듯한 순간마다 꺼내 읽는 마음의 연고가 되어줄 것입니다.     


    화에 대하여


    분노에 대하여

    노바투스여, 당신이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내게 요청했습니다. 모든 감정 중에서도 특히 분노라는 감정을 가장 두려워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른 감정들은 어딘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면이 있지만, 분노는 오로지 적개심만을 원동력으로 삼아 맹렬히 타오르며 공격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형벌과 죽음, 고통을 탐하고, 해를 끼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자신까지 파멸시킵니다.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안위마저 돌보지 않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 복수라 할지라도 열망하여 자기 자신을 그 칼날 위로 던지고 맙니다.


    이러한 까닭에 몇몇 현자들은 분노를 순간의 광기라 일컬었습니다. 분노는 마치 광기처럼 자제력을 잃고, 적절한 행동 기준을 잊어버리며, 인간관계를 무시합니다. 한번 시작한 일에 집착하여 몰두하고, 이성적 판단과 충고에는 귀를 닫아버립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흥분하고 올바른 것과 진실된 것을 구분하지 못하며, 무너져 내리는 건물처럼 산산조각 납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님은 그들의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무모하고 위협적인 태도, 울분으로 가득 찬 이마. 험상궂은 얼굴, 성급한 발걸음, 떨리는 손, 변색된 안색, 거칠게 씩씩거리는 숨결··· 이 모든 것이 광기의 증상이자 분노에 휩싸인 자의 얼굴입니다.


    그들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심장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피가 온 얼굴을 붉게 물들입니다. 입술은 떨리고, 이는 꽉 물려있으며, 머리카락은 곤두서 있습니다. 숨은 가빠지고, 관절은 뒤틀려 우두둑 소리를 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손을 자주 마주치며, 쉴 새 없이 발로 땅을 찹니다. 온몸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격렬한 위협을 드러내니, 이것이 바로 분노로 일그러진 사람의 흉측하고 끔찍한 모습입니다.


    분노는 흉측하고 혐오스러운 악덕이며,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렬하고 통제불능입니다. 다른 악덕들은 드러나지 않은 채 은밀히 자라날 수 있지만, 분노는 얼굴로 드러나 표출되며, 그 강도가 세질수록 더욱 뚜렷하게 끓어오릅니다. 모든 동물이 해를 가하려 할 때 먼저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평소의 평온한 상태를 벗어나 온몸으로 사나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멧돼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빨을 갈아 날카롭게 하며, 황소는 뿔로 허공을 치받고 발로 모래를 흩뿌립니다. 사자는 포효하고, 뱀은 분노로 목을 부풀리며, 광견은 험상궂은 얼굴을 드러냅니다. 가장 무섭고 위험한 본성을 지닌 동물들 중에서 분노할 때 더욱 사나워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다른 감정들 또한 감추기 쉽지 않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욕정, 공포, 만용 역시 그 징후가 나타나 미리 알아챌 수 있습니다. 격렬한 감정이 일어나 마음을 휘저을 때면 필연적으로 표정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들과 분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른 감정은 내면에 감출 수 있지만, 분노는 드러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해 얼굴에까지 표출된다는 점입니다.


    이제 분노의 결과와 해악을 살펴보고 싶다면,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분노는 어떤 재앙보다도 인류에게 더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육과 독살, 서로를 향한 추악한 고소, 국가의 붕괴, 씨족과 부족의 전멸, 노예 시장에 팔려간 귀족들의 비참한 운명, 그리고 주택가의 방화로 성벽 안팎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밤하늘을 밝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한때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국가들을 보십시오. 분노가 그들을 파멸로 이끈 것입니다. 수십 리를 가도 인가를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를 보십시오. 분노가 그곳을 황폐하게 한 것입니다. 후세에 불의의 표상으로 기억되는 수많은 지도자를 보십시오. 분노는 침상의 잠든 이를 칼로 찔렀고, 신전 제단으로 도망친 자를 때려죽였으며, 법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을 처참히 찢어 죽였습니다. 아들의 손으로 아버지의 피를 흘리게 했고, 노예의 손을 빌려 왕의 목을 베었으며, 십자가 처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분노는 외부의 불의보다. 자신의 기대가 무시당하고 뜻이 꺾였다는 감정에서 비롯될 때가 더 많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검투사가 죽음을 거부할 때, 그것이 아무리 인간적인 저항이라 해도, 대중은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종종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기대가 무시당했다는 느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순간 관중의 환호는 단숨에 적개심과 분노로 바뀌고 맙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진정한 분노가 아닌 분노와 비슷한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넘어진 아이들이 다시 일어나 땅을 발로 차며 분풀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대개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조차 모릅니다. 물론 그들도 불의에 의해 상처받았다는 느낌이나 응징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불의를 당하지도 않았고 분명한 이유도 없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땅을 나무라며 매질하는 척하고, 이어서 땅이 되어 눈물로 용서를 구하면 아이들의 화는 금세 풀립니다. 가짜 벌이 가짜 상처를 없애주는 셈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미 해를 입은 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가하려는 자들에게 분노한다. 그러므로 분노는 불의로 인한 피해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해를 가하려는 자들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치려는 의도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불의를 저지르려는 마음을 품은 자는, 실질적인 행동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불의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는 벌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장 약한 자조차 가장 강한 자에게 분노하지만, 실제로 벌할 수 없기 때문에 벌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분노가 벌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벌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실현 불가능한 것조차 욕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아무리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벌하고자 할 수 있으니,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해를 가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역시 우리의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분노를 자신이 받은 고통을 되갚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의와 그의 정의 사이에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자면 길고 복잡한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우리의 정의 모두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짐승이 분노하는 것은 불의에 대한 반응도, 타자에게 벌이나 고통을 가하려는 목적도 아니다. 비록 결과적으로 타자에게 벌이나 고통을 주긴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짐승들, 즉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에게는 분노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분노는 이성의 적이면서도 이성이 있는 곳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에게는 충동, 광포함, 사나움, 공격성이 있고, 어떤 쾌락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더 자제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치를 누릴 줄 모르는 것처럼 분노할 줄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멧돼지는 분노하는 법을 잊었고, 암사슴은 달아나는 본능을 잃었으며, 곰은 더 강한 짐승을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당신은 그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분노라고 표현한 것은 단지 흥분하여 달려드는 본능적 반응을 가리킬 뿐입니다. 짐승들은 용서할 줄 모르는 것처럼, 분노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동물에게는 인간의 정념은 없고, 오직 그것과 비슷한 본능적 충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동물에게도 사랑이나 증오 같은 정념이 존재한다면, 우정과 시기, 불화와 화목도 존재할 것입니다. 물론 동물에게도 이러한 정념들을 연상케 하는 어떤 흔적은 분명히 보입니다. 그러나 선이든 악이든, 이런 복합적인 정념은 결국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것입니다.


    사려분별, 예지력, 근면성실함, 성찰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어서, 동물에게는 미덕이 없는 것처럼 악덕도 없습니다. 동물은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 구조도 인간과 전혀 다릅니다. 동물을 지배하는 관제소는 인간의 것과는 다릅니다. 동물에게도 일종의 목소리가 있지만, 그것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명료하지 않고 모호하여 언어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혀가 있기는 하나 고정되어 있어 다양한 움직임을 만들지 못합니다. 또한 동물을 지배하는 관제소는 충분히 섬세하거나 정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물은 자신이 본 대상에 대해 불분명하고 모호한 인상만을 받아들일 뿐이며, 이것이 곧 충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결과 동물은 혼란에 빠져 갑작스럽게 달려들거나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만, 이는 공포나 걱정, 슬픔이나 분노가 아닌 그러한 정념들과 비슷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동물의 행동은 순식간에 정반대로 바뀝니다. 공포에 질려 사납게 날뛰다가도 곧바로 먹이를 먹기 시작하고, 으르렁거리며 미친 듯이 이리저리 달리다가도 갑자기 조용해져서 잠에 빠져듭니다.



    관용에 대하여

    네로 황제여, 제가 관용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당신의 한 마디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제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이후에도 여러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고귀하고 위대한 영혼의 표현이었으며, 지극히 온화하고 꾸밈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급히 내뱉은 말이 아니라, 황제의 자리에서 겪는 내적 갈등 속에서 당신의 선한 본성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군주를 모시기 위해 태어난 충직한 신하 부루스는 두 강도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과 처형 사유를 적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사형 집행 명령서 작성을 미뤘고, 그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요구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작성해 제출했을 때, 서명하기를 꺼린 당신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차라리 글을 몰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 이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든, 그 주변에서 불안한 자유를 누리며 살든, 무력이나 정신으로 제국에 맞서는 모든 민족이 들어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오, 모든 이가 모인 자리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군주와 왕들이 맹세해야 할 말씀입니다! 오. 저 먼 옛날로 돌아가 온 인류가 죄없이 살던 시대를 여는 데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마음속의 온갖 악을 낳는 탐욕을 몰아내고, 공정과 선의로 되돌아갈 때입니다. 인류애, 순결, 신의, 절제-이 모든 미덕을 되살리고, 오랫동안 권력을 타락시켜 온 악덕의 시대를 끝내어. 행복과 순수의 시대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황제시여, 저는 앞으로 많은 것이 그렇게 되리라 희망하며 또한 믿고 싶습니다. 당신의 그 너그럽고 온화한 마음이 제국 전체에 서서히 퍼져 나가 모든 이가 당신을 닮아갈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려면 머리가 맑아야 하듯. 마음에 생기가 넘치느냐 시들어 있느냐에 따라 몸의 모든 부분이 활력 넘치게 씩씩하거나 힘없이 축 처지게 됩니다. 당신의 이 선함에 걸맞은 시민들과 동맹 도시들이 생겨날 것이며, 온 세상에 바른 풍속이 돌아올 것입니다. 어디서든 당신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게 허락해주십시오. 하지만 이는 당신의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아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은 제 성품과 맞지 않으며, 제가 바라는 바는 즐거운 아부가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일까요? 당신이 선한 행동과 말씀에 더욱 깊이 젖어들어, 지금 당신이 보여주신 그 선한 본성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명언들 대부분을 혐오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증오해도 상관없다"라거나, 이와 비슷한 그리스의 시구로 자신이 죽으면 흙과 불을 섞으라 한 말,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다른 말이 그러합니다.


    어떤 성품의 사람들은 비인간적이고 추악한 내용을 다룰 때조차 거친 감정을 한결 부드러운 말로 표현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선하고 온화한 이에게서 격한 감정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차라리 글을 몰랐더라면' 하고 탄식하게 만든 그런 문서에 서명하는 일은, 비록 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매우 드물게, 진심으로 꺼리며,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여러 차례 미루다가 정말 어쩔 수 없을 때에만 해야 합니다.


    관용이란 말은 듣기에 달콤하지만, 이 말에 현혹되어 실제로는 관용과 정반대되는 길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관용의 본질과 특성 그리고 한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관용이란 복수할 힘이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며, 또한 상급자가 하급자를 처벌할 때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의 정의만으로는 관용의 모든 면을 아우르기 어렵고, 이를테면 법정에서 불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기에 여러 정의를 함께 제시하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그래서 관용이란 처벌을 내릴 때 마음을 너그러운 쪽으로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의가 진실에 아무리 가깝다 해도 여러 반론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관용을, 정당한 처벌을 가볍게 해주는 것이라 하면, 참된 미덕은 해야 할 일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다하는 데 있다는 반박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아는 관용이란, 어떤 이가 엄한 처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그 수위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멈추어 좀 더 가볍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평정심에 대하여

    우리는 유연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결정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우연히 맞닥뜨린 상황에 맞춰 움직여야 하며, 평정심의 가장 큰 적인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 계획과 처지가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운은 우리가 꼭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을 강제로 빼앗기 마련이어서, 집착하면 불안과 불행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제력을 잃은 변덕은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과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은 모두 평정심을 위태롭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든 모든 외적인 것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마음은 자신을 신뢰하고 기뻐하며, 자신의 것을 바라보아야 하고, 외부의 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물러나 있어야 하며, 자신에게 집중하고, 어떤 것도 손실이라 여기지 않으며, 불운이나 재난조차 좋은 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 제논은 배가 난파되어 전 재산이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명이 나를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철학에만 전념하라 명하는구나. 어떤 참주가 철학자 테오도로스를 위협하며, 그를 죽이고 시신조차 매장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당신은 내 한줌의 피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뿐이오. 시신이 땅 위에서 썩든 아래에서 썩든 그것이 내게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이야말로 어리석은 자요."


    카누스 율리우스는 우리 시대에 태어났지만,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가이우스와 오랜 논쟁을 벌인 뒤 자리를 뜨려 하자, 저 팔라리스가 "헛된 희망에 빠져 잘못 처신하지 않도록, 내가 그대를 끌고 가 처형하라 명했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카누스는 "최고의 군주시여,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이 대답에서 여러 가지 뜻을 읽을 수 있어, 그가 정확히 무슨 의도였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카누스는 가이우스가 너무나 잔인해서, 죽이는 것조차 은혜로 여기게 만든다며 모욕하려 한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자식을 잃고 재산을 빼앗기고도 감사하다 말해온 것처럼, 가이우스의 광기가 일상이 된 것을 꾸짖은 것일까요? 혹은 죽음을 자유라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인 것일까요? 어떤 의미였든, 그의 대답은 위대한 영혼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가이우스가 그런 명령을 내린 후 다시 그를 살려두라 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카누스는 처형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이우스의 이런 명령들이 충실히 이행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카누스가 처형될 때까지 열흘 내내 아무 근심 없이 지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한 말들, 보여준 행동들 그리고 그의 평정심, 이 모든 것이 실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형수들을 끌고 가던 백인대장이 강도들과 장기를 두던 카누스에게도 일어서라 명령했습니다. 호출받은 그는 말들을 세고 나서 상대에게 "이보게, 내가 죽은 후에 자네가 이겼다고 거짓말은 하지 말게"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백인대장에게 목례하며 "자네는 내가 말 한 개 만큼 앞서 있었다는 것을 증언해주게"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카누스가 장기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조롱한 것입니다.


    친구들이 그를 잃는 것을 슬퍼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들 슬퍼하는가? 자네들은 영혼이 불멸하는지 궁금해하지만, 나는 이제 곧 알게 것일세.”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진리를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죽음조차 탐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친구인 한 철학자가 뒤따르다가, 우리의 신 카이사르에게 매일 제를 올리는 언덕이 가까워졌을 때 "카누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심경이 어떠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카누스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을 영혼이 인식할 수 있는지를 관찰할 작정일세"라고 답한 뒤, 무언가를 발견하면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폭풍의 한가운데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십시오. 자신의 운명조차 진리 탐구에 활용하고,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의 영혼에게도 물음을 던지며, 죽는 순간뿐 아니라 죽음 자체에서도 배우고자 하는, 영원불멸할 자격이 있는 영혼을 보십시오. 이 사람보다 더 마지막 순간까지 철학을 놓지 않은 이는 없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인물은 쉽게 잊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의 관심 속에 늘 살아 있어야 합니다. 가장 고귀한 인물이며, 가이우스의 희생자들 중 가장 위대한 분이여,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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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