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지은이 : 이진우
출판사 : 추수밭(청림출판)
출판일 : 2025년 08월




  • 주로 심리학의 관점에서 다루어 왔던 ‘부정적 감정’을 고전 철학자 세네카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화에 대하여》를 비롯한 세네카의 저서 속 부정적 감정에 대한 통찰을,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와 생각을 통해 풀어내고 있습니다.


    화내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왜 우리는 광기에 휩싸이는가

    '순간의 광기': 미치지 않고서야 화를 낼 수 없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우리 시대의 질병은 모두 감정과 관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우울해하는 증상이나 자신을 특별히 여기며 우쭐대는 나르시시즘 모두 감정의 병이다. 어느 날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가 어느 날은 갑자기 울적해지는 변덕이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변화하는 감정의 날씨에는 일기예보도 통하지 않는다. 감정은 갑자기 일어났다 순식간에 스러진다.

     


     

    세찬 감정의 바람은 언제나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마음을 흔든다.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화', 즉 '분노'다. 화라는 부정적 감정을 방치하면 우리의 평온을 파괴할 수 있다. 화가 깨뜨리는 것은 평화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인격을 파괴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성격이 더럽다고 불린다. 다른 사람이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화를 내면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상처받은 자신에게는 더욱 화가 난다.

     


     

    화난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분명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고, 곤혹스러워진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말과 행동이 평상시와 사뭇 달라지며 분노하는 모습을 우리는 정신이 이상해진 증후로 받아들인다. 세네카에 의하면 "화는 순간의 광기"이다. 화가 난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는 미친 사람이 된다. 평상시는 다정다감했는데 갑자기 돌변하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짐승'이 되고 '괴물'이 된다.

     


     

    화가 무서운 것은 우리를 변신시키기 때문만은 아니다. 화는 격정적으로 표현된다. 격렬한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므로 감출 수 없다. 어쩌면 화는 스스로 드러나려는 가장 강렬한 충동인지도 모른다. 감출 수 없고 억누를 수 없다는 게 화의 특징이다. 웃는 얼굴로 화를 낼 수는 없다. 화는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누르기 어려운 감정이다. 화난 사람은 험악한 표정으로 고성을 지르고, 온몸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사나운 몸짓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화는 스스로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화의 태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왜 화를 냈는지 나름의 이유를 찾지만, 화가 난 순간에는 사실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짐짓 화가 난 것처럼 꾸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화는 자신을 꾸미지 못한다. 까닭 없이 불현듯이 생기는 화는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기 때문이다. 분노라는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어떤 좋은 말과 이성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북받치는 감정의 노예가 될 뿐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들 중에서도 화가 가장 나쁘고 가장 독성이 강하다고 여겼다. 왜 화는 그토록 끔찍하고 파괴적인가? 화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안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화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현대인의 대표적 질병인 화에 관한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세네카의 스토아철학은 좋은 길잡이가 된다. 그가 《화에 대하여》에서 다룬 감정에 관한 철학적 화두는 사실 그의 모든 글을 관통한다. 감정을 잘 다스려야 우리는 이성적 존재가 된다. '좋은 삶'의 지혜는 오로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얻을 수 있다.

     


     

    21세기는 감정의 시대다. 우리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말을 진부하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려면 감정을 잘 보살피고 관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라는 격정을 다스릴 수 있는가? 화에 휘말릴 때 우리가 잠시나마 자제력을 잃는 이유는 이성의 마비나 결여 때문은 아닌가? 스토아철학은 화가 우리의 이성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화를 내면 붕괴하는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부수면서 돌무더기로 변하는 것처럼 한순간에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예의를 잊고, 개인적 유대감을 무시하고, 목표에 끊임없이 집중하고, 합리적인 숙고에서 차단되고, 별다른 이유 없이 흥분하면서 무엇이 정당하고 진실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다시 부숴 돌무더기로 만드는 것이 바로 화다. 화내는 사람은 자신의 분을 못 이겨 더욱 화를 내고 결국은 완전히 파괴된다. 화가 '순간의 광기'라는 말은 결코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화는 치명적 현실이다.

     


     

    화를 늦춰야 화를 통제한다

     

    우리는 화가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일단 화가 나면 쉽게 통제하지도 못한다. 화는 날벼락처럼 느닷없이 찾아와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음을 장악한다. 분노의 화를 입지 않으려면 그 최초의 충동에 굴복하지 않도록 싸워야 하지만,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 또한 쉽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화를 극복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단서는 화가 생겨나는 과정에 숨어 있다. 화가 일어나는 세 단계를 살펴보면 화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처음 두 단계에 있다.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하면 모든 게 너무 늦다. 분노 조절이 어려운 이유는 세 단계가 너무 빨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초기 감각이 있을 때 그 과정을 늦추는 것이다.

     


     

    화는 일단 몸 안에 들어오면 마음을 망가뜨리는 기생충과 같아진다. 따라서 가장 좋은 치료책은 그 감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세네카는 화를 다스리는 치유법은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화에 빠지지 않는 것과 화난 상태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화에 빠지지 않으려면 화라는 감정을 이해해야 하고, 화났을 때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이성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화라는 격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그 감정에 거리를 둬야 한다. 이성을 사용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최초에 찾아오는 화의 느낌은 본능적인 감정이어서 이성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찌르려 하면 저절로 눈을 감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화의 최초 감정이 세찬 불길로 치솟아 우리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화의 불길에 기름을 붓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이성이다. "이성은 비록 화의 최초 움직임을 극복할 수 없지만, 우리가 이러한 움직임에 익숙해지고 끊임없이 주시한다면 그 힘이 약해질 수 있다. 숙고에서 생겨나는 화의 두 번째 움직임은 숙고로 근절된다." 화를 다스리려면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을 이성에 줘야 한다. 화의 불길이 닿지 않도록 공간적 거리를 두고, 화의 원인을 숙고할 시간적 거리를 둬야 한다. 세네카는 화를 다스리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지연'이며, 화가 일어나는 세 단계 전체를 늦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화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늦추는 것이다. 처음부터 용서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화의 지연을 요구하라. 화가 처음 공격할 때는 피해가 크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물러설 것이다. 한꺼번에 화를 뿌리 뽑으려고 애쓰지 마라. 하나하나 조금씩 뽑아내면 언젠가 화를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다. “

     


     

    감정은 순간적이고, 이성은 시간이 필요하다. 느낌은 생각할 겨를 없이 찾아온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한 말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만,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상처를 준다. 밤새도록 끙끙대고 일했지만 과제를 끝내지 못해 속상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친구가 그를 보고 "너, 머리가 왜 그렇게 수세미 같니!"라고 지적했다고 하자. 이 지적에 화를 내자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미안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제발 생각 좀 하고 말해!" 우리는 타인의 생각 없는 말과 행위에 화가 나고, 자신의 화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더욱 화가 난다.

     


     

    스토아철학은 처음부터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외부의 자극에 마음이 일으키는 최초의 움직임은 ‘인상’이다. 우리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인상에 좌우되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스토아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철학자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과제는 인상을 시험하고 구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중하게 시험하지 않은 인상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이다.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인상에 따라 아무 구별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다. 화는 급격하고 격렬하게 일어나는 부정적 첫인상이다. 화를 다스리려면 이러한 첫인상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동물은 외부의 자극에 즉각 반응하지만, 인간은 거리를 두고 반응한다. 독사는 다른 생명체가 가까이 다가오면 목을 불룩하게 부풀리면서 대가리를 쳐들지만, 인간은 우선 다가오는 것이 자신을 위협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거리를 둔다는 건 본래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자극에 바로 반응하지 않고 시간을 두어야 생각할 수 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일종의 공간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이 있다. 우리는 즉각 화로 반응할 수도 있고, 성내게 만드는 대상을 피할 수도 있다. 인간의 자유는 선택하는 데 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잠시 멈추고 반응을 늦추면, 그 멈춤과 늦춤에서 유익한 반응을 선택할 자유가 생긴다.

     


     

    세상사에 거리를 두면 화낼 일이 별로 없다. 정작 화가 나도, 거리를 두면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마음이 먼저 인상에 동의하고 느낌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잠시 멈추고 화를 늦추면 첫 번째 감정과 인상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화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의 첫 번째 자극을 곧바로 거부하고, 첫 번째 불꽃에 맞서 싸우고, 화에 굴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화로 인해 우리가 항로에서 벗어나면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마음에 들어온 열정에게 의지가 주권을 내어주면 이성은 한 치도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후 화는 네가 허락하든 말든 원하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화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화가 우리를 통제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화를 통제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다.

     


    불평과 감사: 짜증 내지 않으면 짜증 나지 않는다

    짜증은 내어서 무얼 하나

     

    인생은 충분히 길지만,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한다. 특히 끊임없이 불평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는 것 같다. 세네카는 불평과 짜증이 불편함에 대한 단순한 감정 표출이 아니라 내면의 평온을 얻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세네카와 다른 스토아철학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감정적 반응의 원인은 세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평과 짜증은 그 유발 원인보다 훨씬 더 우리의 마음을 해친다. 불평하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의 불평과 짜증을 견디지 못한다.

     


     

    불평과 짜증이 얼마나 내면에 나쁜지는 늘 불평만 하는 사람 곁에서 한 시간만 보내면 알게 된다.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음식점에 갔다. 손님이 많아서 종업원이 빨리 자리를 안내하지 않자 친구는 요즘 식당은 돈 버는 데만 신경 쓰고 친절하지 않다고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이 싱겁다, 반찬이 짜다, 음식이 가격만큼 맛있지 않다고 한다. 벽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에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면 음악으로 불평의 주제가 옮겨간다. 주제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는 불평거리를 찾아낸다. 그는 '만성적 불평가'다. 이러한 불평과 짜증이 다른 사람에게 유독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는 '악성 불평가다. 마음의 평온을 바란다면 이런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못마땅할 때 불평한다. 마음에 탐탁하지 않아서 역정을 내는 것을 짜증이라고 한다. 핵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사건이든 좋게 여겨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불평하고 짜증을 낸다. 불평과 짜증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자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특정한 것에 짜증 내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에 짜증 나게 된다. 세상이 싫어진다.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에 처할 때 우리는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압박과 스트레스는 우리를 짜증 나게 만든다. 화가 나거나, 좌절하거나,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몸에 축적되어 말 그대로 신체적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불평과 짜증은 억눌린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하여 불편한 감정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불평하고 짜증을 낸다. 그쪽이 비교적 쉽고, 순간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고,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불평할 때 같이 불평하면 일종의 동지애와 연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불평과 짜증으로 좋아진 기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불평은 또 다른 불평으로 이어지고, 짜증은 더 많은 짜증을 유발한다. 억눌린 부정적 감정을 불평으로 해소할 때 우리는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는 대신 우회한다. 우리는 불평을 촉진하는 사람에게 직접 불평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애꿎은 친구와 가족에게 불평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대화하지 않고, 함께 불평할 동맹을 찾는다. 마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지 않고, 마음에 쌓인 부정적 기운을 잠시 빼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이 불평하면 할수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좌절감도 더 커진다.

     


     

    불평은 여러 기능 장애를 일으킨다. 불평은 불만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을 격노하게 만들고, 신뢰를 깨고, 불평하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불평하는 데 소비한 모든 에너지는 엄청난 시간과 생산성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평하게 된 초기의 좌절을 더욱 증폭한다. 불평은 어떤 것도 개선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순간적인 기분 완화를 위해 반복적이고 중독적으로 불평한다.

     


     

    세네카는 불평과 짜증이 중독성 있는 순간적 기분 전환제라는 점에 주목한다. 아무리 현자라고 해도 불평과 짜증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스토아철학은 불평하려면 제대로 불평하라고 조언한다. 불평의 원인이 되는 사람에게 직접, 그리고 신중하게 불평해야 한다. 사사건건 불평하는 친구에게 짜증이 난다면 직접 말해야 한다. 소중한 시간을 함께 잘 보내고 싶으니 불평은 하지 말아 달라고. 물론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감정적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 불평하고 짜증을 낸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릴 때 사람들은 짜증을 낸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감정적 용기이다.

     


     

    물론 짜증 나는 일에 짜증을 내지 않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의 불평을 들으면서 스스로 짜증 내는 일이 오히려 쉽지, 짜증 내지 말라고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은 어렵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불평과 짜증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나쁜 습관이다. 이러한 습관을 떨치기 위해서는 '불평하지 않고 한 달 보내기' 등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스토아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실제로 이러한 실천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화를 내고 싶지 않다면 그 습관을 키우지 말고, 그 습관이 자랄 수 있는 무엇도 그 습관 앞에 던져놓지 말라. 무엇보다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화내지 않은 날을 세어보라. '나는 매일 화를 냈고, 그 후로는 이틀에 한 번, 그러고는 사흘에 한 번 화를 냈다.'만약 당신이 30일 동안 그런 식으로 계속한다면 신께 제물을 바쳐라. 왜냐하면 그 습관은 먼저 약해졌고, 다음에는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어떤 괴로움도 느끼지 않았고, 다음 날도, 그리고 두세 달 동안 계속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나에게 괴로움을 일으킬 만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경계했다.'

     

     

    너는 너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목적을 가져라

     

    현대인은 수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유혹은 마음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유혹은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은 한계가 없다. 하나의 대상에서 순식간에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욕망이다. 텔레비전의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의 여행 사진들은 먼 곳을 향한 우리의 동경과 욕망을 자극한다. 우리의 욕망은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으로 향했다가 금세 만년설로 덮여 있는 알프스로 질주한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세계 끝의 오지가 방송에 소개되자마자 수많은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다는 사실은 현대인의 욕망을 말해준다. 매우 아름다운 관광지로 유명한 스위스 동부의 베르귄에는 인스타그램 과시용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간판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행위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여기에 올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경고문이 효과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올린 이미지에 홀려 너도나도 똑같은 것을 경험하려고 한다. 여행에 목적지가 없을 수 없다. 이번에는 스위스 알프스라면, 다음에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 아이슬란드로 향한다. 이번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다음에는 태국에서 코끼리를 탄다. 물론 이렇게 여행하면서 마음을 푸는 것은 커다란 기쁨 중 하나다. 그러나 여행의 기쁨이 진정한 만족이 되려면 우리의 마음이 여행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고 여유가 있어야 한다. 목적지 자체가 여행의 목적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여행을 많이 하려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세네카의 답은 간단명료하다.

     


     

    그들은 한 여행에 이어 또 다른 여행을 떠나고, 한 구경거리를 다른 구경거리로 바꾼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했듯이, 이것이 각자가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방식이지만, 자신을 피하지 못한다면 도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호위대이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동반자 중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동반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약하고, 어떤 수고나 즐거움도 견뎌내지 못하고, 우리 자신과 그 어떤 것도 오래 견뎌내지 못한다. 여행에서 의미 있는 것을 얻으려면 마음이 그 경험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는 우리가 인생에 무엇을 가져오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물론 사회와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 무엇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가? 우리가 올바로 결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삶의 목적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또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개개인의 대답이 바로 삶의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를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

     


     

    현명한 사람은 목적을 향한 단 하나의 길을 따르는 꾸준하고 차분한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때문에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여행지를 바꾸듯이 한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옮겨 다닌다. 한때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원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돈보다는 여유 있는 삶을 원한다. 우연의 바람이 여기저기로 날려 보내는 것처럼 자주 계획을 바꾼다. 인도하는 목적에 따라 자신의 삶을 계획하는 사람은 사실 극소수에 불과하다.

     


     

    삶의 목적은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직업을 선택하고, 결혼을 결정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은 계획의 문제이다. 직업과 결혼과 가정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도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종종 목적이라는 말에 의구심을 품고, 목표 또는 계획과 혼동한다. 목적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가치와 관련 있다. 삶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를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삶의 목적은 밤하늘의 북극성이나 나침반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 우리는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장애물 자체가 삶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험준한 장애물을 넘지 않고서는 평탄한 능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이라는 길에도 수많은 위험과 장애물이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삶의 목적이 필요하다. 길을 가로막는 강을 건너야 할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방향을 파악해야 한다.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무엇을 피해야 할지 알고 싶을 때마다 당신의 가장 큰 선, 즉 당신의 삶 전체의 목표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그 목표에 따라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염두에 둔 사람만이 삶의 세부 사항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작은 일들로 마음을 어지럽혀 삶 전체를 보지 못한다. 궁수가 화살을 쏘려면 무엇을 맞히려고 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물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장 큰 선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삶의 목적과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은 모두 개인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리고 삶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강조한다. 목적의 상대화가 목적 자체를 부정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나는 길은 어쩌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여행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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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