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의미를 비추는 거울로 바라보며, 죽음이 왜 우리에게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 되는지 철학적 논증을 통해 설명한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고전적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죽음이 해로운가’라는 질문을 상실과 박탈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죽음이 나쁜 이유는 고통스러운 죽은 상태 자체가 아니라 살아 있었다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가치 있는 경험들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책은 죽음이 좋은 것들도 나쁜 것들도 함께 거두어가는 양가적 성질을 지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자살이나 안락사처럼 윤리적으로 민감한 주제까지 정면으로 다루며 ‘삶의 가치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죽음을 탐구하는 과정은 결국 생의 방향과 의미를 다시 살피게 만드는 성찰의 여정으로 이어지며, 삶이 풍요로울수록 죽음이 무겁다는 역설을 통해 지금의 삶을 더 충만하게 가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죽음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삶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는 책의 통찰처럼, 이 책은 독자가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더 깊이 음미하고 스스로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갈 힘을 얻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 저자 스티븐 루퍼
저자 스티븐 루퍼는 트리니티대학교 철학 교수이다. 베일러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도덕철학)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아왔다. 특히 예일대학교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보다 1년 앞선 1994년에 시작해 지금껏 이어가고 있는 ‘죽음의 철학(Philosophy of Death)’ 강의가 학부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의 제안으로 그 강의를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지은 책으로 ‘케임브리지 철학의 동반자’ 시리즈인 ‘삶과 죽음(Life and Death)’, ‘필멸의 대상들: 삶과 죽음을 꿰뚫는 존재의 동일성과 지속성(Mortal Objects: Identity and Persistence through Life and Death)’, ‘존재한다는 것: 실존주의 사상 입문(Existing: An Introduction to Existentialist Thought)’, ‘상처받지 않을 권리: 행복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Invulnerability: On Securing Happiness)’, ‘회의론자들(The Skeptics)’, ‘본질적 지식(Essential Knowledge)’ 등이 있다.
■ 역자 조민호
저자 조민호는 안타레스 대표이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단행본 출판 편집자로 일하면서 인문 및 경제경영 분야 150여 종의 책을 기획, 편집했고 저작권 에이전트로도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 ‘불안을 철학하다’, ‘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 ‘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 ‘이코노믹 허스토리’, ‘지루할 틈 없는 경제학’, ‘로빈 니블렛의 신냉전’,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리더십의 심리학’ 등이 있다.
■ 차례
서문_생명 과정의 돌이킬 수 없는 중단
제1부_죽음(DYING)
제1장_살아있다는 것
생명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 / 인간성, 인격성, 동일성
제2장_죽는다는 것
생명의 노화, 종결, 중단 그리고 존재의 소멸 / 죽었다는 기준
제3장_죽음에 관한 논쟁들
대칭 논증 / 시점의 문제 / 평온에 이르는 길
제4장_필멸의 해로움
삶의 타산적 가치 / 해악 논제
제5장_죽음은 언제 해로운가?
에피쿠로스의 도전 / 죽음이 나빠지는 다섯 시점
제2부_죽임(KILLING)
제6장_죽인다는 것
해악 설명 / 주체 가치 설명 / 동의 설명 / 결합 설명
제7장_스스로 죽는 것과 남의 손에 죽는 것
자살과 안락사 / 합리적으로 선택한 죽음 / 도덕적으로 선택한 죽음 / 막거나 돕거나
제8장_태아 살해의 딜레마
낙태 반대 논증 / 낙태 옹호 논증 / 철학으로 풀기 어려운 유일한 죽음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우리가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삶을 더 빛나게 하는지 찬찬히 짚어보자. 상실, 박탈, 가치의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삶과 죽음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이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여정 끝에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더 깊고 충만하게 만들지 스스로 물어보자.
죽음을 철학하다
죽음(DYING)
죽는다는 것
생명의 노화, 종결, 중단, 그리고 존재의 소멸
- 생명의 종결
죽음은 삶의 종말이며, 개별 죽음은 개별 존재의 생명 과정이 끝나는 것이라는 설명은 자연스럽고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끝’에 있다. ‘종말’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 여러 복잡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아울러 곧 살펴보겠지만, 살아있지 않게 되는 것과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사이의 관계 역시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삶이 끝난다는 것과, 삶이 끝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기원전 399년에 끝났으나 그 이후로도 그의 삶은 계속 끝난 상태로 남아 있기에 소크라테스는 죽은 자로서 존재한다. ‘구성’이라는 단어처럼 ‘죽음’이라는 용어도 모호하다. ‘과정’과 ‘결과’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일 수도 있고, 그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죽음은 삶이 끝나는 일련의 사건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삶이 끝난 상태 또는 그런 사실을 가리킬 수도 있다. 후자의 의미는 헷갈릴 것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전자, 즉 ‘삶이 끝나는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히 하고자 한다.
대다수 이론가는 삶의 종말, 어떤 존재의 ‘생명 과정 종결’을 다소 순간적인 사건으로 해석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를 하나의 과정이자 사건으로 보는 대안적 관점을 제시한다. 삶의 끝을 과정으로 생각하면 죽음은 ‘경주’나 ‘추락’에 비유할 수 있다. 경주는 뭔가가 출발점을 떠날 때 시작되고, 결승점에 도달하면서 끝난다. 추락은 뭔가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떨어질 때 시작되고, 표면에 충돌하면서 갑자기 끝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어떤 존재가 죽어갈 때 시작되고, 그 과정이 완료되면 끝난다. 예를 들어 세포의 일반적인 죽음은 자멸 과정이 일어날 때 시작되고, 세포자멸사가 완료되면 끝난다. 죽음을 과정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다음의 두 가지 주장을 뒷받침한다.
첫째, 죽음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존재가 죽어가는 동안에 그 존재의 생명 과정은 점진적으로 꺼져간다. 모든 생명 과정이 최종적으로 사라지기까지, 비록 아주 짧더라도 일정 시간이 흐른다.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은 비교적 빠른 죽음을 초래했지만, 그 역시 순간적으로 죽진 않았다. 아마도 독이 호흡 마비를 일으켰을 테고, 그때 죽음이 시작됐을 것이다. 호흡이 끊겨 혈액 순환이 멈춘 뒤에도 소크라테스의 몸속 세포는 약 4분에서 10분 동안 대사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 뒤 세포막이 파열되면서 효소를 방출해 세포를 내부에서부터 소화하며 죽음의 과정을 완료했을 것이다. 이 자가소화 과정은 대뇌와 같은 장기에서 더 빨리 일어났고, 이후 몸 전체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생명 과정은 한순간에 끝난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은 시간이 걸렸다.
둘째, 죽음은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에서 죽음은 출생과 닮았다. 출생은 언제 시작될까? 옥시토신(oxytocin) 호르몬이 자궁 수축을 유도할 때일까, 아니면 자궁 수축이 태아를 밀어낼 때일까? 수축이 잠시 멈췄다가 몇 시간 후 재개된다면? 또는 아기가 산도를 통과하기 시작할 때일까? 진행이 오랫동안 멈춰 있는 경우라면? 이런 질문으로도 알 수 있듯 출생도 정확히 언제 시작되는지 분명치 않다. 죽음도 그렇다. 소크라테스가 호흡을 멈췄을 때도 그의 혈액은 한동안 여전히 산소를 운반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기존의 역할을 이어갔을 것이다. 혈액 순환이 끝나고서야 신체 조직들이 서서히 죽기 시작했고, 완전히 죽기까지 또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정확히 언제 시작됐고 언제 끝났는지 명확히 특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죽음의 경계는 흐릿하다.
일부 철학자들도 삶의 종말을 이야기할 때 이를 (어느 정도는) 한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어떤 유형의 사건일까? 세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다.
첫 번째로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의 완료, 즉 마지막 삶의 상실을 가리킬 수 있다. 이를 ‘종결 죽음(denouement death)’이라고 부르자, 이 죽음은 불이 꺼지는 것과 비슷하다. 마지막 불씨가 사그라지기 전까지는 불이 꺼졌다고 할 수 없듯,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죽음이 일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경주’나 ‘추락’ 같은 사건과 다르다. 경주나 추락이 그 과정의 마지막 순간만을 지칭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두 번째로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이 본격화하는 시점 또는 삶의 지속 가능성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을 가리킬 수 있다. 소방관들이 불을 거의 다 끈 상태에서 아직 불씨가 몇 개 남아 있더라도, 불이 다시 번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진화 완료’를 선언할 수 있다. 불이 완전히 꺼졌을 때가 아니라, 되살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생명 과정이 완전히 멈추기 전이라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임계 죽음(threshold death)’이라고 부르자. 다만 이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과 죽음이 확정된 상황은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죽어가기 훨씬 이전에도 죽음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상태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치명적인 독이 몸에 들어간 순간, 그 독이 아직 건강을 해치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도 죽음은 이미 확정됐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 해당 존재가 죽었다고 보진 않는다. 실제로 임계 죽음이 발생한 이후에도 죽어가는 과정은 상당 부분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 번째 해석도 있다. 몇몇 도덕철학자들은 죽음을 신체의 다양한 생리적 체계가 통합된 전체로 기능하는 능력을 돌이킬 수 없이 상실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를 ‘통합 죽음(integration death)’이라고 부르자 하지만 통합 기능의 상실이 왜 죽음 과정에서 중요한 지점인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굳이 이유를 부여하자면 아마도 이 통합 죽음이 임계 죽음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통합 죽음이 임계 죽음을 포함한다는 해석이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임계점이 통합 상실보다 먼저 올 수도 있다. 면역 체계에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면, 통합된 생리 작용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미 통합 죽음이나 임계 죽음 상태에 있다면, (삶의 고통이나 무의미함을 없애 준다는 명분으로) 순식간에 소각하거나 압살하는 방식으로 종결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는 정당할까?
죽음의 초기 단계라면,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기 전 단계라면, 죽어가는 과정을 되돌릴 수도 있다. 세포는 일단 세포자멸사가 시작되더라도 그 과정을 역전시킬 수 있다. 개별 유기체도 마찬가지다. 호흡과 심장 박동이 한동안 멈췄다가도 ‘소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세포가 분명히 ‘죽어가고(dying)’ 있었으나 그 과정이 중단됐거나 거꾸로 되돌려졌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죽음은 죽어 있는 ‘상태’이자 죽어가는 ‘과정’인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규정 가능하다. 하나는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른 순간인 ‘임계 죽음’이고, 하나는 죽음의 과정이 완전히 끝나는 순간인 ‘종결 죽음’이다.
죽음에 관한 논쟁들
삶이 좋은 것이라면, 우리가 비록 매년 더 살 때마다 이전 해보다 삶의 가치가 떨어지더라도 오래 사는 게 나은 일인 듯하다. 이처럼 삶을 더 오래 살수록 좋다는 논리는, 죽음은 더 나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해악 논제(harm thesis)’다. 죽음은 죽는 당사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며, 그런 의미에서 ‘해악’을 가한다는 것이다.
시점의 문제
이제 에피쿠로스가 ‘해악 논제’에 제기한 반론을 살펴보자.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죽음이 우리에게 입힐 해악을 경험할 ‘시점’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은 해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닐세.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네.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일세.
에피쿠로스의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만약 죽음이 죽은 개체에 해악이 되려면 죽음 때문에 해를 입는 ‘주체’가 있어야 하고, 그 해가 무엇인지 ‘내용’이 분명해야 하며, 그 해가 발생하는 ‘시점’이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시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 언제 나쁘냐는 것이다. 우리가 죽고 없는 마당에 해로울 게 어디 있느냐는 얘기다. 이 해악의 ‘시점’ 문제를 따져보면 삶이 끝나자마자 죽음이 따른다는 점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죽음이 살아있는 동안 해를 입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이후에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후자를 생각하면 그 즉시 해를 입는 ‘주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죽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해를 입는 주체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해악이 발생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반면 전자의 경우, 즉 죽음이 살아있을 때 해를 입힌다고 보면 해를 입는 ‘주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지만, 죽음이 우리에게 입히는 해악의 ‘내용’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죽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살아있는 동안 아무런 해도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에피쿠로스는 ‘해악 논제’를 거부했다. 에피쿠로스는 주로 죽음 자체에 초점을 맞췄지만, 그의 논증이 타당하다면 죽음 이후의 모든 사건에도 이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다면, 즉 이 논증을 통해 해악 논제를 부정한다면,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해롭지 않게 된다. ‘사후 해악 논제’도 동시에 부정되는 것이다. 이제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필 텐데, ‘사후 해악 논제’와 관련한 반론은 덩달아 성립하니 따로 언급하진 않을 것이다.
- 죽음은 우리에게 해악을 끼칠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대신, 죽음이 우리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우리에게 해롭다고 간주할 수 있는 필요조건을 제시하고, 죽음은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에피쿠로스가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은 이렇다. 어떤 사건(상태)이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하려면 그것이 불쾌한 어떤 상황을 초래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그런 상황은 모두 ‘고통’이나 ‘고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이 해당 사건 발생 시점과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해당 사건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훨씬 전에,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발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150년 후에 폭발하는 장치를 설치해 우리를 죽게 한다면, 그 사건은 오래전에 발생했더라도 고통을 초래한다.
에피쿠로스의 해악 기준에 따르면 죽음의 상태나 죽음의 과정 ‘그 자체’는 해롭지 않다. 죽음이 반드시 고통을 유발하진 않는다. 의식을 잃고 평온하게 죽는다면 고통 없이 죽는 것이고,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기준대로 해롭지 않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에게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닐세”라고 썼을 때, 죽음이 해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결코’ 해롭지 않다고 주장했고, 그의 기준에 따르면 죽음은 절대로 그 당사자에게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눈에 띌 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고자 죽음이 우리에게 그 어떤 상태(불쾌하든 아니든)도 초래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죽음은 오직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게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주장은 ‘과정’으로서의 죽음 개념에 비춰 명백한 거짓이다. 완전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생명 활동이 사라진 상태로 옮겨가는 일은 실제로 고통을 수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한 선택지 중 하나는 ‘종결 죽음’ 개념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지는 순간은 매우 짧게, 어쩌면 눈에 띌 만한 영향을 전혀 주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으니까. 에피쿠로스는 바로 이 점을 들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종결 죽음’은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논증을 이어갈 수 있다.
17.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사건(상태)은 그것이 종결 죽음인 한 우리에게 해악을 끼칠 수 없으며, 죽음의 과정은 설령 해를 끼치더라도 그 과정이 진행되는 시점에서만 그렇다.
그렇더라도 이 결론은 우리가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해결하지 못한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은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논리로는 우리의 근본적인 불안을 누그러뜨리기 어렵다. 우리가 걱정하는 부분은 삶을 잃는 게 나쁘냐에 있지, 생명이 거의 다 소진된 상태에서 마지막 한 조각을 잃는 게 나쁘냐가 아니다. 게다가 이런 결론은 에피쿠로스 자신에게도 적절하지 않다. ‘죽어가는 과정’이 해로울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좁은 의미의 해악 기준을 인정하더라도 그는 결국 ‘죽어가는 과정’이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고는 끝내 입증하지 못했다. 만약 제대로 그가 ‘죽은 상태’는 우리에게 나쁠 수 없고, ‘죽어가는 과정’도 오직 고통스러울 때만 해로울 수 있음을 보여줬다면, 그 철학적 성취는 어마어마한 업적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도 못한 죽음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가질 이유도 사라졌을 것이다. 고통 없는 죽음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이 전혀 없으니까. 죽지 않았다면 얼마나 풍요롭고 특별한 삶을 살았을지 따지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죽음이 언제 닥치든, 어떤 삶을 막아버리든, 고통 없는 죽음이라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죽임(KILLING)
스스로 죽는 것과 남의 손에 죽는 것
합리적으로 선택한 죽음
자살은 절대로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죽음은 결코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없다고, 설령 일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도 합리적 판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는 없기에 거의 모든 자살은 정신적 손상에서 비롯된 비극이라고 말이다.
자신을 살해하도록 허용하는 경우에도 비슷한 주장이 가능하다. 전혀 이익이 되지 않으며, 그 또한 제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칼로 자기 손목을 긋는 등의 자해 행위를 봐도 하나 같이 정신적 균형이 무너진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 아니냐는 얘기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해로워 보이는 일이 사실은 우리를 이롭게 할 수도 있어서 반드시 정신적 불안정의 증거가 되진 않는다. 유명한 사례도 있다. 애런 램스턴(Aron Ralston)은 2003년에 유타(Utah) 주의 외딴 협곡을 혼자 등반하던 중 좁은 절벽 사이를 타고 내려가다가 떨어져 내린 바위에 오른팔이 끼어서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됐다. 그는 127시간을 버티면서 팔을 빼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주머니칼로 짓눌린 팔을 잘라내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해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선택은 옳았고, 오히려 그의 삶을 이롭게 했다. 그는 살았고, 그 일로 유명 인사가 됐으며, 책도 펴내고 강연도 하면서 삶이 더 풍성해졌다.
- 타산적 고려
사실 우리는 이미 답에 가까이 왔다. 죽음이 우리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것이 이미 확립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어떤 시점에서 죽는 것이 계속 사는 것보다 나은지 판단하려면 우리가 그때 죽었을 경우의 삶과 계속 살아갔을 경우의 삶을 비교하면 된다. 전자가 후자보다 낫다면 죽음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한다.
죽음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경우는 고통의 수준이 한계 상황에 이르렀고,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그 고통을 낮출 수 없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 아닌 정신적 고통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신적 고통에도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는데, 일테면 기계나 타인의 의존 없이는 일상적인 활동이 전혀 불가능한 자율성 상실을 들 수 있다.
자살이 합리적일 수 있는지 오랫동안 연구한 철학자 카를로스G. 프라도(Carlos G. Prado)는 자살을 ‘종결적 자살’과 ‘예방적 자살’로 구분했다. 종결적 자살은 “현재의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자살이고, 예방적 자살은 “앞으로 닥칠 참을 수 없는 말기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선택하는 자살이다. 프라도는 두 경우 모두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어떤 질병이 곧 끝없는 고통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으리라고 예상한다면, 병이 더 진행되기 전에 삶을 끝내는 게 이익일 수 있다. 물론 시점이 중요하다. 초기 단계에는 삶이 견딜 만하고 여전히 좋은 상태일 수 있기에 우리 삶을 끝내는 선택을 미루는 편이 낫다.
그런데 우리 삶을 끝내는 선택이 타산적일 수 있음을 보이려면 죽음이 이익에 부합할 수 있다는 증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살의 수단, 즉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도 고려해야 한다. 어떤 방식은 너무 느리고 고통스러워서 적절하지 않고, 또 어떤 방식은 실패 위험이 커서 오히려 더 나쁜 상황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곡기를 끊고 굶어서 죽는 ‘소극적 자살’은 아마도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방식이 상대적으로 끔찍하진 않다고 설명하지만, 분명히 더 빠르고 고통이 덜한 죽음에 비하면 훨씬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식은 극소수의 사람들한테만 타산적이다. 더 빠르고 덜 고통스러운 수단을 찾을 수 없고, 피하고자 하는 미래가 너무 참담할 때만 이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총기를 이용한 ‘적극적 자살’은 후자에 해당할 텐데, 누구라도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게 처음이라 손이라도 떨어서 빗나가기라도 하면 고통만 가중될 뿐이므로, 이 또한 극소수에게만 타산적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적절한 자살 방식은 고통을 느낄 수 없고, 빠르고, 확실한 것이어야 한다. 아무래도 의사가 처방한 어떤 약물을 이용하는 게 가장 나을 것이다. 죽음이 그 사람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라면, 이런 방식의 ‘적극적 자살’은 타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이 적극적 자살에 유일하게 타산적이라고 해도 최선의 방식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선의 방식은 모든 정황을 다 알고 기꺼이 도울 준비가 된 의사의 감독 아래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도 의사가 개입해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어서다. 물론 적극적 안락사가 허용되고 이용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삶을 끝내는 수단으로 안락사가 가진 장점은 명확하다. 이를 순수하게 시행할 의지가 있는 의사들이 있다는 가정 아래, 안락사는 고통이 전혀 없고 잠들 듯이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