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지은이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지은이), 박문재(옮긴이)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5년 08월




  • 단순한 고전이 아니다. 이 책은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가장 날카로운 철학적 자기계발서다. 부와 성공, 바쁜 일정, 남의 기대를 좇느라 정작 자신을 위해 살았던 시간이 단 한 시간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세네카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파울리누스여, 필멸의 인간들은 대부분 자연의 야속함을 한탄합니다. 우리의 생애는 짧고, 주어진 시간마저도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기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삶은 준비만 하다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이 삶을 두고 불평하는 것은 무지한 대중뿐만이 아닙니다. 인생이 짧다는 이 느낌은 위대한 이들조차 탄식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 위대한 의사도 "인생은 짧고, 기술과 학문은 길다"3라고 한탄했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성을 깊이 생각하면서도, 현자답지 않게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자연은 동물들ㅍ에게는 너그러워서 다섯 세대나 열 세대를 기르고 가르칠 만큼의 수명을 주었으면서도, 태어나서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내는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게 정해놓았다."

    하지만 사실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충분히 길고,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가장 훌륭한 것을 이루어낼 만큼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일에는 시간을 쓰지 않고 사치와 방탕 속에 무심히 시간을 흘려ㅍ보내다 보면, 결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다 지나가버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짧게 만든 것이며,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낭비한 것입니다. 왕의 막대한 재산도 나쁜 주인을 만나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무리 작은 재산도 현명한 관리인을 만나면 잘 불어나듯이, 우리의 인생도 잘 배치하여 사용한다면 더 큰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왜 우리는 사물의 본성을 탓하는 것입니까? 자연은 우리에게 충분한 호의와 너그러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활용하는 방법만 안다면, 인생은 충분히 깁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이는 무익한 일들에 매달려 고군분투합니다. 어떤 이는 술에 빠져 살아가고, 어떤 이는 무기력하게 시간을 낭비합니다. 어떤 이는 야망을 이루려 남들의 평가에 매달려 지쳐 있고, 어떤 이는 오직 이윤을 좇아 땅과 바다를 헤맵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의 욕망에 사로잡혀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다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고, 어떤 이들은 은혜도 모르는 윗사람을 섬기며 스스로 노예가 되어 인생을 낭비합니다.

    남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느라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많고, 변덕스러워서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확실한 목표도 없이 새로운 계획만 쫓아다니는 이들도 셀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삶의 방향을 잡아줄 그 무엇도 없이 나태하게 살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위대한 시인이 신탁처럼 말한 것이 진실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의 극히 일부만을 살아갈 뿐이다." 그 나머지는 진정한 삶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시간일 뿐입니다. 

    악덕들은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짓눌러서, 우리가 일어나 진실을 똑바로 볼 수 없게 합니다. 악덕들은 우리를 욕망에 침잠시켜 꼼짝할 수 없게 만들기에, 우리는 결코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때로 우연히 평온을 얻더라도, 마치 폭풍 후의 깊은 바다처럼 마음은 여전히 출렁이기에, 욕망에서 벗어나 평온을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내가 누가 봐도 악덕에 빠진 이들을 대상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운아들, 과한 행복에 질식할 것 같은 이들을 보십시오. 많은 이에게 부와 재물은 그저 짓누르는 짐일 뿐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려 노심초사하며 날마다 피를 말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끊임없는 쾌락 추구에 창백해진 이들이,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비천한 이들부터 가장 높은 이들까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이는 도움을 청하고, 저이는 그를 돕고자 법정에 섭니다. 이이는 고발하고, 저이는 변호하며, 또 다른 이는 판결합니다. 그들 모두가 남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지만, 정작 자신을 돌아보고 판단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스스로를 소진하며 타인의 일에만 매달릴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알아보는 방법이란 누가 누구의 후견인이었느냐일 뿐,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찾아뵙고자 해도 시간을 내주지 않는 높은 이들을 오만하다 분노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습니다. 자신을 위한 시간조차 내지 않으면서, 남이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당신이 누구든, 높은 이는 비록 오만한 표정이었을지언정 당신을 보았고, 당신의 말에 귀 기울였으며, 당신을 곁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가치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남에게 당신을 만나고 들어줄 의무가 있다 여기지 마십시오. 설령 당신이 남을 만나고 그의 말을 들었다 해도, 그것은 그와 함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와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그들이 얼마나 짧게 사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 보십시오. 백발이 된 노인들조차 몇 년이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신들에게 애원합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아직 젊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속임으로써 운명까지도 속일 수 있을 것처럼 기꺼이 자기기만에 빠져듭니다. 그러다 쇠약해져서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깨닫게 되면, 삶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끌려 나가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며 죽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리석게 살았음을 깨닫고, 이 쇠약함만 벗어날 수 있다면 이제 여유롭게 살겠노라 다짐합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그들은 누리지도 못할 것을 위해 시간을 쓴 것이 얼마나 헛된지. 모든 수고가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졌는지를 깨닫습니다.

    반면 모든 일을 멀리하며 사는 이에게 어찌 인생이 짧고 모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인생에는 새어나가는 것도,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도, 우연에 맡기는 것도, 부주의하게 낭비하는 것도, 마구잡이로 쓰는 것도. 헛되이 쓰이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순간을 의미 있게 채우니, 그의 인생은 비록 짧더라도 깊이가 있고 충만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언제 오든, 현자는 죽음을 향해 당당히 걸어갑니다. 


    행복한 삶에 대하여
    갈리오 형제여, 모든 이가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정작 행복한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그 모습이 흐릿하기만 합니다. 잘못된 길을 택한다면, 행복한 삶을 향해 더 열심히 달리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곳에서 더 멀어지고,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면 그 속도만큼 더 큰 거리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행복한 삶에 이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목적지를 정하고, 그다음 그곳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올바른 길에 들어섰다면, 하루에 전체 여정의 얼마를 갈 수 있는지, 우리의 본성이 이끄는 그곳에 얼마나 더 가까워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길잡이를 따르지 않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소리와 외침을 좇아 이리저리 헤맨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밤낮으로 노력해도 길을 찾는 동안 짧은 인생만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야 할 곳과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정해야 하며, 그곳을 이미 경험하고 살펴본 이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이 여정은 다른 모든 여정과는 다릅니다. 다른 여정에는 이미 알려진 길이 있고, 길을 잃으면 현지인에게 물어 바른길을 찾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 여정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고 잘 알려진 길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정에서 가장 주의할 점은, 앞서가는 무리를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가축처럼 남들이 간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수의 동의를 얻은 것이 최선이라 착각하여 풍문과 평판을 좇고,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닌 다수의 본보기를 따라 이성이 아닌 모방에 의지해 사는 것만큼 우리를 큰 불행으로 이끄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다 차례로 무너져 내리며 결국 거대한 파멸의 더미를 이룹니다. 마치 많은 이들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다 서로 밀치고 넘어지며 뒤엉켜 큰 무더기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앞선 이가 먼저 쓰러지며 뒤따르던 이까지 끌어당기기에, 앞선 이의 몰락이 곧 뒤이은 이의 파멸을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일이 인생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릇된 길을 걷는 이는 자신만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잘못된 길로 끌어들이는 원인이 됩니다. 앞선 무리를 따르는 것은 해롭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남에게 의지하기를 선호하는 한, 삶에 관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늘 남에게 기대게 되며, 수많은 이의 손을 거쳐 전해진 잘못이 우리를 거꾸로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다 망하지만, 다수를 따르지만 않는다면 무사할 것입니다.

    사실 대중은 이성과 반대편에 서서 자신들의 잘못을 옹호합니다. 그래서 민회에서처럼. 사람들은 변덕스러운 민심에 휘둘려 누군가를 법무관으로 뽑아놓고는 그가 법무관이 된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놀라워합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두고 옳다고 했다가 얼마 후 틀리다고 하는데, 다수가 내린 모든 판단은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행복한 삶을 논할 때, 당신은 마치 이 문제가 원로원의 표결처럼 해결될 수 있다는 듯이 "이쪽이 다수의 의견인 것같다"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가 선택한 것이 오히려 더 나쁘기 때문입니다. 인간사에서 다수가 더 고귀한 것을 선호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군중의 지지를 근거로 삼는 것은 가장 신뢰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행복을 얻으려고 흔히 하는 일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행복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최선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진리의 가장 나쁜 해석자인 군중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노예복을 입은 자들뿐 아니라 군복을 입은 자들도 군중이라 부릅니다. 나는 겉으로 걸친 옷의 색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참과 거짓을 더 잘 더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는 다른 눈이 있습니다. 영혼에 이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혼뿐입니다. 언젠가 영혼이 숨 돌릴 여유를 얻어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면, 스스로를 꾸짖으며 이렇게 진실을 고백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고, 지금껏 한 모든 말을 생각하면 말 못하는 이들이 부럽구나.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빌었던 모든 것은 지금 보니 원수들의 저주였고, 무거운 짐이라 여겨 두려워 피했던 모든 것이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나는 수많은 이들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비록 악인들 사이에서도 우정이 존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나는 미움의 길 끝에서 우정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나 자신과 친구가 되지 못했다. 나는 내 재능으로 대중을 뛰어넘는 유명인이 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는 결국 나 자
    신을 세상이라는 무정한 투창 앞에 내세우는 일이었으니, 그 창이 누구를 겨눌지 스스로 과녁이 되어 알려준 셈 아닌가?

    너는 네가 말을 잘한다며 칭찬하고, 네 재물을 좇으며, 네 호의를 얻으려 아부하고, 네 권력을 떠받드는 자들을 보는가? 그들은 모두 너의 적이거나 적과 다름없는 자들이며, 지금은 적이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적이 될 수 있는 자들이다.

    너를 칭송하는 이가 많다면, 시기하는 자도 많다. 나는 과연 선을 알기 위해 그것을 추구했는가? 아니다.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서로에게 보여줄 때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겉으로는 빛나지만, 속은 허망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견실하고 변함없으며 숨겨진 부분이 더욱 아름다운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헤쳐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손을 어디로 뻗어야 할지만 알면 당신은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치 어둠에 갇힌 것처럼, 찾는 것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과 부딪히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피곤하게 하지 않기 위해 다른 학파들의 견해는 생략하려 합니다. 모든 학파의 견해를 늘어놓고 하나하나 반박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파의 견해를 들어보십시오. 우리 학파라고는 했지만, 나는 스토아학과의 어느 한 주요 철학자의 견해에 얽매이지는 않습니다. 나에게도 판단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의 견해는 지지하고, 어떤 이에게는 더 상세한 설명을 요청하면서, 아마도 모든 이의 견해를 듣고 난 뒤에는 선배들의 어떤 견해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고, "나는 그 견해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나는 스토아학과 모두가 동의하는 것, 즉 사물의 본성을 토대로 삼을 것입니다. 사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고 본성의 법칙과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지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행복한 삶이며, 이 행복한 삶에 먼저 이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하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먼저 올바른 정신을 지니고, 그 올바른 상태를 꾸준히 유지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 정신이 굳세고 활기차서 훌륭히 견디고,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히 대응하며, 자신의 몸과 주변을 잘 돌보되 지나침 없이 균형을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삶을 이루는 그 밖의 것도 세심히 살피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운명이 준 선물들을 사용하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우리를 들뜨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을 떨쳐버리면 지속적인 평온과 자유가 찾아온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친 성질은 나약함에서 비롯되는데, 이 나약함을 버리면 하찮고 덧없는 쾌락 대신 흔들리지 않는 큰 기쁨이 찾아오고, 이와 함께 평화롭고 조화로우며, 온화한 위대한 영혼이 깃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