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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흔들릴 때 니체를 쓴다
 
지은이 : 이인
출판사 : 서사원
출판일 : 2026년 01월




  • 불안과 혼란이 일상이 된 시대, 우리는 왜 다시 니체를 찾아야 할까? 삶의 방향을 잃기 쉬운 순간, 니체의 문장은 여전히 가장 단단한 기준점을 준다.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을 일상의 고민과 연결해서 쉽게 이해하도록 풀어냈다. 


    삶이 흔들릴 때 니체를 쓴다

     

    『아침놀』
    다음의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 언제 어디서든 그대의 행동은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진다. 인간은 줄곧 능동과 수동을 혼동했다.

    오늘도 하루가 흐지부지 흘러간다. 지하철을 타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소식에 귀가 쫑긋해진다. 습관처럼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주말이면 번화가를 서성인다. 앞으로도 이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려고 해도 자꾸만 딴생각이 난다. 잠깐 쉬겠다는 명분으로 보잘것없는 영상들을 하염없이 구경하고, 여러 게시판을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댓글들을 읽는다. 도둑이 담 넘듯 몇 시간이 넘어간다. 책은 며칠째 몇 쪽을 넘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이건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주인이라면 자기 뜻대로 자신을 관리해서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한다. 우리는 목표한 대로 살지 않고 그저 살아갈 뿐이다. 삶을 이끄는 게 아니라 삶에 끌려가는 중이다. 세상이 파놓은 홈 따라 물살에 떠내려가듯 살아진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주관하지 못한다고 니체가 질책하는 까닭이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말해버렸고, 충동대로 행동했다. 가라고 하니까 학교에 갔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른 채 시험을 치렀으며, 돈이 필요하니까 직장을 구했고,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났다. 스스로 도모한 건 별로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어쩔 수 없이 해놓고는 마치 자기가 원해서 한 것처럼 말이다.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면 자신의 수동성을 뜯어고쳐야 한다. 인생의 주인공은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니까.


    『도덕의 계보』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른다. 우리처럼 세상을 열심히 탐구하는 자들조차 자기 자신에게 무지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자신을 제대로 탐구한 적이 없기에 그렇다.

    우리의 조상들은 먹고사는 일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세상 만물을 이해하려고 연구했다. 동물과 식물의 특성을 관찰했고, 밤이면 펼쳐지는 별들의 공연을 보면서 감탄하는 동시에 별들이 무엇일지 궁리했다. 

    호기심이 왕성했고, 불가능하게 보이던 일을 감행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험준한 산맥을 넘었고, 저 바다 건너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알고자 배를 띄웠다. 낙타를 타고 광활한 사막을 가로질렀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으며, 심해 깊숙이까지 들어갔다. 인간의 몸집에 견주어 너무나 거대한 지구인데, 구석구석 인류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인간의 모험과 도전 덕분에 많은 것들이 밝혀졌다. 이제 우리는 피뢰침을 만들어 그 무섭던 번개마저도 안전하게 처리하고 있다. 천둥을 신의 노염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인류의 탐험은 멈출 줄 모른다. 우주선도 쏘아 올리고 있다. 우주의 수수께끼마저 하나둘씩 풀리고 있다. 이처럼 전방위로 탐구하는 가운데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세계가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세계인데, 내가 누구인지, 왜 나는 이러한지 우리는 좀처럼 알지 못한다. 인간이 자신을 잘 모른다고 니체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많은 이들이 세상을 열심히 알려고 들면서 정작 자신을 속속들이 알려고 들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잘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을 제대로 아는 일이다. 많은 문제가 자신을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되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삶이 꼬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잘 모른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자신에게 무지할수록 인생은 무지하게 힘들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
    비로소 자신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또 다시 찾아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우리는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아직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거나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규정해봤자 그건 그저 언어일 뿐이다.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믿음은 깨지게 마련이다. 미처 몰랐던 자신을 발견해서 생기는 당혹감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다. 

    물론 자신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몰라서 방황한다. 날마다 자신과 부대끼면서 쩔쩔매고 있다면 절절하게 자신을 찾아야만 한다. 자신을 찾아야만 괜히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하던 과거와 작별하고, 진짜 자신으로서 살 수 있다. 기쁨과 평화는 덤이다. 

    그동안 나라고 믿어왔던 가면을 벗으면 내면의 감춰져 있던 내가 등장한다. 그런데 가면을 비집고 내면이 새어 나오더라도 그 모습이 유일한 진실은 아니다. 그 안에는 여러 모습의 '나'가 공존한다. 그러므로 낯선 '나'를 찾았어도 끝없이 탐색해야 한다. 니체가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잃어버린 뒤 또다시 찾아내는 법을 터득하라고 귀띔한 이유이다. 내 안에 무궁무진한 세계가 잠들어 있기에 그렇다. 

    자신을 발견하면 그동안 답답했던 일들이 풀린다. 내가 나로서 사는데 나를 모른 채 사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를 모르면서 사는 것만큼 큰 문제가 없다. 나 자신을 찾으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해진다. 나 자신으로 사는 일은 뭉클하게 설렌다.


    『선악의 저편』
    가슴 찢는 고통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든다.

    살다 보면 누구나 곤경에 빠진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의 실패, 믿었던 친구의 배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의 죽음, 느닷없이 당하는 해고, 예기치 못한 질병, 갑작스러운 사고가 우리를 강타한다. 

    고난은 엎친 데 덮친다. 마음이 무너지는데 주위 사람들이 떠나간다. 돈을 잃었는데 건강도 나빠진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둘러보지만, 사방은 깜깜하기만 하다. 어디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고 비빌 언덕이 없다. 

    열불과 눈물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지탱해온 삶은 거꾸러진다. 

    고통스러운 시기에 우리는 엉뚱한 대상에게 화풀이하거나 신세타령을 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사람인지라 가슴을 치면서 하소연할 수밖에 없기는 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웅크린 채 훌쩍이기만 할 수는 없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과거의 구렁에서 훌쩍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니체뿐 아니라 모든 위인은 하나같이 역경 속에서 영글었다. 누군가 성숙했다면 그 사람은 가슴이 에이었을 게 분명하다. 당시는 무지하게 괴로웠으나 고통 속에서 그들은 강해졌다. 

    깊은 고통이 우리를 고귀하게 만든다고 니체가 나지막이 속삭인다. 고통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우리가 과거에 사로잡혔기에 생겨난 충격이다. 머뭇거리는 나를 깨뜨리면서 깨어나게 하려고 찾아온 손님이 시련이다. 가슴이 찢겨야만 우리는 거듭날 수 있다.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부모, 사회, 나라, 이웃 등 내가 고르지 않았다. 바로 이런 것들과 함께 운명이 빚어지고, 운명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 우리 내면의 힘이 태어난다.

    삶의 뼈대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이뤄진다. 태어나보니 이러한 가정이었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 숨 쉴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없었다. 눈떠보니 나이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모습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나인 건 운명이다. 

    처음에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려 한다. 자신의 처지에 흡족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을 아끼며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그늘은 짙게만 보인다. 주위 사람들과 자꾸 부딪친다. 그 누구의 삶이든 말썽투성이이다. 문제는, 마뜩잖은 여건에다 원치 않은 상황에 내던져졌더라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로서 살아가는 게 운명이다. 

    운명이란 인생이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부모, 지역, 문화, 국가, 시대, 종교 등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 영향에 내 삶이 판가름 나지는 않는다. 내게 미치는 수많은 힘과 부딪치고 대결하면서 우리는 인생을 만든다. 자신의 운명을 빚어내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여러 가지가 운명처럼 각인되었어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이렇게 살 팔자라면서 한숨만 내쉬면 자신의 삶은 한심하게 결딴날 수밖에 없다. 비록 현실이 갑갑하더라도 앞날은 달라지리라고 믿고 움직이면 많은 게 바뀐다. 

    운명은 우리 삶을 얽어매지만, 운명보다 더 큰 힘이 우리 안에 있다. 운명에 맞서 투쟁하면, 자신이 미처 몰랐던 놀라운 힘이 깨어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독하다. 사랑의 길을 걸어가니 말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 나를 경멸한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경멸을 알 수 있다. 경멸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새로움을 창조한다. 경멸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알겠는가!

    세상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사랑의 길과 미움의 길이다. 사랑의 길을 가면 마음이 탱탱해지고 자신이 커진다. 미움의 길을 가면 마음이 찌그러지고 자신이 작아진다. 날마다 우리 앞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뻔하다. 당연히 사랑의 길로 발을 뻗어야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미움의 길을 간다. 미움의 길이 쉽기에 그렇다. 툭하면 짜증과 신경질을 내고, 사소한 일에도 낙담하며 투정을 부린다. 습관처럼 타인을 흉보고 자신을 업신여긴다. 미움의 길을 가면 나이가 들어도 완숙하게 무르익기는커녕 좀스럽게 쭈그러든다. 

    반면에 사랑의 길은 가시밭을 헤쳐가는 일이나 다름없다. 자신과 세상이 사랑스럽지 않은데 사랑하기는 어렵다. 자신을 붙잡고 눈물겹게 씨름하고, 세상과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변화를 일궈야 한다. 사랑의 길을 가는 사람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니체는 사랑과 함께 경멸을 이야기한다. 엉망진창인 자신을 사랑한다며 떠벌리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진실에 눈감는 거짓부렁일 뿐이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문제를 경멸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경멸하는 것들을 고치는 일이다. 사랑은 입으로 나불거리는 일이 아니다. 사랑이란 새로움의 창조이다.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자 자신의 허물을 경멸한다. 삶을 대폭 수정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수정처럼 빛나도록 끝없이 갈고 닦는다.


    『선악의 저편』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괴물과 뒤엉키는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팍팍한 경쟁이다. 경쟁은 난자와 정자가 결합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도 학교 성적부터 운동회 달리기까지, 대학입시부터 취업까지, 연애부터 결혼까지, 주택마련부터 자식 뒷바라지까지 생애 내내 치열하게 이뤄진다. 

    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모두가 앞서갈 수 없다. 경쟁이 공정했다면 뒤처진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으나 세상의 경쟁이 모두가 승복할 만큼 공명정대하지는 않다. 비리와 짬짜미가 난무하고, 편법과 불법이 기승을 부리기도 한다. 

    경쟁은 괴물을 만든다. 승리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악착같이 달려들다 보면 괴물이 되어버린다. 경쟁하며 살아가는 우리 앞에 괴물이 출몰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괴물을 물리치지 않고는 앞으로 못 나가는 경우가 꼭 생긴다. 괴물은 나를 가로막고, 나와 실랑이하며 드잡이한다. 

    문제는 괴물과 악다구니를 벌이면서 우리도 괴물처럼 되어간다는 점이다. 괴물을 무찌르고자 괴물보다 더 무참해진다. 괴물에게 덤비는 사람은 자신이 싸우는 이유를 명심해야 한다. 왜 부딪치는지 까먹은 채 그저 이겨 먹으려고 든다면 자신의 마음이 짓이겨질 테니 말이다. 괴물과 싸울 때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신신당부는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통찰과 맥락을 같이한다. 무시무시한 파시즘을 겪었던 브레히트는 단순히 파시즘만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파시즘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라고. 

    수많은 경쟁에서 승리했어도 괴물이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패배이다. 세상엔 눈앞의 승리라는 미끼를 물어서 가장 끔찍한 패배를 겪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더불어 숲과 바위는 기품있게 고요할 줄 안다. 당신이 사랑하는, 저 넓게 가지 뻗은 나무처럼 되어라. 나무는 조용하나 늘 귀를 기울이며 바다로 뻗어 있다.

    때때로 우리는 산과 바다와 숲으로 떠난다.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심원한 적막이 우리를 기다린다. 흐드러진 풍경이 흐트러진 우리를 맞이한다. 고요한 자연은 고상하면서 풍요로운 시간을 건넨다. 우리가 일부러 야외를 찾는 까닭이다. 

    자연 가운데 나무는 그야말로 빼어난 품격을 지녔다. 봄이면 연둣빛 싹을 틔우면서 포근한 풋풋함을 선도하고, 여름이면 울창한 잎사귀로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며, 가을이면 탐스러운 과실을 넉넉하게 선물하고, 겨울이면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꿋꿋함을 선보인다. 소나무처럼 자신의 기백을 사시사철 견지하는 나무도 있다. 다양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지구의 허파가 되어준다. 

    나무는 묵묵히 비바람을 이겨낸다. 상처가 나 옹이가 생기지만 굴하지 않는다. 수많은 생명체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아낌없이 열매를 내어준다. 해마다 늘어난 나이테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영광이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아도 나무는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꿈꾼다. 작은 벌레나 사소한 미풍에 꿈쩍하지 않고 고즈넉하게 품어준다. 모진 세월을 인내하며 더 높은 세계를 향해 뻗는 나무는 신성하고 신선하다. 

    소음에 파묻혀 매정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무는 안도의 정적을 내어준다. 정색하던 마음은 풀어지면서 정돈된다. 우리는 아름드리나무를 마주할 때마다 경탄한다. 수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면서 하늘에 닿으려는 나무처럼 우리도 원대한 시야를 갖추고 호젓이 정진해야 한다.


    『반시대적 고찰』
    우리를 들어 올리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를 들어 올려서 다른 차원을 꿈꾸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진실한 사람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사람들, 철학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성자들이다.

    우리의 오늘과 어제는 틀린 그림 찾기와 비슷하다. 몇 가지가 달라졌으나 대강은 똑같다. 틈만 나면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연예인들의 영상을 구경하며,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곤 한다. 

    지구의 중력이 굉장히 크기에 우리가 땅에 붙어서 살듯 현실에는 중력이 작용한다. 중력 덕분에 붕붕 떠다니지 않고 안정감을 얻는다. 문제는 안정감이 갑갑한 지루함으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인류가 땅만 보지 않고 하늘을 날고자 시도했기에 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현실에 밀착해서 살더라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는 건 진정한 도전이 아니다.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면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자기 삶의 의미가 생긴다. 

    물론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는 건 너무나 어렵다. 그 누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압하지 않았는데도 틀에 박힌 나날이 펼쳐진다. 새로운 상상을 하고 싶어도 우리의 경험이 제한되어 있어서 참신한 변화를 도모하기가 쉽지 않다. 상상조차도 우리의 한계에 얽매인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자, 예술가, 성자 같은 진실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안내한다. 이들은 그저 먹고 싸는 동물 차원의 삶 너머, 더 높은 차원을 꿈꾸게 해준다. 니체는 그들이 나타나면 웅크리던 자연이 도약한다고 말한다. 잠들어 있던 정신이 깨어나고, 기쁨의 비약이 일어난다. 

    바쁜 일상에서도 인문학 서적을 찾아 읽고, 공연과 전시를 챙겨보며, 진실한 종교인과 허물없이 대화하는 일. 이 모든 것은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면서 자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