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현대인은 끝없는 질주 속에 산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해질 거라 믿지만 불안은 깊어지고 마음은 공허하다. SNS ‘좋아요’에 일희일비하고, 남의 성공담에 초조해하며 밤마다 자기계발서를 뒤적인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바로 이 불편한 진실을-우리가 왜 이토록 타인의 시선에 목마르고, 어떻게 하면 내면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지를- 250년 전에 이미 꿰뚫어보았다.
많은 이들이 스미스를 『국부론』의 저자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평생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도덕 철학자였다. 특히 죽기 직전인 1790년 완성한 제6판에서는 미덕과 자기통제에 관한 논의를 대폭 보강했다. 이 책은 인간의 감정과 판단이 어떻게 작동하고 사회를 유지하는지 섬세하게 분석한 심오한 심리학서이자 윤리학서다.
■ 저자 애덤 스미스
1723년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스미스의 집안은 꽤 부유했고 인맥도 넓었다. 어릴 때는 병약했으며, 깊이 생각에 빠지면 멍하게 혼자 중얼거리며 몰입하곤 했는데, 이런 버릇은 평생 지속되었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커콜디의 작은 마을에서 학교를 다녔고, 열 살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7세에 장학금을 받아 잉글랜드의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갔지만 그곳의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 23세에 귀국했다. 1751년(28세)에는 글래스고 대학교의 논리학 교수로 임명되고 1752년에는 도덕철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대표작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두 축, 즉 경제와 윤리의 원리를 탐구한 역작이다. 『도덕감정론』은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시절 강의를 바탕으로 1759년(36세)에 발표한 첫 저서이며, 『국부론』의 사상적 토대를 이룬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self-love)을 분석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공감’과 ‘공정한 관찰자’를 통해 도덕적 사회를 형성하는지를 평생에 걸쳐 연구했다.
이러한 통찰은 어린 시절 못 공장을 보며 분업의 원리를 떠올렸던 남다른 관찰력, 옥스퍼드 시절의 방대한 독서 그리고 볼테르와 같은 당대 유럽 지성들과의 교류를 통해 더욱 깊어졌다. 특히 그는 『도덕감정론』을 자신의 필생 역작으로 여겨 『국부론』보다 더 아꼈으며 30년간 다섯 차례 개정하고, 179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제6판을 최종본으로 남겼다. 이 책은 “인간은 왜 부와 권력을 갈망하며 타인의 인정을 원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적 토대를 묻는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 역자 이종인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과 성균관대학교 전문 번역가 양성 과정 겸임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까지 250여 권의 책을 옮겼으며, 최근에는 인문 및 경제 분야의 고전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번역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국부론』, 『진보와 빈곤』, 『리비우스 로마사 세트(전4권)』, 『월든·시민 불복종』, 『자기 신뢰』, 『유한계급론』, 『공리주의』, 『걸리버여행기』, 『로마제국 쇠망사』, 『고대 로마사』, 『숨결이 바람 될 때』, 『변신 이야기』, 『작가는 왜 쓰는가』, 『호모 루덴스』,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등이 있다. 집필한 책으로는 번역 입문 강의서 『번역은 글쓰기다』, 고전 읽기의 참맛을 소개하는 『살면서 마주한 고전』 등이 있다.
■ 차례
저자 공지
제1부. 행위의 적절함에 관하여
제1편. 어떤 행위가 적절하다고 느끼는 판단에 관하여
제1장 | 공감에 대하여
제2장 | 서로 공감할 때 오는 즐거움에 대하여
제3장 | 우리는 왜 어떤 감정은 정당하고, 어떤 감정은 부당하다고 여기는가 (1)
제4장 | 우리는 왜 어떤 감정은 정당하고, 어떤 감정은 부당하다고 여기는가 (2)
제5장 | 친근한 미덕과 존경할 만한 미덕에 대하여
제2편. 적절함에 부합하는 서로 다른 감정의 강도에 관하여
서문
제1장 | 신체에서 유래하는 감정들에 대하여
제2장 | 상상력의 특성과 습관에서 비롯되는 감정에 대하여
제3장 | 비사교적 감정에 대하여
제4장 | 사교적 감정에 대하여
제5장 | 이기적 감정들에 대하여
제3편. 번영과 역경이 인간의 행동 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는 왜 역경보다 번영 속에서 더 쉽게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가
제1장 | 슬픔에 대한 공감은 즐거움보다 강렬하지만 결코 당사자의 고통에는 미치지 못한다
제2장 | 야망의 근원과 신분의 구분에 대하여
제3장 | 부자와 권력자를 숭배하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할 때, 도덕 감정은 어떻게 타락하는가
제2부. 공로와 과실 혹은 포상과 처벌의 대상에 관하여
제1편. 공로와 과실에 관한 인식
서문
제1장 | 우리가 감사하는 대상은 보상받아 마땅하고, 우리가 분노하는 대상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제2장 | 감사와 분노의 적절한 대상에 대하여
제3장 | 혜택을 베푼 자의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면 감사에 공감할 수 없고, 해악을 끼친 자의 동기가 부당하지 않다면 분노에 공감할 수 없다
제4장 | 앞의 세 장에 대한 요약
제5장 | 공로와 과실의 느낌에 대한 분석
제2편. 정의와 자혜에 관하여
제1장 | 두 미덕의 비교
제2장 | 정의감, 회한, 공로의 인식에 대하여
제3장 | 이러한 인간 본성의 효용에 대하여
제3편. 공로와 과실에 대한 판단에서 운명이 인간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서문
제1장 | 운명이 영향을 미치는 원인들에 대하여
제2장 | 운명이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에 대하여
제3장 | 감정의 불규칙성을 설명하는 마지막 원인에 대하여
제3부. 자기감정과 행위 판단의 근거, 그리고 의무감에 관하여
제1장 | 자기 승인과 불승인의 원리에 대하여
제2장 | 칭찬과 칭찬받을 자격, 비난과 비난받을 자격에 대하여
제3장 | 양심의 영향과 권위에 대하여
제4장 | 자기기만의 속성과, 일반 규칙의 기원 및 활용에 대하여
제5장 | 도덕적 일반 규칙의 권위와 영향력, 그리고 그것이 신성한 법칙으로 여겨지는 이유에 대하여
제6장 | 의무감만으로 행동해야 할 때, 그리고 다른 동기와 함께해야 할 때
제4부. 효용이 도덕적 승인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제1장 | 예술 작품에서 효용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 그 영향에 대하여
제2장 | 인간의 성품과 행위에서 나타나는 효용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도덕적 승인의 근원이 되는가에 대하여
제5부. 도덕적 승인과 불승인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관습과 유행에 관하여
제1장 | 우리의 미추(美醜)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관습과 유행에 대하여
제2장 | 관습과 유행이 도덕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제6부. 미덕의 성격에 관하여
서문
제1편.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성격 혹은 신중함에 관하여
제2편.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의 성격에 관하여
서문
제1장 | 자연이 우리에게 정해준 관심과 배려의 순서에 대하여
제2장 | 사회 집단에 대한 자혜의 자연스러운 순서에 대하여
제3장 | 보편적 자애에 대하여
제3편. 자기 제어에 관하여
6부의 결론
제7부. 도덕 철학의 체계에 관하여
제1편. 도덕적 감정의 이론에서 살펴야 할 여러 문제에 관하여
제2편. 미덕의 본성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에 관하여
서문
제1장 | 행위의 적절성에 미덕의 본질이 있다고 보는 체계들에 대하여
제2장 | 신중함을 미덕으로 보는 체계에 대하여
제3장 | 자애를 미덕으로 보는 체계에 대하여
제4장 | 방종한 체계에 대하여
제3편. 도덕적 승인의 근원에 대한 여러 다른 체계에 관하여
서문
제1장 | 자기애를 승인의 근원으로 보는 여러 체계에 대하여
제2장 | 이성을 승인의 근원으로 보는 여러 체계에 대하여
제3장 | 감정을 승인의 근원으로 보는 여러 체계에 대하여
제4편. 도덕 실천 규칙을 다루는 여러 저자들의 방식에 관하여
특별 논문 |
언어의 최초 생성에 관한 여러 고려 사항, 그리고 원초적 언어와 혼합 언어의 서로 다른 특성에 관하여
해설 | 이종인
애덤 스미스 연보
『도덕감정론』 인물 사전 (완전판)
우리가 행동할 때 “남이 본다면 부끄럽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묻는 그 내면의 목소리를 분석한 최초의 책이다. 오늘날 말로 하자면 ‘메타인지의 원조’, ‘마음의 경제학’이다. 스미스는 말한다. “이기심은 죄가 아니다. 단지 길들여야 할 본능일 뿐이다.” 그 길들이는 기술이 바로 공감, 자제, 정의, 인류애다. 그가 남긴 통찰은 스토아 철학의 평정과 실용적 윤리가 결합된 ‘마음의 경제학’, 즉 내면의 균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도덕감정론
행위의 적절함에 관하여
어떤 행위가 적절하다고 느끼는 판단에 관하여
공감에 대하여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해도, 그의 본성 속에는 분명 몇 가지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그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행운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복을 자신의 필요처럼 느낀다. 비록 그 행복으로부터 얻는 것이 그저 바라보는 즐거움뿐일지라도, 인간은 남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이러한 심리가 연민 혹은 동정이다. 우리는 타인의 비참한 상태에 공감할 때 이런 마음 상태가 된다. 우리가 그런 비참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거나 또는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떠올릴 때, 연민 또는 동정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상상력은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힘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그 감정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느낌일지를 상상함으로써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우리의 형제가 고문대에 묶여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편안한 상태라면 그의 고통이 직접 우리의 감각으로 전해지지는 않는다. 감각은 결코 우리 몸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고통을 이해하려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력뿐이다. 이 상상은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느꼈을 법한 감정을 재현할 뿐이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 되살리는 것은, 형제가 실제로 느끼는 고통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느꼈을 법한 감각적 인상일 뿐이다.
고통이나 번민이 얼마나 깊은 슬픔을 불러오는지는 각자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을 겪지 않더라도 그것을 생생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느 정도 그에 상응하는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감정의 깊이는 전적으로 상상의 강도에 달려 있다.
타인의 비참함을 마주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동료 의식을 느낀다. 고통받는 이의 처지를 상상을 통해 체험하고, 그로부터 감정적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의 다리나 팔에 곧 타격이 가해질 것 같은 장면을 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움츠리며 몸을 뒤로 뺀다. 실제 타격이 가해질 경우에는, 우리 역시 어느 정도 그 고통을 느끼며 고통의 현장에 있는 사람 못지않은 불편함을 경험한다. 줄타기 곡예사를 바라보는 군중이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며 균형을 잡으려 하듯, 우리도 상상 속에서 마치 그 자리에 선 듯 반응한다.
신경이 예민하고 체질이 허약한 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있는 거지부스럼투성이 팔과 다리를 보고 자기 몸의 그 부위에 가려움이나 통증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는 그들이 바라보는 거지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했을 때, 만약 자신의 팔다리에 그런 병변이 생긴다면 얼마나 불쾌하고 두려울지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단지 상상력의 작용만으로도, 그들의 허약한 신체에 실제로 가려움이나 통증 같은 감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강건한 사람도 상대방의 눈에 병이 있을 때 자기 눈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눈처럼 민감한 기관은 상상만으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상상력은 이처럼 신체의 가장 예민한 부분까지 스며들어 실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동료 감정은 단지 슬픔이나 고통 같은 부정적 정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감정이 무엇이든, 사려 깊은 관찰자는 그 상황을 상상함으로써 유사한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비극이나 로맨스의 주인공들이 고난 끝에 해방되는 장면에서 느끼는 기쁨은, 사실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동료의식은, 그들의 행복을 향한 기쁨만큼 깊고 절실하다. 우리는 그들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친구들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그들을 배신하거나 해한 자들에게는 분노를 함께 느낀다. 관찰자는 상상을 통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설령 그 고통을 직접 겪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연민과 공감은 관찰자의 동료 의식
연민과 공감은 우리가 타인의 슬픔에 대해 느끼는 동료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동정’(sympathy)이라는 말이 그러한 의미로 쓰였지만, 이제는 다소 부적절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유사한 감정이 유발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 감정의 배경이나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당사자의 표정과 몸짓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슬픔이나 기쁨에 깊이 감응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표정과 몸짓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슬픔이나 기쁨은 거의 같은 강도로 관찰자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웃는 얼굴은 누구에게나 유쾌하게 다가오며, 슬픈 표정은 보는 이에게도 우울함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전이 현상이 모든 감정에 똑같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공감이 일어나지 않거나, 오히려 반감이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격분하며 화를 내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그의 분노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도리어 그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고, 우리는 그가 분노를 향하고 있는 대상보다는 그에게 분노를 느끼게 된다. 우리가 그 분노의 원인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감정의 정당성을 알지 못하므로 마음속에서 같은 감정을 일으킬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대상이 어떤 위협에 처할지는 즉각 상상할 수 있고, 그래서 상대방이 느끼는 공포나 분노에 즉각적으로 감응하게 되며, 그를 위협하는 폭력에 함께 맞서 싸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가 슬픔이나 기쁨의 표정을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그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표정을 통해 그 사람에게 닥친 행운이나 불운을 직관적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효과는 대개 그것을 느끼는 당사자 안에서만 머문다. 슬픔이나 기쁨은 분노와는 달리, 그 감정을 일으킨 대립적인 타인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행운(기쁨)이나 불운(슬픔)은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에게는 중대한 문제지만, 제3자인 우리에게는 맥락이 없는 막연한 인상에 불과하다. 반면 도발이라는 일반적 개념만으로는 누군가의 분노에 공감하기 어렵다. 그 도발이 벌어진 구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분노에 선뜻 마음을 보태지 않는다. 마치 분노의 정당성을 이해하기 전에는 그 감정에 동조하지 말고 오히려 경계하라고 자연이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타인의 슬픔이나 기쁨에 공감할 때도 감정의 원인을 정확히 알기 전까지는 그 공감이 매우 불완전하게 머무는 경우가 많다. 당사자가 막연히 드러내는 슬픔은 우리에게 곧바로 공감을 불러오기보다는, 먼저 그의 사정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의 불행을 짐작하며 불안과 불편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공감도 깊이 있게 형성되지 않는다.
결국 진정한 공감은 단지 강렬한 감정을 목격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일으킨 구체적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정작 당사자는 느끼지 않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상상력을 통해 구성된 것이고, 당사자는 그러한 정서를 전혀 느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어떤 사람의 뻔뻔함이나 무례함을 보고 얼굴을 붉히지만,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느끼는 그 당혹감은, 만약 우리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혼란스러웠을지를 상상한 결과일 뿐이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인류가 직면하는 가장 끔찍한 재앙 중 하나는 이성의 상실, 즉 광기이다. 인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조차 광기를 극도로 두려워하며, 그것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비참함의 최종 단계로 여기고 깊은 연민을 품는다. 그러나 정작 광기에 빠진 당사자는 웃고 노래하며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실성한 사람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당사자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관찰자의 연민은 자신이 그런 광기에 빠졌을 때 느꼈을 감정과, 현재의 이성과 판단력으로 그런 상태를 바라보며(이는 실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느끼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의와 지혜에 관하여
두 미덕의 비교
은혜는 강요할 수 없고, 분노는 방어를 위해서만 정당화된다
유익한 결과를 낳은 행위라도 동기가 올바르지 않다면 포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적절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만이 감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공정한 관찰자의 공감 어린 승인을 얻는다. 반대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부적절한 동기에서 비롯된 경우에만 정당한 처벌의 대상이 된다. 이런 행위야말로 공정한 관찰자의 동정적 분노를 자극하고, 분노의 정당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은혜로운 행위, 즉 자혜는 언제나 자발적인 행동이며,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선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받지는 않는다. 그것은 적극적인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기대되던 선행을 외면한 데 대해 혐오나 불승인 감정이 생길 수는 있으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분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시혜자 을에게서 도움을 받고도 보답하지 않는 수혜자 갑은 배은망덕의 대표적 사례다. 특히 갑에게 보답할 여력이 충분하고, 을이 갑의 도움을 필요로 했음에도 외면했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갑의 이기적 태도에 전혀 공감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가장 심각한 불승인 대상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갑이 실제로 누구에게 해악을 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예의상 기대되던 선행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분노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증오는 부적절한 감정이나 행동에 대한 반응이며, 분노는 타인에게 실제적 해를 끼친 행위에 대한 감정이다. 따라서 갑의 배은망덕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갑에게 감사의 표현을 강요하는 것은 그의 배은망덕보다 더 부적절한 행위가 된다. 갑에게 보답을 강제하려 한다면 시혜자인 을 역시 자신의 고귀한 선행을 스스로 실추시키는 것이다. 또한 이 둘의 관계에 제3자가 개입하여 갑의 행동을 강요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선행의 여러 의무 중에서도, 감은지정(感恩之情)에서 비롯된 의무는 소위 완전한 의무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우정, 관대함, 자비심 같은 덕목은 보편적으로 승인되며, 우리에게 자발적 실천을 권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감은지정 외의 어떤 힘으로도 강제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감사의 빚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자비의 빚이나 우정의 빚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특히 우정은 그것이 진심 어린 감사의 감정에 의해 강화되지 않는 한, 단지 형식적인 관계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한편, 분노는 본질적으로 방어를 위한 감정이다. 그것은 정의의 수호자이며, 무고함을 지키는 안전장치다. 분노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진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고, 이미 발생한 악행에는 정당한 보복을 가할 수 있다. 그 결과, 가해자는 자신의 부정의에 대해 후회하게 되며, 다른 이들은 그 처벌을 두려워하여 유사한 악행을 미리 피하게 된다. 이처럼 분노는 오직 방어와 정의 실현을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될 경우 공정한 관찰자는 결코 이에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선행의 결핍은 실망스럽긴 해도, 그것이 우리를 해치거나 스스로 방어하게 만들 정도의 직접적 악행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행이 결여된 상황에서 분노는 정당화될 수 없다.
좋은 일은 강요할 수 없다
단순히 선행이 부족하다고 해서 처벌받지는 않지만 그 미덕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가장 큰 찬사와 보상을 받는다. 크게 선행을 베푸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깊은 감사와 존경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가져오며, 그에 합당한 인정을 받는다. 반면 정의를 위반한 자는 처벌을 받지만, 정의의 규칙을 지킨 것만으로는 특별한 찬사나 감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정의를 실천하는 행위는 분명히 도덕적으로 적절하며, 마땅한 인정을 받지만, 그것이 능동적으로 선을 행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대개 정의의 준수는 소극적 미덕에 속한다. 이는 단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이웃의 신체나 재산, 명예를 침해하지 않는 것에 머문다. 그런 사람은 어떤 특별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정의의 규칙을 모두 이행한 것이다. 그는 이웃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모든 도덕적 요구를 충실히 따랐고,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을 수도 있는 모든 규범도 이행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은 때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음으로써?즉, 침묵하거나 개입하지 않음으로써?가능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우리도 행동하는 것, 즉 보복은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가장 위대한 법칙처럼 보인다. 우리는 오직 관대하고 선량한 사람만이 진정한 선행과 관용을 베푸는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에 마음을 닫고 무관심한 사람은, 공동체의 따뜻한 애정과 관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마땅하다고 느낀다. 설령 그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허용되더라도,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마치 인간관계가 사라진 거대한 사막 속에 놓이도록 해야 한다고 여긴다.
정의의 법칙을 어긴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가한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냉정함 때문에 부정의한 행동을 했으므로, 이제는 자신이 그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공포를 느껴야 한다.
간신히 무고한 척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 남들과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정의만을 지키며, 무관심함으로써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이웃들로부터 그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웃은 그의 표면적인 무고함은 인정하되, 그가 타인에게 보였던 무심한 태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덕의 성격에 관하여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성격 혹은 신중함에 관하여
존중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돈
인간은 동료들로부터 존중받고 싶어 하며, 사회 속에서 일정한 신용과 지위를 갖기 원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는 우리가 현재 보유한 것, 또는 앞으로 얻게 될 재산의 규모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욕구는, 현실을 살아가는 누구라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적절한 평가를 받고자 하는 욕망, 그들 사이에서 신용과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한 본성 중 하나다. 우리가 재산을 얻고자 하는 열망도, 본질적으로는 육체적 필요보다 이런 사회적 욕망에서 더욱 강하게 발현된다. 사회적 지위와 신용은 결국 우리의 성격, 행동 그리고 우리 주변 사람이 느끼는 신뢰, 존중, 호의에 달려 있다. 따라서 도덕적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신뢰와 호의에 기대어 살아간다.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 평판은 모두 그의 삶의 안락함과 행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이러한 것을 잘 관리하고 지키는 일은 신중함이라는 미덕의 몫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나아갈 때보다, 좋은 상태에서 나쁜 상태로 추락할 때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렇기에 신중함이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는 안전이다. 신중함은 건강, 재산, 지위, 평판이 어떤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성격은 대체로 보수적이며, 더 큰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재 가진 것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쪽에 가깝다. 신중함은 재산을 늘릴 때 손실과 위험을 피하는 방식을 택하라고 권한다. 이러한 성향 덕분에 신중함이라는 미덕은 자기 업종에서 실제적인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성실하게 실행하며, 모든 지출에 있어 절제를 강조한다.
공정한 관찰자의 지지를 받는 신중한 사람
신중한 사람은 언젠가 더 오래 지속될 편안함과 깊은 만족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근면과 절약 속에서 현재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는 언제나 공정한 관찰자, 곧 그의 내면에서 양심의 역할을 하는 가슴속 사람(the man within the breast)의 전적인 찬성과 지지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공정한 관찰자는 당사자의 현재 노력과 고통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눈앞의 충동적 욕구에 흔들리지 않는다. 공정한 관찰자의 눈에는 지금 욕망을 따르는 일과 더 큰 만족을 위해 참는 일이 결국 같은 욕구 충족의 두 시점일 뿐이다. 그는 이 두 시점을 거의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며 비슷한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공정한 관찰자는 또한 잘 알고 있다. 당사자에게는 이 두 시점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과, 그에 따라 영향을 받는 방식도 크게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이 자신처럼 현재와 미래를 동일한 무게로 바라보며, 미래를 위해 현재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안다면 그는 그러한 태도와 인격을 깊이 존중하고 아낌없이 칭찬한다.
자신의 수입 범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소 느리더라도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삶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만족한다. 그는 점차 절약과 근면의 긴장을 내려놓고, 늘어난 여유와 즐거움을 누리며 과거의 부족했던 시절을 되새길 때 오히려 더 깊은 만족을 느낀다. 그는 이 평온한 상태를 바꿔야 할 이유를 느끼지 않으며, 현재의 안정을 깨뜨릴 수 있는 사업이나 모험에 쉽게 뛰어들지 않는다. 만약 어떤 새로운 계획에 착수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준비된 이후일 것이다. 그는 절박한 필요나 조급한 욕망에 끌려 무모하게 나서지 않고 결과를 충분히 따진 뒤에 행동한다.
신중함은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선택하는 미덕
신중한 사람은 자신에게 명확히 부여되지 않은 책임을 자청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와 관련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으며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원치 않는 충고를 함부로 늘어놓는 법이 없다. 그는 의무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뿐이며, 많은 이들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영향력을 얻으려 애쓰지만, 그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파벌 다툼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하고, 파벌 자체를 혐오하며, 고상한 포부로 포장된 정치적 야심에도 쉽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조국을 위한 봉사가 정식으로 요청된다면 마다하지 않지만 그 일을 얻기 위해 음모를 꾸미거나 경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적인 책무를 맡아 번거로움을 감수하기보다는, 누군가 그 일을 더 잘 처리해주기를 선호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성공한 야망이 가져오는 온갖 헛된 화려함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행동을 실천했을 때 주어지는 실질적인 영예조차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평온한 삶을 지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신중함은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 평판을 잘 돌보는 태도라는 점에서 존중받기에 충분하며, 어느 정도 기분 좋은 덕성으로도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매혹적이거나 고결한 미덕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 이런 개인적 신중함은 조용한 존경은 받지만 뜨거운 사랑이나 찬탄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현명하고 신중한 행동은 단순히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 평판에 대한 관심을 넘어, 더 크고 고귀한 목적을 향할 때 비로소 참된 신중함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말하는 신중함은 위대한 장군, 정치가, 입법자의 신중함이다. 이런 차원의 신중함은 언제나 용기, 넓고 강인한 자애, 그리고 정의의 원칙에 대한 깊은 존중과 함께한다. 그리고 이 덕성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반드시 자기 절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신중함이 이처럼 높은 경지에 이르면,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로 이어진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지적·도덕적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중함은 최고의 지성이 최고의 도덕성과 결합된 상태이며, 가장 완성된 이성이 가장 고귀한 미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