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이며,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빚어내는가?”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고도 심오한 답변인 『루소의 에밀』이 메이트북스에서 현대적 감각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편역서로 출간되었다. 이미 국내에는 여러 완역본이 존재하지만, 그 방대한 분량과 난삽한 문장은 일반 독자에게 높은 벽이 되어왔다. 이번 편역은 그 장벽을 허물기 위한 시도다. 이 편역서는 루소의 ‘심장부’만을 선별해 담았다. 지나치게 장황하거나 시대착오적인 부분은 과감히 덜어내고, 루소 교육철학의 정수인 '자연, 감각, 습관, 자율성'을 중심으로 사유의 본령만을 묶었기에 이 책은 완역본이 담을 수 없는 명료함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이는 단순 축소본이 아니라, 원전의 논리와 무게를 유지하면서도 ‘현대 독자가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교양서’로 새롭게 빚어낸 편역 작업이다.
『에밀』은 단순한 교육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빚어내는가를 묻는 철학의 선언문이다. 루소는 인간을 본성적으로 선한 존재로 보고, 사회 제도가 그 본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아이를 세상에 맞추는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왜곡을 비추는 거울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사유는 지금도 여전히 혁명적이다. 1762년 발표 당시, 이 책은 프랑스 파리 의회와 로마 교황청의 격렬한 비판을 받으며 금서가 되었고, 루소는 체포를 피해 스위스로 도피해야 했을 만큼 시대를 뒤흔든 혁명적 사유였다. 오늘날 정보와 경쟁의 강박 속에서 길을 잃은 교육 현실에, 이 책은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던진다. 정보와 경쟁, 성취의 강박 속에서 교육이 인간의 내면보다 결과를 앞세우는 시대에, 『루소의 에밀』이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한 철학적 길잡이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 작가정보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다.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독학으로 음악·문학·철학을 공부하며 청년 시절에는 방랑과 사색을 거듭했고, 파리에서 백과전서파와 교류하며 계몽사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합리주의 일변도의 계몽철학과는 달리 인간의 감성, 자연, 자유를 강조하는 독자적 사상을 전개했다. 1749년 『학문예술론』으로 아카데미 공모전에 당선되며 주목을 받았고, 이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사회 제도와 문명 발달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사회계약론』에서는 ‘일반의지’ 개념을 제시하며 근대 민주주의 정치철학의 기초를 마련했고, 『에밀』에서는 인간 교육의 자연성과 자율성을 강조해 근대 교육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생애 내내 권력과 제도, 교회와의 충돌로 박해와 추방을 당했으며 스위스, 영국 등지로 망명 생활을 했다. 말년에는 자서전적 작품 『고백록』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집필하며 자기 성찰의 글을 남겼고, 1778년 파리 근교 에르므농빌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혁명과 근대 교육학, 낭만주의 문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계몽사상과 낭만주의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인간 내면의 감성과 자유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루소의 사상은 칸트와 헤겔, 톨스토이 등 이후 철학자와 문학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고, 근대 교육학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에도 그의 저작은 민주주의, 자유, 교육을 논의하는 데 여전히 살아 있는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번역 이나래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불번역과를 졸업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 기획 및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세밀화로 본 정원 속 작은 곤충들』 『플라스틱 없이 1년 살기』 『쓰레기 제로 라이프』 『로비스트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세뇌하는가』 등이 있다.
■ 목차
엮은이의 말_ 21세기의 언어와 편집 감각으로 『에밀』을 다시 쓰다
머리말_ 어디서든 적용 가능한 교육의 원칙을 말하다
프롤로그_ 가상의 제자 에밀과 함께 현실의 교육을 시험한다
1장 자연에서 시작하는 여섯 가지 첫걸음_유아기
◇ 자연에 뿌리내리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라
‘자연, 타인, 환경’의 조화로 교육은 한 목표를 향한다|자연은 습관이 되어 본성으로 아이를 기른다
◇ 부모가 먼저 깨어나야 아이를 살린다
지키는 데서 멈추지 말고 살도록 이끌어야 한다|어머니가 먼저 깨어나면 가정과 사회도 다시 깨어난다|어머니의 사랑은 부족해도, 넘쳐도 아이를 해친다|어머니는 품어 기르고, 아버지는 이끌어 세운다
◇ 점진적인 단련으로 아이를 강하게 키워라
억누르지 말고, 점진적으로 강하게 키워라|아이에게 가르칠 유일한 습관은, 습관에 길들지 않는 자유|천천히 단련시키며 두려움을 넘어서게 하자
◇ 몸과 감각으로 스스로 겪으며 배우게 한다
몸으로 직접 겪게 하고, 스스로 배우게 해야 한다|눈과 손으로 감각을 익히고, 사물과 함께 언어를 배운다
◇ 도움은 주되, 욕망과 변덕에는 단호하라
아이가 울 때, 도와주되 휘둘리지는 말라|아이의 손길이 거칠어도 악의가 아닌 삶의 생명력이다|아이의 변덕이나 이유 없는 욕망에는 응하지 말라
◇ 아이가 말을 배울 때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자
아이가 처음 듣는 말은 분명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아이 말의 자잘한 오류들을 모두 고치려 하지 마라|조급히 말문을 재촉하면 아이의 언어는 더 어눌해진다
2장 자연 속에서 자라는 열한 걸음_유년기
◇ 울음에서 말로, 고통에서 용기로
울음에 반응하지 말고, 말할 때 다가가라|작은 통증으로 용기를 기르게 하라|과보호하지 말고, 자유 속에서 강하게 키워라
◇ 억누르는 권위 대신 자연의 법칙으로 가르쳐라
아이를 권위가 아니라 자연에 맡겨야 한다|자유를 주되 욕망은 절제시켜야 한다|작은 고통이 큰 행복을 준비한다|이성과 도덕을 서두르면 안 된다|교육은 자연의 법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자연의 선한 충동을 지켜주는 환경
아이의 본성은 선하므로 환경이 스승이 되어야 한다|가르치기보다 지켜주며 기다려야 한다|교육자의 인격과 진심이 최고의 환경이 된다
◇ 설교보다 설계! 교육은 경험의 구조다
훈계보다 체험으로 배우게 하라|격정의 순간, 경험을 통한 배움|아이의 생각을 지켜주는 교육자의 길
◇ 명령과 약속, 거짓말을 교육에서 치워라
물건을 파괴해도, 화내지 말고 경험하게 하라|약속은 협상과 자율 속에서 배운다|약속과 함께 태어나는 거짓말|강요된 약속은 거짓말을 낳는다
◇ 미덕은 보이는 것! 관대함은 모범으로
계산된 관대함은 진짜 미덕이 아니다|강요하지 말고 모범을 보여라|모방의 한계와 진정한 도덕
◇ 조기 훈육의 환상에서 아이를 지켜라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신동이라 불려도 아직은 아이일 뿐이다|유년기는 준비가 아니라 완전한 삶이다|기호와 말에 갇힌 헛된 교육
◇ 독서와 언어는 늦게, 현실과 사물이 먼저
단어 암기, 지식이 아니다|유연한 뇌에는 현실과 사물이 먼저|독서는 늦게, 배움은 욕망으로|소극적 교육은 방임이 아니다|현실에 뿌리내린 지성, 몸의 힘이 토대다
◇ 몸이 먼저이고, 지성은 뒤따르는 것이다
몸이 강할수록 아이의 이성도 강해진다|수면은 운동과 짝을 이룬다|잠과 깨움도 교육이다
◇ 감각의 학교! 만지고, 재고, 그리며 배운다
아이의 첫 스승은 발, 손, 눈|주입 대신, 감각과 판단을 훈련시켜라|빛 없이 어둠 속에서 배우는 촉각 훈련|도구를 벗어나, 감으로 재고 가늠하게 하라|실물로 그려야 보는 눈이 열린다
◇ 아이의 음악교육은 감정보다 ‘구조’여야 한다
아이의 목소리는 아직 감정을 담지 못한다|꾸밈없이, 정확한 목소리를 길러라|음악은 감정보다 구조다
◇ 입맛은 교육의 첫 문! 식탐을 허영심보다 믿어라
입맛은 교육의 첫 문이다|식탐은 허영심보다 훨씬 바람직한 교육적 동기다
◇ 유년기의 행복은 현재를 누리는 힘이다
현재를 사는 아이 vs. 미래를 강요받는 아이|아이의 언어는 꾸밈 없는 진실이다|자연의 필연성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자연이 주는 자유 속에서 아이의 분별력이 자란다
자유로운 행동, 그러나 경솔함은 없다|놀이와 활동이 곧 삶이 되는 순간|분별력으로 또래의 중심에 선다
3장 몸과 마음이 힘을 키워가다_ 소년기(12~15세)
◇ 욕망보다 앞선 힘을 지금 배움으로 돌려라
욕망을 앞지르는 힘이 싹틀 때|남는 힘을 배움으로 바꾸는 법
◇ 무엇을 가르칠지 ‘유익’이라는 기준으로 고르자
가르칠 것과 미룰 것의 기준|권위보다 경험, 그리고 도덕
◇ 호기심에 불붙이고, 감각으로 배우게 하라
호기심의 동력: 본능과 허영을 가르려면|감각에서 사유로: 경험이 먼저다|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질문법|하늘 수업: 실물 관찰로 여는 천문|도구는 보조일 뿐: 기호의 함정|지리를 배우는 법: ‘지금 여기’에서 지도까지
‘유익’이라는 기준으로 시간 쓰기|‘유익’의 의미를 몸으로 가르치기|되묻기의 힘과 신뢰|질문은 정말 필요할 때만 신중하게 던지자
◇ 주입을 멈추고, 판단력을 키워주자
경험 없는 설득은 헛수고다|다른 아이와의 비교 말고, 자기 경쟁|사물 먼저, 사회는 나중에|오류를 피하는 판단 훈련
◇ 살아가는 기술, 살아남는 법부터 가르치자
교환과 분업이야말로 함께 사는 힘|삶을 지키는 법부터 가르치자|재능인가, 욕망인가? 관찰이 답이다
◇ 알고 있는 지식만큼은 완전히 자기 것이 되도록 하자
내 것이 되는 앎: 양보다 내실|경험에서 출발하는 학습|관계로 판단하고, 흔들리지 않는다|오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4장 이성과 격정의 시기_ 청소년에서 청년으로(15~20세)
◇ 사춘기의 몸과 마음은 두 번째 탄생의 신호가 된다
두 번째 탄생인 ‘사춘기’는 몸에서 시작된다|눈빛이 달라지고, 태도가 독립을 배운다|마음의 흔들림은 성숙을 준비한다
◇ 교육은 훈육에서 벗어나 동행의 길로 들어선다
훈육은 물러서고, 동행이 시작된다|권위는 강제가 아니라 모범에서 나온다|성장을 서두르지 말고 계절을 따르자
◇ 상상력과 이성은 균형 있게 길러야 한다
상상력은 두려움도 키우고 열정도 키운다|이성을 감각 경험 위에 세워야 한다|상상과 이성은 충돌하지 말고 협력한다
◇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아이의 감정을 적으로 대하지 마라|사랑은 시험대이자 정화의 훈련이 된다|연민은 넓히고, 자존심은 경계한다|감정 위에 도덕이 세워진다
◇ 정의와 자유는 사회 속에서 배운다
정의는 놀이와 교류 속에서 배운다|자유는 규칙과 함께 자란다|사회적 관계 속에서 배우는 정의
◇ 신앙과 양심은 내면의 목소리로 자라난다
신앙은 강요보다 자유에서 싹튼다|양심의 자율성과 교육자의 역할|도덕 위에서 자라나야 살아 있는 신앙이다
◇ 사랑과 우정은 성숙의 학교가 된다
우정은 도덕 감정의 첫 번째 학교다|사랑은 가장 강렬한 시험대다
5장 지혜와 결혼의 시기_ 청년기의 완성(20~25세)
◇ 청춘의 끝자락에서 사랑은 찬란하게 온다
청춘의 절정은 지금 여기에서|첫사랑이 열어주는 달콤한 세계|기다림이 주는 행복의 진짜 맛
◇ 청년이 흔들릴 때 교육은 끝까지 붙잡아준다
이상을 잃을 때 청년은 흔들린다|교육의 힘은 습관을 이어주는 데 있다
◇ 행복은 가까이에 있지만 청년은 자주 길을 잃는다
행복을 찾아 헤매다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지다|자연이 보여주는 길 위에서 행복을 만나다|욕망을 배우며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
◇ 결혼과 가정은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결혼은 자유를 성숙으로 이끈다|가정은 가장 작은 사회다|결혼과 가정은 사회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 조국과 함께할 때 청년은 완성되어간다
조국은 청년이 덕을 실천할 무대가 된다|조국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무
에필로그_ 에밀식 교육의 결실은, 덕 있는 자유인의 탄생이다
"에밀"은 단순한 교육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빚어내는가를 묻는 철학의 선언문이다. 루소는 인간을 본성적으로 선한 존재로 보고, 사회 제도가 그 본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아이를 세상에 맞추는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왜곡을 비추는 거울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사유는 지금도 여전히 혁명적이다.
루소의 에밀
환경은 아이의 삶을 감싸는 첫 울타리이고, 습관은 그 안에서 반복되는 작은 선택의 축적이고, 감각은 세상을 인식하는 창이자 배움의 문이다. 사소한 습관 하나가 자유를 억압하기도 하고, 작은 배려 하나가 평생의 힘을 길러주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이의 교육은 출발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교육의 길 위에 선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다. ‘첫 경험, 첫 감각, 첫 움직임’이 바로 배움의 시작이 된다. 유아기의 과업은 단순하다. 아이가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지켜보고, 불필요하게 억누르지 않으며, 점진적인 훈련으로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도록 돕는 것이다. 교육자는 무엇을 가르칠까보다 무엇을 방해하지 말아야 할까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제 ‘자연 속 아이’를 바라보는 교육자의 시선으로 들어가보자.
자연에서 시작하는 여섯 가지 첫걸음, 유아기
자연에 뿌리내리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라
‘자연, 타인, 환경’의 조화로 교육은 한 목표를 향한다
식물은 재배로 기르고, 인간은 교육으로 키운다. 인간이 아무리 크고 강하게 태어났더라도 체격과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는 아무 소용도 없다.
우리는 약하게 태어난 까닭에 힘이 필요하다. 빈손으로 세상에 던져졌으므로 도움을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한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자연, 타인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배운다. 자연을 통해 지적 능력과 신체 능력을 키우고 타인을 관찰해 성장한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깨치며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신만의 경험을 쌓는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세 가지 유형의 교사로부터 교육을 받는 셈이다. 하지만 내용이 서로 상충한다면 실패한 교육일 뿐이다. 그러면 가르침을 받더라도 결코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없다. 반면 성공적인 교육은 동일한 핵심 내용을 공유하고, 하나의 목표를 추구한다. 즉 인간이 배움을 바탕으로 스스로 정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며 일관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다.
자연은 습관이 되어 본성으로 아이를 기른다
나는 이른바 ‘콜레주(College)’라고 불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시설을 공적 교육기관으로 보지 않는다. 그 외에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역시 내가 말하는 진정한 교육에는 포함될 수 없다. 이런 교육은 서로 모순된 두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결국 모두 놓치고 만다. 그 결과 언제나 겉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무엇도 나누지 않고 오직 자기 이익만 쫓는 이중적 인간을 길러낼 뿐이다. 게다가 다들 그것이 뻔한 겉치레임을 알고 있기에 아무도 속지 않는다. 그러니 애써 그럴듯하게 꾸며봤자 헛수고다.
교육이라는 외적 모순에서 비롯된 내적 충돌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는 자연과 사회라는 두 길에서 양쪽으로 잡아당겨지며, 다양한 충동에 휩쓸려 조각조각 찢긴다. 결국 두 가지를 절충한 길을 따라가지만 어떤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처럼 일평생 부딪히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는 끝내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다. 끝내 우리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좋은 존재가 되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자연에 따른 교육, 곧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뿐이다. 그렇다면 오직 자기 자신으로 길러진 인간이 사회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을 위한 교육과 시민을 위한 교육, 이 두 목표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면 인간 내면의 모순은 사라지고,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자연 상태의 인간이 공동체 속에서 어떤 존재가 될지를 판단하려면 완성된 모습을 직접 보아야 한다. 성향을 관찰하고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걸어온 길을 따라가야 한다. 다시 말해 자연 상태의 인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이 주제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리라 믿는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므로 그들의 공통된 소명은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명을 이행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맡아야 할 다른 역할도 잘해낼 것이다. 내 제자가 장차 군인이 되든, 성직자가 되든, 법조인이 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부모가 아이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전에 자연은 먼저 아이를 불러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가리킨다. 나는 아이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자 한다. 내가 가르친 아이는 내 손을 떠난 뒤 곧바로 법조인, 군인, 성직자가 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아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자질을 필요한 순간에 누구보다 잘 발휘할 줄 아는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 탐구해야 할 주제는 ‘인간의 조건’이다. 내 생각에 ‘삶의 기쁨과 고통을 가장 잘 견딜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잘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은 이론적 가르침보다 실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점진적인 단련으로 아이를 강하게 키워라
아이에게 가르칠 유일한 습관은, 습관에 길들지 않는 자유
아이가 처음 접하는 감각은 감정과 결부된다. 태어난 직후 아이는 오직 기쁨과 괴로움만을 안다. 스스로 걷지도, 손으로 움켜쥘 수도 없는 탓에 외부 사물을 분리된 대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사물이 감각 속에서 외부 대상으로 확장되고, 시각을 통해 거리·크기·형태를 분별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감정적 감각이 반복되며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아이는 눈길이 끊임없이 빛으로 향한다. 옆에서 빛이 비추면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바라본다. 따라서 사시나 비스듬한 시선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얼굴을 언제나 빛 쪽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어둠에 익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에 놓이는 순간 곧장 울음을 터뜨린다. 음식과 수면을 지나치게 규칙적으로 맞추면 몸은 일정한 간격으로만 먹고 자도록 길들여진다. 그러면 욕망은 자연스러운 필요가 아니라 습관에서 생겨난다. 더 정확히는 습관이 자연적 필요 위에 새로운 욕구를 덧붙이는 것이다. 이런 습관화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아이가 익혀야 할 유일한 습관은, 어떤 습관에도 길들지 않는 자유다. 아이가 한쪽만 편하게 느끼지 않도록 양팔을 번갈아 안아야 하며, 어느 한 손만 내미는 습관이 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먹고, 자고, 움직이는 시간도 유동적으로 바꾸어 불필요한 버릇이 자리 잡지 않게 해야 한다. 밤이든 낮이든 혼자 있어도 의연할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
아이가 장차 자유를 누리고, 자신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으려면 지금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몸이 자연의 흐름에 따라 자라도록 돕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도록 훈련하며, 일단 결심하면 끝내 자기 뜻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천천히 단련시키며 두려움을 넘어서게 하자
아이가 사물을 구별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무엇을 보여줄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사물은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아이는 자신이 연약하다고 느껴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거미 한 마리조차 없는 집에서 자란 아이는 거미를 무서워하지만 시골 사람들 가운데 거미를 두려워하는 경우는 없다.
아이의 태도가 보여주는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왜 말하고 듣기 전에 이미 교육을 시작하지 않는가? 나는 아이가 낯선 사물, 보기 흉하거나 이상한 동물에도 익숙해지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본다.
처음에는 멀리서 조금씩 보여주며 낯설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도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 어릴 적 두꺼비, 뱀, 가재를 두려움 없이 본 아이라면 자라서 어떤 동물을 마주쳐도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매일 마주하면 아무리 흉측한 대상도 결국 혐오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는 누구나 가면을 무서워한다. 나는 먼저 에밀에게 부드러운 표정의 가면을 보여주고, 누군가 그 가면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웃음을 터뜨리면 모두가 웃고, 아이도 따라 웃는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익숙해지면 더 험한 가면도 두렵지 않게 되고, 마침내 흉측한 얼굴을 보고도 겁내지 않는다. 단계를 점진적으로 높여간 덕분에, 아이는 마지막 가면을 봐도 놀라기는커녕 처음 봤을 때처럼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이제 가면을 보고 놀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아이의 또 다른 발달 과정은 울음이 줄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데서 나타난다. 이는 신체적 힘이 붙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힘이 강해질수록 그 힘을 조절할 수 있는 인지 능력도 함께 발달한다. 이 두 번째 단계부터 아이 자신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아이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자각한다.
기억은 자기 동일성에 대한 감각을 삶의 모든 순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아이는 동일한 ‘나’로 거듭나며, 이제 행복도, 불행도 자신의 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점부터는 아이를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존재로 대해야 한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열한 걸음_유년기
루소는 이 장에서 유년기의 핵심 과업을 다룬다. 유년기는 아이가 두 살을 지난 뒤부터 열두 살 무렵까지 이어지는 시기이다. 이때 아이는 울음 대신 말을 배우고, 몸을 단련하며, 스스로 움직이고 배우려는 힘을 키운다. 유년기 학습의 초점은 지식을 조기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와 경험, 반복되는 활동 속에서 기초를 다지는 데 있다. 교육자의 역할은 훈계나 설득이 아니라 환경을 마련하고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힘을 시험하고 감각을 단련할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한다. 무리하게 이성을 앞당겨 요구하지 말고, 자연이 정한 순서에 따라 아이를 자유롭게 성장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루소가 강조하는 유년기 교육의 본질이다.
울음에서 말로, 고통에서 용기로
울음에 반응하지 말고, 말할 때 다가가라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울음은 줄어든다.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말이 울음을 대신하는 것이다. 아이가 고통을 말로 전할 수 있게 되면 굳이 울 필요가 없다. 물론 고통이 극심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는 예외이다. 그런데도 계속 운다면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에게 있다. 에밀이 아플 때 “아파요”라고 말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큰 고통이 아니면 울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가 섬세하고 예민해 사소한 일에도 쉽게 운다면, 울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나는 아이가 우는 동안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울음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히면 곧바로 다가간다. 머지않아 아이는 울음 대신 조용히 기다리거나 짧게 울고 멈춰야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아이는 다양한 표현을 시도하며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경험을 통해 익힌다. 언어 관습에 물들지 않은 아이는 오직 경험으로 언어를 배운다. 그래서 다치더라도 혼자 있을 때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과보호하지 말고, 자유 속에서 강하게 키워라
아이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 부모는 포장된 길에서만 붙들고 걷게 한다. 그러나 아이를 매일 들판으로 데려가 마음껏 달리고 뛰어놀게 해야 한다. 하루에 백 번을 넘어져도 괜찮다. 오히려 좋다. 그럴수록 아이는 더 빨리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운다.
자유 속에서 얻는 건강은 웬만한 상처쯤은 충분히 보상한다. 내 제자는 몸에 멍이 자주 들겠지만, 마음만은 늘 명랑하고 즐겁다. 반대로 과보호 속에 자란 아이는 상처는 적을지 몰라도 늘 억눌리고 우울하다. 어떤 방식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아이의 또 다른 발달 과정은 울음이 줄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데서 나타난다. 이는 신체적 힘이 붙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힘이 강해질수록 그 힘을 조절할 수 있는 인지 능력도 함께 발달한다. 이 두 번째 단계부터 아이 자신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아이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자각한다.
기억은 자기 동일성에 대한 감각을 삶의 모든 순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아이는 동일한 ‘나’로 거듭나며, 이제 행복도, 불행도 자신의 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점부터는 아이를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존재로 대해야 한다.
억누르는 권위 대신 자연의 법칙으로 가르쳐라
아이를 권위가 아니라 자연에 맡겨야 한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에 아이를 맡겨야 교육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아이가 충동적으로 행동해 통제가 어렵더라도 훈계하거나 주의를 주기보다, 물리적 제약을 두거나 그 행동의 결과를 직접 경험하게 해야 한다. 이후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아이가 그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면 충분하다.
잘못된 행동을 억지로 막으려고 호통을 칠 필요도 없다.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아이는 오직 경험을 통해 배우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과정을 거쳐 스스로 법칙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아이의 요구라고 해서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할 때만 허락하는 것이 옳다.
아이의 행동은 복종이 아니라 자율적 의지의 표현이다. 타인의 도움은 복종의 증거가 아니라 기꺼이 베푼 호의이다. 아이는 스스로 행동할 때도, 어른이 대신 도와줄 때도, 언제나 자유를 느껴야 한다. 부족한 힘을 보완해줄 때는 아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도한 보호는 아이를 오만하게 만든다. 아이가 도움을 받을 때마다 민망함을 느끼게 하고, 어른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냈음을 자랑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게 해야 한다.
자유를 주되 욕망은 절제시켜야 한다
자연은 인간의 몸을 튼튼하게 만들고 성장시키기 위해 고유한 방식을 사용한다. 이 흐름을 결코 거슬러서는 안 된다. 아이가 움직이고 싶어 할 때 억지로 자리에 붙잡아두거나, 반대로 쉬고 싶어 하는데 억지로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의 의지가 어른의 간섭으로 흐트러지지 않았다면, 아이는 결코 쓸데없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이가 뛰고, 달리고, 소리 지르고 싶어 한다면 그대로 두어야 한다.
아이는 본성에 따라 몸을 단련한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이라면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욕구와 변덕스러운 욕망은 분명히 다르므로 구분해야 한다.
아이가 이것저것 갖고 싶다고 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여기서는 단지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한다. 아이가 바람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더 빨리 이루거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눈물을 짜낸다면, 그 요구는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아이가 본능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말로 도움을 요청한다면 즉시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눈물에 무조건 져주면 오히려 더 자주 울도록 부추기는 셈이다.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무조건적으로 관대한 태도는 모두 피해야 한다. 아이가 괴로워하는데도 모른 척 방임하면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고, 그 순간 아이는 비참한 감정에 휩싸인다. 반대로 어떤 불편도 겪지 않도록 사사건건 간섭하면, 아이는 대비 없이 어른이 되어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
부모의 지나친 애정은 아이를 예민하고 나약하게 만든다. 인위적으로 고통을 피하게 해도, 결국 현실은 보호의 벽을 무너뜨린다. 자연이 예비해둔 몇 안 되는 시련을 모두 피하게 하려다,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고통을 아이 스스로 짊어지게 만든다.
이성과 도덕을 서두르면 안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성이 자라고, 사람은 시민으로서 사회에 예속된다. 그런데 왜 그 이전부터 가정에서 미리 복종을 가르치며 아이를 길들이려 하는가?
자연이 씌우지 않은 멍에라면 인생의 한 시기만이라도 속박에서 벗어나 살 수 있도록 허락하자. 어린 시절만큼은 자연이 준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라. 그러면 적어도 한동안은 복종과 함께 배우는 온갖 악습에 물드는 시기를 늦출 수 있다.
엄격한 교사들, 아이에게 휘둘리는 아버지들,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한들 겉도는 반박 말고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자기 방식이 옳다고 떠들기 전에 먼저 자연이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차분히 관찰해야 한다.
이제 앞서 세운 원칙들을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할 차례다. 아이가 단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뭔가를 쥐여주어서는 안 된다. 정말 필요할 때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교육은 자연의 법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제자는 그 나이에 맞게 다뤄야 한다. 우선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분명히 인식하게 돕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그러면 지혜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아이는 지혜의 중요한 교훈을 몸으로 익히게 될 것이다.
아이에게 절대로 아무것도 명령해선 안 된다. 예외 없이, 명령을 통한 교육은 배제해야 한다. 또한 아이의 머릿속에 누군가 자신을 억누르려 한다는 의심이 싹트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려면 권위적인 태도를 피해야 한다.
단, 아이가 자신은 약하고 어른은 강하다는 사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반드시 인정하게 해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고 배우며 몸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콧대 높은 아이라면 가능한 한 어릴 때 자연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해야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채워둔 ‘필연’이라는 족쇄가 자신의 발목에도 달려 있고, 유한한 존재는 이 족쇄를 끊어내지 못한 채 결국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아이에게 억제력을 주는 것은 권위가 아니라 자연의 힘이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굳이 명령하지 말고, 애초에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반대로 허락할 일이라면 아이가 요구하기도 전에 곧바로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허락은 기꺼이, 거절은 신중히! 특히 한 번 거절한 일은 절대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다섯 번, 여섯 번 전력을 다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벽처럼 “안 돼”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교육하면, 아이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에도 인내심을 갖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타인의 악의에는 쉽게 분노하지만, 자연의 필연적 흐름 앞에서는 순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직 가능과 불가능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른은 아이를 둘러싼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거나 좁힌다. 그러나 ‘필연’이라는 끈으로 묶어두면 아이는 불평하지 않는다. 사물의 힘, 즉 자연이 주는 조건만으로 아이는 유연하게 순응한다. 이 과정에서는 어떤 악도 싹틀 수 없다. 욕망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날뛰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