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지은이 : 장하석 (지은이), 전대호 (옮긴이)
출판사 : 김영사
출판일 : 2026년 02월



  • 과학을 비판으로부터 보호받는 성역이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와 논쟁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인간 활동으로 정의하는 이 책은, 보다 현실적인 실재론으로 ‘행동하는 실재주의(Activist Realism)’를 주창한다.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신뢰하고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하는 모든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지적 이정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삶의 현장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학철학

    현대 과학철학은 오랫동안 실험실과 학자의 서재 안에 머물러 있었다. 과학 이론이 참인가, 거짓인가, 귀납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은 철학자에게는 흥미롭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이 거리를 줄이려는 시도다. 과학을 추상적 진리 탐구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는 도구, 곧 실천의 일부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다. 진리라는 말 대신 무엇이 더 잘 작동하는가, 어떤 이론이 더 잘 예측하고, 더 나은 결정을 돕고,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 관점에서 과학철학은 더 이상 학자들만의 내기장이 아니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의료기술, 공공정책을 둘러싼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는 어떤 과학을 믿고, 어떤 데이터를 채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이런 장면에서 “무엇이 옳은 이론인가”를 묻는 대신 “어떤 선택이 더 책임 있고, 더 풍부한 결과를 낳는가”를 묻도록 방향을 돌린다. 철학은 과학의 심판이 아니라, 과학이 사회와 만나는 접점에서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가 된다.

    진리 대신 작동성에 주목한다는 것

    실용주의 과학철학이 가장 먼저 의심하는 것은 진리의 절대성이다. 과거의 철학은 과학 이론의 목표를 세계의 구조를 정확히 비추는 참된 서술로 보았다. 하지만 실용주의자는 묻는다. 그런 ‘거울처럼 완벽한 묘사’가 정말 필요한가. 현실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류 없는 그림이 아니라, 충분히 정확해서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지도다. 지도는 축척도 다르고, 생략도 많지만, 길을 찾는 데는 오히려 그런 단순화가 더 유용하다.

    이런 태도는 진리를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세계와 성공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해주는 특성”으로 재해석하자는 제안에 가깝다. 어떤 이론이 더 넓은 상황에서 잘 작동하고, 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 진리에 가깝다고 부를 수 있다. 진리는 하늘 위에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검증되고 수선되는 성능의 이름이다. 과학은 실험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이론은 도구이고, 모형은 렌즈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의 두 번째 특징은 이론과 모형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론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서술하는 진술들의 체계였다. 이에 비해 실용주의자는 이론을 “문제를 풀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상자”로 본다. 도구에는 망치도 있고, 드라이버도 있고, 섬세한 작업을 위한 핀셋도 있다. 모든 상황을 해결하는 만능 도구는 없지만, 각 도구는 적절한 맥락에서 필수적이다.

    모형도 마찬가지다. 경제 모형, 기후 모형, 질병 확산 모형은 현실을 왜곡하고 단순화한다. 그러나 이 왜곡은 실패가 아니라 의도된 전략이다. 어떤 측면은 과감히 버리고, 어떤 변수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질문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 모형이 진짜 세상을 얼마나 똑같이 따라 만드는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이 모형이 답을 주는가”이다. 모형은 거울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확대해주는 렌즈다.

    이렇게 도구와 렌즈의 관점에 서면, 서로 다른 이론 간의 갈등도 덜 극단적이 된다. 경쟁 이론은 서로를 전면 부정하는 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제를 다르게 조명하는 도구일 수 있다. 물리학에서 파동 모형과 입자 모형이 동시에 쓰이듯,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무엇이 진짜인가”를 따지기 전에 “어떤 관점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많이 도와주는가”를 우선 묻는다.

    가치와 과학은 분리될 수 있는가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이 특히 중요하게 짚는 지점은 가치의 문제다. 오래된 이상은 과학을 순수한 사실의 세계에 놓고, 가치는 정치나 윤리의 문제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과학은 언제나 가치와 뒤섞여 있다. 어떤 연구 주제에 예산을 배정할지, 어떤 위험 수준을 “수용 가능”이라고 볼지, 어떤 데이터를 우선 수집할지 같은 결정은 모두 가치판단을 동반한다.

    실용주의 관점은 이 섞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이 가치와 얽힌다는 사실을 투명하게 인정하고, 그 얽힘을 어떻게 책임 있게 관리할지 논의의 중심에 올린다. 기후위기 연구에서 어떤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삼을지, 백신 정책에서 어떤 불확실성을 허용할지에 대한 판단은 단순히 과학자에게만 맡길 수 없다. 그것은 시민과 정책결정자, 전문지식 공동체가 함께 논의해야 할 사회적 선택이다. 과학은 객관성의 이름으로 가치 논의를 대체할 수 없고, 오히려 가치 논의를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여야 한다.

    이때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가치가 개입했으니 과학은 주관적이다”라는 냉소와도 거리를 둔다. 중요한 것은 가치가 들어오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치가, 어떤 절차를 통해 들어오며, 그 과정이 얼마나 공개되고 비판 가능한가이다. 객관성은 가치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가 투명하게 드러나고 토론될 수 있는 구조에서 다시 정의된다.

    불확실성 속에서 결정해야 하는 시대

    현대의 과학적 쟁점은 대부분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기후 변화의 정확한 속도, 새로운 바이러스의 변이 양상, 인공지능의 장기적 영향에 대해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충분한 데이터가 쌓일 때까지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정책과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부분적인 지식” 위에서 이루어진다. 전통적인 과학관은 이 지점에서 자주 멈춘다. 더 정확한 예측을 얻기 전에는 행동을 유보하자고 말하고 싶어진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다른 길을 제안한다.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과 동시에,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예측 모형은 미래를 확정적으로 알려주는 예언이 아니라, “지금 조건이 유지된다면 어떤 경향이 나타날지”를 보여주는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우리는 여러 행동 옵션을 비교하고, 각 옵션의 위험과 이익을 따져보며, 가치와 우선순위를 조정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을 맞혔는가”가 아니라, “당시 이용 가능한 최선의 지식과 가치 논의를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결정했는가”이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과학적 합리성을 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질에서 찾는다. 나중에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올 수 있지만, 그때 우리는 절차를 재검토하고 배우면 된다. 불확실성은 회피의 이유가 아니라, 학습과 조정의 이유가 된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이 여는 새로운 시민성

    실용주의는 철학자와 과학자만을 위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이 과학을 대하는 방식과도 깊이 연결된다. 과학을 절대적 권위로 숭배하거나, 반대로 음모론적 시선으로 전면 부정하는 양극단은 모두 “과학은 완전히 맞거나 완전히 틀린 것”이라는 이분법에서 나온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이 틀을 깨고, 과학을 “함께 다듬어야 할 공적 자원”으로 제시한다.

    시민은 더 이상 과학결과를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소비자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 어떤 연구 방향을 우선할지, 어떤 증거를 ‘충분하다’고 볼지를 둘러싼 논의에 참여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려면 과학적 내용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과학이 작동하는 철학적 구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이 구조를 조용히 해부해 보여주며, “과학을 무조건 믿거나, 무조건 의심하라”가 아닌 “어디를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결국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남긴다. 과학은 누구의 도구인가. 그 도구는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쓰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있는가. 진리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수많은 선택이 실제로는 어떤 가치와 이해관계 위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을 때, 과학은 비로소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실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철학은 전문용어의 숲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현실을 이해하고 바꾸기 위해 올라서는 하나의 전망대가 된다.


    핵심 메시지
    과학을 절대적 진리의 보고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볼 때, 우리는 이론과 모형의 가치를 작동성과 책임성의 관점에서 다시 평가할 수 있다.
    과학은 가치와 분리된 순수 영역이 아니라, 무엇을 연구하고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 선택을 포함하는 실천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시민이 과학의 권위에 의존하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질문하고 참여하는 주체가 되도록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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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을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로 바라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현실적인 철학적 언어를 건넨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같은 쟁점에서 과학적 근거와 가치 판단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실용주의 관점은 명쾌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전문적인 과학지식이 없더라도 과학이 사회와 민주주의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 고민해보고 싶은 시민에게 차분하지만 깊이 있는 안내서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