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질문
 
지은이 : 장재형 (지은이)
출판사 : 타인의취향
출판일 : 2025년 12월




  • 질문보다 더 확실한 철학은 없다. 막연한 불안감, 마음 한구석의 헛헛함, 이유 없는 쓸쓸함, 이런 것들은 단순한 위로로 해결되지 않는다. 나 스스로 묻고 답하며 깨달아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사유해야 할 다섯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책이다. 



    왜 나는 모든 것이 불안한가

    흔들리는 나의 마음에 관하여
    불안의 본질 | 불행은 과로가 아니라 불안에서 시작된다 | 버트런드 러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걱정이나 불안이다.”

    사는 게 참 피곤하고 힘들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내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중에서 우리를 갑자기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불안’이다. 걱정과 불안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다.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끼던 순간에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찾아와 나를 뒤흔든다.

    익숙한 풍경이 갑자기 낯설고 불길하게 다가오는 순간에 대해 말하려 한다.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가 〈절규〉에서 포착한 바로 그 순간이다. 어느날 저녁, 뭉크는 친구들과 함께 평소처럼 노르웨이 오슬로 근처의 피오르드를 산책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던 그 순간 그는 예기치 못한 압도적 공포에 사로잡혔다. 뭉크는 소리를 지르며 절규하는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을 캔버스에 담았다. 작품 속의 인물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괴로움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인물 뒤로 굽이치는 붉게 노을 진 하늘과 검푸른 해안선은 공포에 떨고 있는 인물의 불안한 감정을 나타낸다. 하지만 뒤에 보이는 두 명의 사람은 무심하게 걷고 있다.

    불안이 갑자기 찾아올 때 우리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며,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든다. 땀이 나거나 현기증이 나고, 때로는 손이 떨리거나 몸에 힘이 빠지기도 한다. 불안이 엄습하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안절부절못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된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걱정과 불안을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을 아래와 같이 진단한다.

    1 감성적인 피로: 늘 긴장하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생활을 반복하면 신경이 끊임없이 혹사당한다. 이런 감성적인 피로가 누적될 때 사람은 작은 문제나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쉽게 불안을 느끼게 된다.
    2 지나친 자기중심적 태도: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작은 문제나 비판에도 쉽게 상처받고 불안해진다.
    3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억압하기: 불안을 외면하거나 억압하면 오히려 그 감정은 더 커지고 힘을 갖게 된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불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만든다. 불안이 지속되면 삶의 즐거움과 행복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도 무너진다. 또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을 두렵게 만들고,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를 회피하게 만든다. 결국 삶의 폭이 점점 좁아진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불안은 오히려 친밀감이 생기면 그 두려움의 칼날이 무뎌진다. 그래서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그러나 매우 집중적으로 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혹시 당신도 지속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어떤 즐거운 일도, 사람들과의 교류도 부담스러운가? 불치병, 상실, 좌절, 슬픔 같은 좋지 않은 감정들이 닥칠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은 더욱 강해진다. 이때 두려움을 피하려고 시선을 돌리면 오히려 두려움은 더 커진다.

    예를 들어 매일 밤 침대에 누워도 내일 있을 사소한 발표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불안에 시달릴 수 있다. 회사에서 한 사소한 실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면 신경이 쇠약해질 수도 있다. 겉보기엔 회사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후배가 두각을 드러낼 때마다 속으로 질투와 초조를 느낄 수 있다. 평소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고 자신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험담했다는 소문 하나에 쉽게 무너진다. 더욱이 요즘 같은 투자 열풍 속에 남들 다하는 주식이나 부동산 재테크를 따라가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아 불안해진다.

    우리는 두려움을 쉽게 물리치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두려움은 언제나 곁에 있겠지만, 그것은 온전히 내가 되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어쩌면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불안 앞에서의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불안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 평온한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걱정에 끌려가지 말고 이겨내라. 2;


    왜 나는 타인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에 관하여
    자기 사랑 |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야 나를 되찾는다 | 장 자크 루소
    “내 영혼을 성찰함으로써, 자만심을 쉽사리 만족시키지 못하는 외부와의 관계들을 단절함으로써, 마지막으로 비교와 편애를 포기함으로써 자만심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성실한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 자만심은 자연의 질서 속으로 되돌아왔으며 나를 세론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인간은 쉽게 자만심에 사로잡혀 타인의 평가에 흔들린다. 남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자신을 재단하고, 그 평가 앞에서 자기 기준을 잃는다. 반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남과의 비교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안에서 만족을 찾는다. 자기 사랑은 내 안에서 비롯된 성실함과 확신에 뿌리를 둔다. 이를 통해 타인의 평가와 무관하게 내 안의 가치를 확인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세운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타인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기를 원한다.

    “왜 우리는 타인을 희생시켜가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는가?”

    그것은 순수한 자기 사랑이 약해지고 자만심이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고립적으로 살아가던 인간은 단순한 욕구와 자기 사랑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살게 되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비교하게 되었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자만심이 발생했고, 명예와 우월에 대한 욕망이 싹튼다. 사람들은 서로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자기도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루소에 따르면 그때부터 인간에게 허영심·질투·분노와 같은 감정이 생겨났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 불평등의 첫걸음이다. 결국 타인을 희생시켜가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숨겨진 욕망으로 인해 순수했던 자기 사랑은 자만심으로 바뀌었다. 자만심에 빠진 인간은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잃고, 끝내 허영심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쓴다.

    루소는 자만심과 자기 사랑을 본래부터 다른 것으로 구분했다. 다만 사회 속에서 힘이 약해진 자만심은 자기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세론, 즉 여론과 타인의 평가라는 굴레에서 해방된다. 여기서 해방은 바로 사회가 만든 굴레를 끊고, 자유로운 주체로 서는 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만심을 버리고 자기 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까?

    루소가 제안하는 3가지 자기 사랑법
    1 내 영혼을 성찰하라. 타인이 아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준을 되찾는다. 하루의 끝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오늘 내가 한 말과 행동이 진실했는지 되묻는 것이다.
    2 자만심을 쉽사리 만족시키는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라. 그것은 탐욕스러운 야심을 부추기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는 열망을 키워 결국 허영심과 질투로 이어진다.
    3 비교를 포기하라. 남과 자신을 저울질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특정한 대상만 높이 평가하는 태도는 다른 이를 깎아내리는 결과를 낳는다.
    당신 또한 남의 인정으로만 내면을 채우는 허영심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남의 눈으로 살아가는 삶은 세상이 만든 잣대와 평판에 매여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제는 내 삶에 얼마나 정직한지, 내 영혼에 거짓은 없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성실한가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루소가 말한 ‘나 자신에 대해 성실한 것에 만족했다’라는 것이다. 남이 뭐라 하든, 내가 나에게 떳떳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삶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삶의 방향과 태도에 관하여
    흔들리지 않는 삶 | 방향 없는 삶은 어느 바람에도 흔들린다 | 몽테뉴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한 확고한 구상을 세우지 않으며, 조각조각 단편적으로만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주소도 목적지도 없으니 우리의 계획은 길을 잃고 헤맨다.”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출 수도 없다는 의미다. 삶은 안정된 듯 보여도 누구나 길을 잃는 순간을 맞는다. 피하려 애써도 결국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항로를 잃은 배처럼 어디론가 떠밀려가며 쓸쓸한 흔적을 남긴다. 중요한 건 길을 잃고 방황하더라도 나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면 된다. 과거로 떠밀려 가더라도 말이다.

    당신은 얼마나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는가. 배움이 많든 적든, 나이가 많든 적든 어느 누구도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과정이다. 그때 당신은 그것을 어떤 태도로 맞이할지 물어야 한다. 다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그저 떠밀려 갈 것인지. 르네상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에세 3》에서 방향을 잃은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려는 항구가 없는 자에겐 어떤 바람도 유용하지 않다.”

    몽테뉴에 따르면 우리는 인생 전체를 하나의 항로로 보지 못하고 순간순간마다 단편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매번 다른 선택을 한다. 목적지가 없으니 매 순간의 판단은 일관성을 잃고,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삶을 되풀이하는가.

    그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 인생을 전체로 구상하지 않고 조각조각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는 태도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확고한 목적에 따라 삶을 전체적으로 계획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 둘째, 욕망과 충동에 따라 그때그때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순간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계획은 단편적이고 일관성이 없다. 셋째, 궁극적으로 이르고 싶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서다. 그러다 보니 계획은 무의미해지고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당신은 방향을 잃을 때마다 어떤 선택을 해왔는가. 만약 조류에 떠밀려 다니며 매번 빈손으로 돌아왔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당신이 삶을 다시 하나로 구상한다면 어디에서든 전체를 잇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인생은 거시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몽테뉴가 문제 삼은 핵심이다. 그는 사람들이 여러 의견 사이를 떠다닌다고 말했다. 순간의 기분이나 우연한 사건에 매달려 어떤 것도 자발적으로,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어떤 것도 한결같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전체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런 행동이 쌓이면 결국 용기를 잃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라도 당신 인생의 빅피처를 그려라.


    참고 버티면 언젠가 나아질까
    자기 극복과 성장에 관하여
    일상의 완급 조절 |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간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은 고통과 무료함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욕망이나 결핍에 의해 내몰릴 때 고통을 느끼고, 그 둘로부터 벗어날 때 권태를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사실상 진폭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 두 가지 적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권태라는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권태는 매일 똑같은 일상에 흥미를 잃고, 하려던 일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다. 이러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기분이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진다. 쇼펜하우어는 권태를 인간 실존에 깊이 뿌리 내린 불가피한 감정으로 보았다. 실제로 인간은 욕망이 충족되면 목표를 잃고 흥미가 사라져 지루함을 느낀다. 반면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으로 인해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으로 고통과 권태를 꼽았다.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쇼펜하우어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인생에서 고통과 권태를 완전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온 힘을 쏟을 만한 유일한 길로 그 일을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하루하루가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작은 성과에도 만족과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매일 판에 박힌 듯한 일상과 루틴이 계속되면 처음의 열정은 서서히 사라진다. 사업을 이어가더라도 새로운 시도와 성장을 멈추면 모든 날이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간다. 하루를 시작해도 어제와 다르지 않고, 계획을 세워도 특별히 기대되지 않는다. 물론 겉으로는 예전과 다름없는 안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은 서서히 무뎌지고 무기력해진다.

    권태를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권태에 빠져 무기력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계기로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두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권태에 빠진 사람은 익숙한 현실에 안주한 채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의 하루는 신선함도 없고 긴장감도 사라진 상태다. 매일 똑같은 패턴을 습관처럼 반복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반면 권태를 느끼는 순간 행동하려는 사람은 곧바로 새로운 일과 자극을 찾아 나선다.

    앞서 말했듯이 어느 누구도 권태라는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생을 하루하루 흥미롭고 설레는 순간으로만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성공한 사업가조차 매일 반복되는 긴 노동 시간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과감히 사업체를 팔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일상의 완급을 조절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다. 권태에서 벗어나려 해도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지루함은 계속 찾아오고, 설령 권태에서 벗어나더라도 준비 없는 변화는 곧 맞은편에 있는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삶의 어느 부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에서 똑같이 반복된다. 사람들은 한때 사랑했던 일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지루하고 답답하다고 느낀다. 그런 감정은 나태나 게으름이 아니라 변화 없는 일상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이다. 권태는 단순히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다시 잡는 숨 고르기다. 그러니 지금 삶이 권태롭다면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더 멀리 가기 위해 잠시 멈춰 호흡을 가다듬고, 힘을 비축하며 방향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라.

    권태에 빠진 사람은 의욕이 없고 한숨만 내쉬며 주변 분위기까지 가라앉힌다. 그는 막연히 변화를 기다리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대신 그 권태에서 끌어내주지 않는다. 권태에 길들여 당신의 일상을 스스로 감옥으로 만들지 마라. 지루하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몸을 움직여 일상의 속도를 바꿔라. 간단하지 않은가. 무언가를 하려는 태도가 당신을 무기력에서 끌어올린다는 걸 기억하라. 삶을 전쟁에 비유한다면 권태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삶의 궤도를 바꿔야 한다는 신호탄이다. 권태가 찾아오는 그 순간 새로운 전략과 전술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 사소한 변화 같아 보여도 그것이 쌓이면 권태와 고통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힘이 되어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이다.


    내면의 부를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더 높은 삶과 행복에 관하여
    온전한 삶 | 삶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 공자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공자는 《논어》 〈옹야〉 편에서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먼저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설명한다. ‘안다’라는 것은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단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아한다’라는 것은 배우는 일을 즐겨 찾으며 기꺼이 탐구하는 상태다. 그리고 ‘즐긴다’라는 것은 배움이 삶 속에서 완전히 자기 것이 되어 기쁨을 누리는 경지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아는 것-좋아하는 것-즐기는 것’의 세 단계는 단순히 학문이나 배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무엇을 안다는 것에서 ‘무엇’은 특정한 분야가 아니라 인간이 마주하는 삶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이렇게 풀이했다.

    “안다는 것은 듣고 옳음을 아는 것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행하여 그 맛을 기뻐하는 것이며, 즐긴다는 것은 얻어서 그 만족함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것이든 아는 데서 만족한다. 왜 삶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까? 가장 큰 이유는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하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순간을 ‘해야 할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삶은 그저 견뎌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특히 결과에 연연하면 그 과정을 즐길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얼마나 몰입하느냐다. 다음은 공자가 제시한 삶을 즐기기 위한 일곱 가지 구체적 태도다.

    삶을 즐기기 위해 지녀야 할 7가지 태도
    1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라 | 성과를 좇지 말고 지금의 행위를 즐겨야 한다. 공자는 빨리 이루려 하면 도달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바라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
    2 말보다 몸으로 실천하라 |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삶을 만끽할 수 있다. 공자는 먼저 말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 뒤에야 말이 따르게 하라고 강조했다.
    3 단순히 배우는 데서 멈추지 말고 반드시 사유하라 | 배우고 생각해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되고, 그 위에서야 좋아함과 즐거움으로 나아갈 수 있다.
    4 삶의 진정한 의미를 순간마다 깨우쳐라 | 단 한 번이라도 도를 깨달았다면 그 삶은 이미 충만하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도에 들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다.
    5 스스로 한계를 넘어 잠재력을 펼쳐라 | 공자는 군자를 용도가 정해진 그릇으로 보지 않았다. 삶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가 놀이하듯 한계를 두지 말고 삶의 가치를 창조하라.
    6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 공자가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냐고 말한 이유다. 죽음을 논하기보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사는지나 중요하다.
    7 운명을 바로 알고 움직여라 | 공자의 말처럼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주어진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길을 찾을 때 비로소 삶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