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오후 한때를 보낼 수 있다면 자신의 기술을 다 내놓아도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이 오래 붙들렸다. 누구보다 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이, 왜 하필 소크라테스였을까. 아마 잡스가 진짜로 부러워한 것은 한 철학자의 지식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질문의 힘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도 어쩌면 바로 그것이다. 정보는 넘치고, 조언은 사방에서 쏟아진다. 그런데 삶은 더 또렷해지기보다 더 쉽게 흔들린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먼저 두려워하고,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해석을 진실로 믿는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파고든다. 소크라테스를 박제된 고전의 지혜자가 아니라, 혼란한 시대에 인간의 생각을 다시 훈련시킨 가장 현실적인 스승으로 되살려낸다.
■ 저자 도널드 로버트슨(Donald J. Robertson)
열일곱 살 무렵 우연히 플라톤의 『국가』를 펼친 뒤,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한 번의 독서는 철학 전공으로, 다시 심리치료 공부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20여 년 동안 스토아 철학을 연구하며 이를 인지행동치료에 적용해온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다. 비영리단체 ‘현대 스토아 철학’(Modern Stoicism)의 창립자이자 ‘그리스 플라톤 아카데미 센터’(Plato’s Academy Centre)의 설립자·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고대 철학을 박제된 사상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바꾸는 실천적 지혜로 되살려왔다.
그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를 단순한 ‘명언의 철학자’가 아니라, 답을 주기보다 질문으로 생각을 단련하게 만드는 서양철학의 뿌리이자 스토아 전통의 출발점으로 정확히 복원해낸다. 특히 소크라테스식 문답이 현대 인지행동치료의 핵심 기법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탁월하게 풀어내며, 불안·분노·관계·판단의 혼란 속에서도 스스로 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세우는 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내에도 소개된 『로마 황제처럼 생각하는 법』을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 역자 이민철
고려대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씨티은행에서 근무했다. 우리말의 말맛을 살리는 번역을 좋아한다. 글밥 아카데미 영어출판번역과정을 마치고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세계문화여행: 폴란드』, 『잘 팔리는 스토리의 비밀』, 『네 줄 위의 희망』 등이 있다.
■ 차례
추천의 글
작가의 말
저자 서문 | 답을 주지 않는 철학, 삶을 바꾸는 질문
1장 남들의 시선보다 나의 진실 | 재판대에 선 소크라테스
생각의 산파술 01 끝에서 거꾸로 보기 _ “책상을 비우는 날, 비로소 보이는 것들”
2장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단단한 사람이 되라 | 가치관 재설정
생각의 산파술 02 항상 좋은가 묻기 _ “남이 정해준 성공 말고, 내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질문”
3장 소유하는 사랑에서 함께 성장하는 사랑으로 | 관계의 법칙
생각의 산파술 03 기준을 나에게 돌리기 _ “남을 판단하던 눈으로 먼저 나를 비춰보는 질문”
4장 나의 무지를 인정하라 | 메타인지를 높이는 문답법
생각의 산파술 04 예외로 생각 흔들기 _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어온 생각에 작은 균열을 내는 질문”
5장 감정에 속지 말고 결과를 계산하라 | 인생 손익 분석
생각의 산파술 05 결과를 먼저 계산하기 _ “눈앞의 쾌락보다, 끝에 남을 대가를 먼저 보는 질문”
6장 내 마음과 거리를 두어라 | 인지적 객관화
생각의 산파술 06 내 이름으로 나를 부르기 _ “감정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다시 보는 법”
7장 궤변과 선동을 의심하라 | 비판적 사고
생각의 산파술 07 사실과 해석 가르기 _ “내 생각을 진실이 아니라 가설로 다루는 훈련”
8장 욕망에 이성을 내어주지 마라 | 무모한 결정 최소화
생각의 산파술 08 머릿속 폭주 멈추기 _ “현실보다 먼저 무너지는 것은 대개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다”
9장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 마라 | 불안 다스리기
생각의 산파술 09 미리 최악이라 단정하지 않기 _ “알 수 없는 것을 벌써부터 끔찍하다고 판정하지 않는 법”
10장 분노가 나를 붙잡을 때 | 억울함과 복수심에서 해방되기
생각의 산파술 10 분노의 값을 계산하기 _ “화가 난 이유보다 그 화를 왜 계속 키우는지를 물어보라”
11장 떳떳한 삶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다 | 소크라테스 마지막 수업
감사의 말
미주
참고문헌
고대 철학을 오늘의 심리 문제와 정교하게 연결했다. 도널드 로버트슨은 20여 년간 스토아 철학을 연구하고 이를 인지행동치료에 적용해온 전문가답게, 소크라테스식 문답이 현대 심리치료의 핵심 기법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처럼 생각하는 법
남들의 시선보다 나의 진실 | 재판대에 선 소크라테스
생각의 산파술 끝에서 거꾸로 보기 _ “책상을 비우는 날, 비로소 보이는 것들”
삶의 끝에서 다시 묻는 질문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아주 단순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현상’(appearance)과 ‘실재’(reality)를 구분하며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된 지혜를 가려내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이런 사람을 떠올려보자. 주변 사람들을 은근히 깔보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는 사람, 책에서 인상적인 문장을 외워 늘어놓으며 철학을 안다고 으스대는 사람 말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지혜가 아니라 남의 의견을 빌려 생긴 착각에 가깝다. 그는 철학을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훈련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식 질문은 언제나 ‘거짓’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한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채소 가게에서 양파를 사듯 지혜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없다. 제아무리 많은 돈을 내더라도 남의 지혜를 살 수는 없다. 지혜는 오직 스스로 사유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식 질문은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맞다, 그러나···”라는 태도로 기존의 정의와 전제, 규칙을 끈질기게 되묻고, 그 틈에서 예외를 찾아 나가는 사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는 성공, 명예, 부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조차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끝없이 묻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를 즐겼고, 다른 사상가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읽은 모든 것을 델포이의 신탁처럼 의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예외를 찾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보다 지혜로운 이는 없다는 신탁도,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도 이런 방식으로 곱씹을 때 비로소 의미가 분명해진다고 그는 믿었다. 지혜는 가르칠 수 없지만 배울 수는 있다. 삶을 탐구하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근거 위에 놓여 있는지 성찰할 때 지혜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 연습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소크라테스는 순서를 뒤집어 보라고 말할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출발해보는 것이다. 가령 당신이 사형 판결을 앞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은 당신의 인생을 왜곡해 평가했고 판결은 이미 내려졌다. 설득의 여지도 없다. 죽음을 앞둔 지금, 삶을 돌아볼 때 끝내 붙잡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싶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당신은 지금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를 들고 있다. 입술에 잔을 대고, 마지막 숨을 고르기 직전이다. 이 순간,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은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을 썼는가? 시간은 우리가 가진 가장 결정적인 자산이다. 불과 하루이틀 전, 당신이 시간을 들여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같은 맥락에서 당신이 지금까지 모은 재산과 소유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은 진부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은행 계좌에 쌓인 돈이 그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고 가정해보면 돈은 그 자체로 아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모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썼느냐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많은 것도 실은 마찬가지다. 언젠가 쓰겠다는 막연한 기대 속에 쌓아두지만 마지막 순간에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명성은 어떨까? 오늘날 명성은 재산보다 훨씬 간단하게 수치화된다. 당신의 소셜미디어 팔로워가 백만 명이라고 가정해보자. 이제 당신은 죽음을 앞두고 침대에 누워 있다. 그 숫자가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었는가? 부와 마찬가지로 명성 역시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명성은 영향력을 준다. 문제는 그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다. 만약 그 힘을 의미 있는 일에 쓴 적이 거의 없다면 명성을 얻기 위해 들인 수많은 시간은 과연 정당했을까?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대부분 이런 식의 수단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우리가 사는 사회가 눈에 잘 띄는 가치와 진짜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 채 뒤섞어 놓고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지식은 어떨까? 많은 사람은 부나 명성보다 지식을 추구하는 삶이 더 고귀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모든 지식이 같은 무게를 지닐까? 이런 유언을 상상해보자.
“시트콤 <프렌즈>의 마지막 시즌을 끝까지 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과학이나 의학처럼 실제로 사람을 돕는 지식은 또 다를까? 삶에 적용되지 않고 지혜롭게 사용되지 않는 지식은 어떤 가치를 가질까? 죽음을 앞두고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많은 것이 결국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 도구들을 제대로 사용했는가?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굳이 사형대에 오를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이미 그 자리에 먼저 서봤다. 그는 죽음을 예감한 상태에서 말했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소명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권력자의 미움도 감내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부와 명성보다 지혜가 우선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에게 던졌던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돌아온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하찮게 여기고, 하찮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이런 질문을 마주한다. 운이 좋은 사람만이 죽기 전에 그 기회를 얻는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구두쇠 스크루지는 자신의 묘비를 보는 꿈을 꾼 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도 비슷한 각성을 경험했다. 1888년, 신문의 오보로 자신의 부고를 읽은 그는 “죽음의 상인”이라는 표현에 충격을 받았고, 그 결과 유언을 고쳐 노벨상을 만들었다. 죽음을 거울 삼아 삶을 다시 바라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철학을 삶의 도구로 사용해 인간의 가치 체계를 정면에서 흔든 인물이었다. 그는 삶의 목적을 ‘미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 다시 말해 인격을 가꾸는 데 두었다. 그래서 그는 “탐구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그는 아들들과 친구들에게,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지적 허영심을 벗고 돈이 아닌 지혜를 돌보는 삶을 살라고 당부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남긴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다.
나의 무지를 인정하라 | 메타인지를 높이는 문답법
생각의 산파술 예외로 생각 흔들기 _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어온 생각에 작은 균열을 내는 질문”
똑똑한 사람은 정말 지혜로운가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방안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뮤즈의 주인이자 예언의 신, 나아가 철학을 관장하는 아폴론에게 누가 참으로 지혜로운지 직접 묻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엔 내키지 않았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아테네에서 거의 150킬로미터 떨어진 파르나소스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의 비문을 직접 눈으로 보고, 사제에게 그 의미를 물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라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그는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434년 늦은 여름, 소크라테스는 카이레폰과 그의 동생 카이레크라테스와 함께 델포이를 향해 길을 나섰다. 대략 닷새가 걸릴 예정이었다. 일행은 아테네 북쪽 아티카 지방의 온화한 풍광을 바라보며 걸었다. 길 위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늑대 떼를 피해 방향을 틀기도 하고, 군데군데 흩어진 농가와 수풀이 우거진 산길을 지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오티아의 비옥한 평야가 시야에 들어왔다. 평야를 가로질러 난 길 끝에서, 그들은 마침내 ‘성스러운 길’(the Sacred Way)로 접어들었다. 이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파르나소스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너머에 델포이와 장엄한 아폴론 신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혜는 말다툼에서 시작된다
파르나소스산 중턱을 오르던 중, 카이레폰과 그의 동생 카이레크라테스가 갑자기 말다툼을 벌였다. 가문의 유산을 어떻게 나눌지를 두고 시작된 다툼이었다. 언성이 높아지더니 이내 두 사람은 등을 돌린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카이레크라테스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보기엔 자네가 형보다 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카이레크라테스는 뜻밖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이었다. “물건에는 마음이 없지만 자네 형에게는 마음이 있지. 마음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네. 물론 자네에겐 잘 관리해야 할 재산이 많겠지. 하지만 형은 하나뿐이지 않나. 자네가 형을 잘 돌보면 형도 자네를 돌보지 않겠나?”
카이레크라테스는 사람이 물건보다 소중하다는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곧 불만을 터뜨렸다. “돈이 있으면 친구도 쉽게 사귀고, 노예도 구할 수 있습니다. 친구나 노예는 적어도 형처럼 성가시게 굴지도 않죠.”
소크라테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말은, 노예를 얻고 친구를 사귀기 위해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겠다는 뜻인가? 자기 형제는 외면하면서 말일세? 가족보다 낯선 이와 맺은 우정이 더 소중해야 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그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함께 자란 형제라면 공통점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서로 우애를 나눌 이유 또한 분명하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설명을 이어갔다. “자네도 알다시피 동물조차 태어나자마자 형제에게 친근함을 느낀다네.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이 포식자의 위협을 덜 받듯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자란 사람은 세상에서도 존중받기 마련이지.”
카이레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를 진심으로 존경했지만 형에 대한 분노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형제는 인생에서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그건 형이 ‘형다울’ 때의 이야기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한 일으로 형제에게 등을 돌리는 건 옳지 않겠지요. 하지만 의견이 너무 엇갈리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카이레크라테스는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제 형은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좋은 형과는 거리가 먼데, 제가 왜 굳이 비위를 맞추며 지내야 합니까?”
잠시 침묵하던 소크라테스는 활짝 웃었다. 그는 카이레폰이 카이레크라테스가 말하듯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네처럼 자네 형을 견디지 못하던가 아니면 그와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도 있던가?” 이 질문은 카이레크라테스의 마음을 겨냥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분노의 원인이 형 그 자체가 아니라 형을 바라보는 그의 생각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자 했다. 문제는 형이 아니라, 형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카이레크라테스는 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더 속이 뒤집힙니다.” 그는 분을 억누르지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 “형은 기분만 맞으면 누구와도 잘 지냅니다. 그런데 저와 있으면 늘 골칫거리가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조용히 말했다. “말을 다룰 줄 모르고 말을 기르면 고달프듯, 형을 대하는 법을 몰라서 형이 골칫거리가 되는 건 아닐까.”
카이레크라테스는 발끈했다. “제가 형을 다를 줄 모른다니요? 저도 예의를 아는 사람 앞에서는 깍듯이 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 앞에서까지 예의 바르게 행동할 생각은 없습니다. 추호도요.”
소크라테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묘한 말이군.”
카이레크라테스는 놀란 듯 소크라테스를 바라보았다. 소크라테스가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 개를 기르는데, 그 개가 남들에겐 살가우면서 주인만 보면 짖고 날뛴다고 쳐보세. 곰곰이 생각해보면 개가 늘 사나운 건 아니니 길들이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네. 제대로 가르친다면 그 개는 다른 사람에게 하듯 주인에게도 살갑게 굴게 되지. 자네 말에 따르면, 형이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면 인생에 큰 힘이 될 수 있지. 또 자네 자신은 예의 바르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네. 그런데 형이 예의 바르게 굴지 않으니, 자네도 그럴 마음이 없다고 했지.”
카이레크라테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형이 제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형을 단번에 바꾸는 묘책 같은 건 없네. 하지만 자네가 이미 알고 있는 방식만 잘 써도 형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지.”
“자네가 누군가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고 싶다고 해보세. 어떻게 하겠나?”
“먼저 그 사람을 우리 집에 초대하겠지요.”
“그렇다면 집을 비워야 해서 친구에게 집을 봐달라고 부탁해야 할 땐?”
“먼저 제가 그만한 호의를 베풀어야겠지요.”
소크라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외국에 머무는 동안 현지인에게 환대를 받고 싶다면?”
카이레크라테스는 이번에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 외국인이 아테네에 머물 때, 제가 먼저 따뜻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더 묻지 않았다. 이미 답은 충분히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마법의 주문을 꿰고 있으면서도 여태껏 숨겨왔구먼.” 소크라테스는 짐짓 놀란 듯 말했다. “지금 당장 그 마법을 써보면 어떤가?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는 타인이 나를 대하길 바라는 방식으로 먼저 타인을 대해야 하네. 나는 그 말이 옳다고 믿네.”
내 마음과 거리를 두어라 | 인지적 객관화
생각의 산파술 내 이름으로 나를 부르기 _ “감정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다시 보는 법”
자기 자신과 철학적 거리를 두는 법
이솝 우화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 목에 두 개의 주머니를 달고 나온다. 하나는 코 밑에, 다른 하나는 뒤통수에 매달려 있다. 코 밑의 커다란 주머니에는 타인의 결점이, 뒤통수의 작은 주머니에는 자기 자신의 결점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타인의 허물에는 예민하지만 자신의 허물에는 둔감하도록 태어났다. 자기 이해가 어려운 이유이다.
성경의 비유도 같은 뜻을 전한다. 남의 눈에 들어간 티끌은 잘 보면서 정작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직면하지 못할 때 인간은 성장의 문턱에서 가장 큰 장애물을 만난다.
현대 심리학은 소크라테스의 통찰에 경험적 근거를 더한다.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에서 지혜를 연구한 이고르 그로스만은 사람들이 자기 문제보다 타인의 문제를 훨씬 더 현명하게 판단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솔로몬의 역설”(Solomon's Paradox)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뛰어난 지혜로 명성을 얻은 솔로몬 왕이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그 지혜를 발휘하지 못해 왕국을 분열로 이끌었다는 이야기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그로스만 연구팀은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대인관계 갈등 상황을 상상하도록 했다. 한 집단에는 ‘친구 문제’로, 다른 집단에는 ‘자기 자신의 문제’로 상상하게 했다. 결과는 분명했다. 타인의 문제로 상상한 집단이 지적 겸손, 개방성, 배려심에서 모두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수치로 보면 지적 겸손은 22퍼센트, 개방성은 31퍼센트, 배려심은 15퍼센트 더 높았다. 인간은 자기 일에서 유독 지혜를 잃는다.
그렇다면 이 심리적 장벽을 넘는 방법은 없을까.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더 나아가 그는 타인을 관찰하면 그 안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대화할 때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했고, 같은 전제를 따라가며 같은 오류를 함께 점검하려 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에서 눈앞의 대화 상대는 나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굳게 믿는 바와 거리를 두고 이를 객관화하려 애썼다.
철학적 대화를 읽는 것만으로도 사고의 틀은 넓어진다. 그러나 실제로 대화를 나눈다면 효과는 훨씬 크다. 타인의 사고가 흘러가는 양상을 지켜보면, 맹목적인 믿음을 고집할 때 어떤 파국이 닥치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믿음이 인격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른 믿음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상황이 바뀌면 어떤 의미를 띠는지 한눈에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한발 더 나아가, 혼자 있을 때조차 철학적 대화를 실천한 인물로 보인다. 누군가 철학을 공부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답했다. 이 다소 기묘한 발언을 뒷받침하듯, 소크라테스가 스스로와 철학적 문답을 나누었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플라톤의 『대(大) 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붓는 한 괴상한 남자를 언급한다. 그 남자는 소크라테스의 가까운 친척으로,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묘사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날 선 질문을 퍼붓는다. 그리고 이렇게 꾸짖는다. 지혜, 정의, 아름다움 같은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어떤 담론이 아름답고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이 집요한 질문자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이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알되, 모르는 일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괴상한 남자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 자신이다. 단지 타인처럼 등장할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나 친구들과의 대화를 마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 상상 속의 자신과 대화를 이어간 듯하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곧장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타인의 것처럼 떨어뜨려 바라보았다. 이런 화법을 오늘날에는 일레이즘(illeism), 즉 삼인칭 화법이라 부른다. ‘그’를 뜻하는 라틴어 ‘일레’(ille)에서 나온 말이다.
삼인칭 화법을 쓰기 위해 복잡한 상상을 할 필요는 없다. 단어 하나만 바꾸면 충분하다. 예컨대 ‘나는 정말 속상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생각이 들 때, 이를 ‘○○은 지금 몹시 속상해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보인다’라고 주어만 바꾸어보아도 확 관점은 달라진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자신을 삼인칭으로 다루는 철학자였다. 그는 타인의 모습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며 탐구를 시작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에게 우연히 마주친 거울과 같았다.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관해 질문했을 때 알키비아데스는 솔직하게 답했고 그 과정에서 논리적 허점을 드러냈다. 소크라테스는 그 답변 속에서 자기 자신의 오류와 착각을 함께 보았다.
중요한 점은 알키비아데스가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겉돌지 않고 오히려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훗날 그는 처음에는 난감했지만 점차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고, 마치 코뤼반테스의 광란(고대 그리스에서 여신을 섬기던 이들이 북과 춤, 격렬한 몸짓 속에서 황홀경에 빠지는 종교적 도취 상태-편집주)처럼 가슴이 요동쳤다고 회상한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위대한 인물들 역시 그의 말을 듣고 같은 반응을 보이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통해 알키비아데스는 더 이상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좇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아테네의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선택했고,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