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지는 정보를 그저 외우고 익히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자신만의 신성을 찾아 험난한 길을 떠난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트처럼, 아프리카로 향하던 여행길에 생명 경외를 깨달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처럼, 전장 한가운데서 목숨보다 가치 있는 진리를 찾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스스로 삶의 문제를 사유해야 할 때다. 나만의 가치관을 세우고 싶은 청소년부터 일상의 스트레스를 지혜롭게 관리하고 싶은 직장인, 자녀와 함께 비판적 토론을 해 보고픈 부모까지, 《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이 모두에게 일상의 ‘논쟁적인’ 질문에 답할 기회를 열어 주길 바란다.
■ 저자 크리스토프 크바르히
1964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철학자이자 작가, 강연가, 플라톤 전문가다. 플라톤의 ‘대화편’으로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이자 ‘철학적 해석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연구 조교로 일했다.
이론적 사유를 넘어 실제 삶에 철학을 적용하는 ‘실천 철학가’로서, 고전 서양 철학을 현대적 삶과 미래 지향적 세계관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다양한 기업을 자문하고 대학에서 정치·예술·윤리·철학을 강의하면서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2020년에는 각계각층 사람들이 한데 모여 대화하며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대와 같은 지적·정신적 부흥을 꾀하는 ‘신 플라톤 아카데미’ (akademie-3.org) 모임을 시작했다.
■ 역자 장혜경
연세대학교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하노버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침묵을 배우는 시간》,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차례
1. 살다 보니 나를 잃었을 때 읽는 철학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 철학’
내 목숨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있을까?
쇠렌 키르케고르와 ‘자신이 되기’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해야만 잘 살 수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와 ‘자기 사랑’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마르틴 하이데거와 ‘본래적 삶’
내 취향보다 유행을 따라야 성공하지 않을까?
2. 나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철학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변증법’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도 타협해야 할까?
임마누엘 칸트와 ‘진실성 의무’
악의 없는 거짓말은 괜찮지 않을까?
에디트 슈타인과 ‘타인의 의식 경험’
나 살기도 바쁜데 남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감정 철학’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해도 괜찮을까?
3. 일하는 인간과 놀이하는 인간 사이의 철학
프리드리히 니체와 ‘최후의 인간’
남들이 시키는 대로 살면 안 될까?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자연적 삶’
내가 하는 일을 꼭 사랑해야 할까?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와 ‘비판적 반성’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시간을 써야 할까?
프리드리히 폰 실러와 ‘놀이 충동’
놀며 시간을 허비해도 괜찮을까?
4. 진정한 사랑과 우정의 의미를 고민하는 철학
플라톤과 ‘쿠겔멘시’
나만의 이상적인 ‘한 사람’이 존재할까?
카를 야스퍼스와 ‘신의’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데도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
만티네이아의 디오티마와 ‘에로스’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해도 될까?
아뇰로 피렌추올라와 ‘아름다움’
친구와 외모로 경쟁해도 될까?
5.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부모 자식 관계의 철학
마르틴 부버와 ‘나와 너’
부모가 늙으면 돌보는 게 도리일까?
소크라테스와 ‘가족 질서’
부모의 잘못은 무조건 용서해야 할까?
빌헬름 폰 훔볼트와 ‘인간 교육론’
소원을 들어주면 아이가 행복할까?
아리스토텔레스와 ‘관용’
선물로 돈을 주어도 될까?
6.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정치의 역할을 묻는 철학
한나 아렌트와 ‘활동적 삶’
투표 외에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제러미 벤담과 ‘공리주의’
난민 문제에 굳이 목소리를 내야 할까?
플로라 트리스탕과 ‘노동자 연합’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할까?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타자의 얼굴’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게 도움이 될까?
7. 인간의 불변하는 터전, 지구와 더불어 사는 철학
랠프 월도 에머슨과 ‘자연과의 합일’
자연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위로를 줄까?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생명 외경’
병든 반려동물 치료에 큰돈을 써도 될까?
한스 요나스와 ‘생태학적 정언명령’
누군가는 굶어 죽는데, 음식을 남겨도 될까?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자연철학’
채식을 해야 좋은 사람일까?
8. 과학이 종교가 된 시대, 신을 변호하는 철학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 ‘종교론’
종교가 있는 세상이 없는 세상보다 나을까?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트와 ‘신성’
자신의 영성을 직접 가꿀 수 있을까?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예정 조화’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피타고라스와 ‘영혼 불멸’
죽음 이후 삶이 존재할까?
크리스토프 크바르히는 철학이 이론적 사유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삶의 성공과 풍요에 기여하도록 애쓰는 실천 철학가로, 이번 책 역시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헤겔 등 저명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냈다.
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
나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철학
에디트 슈타인과 ‘타인의 의식 경험’
나 살기도 바쁜데 남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까?
입장을 한번 바꾸어 봅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면 좋겠나요? 아마 그럴 거예요.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관심을 쏟습니다.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고 우리 말에 귀 기울이며, 정성을 다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해받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어요.
사실 그런 기대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공감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무시와 몰이해를 맞닥뜨렸던 아픈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예요.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너도나도 공감을 외쳐댑니다. 자기 할 말만 해대는 세상에서는 공감이 진정한 한 줄기 희망의 빛이니 말이죠.
누군가 내 마음을 헤아려 준다면 기분이 좋고 반가울 겁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것 말고는 타인을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를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간으로 이해하는 길은 공감 말고는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가게에 들어가니 판매원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이런저런 물건을 보여주네요. 당신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물건을 팔려는 판매원의 행위로 해석합니다. 당신은 그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당신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이해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그가 아니며, 기껏해야 그의 기능일 테니까요. 그러니 어쩌면 그는 당신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지도 몰라요.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누군가를 인간으로 이해하기란, 그러니까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괴로워하며, 희망을 품고 망설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하기란, 그 사람을 하나의 역할에 못 박고 분류하여 그 역할에 맞게 대접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후자는 인공지능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공지능은 절대 우리를 개별적 인간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자면 공감이 필요하니까요. 그러려면 타인의 의식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건 계산이나 합리적 추론으로 되지 않습니다. 느껴야 하죠.
철학자 에디트 슈타인은 공감 및 감정 이입을 “타인의 의식 경험(Erfahrung von fremdem Bewusstsein)”이라 정의했습니다. 그는 박사 논문부터 공감을 연구 주제로 삼았습니다. 공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 개인의 의식과 다른 이들의 의식을 갈라놓는, 도저히 메울 수 없어 보이는 틈을 메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했어요.
에디트 슈타인은 의식의 틈을 메우는 재료가 ‘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빨개진 얼굴은 몸이 알려 주는 수치심입니다. 미간에 잡힌 주름은 근심의 표현이고요. “목소리 음색에서 그가 기분이 좋은지 울적한지, 마음이 차분한지 흥분했는지, 상대에게 다정한지 거부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그는 공감이란 타인의 몸을 인식하고 내 몸이나 신체 반응의 지식을 불러내어 상대가 어떤 기분인지를 추론해야만 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공감은 타인을 큰 관심으로 대하는 동시에 자기 몸에 섬세한 감각을 지닐 때만 가능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착각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몸짓이나 말로, 에디트 슈타인에 따르면 영혼이나 정신을 가리키는 ‘속내’를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내면세계로 넘어가는 다리를 놓으려면 우리가 그들에게서 인지한 모든 감각 인상을 종합해야 합니다. 여러 뜻이 있는 단어의 의미를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문맥으로 파악하듯,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직관적으로 종합하여 감정 상태를 알아차립니다. 이 일이 가능한 곳에 다리가 놓이고, 이 다리를 매개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이해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가지 선물을 받습니다. 하나는 풍요로운 연인 관계나 우정의 필수 조건인 깊은 이해와 진짜 친밀감입니다. 또 하나는 타인의 마음에 공감함으로써 성큼 자란 내 마음입니다.
일하는 인간과 놀이하는 인간 사이의 철학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자연적 삶’
내가 하는 일을 꼭 사랑해야 할까?
정확히 말하면 이 질문은 틀렸습니다. "해야 한다"와 "사랑한다"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니거든요. "사랑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온갖 사랑의 계명이 있기는 해도, 사랑은 의지나 의식적 결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어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는 "사랑에 빠집니다(to fall in love)." 혹은 사랑의 신 아모르나 큐피드가 쏜 화살에 맞죠.
"사랑해야 한다"가 불가능하다면, 질문을 바꾸어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한지는 물어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이 질문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못되었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하는 일이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대상인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 강아지나 이웃집 아이, 할머니의 텃밭처럼 말이죠.
일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일은 자신의 표현이자 성취, 혹은 증명이므로 나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해야 하는지, 혹은 사랑해야 마땅한지를 묻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한 표현이에요. 나의 자아와 나의 일이 어떻게든 떨어질 수 있다는 오해죠.
이 질문은 이런 우려가 있기는 해도 틀렸거나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어떤 자세로 일을 하는지를 묻는 일은 어찌 되었든 잘못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서양 문화권의 철학자와 현인들도 이 질문을 반복해서 던졌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예요. 행복하게 잘 사는 삶이란 어떠한지를 가르치는 그의 유익한 조언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일에 관한 그의 조언도 마찬가지예요.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기본 사상은 간단한 공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잘 사는 삶이란 자연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이죠. 자연을 따르는 삶이란, 우리 바깥의 자연뿐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도 맞는 삶을 말합니다. 즉 인생의 성패는 우리의 바람이나 사상·이상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우리 존재, 즉 자연적 존재의 단순한 현실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을 일에 적용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은 무의미하다.“
세네카의 이 말은 어떤 태도로 자기 일에 임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즉 일을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것, 사랑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기 인성의 표현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내 일이 곧 나다! 그러니 그 일이 나와 정말로 잘 맞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지, 능력을 넘어서지는 않는지, 정말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지, 일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는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지가 관건입니다.
이제 다시 사랑이 등판합니다. 사랑은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죠. 일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일이 사랑의 표현이냐가 잘 사는 삶의 기준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고, 일과 내가 둘이 아니며, 내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열정을 다 바치는 거죠. 이 말은 또 그 모든 일을 할 때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 일을 사랑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자기 일을 사랑으로 하는 사람은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부모 자식 관계의 철학
마르틴 부버와 ‘나와 너’
부모가 늙으면 돌보는 게 도리일까?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는 시험 삼아 질문을 거꾸로 돌려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늙은 당신을 자식이 보살핀다면 마음이 어떨 것 같나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한편으로는 몸이 예전 같지 않은데 자식에게 외면당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이 효심 탓에 나를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한다면요? 자식이 그러길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요?
철학자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질문을 정확하게 던져라! 그러니까 ‘돌봄’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따져 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돌봄이 놀이 프로그램부터 기저귀 갈기까지, 24시간 내내 부모 곁을 떠나지 말고 보살피라는 말일까요? 다시 말해 돌봄 시설에서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처럼 모든 서비스를 부모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온종일 그런 돌봄 프로그램을 제공하라고 하면, 너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움칠할 겁니다.
어찌 보면 움칠하는 게 당연합니다. 첫째,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현대 사회에서 일과 가사 노동에 돌봄까지 떠안을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둘째, 요즘엔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고도의 전문 능력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 능력과 경험을 갖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차라리 전문가에게 맡기는 일이 최악의 선택은 아닌 셈이지요.
어쩌면 진짜 중요한 문제는 전문적인 돌봄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 대상이 자기 부모라면요. 부모에게는 전혀 다른 형식의 관계가 필요한지도 몰라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세기의 걸작 《나와 너》에서 말한 그 관계 말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관계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태도로 세상과 인간을 하나의 대상으로 대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Ich-Es-Beziehung)”와, 온전히 상대에게 관심을 쏟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즉 상대를 대상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나와 너의 관계(Ich-Du-Begegnumg)”였죠.
따지고 보면 우리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닐까요?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 또한 그럴 겁니다. 우리에게서 전문적인 24시간 돌봄 인력이 아니라 진실로 깊게 연결된 “여기에 있는 너”를 바랄 거예요. 돌봄 전문 지식이 없어도, 24시간 돌봄 프로그램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심도 있는 진짜 만남이라면 설령 가끔이라도 그 시간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만남이 헌신적이지만 영혼 없이 부산스러운 만남보다 훨씬 더 가치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이 부모를 대할 때 후자의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요.
‘나와 너의 만남’이야말로 노인에게 가장 절실합니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응하겠다는 당신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가 투사한 것만 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그런 만남은 당신에게도 득이 될 겁니다. 부모님은 물론, 나 자신에게서도 전혀 생각지 못한 여러 측면을 발견할지 모르니까요.
인간의 불변하는 터전, 지구와 더불어 사는 철학
랠프 월도 에머슨과 ‘자연과의 합일’
자연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위로를 줄까?
물정 모르는 답답한 몇몇 사람을 빼면 지금 우리가 유례없는 기후변화의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대다수 인류는 자연 보호가 의무라는 주장에 동의할 겁니다. 게다가 바다도, 공기도, 땅도 오염되어 이대로 살아가가는 생존이 위태로울 지경입니다. 원시 생태계가 파괴되면 무서운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고요.
말이 길었지만 뜻은 간단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길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정계나 경제계의 권력자들까지도 이런 현실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서 환경 보호가 필요하다는 의식이 깨어나고 있지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 For Future; FFF)’ 운동은 자연 보호와 생태계 보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세대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참 바람직한 변화이지요. 지구 생태계를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정신 건강 측면에서도 정말로 바람직하니까요.
자연은 식품이나 에너지를 생산하는 자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관광이나 레저 산업이 상품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관광 명소, 야외 체험, 스포츠 활동의 장소만도 아닙니다. 스트레스에 지친 도시인들이 숲 치유나 산악자전거를 즐길 피난처만도 아니고요. 그래요. 자연은 무엇보다 우리의 동반자이며, 우리의 자매이자 친족입니다. 잘 사는 데 진짜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충직한 길동무이자 스승입니다. 삶의 기준을 알려 주는 참 스승이지요.
그러기에 우리 몸과 마음과 정신이 건강하려면, 쉬지 않고 자연과 자연적인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미국 철학자이자 작가인 랩프 왈도 에머슨은 19세기에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연에 있으면 온갖 근심이 마음을 짓눌러도 놀라울 만큼 마음이 편안하다. 자연은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이니 온갖 근심에 마음이 답답해도 자신과 함께하면 행복해야 마땅하다고.” 에머슨은 《자연》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이렇듯 아름답고 철학적인 자연 찬가를 외쳐 불렀고, 덕분에 20세기와 21세기 생태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모두 자기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지요. “숲에 들어가면 우리는 이성과 신뢰를 되찾는다. 그곳에 있으면 그 무엇도, 어떤 치욕이나 불행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 같다. (···) 자연은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이 에머슨 혼자만의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자연에 있으면 정말 좋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이동이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갑자기 공원과 숲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나무와 꽃과 풀밭이 실제로 치유의 힘을 뿜어낸다는 사실을 예감했던 것이지요.
자연은 서로에게 거리를 두며 날로 냉담해지는 지금 시대에 큰 위로가 됩니다. 에머슨은 말했습니다. “산과 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가장 큰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간과 식물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발상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외면당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내게로 고개를 돌리고, 내가 그것들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물론 이런 말이 낭만에 젖은 망상이라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눈과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고 산과 들, 숲과 언덕을 걸어 보지 않았겠지요. 직접 한번 해 보세요. 가까운 공원이나 산으로 나가 보세요. 사람 사는 집이 없고 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습니다. 가서 두세 시간 거닐면서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느껴 보세요. 모든 것이 말을 걸어올 겁니다. 모든 것이 힘을 줄 겁니다. 모든 것이 활기로 당신을 가득 채울 겁니다. 모든 것이 위로와 힘을 주는 소속감을, 만물을 아우르는 거대한 삶에 당신도 포함된다는 느낌을 선사할 겁니다. 에머슨의 영향을 받은 소설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는 20세기 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는 죽어 가고 있다. 뿌리 뽑혀 허공에 뜬 큰 나무 같다. 우리는 다시 우주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자연 보호는 그곳으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