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열 개의 단어, ‘정의·기술·권력·폭력·자유·노동·소외·국가·종교·전쟁’을 통해 그 안에 겹겹이 쌓여 있는 서로 다른 의미들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정의는 공정함일 수도 있고 권리일 수도 있으며, 공동체의 선을 뜻하기도 한다. 자유는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권력은 눈에 보이는 지배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작동하는 구조일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단어는 결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해 온 언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이미 특정한 세계관과 전제를 담고 있는 사고의 틀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틀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말이 왜 다르게 들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개념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 저자 오카모토 유이치로
규슈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철학과 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규슈대학교 조교수, 다마가와대학 문학부 교수를 거쳐 2019년부터 다마가와대학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양 근현대 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며, 철학과 테크놀로지의 경계를 횡단하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의 기본』 『니체의 마지막 선물』 『현대사회를 읽는 질문 8』 『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등이 있다.
■ 역자 곽현아
국민대학교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일본학을 부전공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 기획자이자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머리 좋은 사람만 아는 설득력』 『당연한 것들을 의심하는 100가지 철학』 『기억을 비울수록 뇌가 산다』 『무조건 나부터 생각할 것』 『바칼로레아 철학 수업』 외 다수가 있다.
■ 차례
서문 009
제1부 정의: 정의에는 몇 가지 정의가 있다
제1장 현대 미국의 정의론
롤스가 구상한 정의 | 자유 지상주의자 비판 | 공동체주의 정의론
제2장 근대의 ‘정의’ 사유법
칸트: 정의는 도덕인가 | 로크: 정의와 국가의 탄생 | 라이프니츠: 공정한 정의는 가능한가
제3장 공동선의 기원
아리스토텔레스: 공동선 발견 045 | 아퀴나스: 신학으로 확장 047 | 플라톤: 정의와 올바름의 원형
제2부 기술: 철학자는 기술을 거부하는가
제1장 계몽주의와 기술관
기술은 무엇인가 | 베이컨의 기술 혁명 | 계몽주의가 꿈꾼 진보
제2장 고대와 중세의 기술론
플라톤: 테크네 | 아리스토텔레스: 기술 재해석 | 중세 시대 기술 인식
제3장 현대 철학자의 기술 사유법
스티글레르: 인간에게 왜 기술이 필요한가 | 하이데거: 기술은 인간을 지배하는가 | 마르쿠제: 기술은 해방인가 통제인가
제3부 권력: 권력은 힘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제1장 권력의 철학
마키아벨리: 권모술수 | 흄: 사회계약론 비판 | 베버: 정식화한 권력
제2장 권력론의 혁명
푸코: 권력 혁명 | 하버마스: 의사소통, 권력의 대안인가 | 로티: 푸코 비판
제3장 디지털 사회의 권력
포스트파놉티콘 시대의 권력 | 통제 사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 모두가 감시하는 시놉티콘
제4부 폭력: 폭력은 언제나 나쁜가
제1장 폭력의 다양성
아렌트: ‘권력’과 ‘폭력’ | 베버: 폭력은 국가의 특권인가 | 마르크스: 사회를 움직이는 폭력
제2장 폭력의 유형론
소렐: 혁명을 위한 폭력 | 벤야민: 법을 만드는 폭력 | 데리다: 법과 폭력의 경계
제3장 인간과 폭력
프로이트: 폭력은 인간 본성인가 | 핑커: 인류는 점점 평화로워지는가 | 진화는 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가
제5부 자유: 자유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제1장 자유의 개념
벌린: 자유에는 두 얼굴이 있다 |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자유와 민주주의의 긴장
제2장 자유와 규제
밀: 민폐만 아니면 자유인가 | 칸트: 자유와 이성 | 밀: 내 몸은 내 것인가 | ‘광차 문제’로 생각해 보는 자유
베버: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는가 | 국가는 이데올로기 장치인가 |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국가
제9부 종교: 종교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제1장 철학과 ‘신’
아리스토텔레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비판 | 데카르트: 신과 코기토 | 헤겔: 신은 왜 오해받았는가
제2장 신도는 ‘신’을 어떻게 사유했나
테르툴리아누스: 불합리하기에 믿는다 | 파스칼: 신앙과 내기 | 키르케고르: 신앙적 결단
제3장 ‘신은 없다’-무신론의 역사
포이어바흐: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 니체: 신은 죽었다 | 데닛: 과학과 종교
제10부 전쟁: 철학자는 전쟁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1장 전쟁의 ‘대의’
폴리스를 위한 전쟁 | 기독교 시대의 전쟁 | 국민국가와 총력전
제2장 전쟁인가 평화인가
칸트: 영구 평화론 | 헤겔: 전쟁은 필요하다 | 니체는 전쟁을 찬성했을까?
제3장 현대 전쟁론
윙거: 총동원 | 들뢰즈·가타리: 전쟁 기계 | 냉전 이후, 새로운 전쟁
우리가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열 가지 핵심 개념-정의·기술·권력·폭력·자유·노동·소외·국가·종교·전쟁-이 시대와 철학자에 따라 어떻게 변주되어 왔는지를 치밀하게 파고든다. 일상에서 숨 쉬듯 쓰는 단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류 지성사가 부딪히며 쌓아 온 거대한 논쟁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지적인 삶을 위한 열 가지 철학
권력: 권력은 힘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권력론의 혁명
푸코: 권력 혁명
이번에는 현대 철학자들이 그 권력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입니다. 그는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 I: 지식에의 의지』에서 독자적인 권력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논의는 종래의 권력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권력론의 혁명’이라고도 불립니다.
권력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특정한 행동에 사람을 동원하는 강제적인 힘’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강력한 폭력 장치를 통해 위에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군주의 권력’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제시한 권력 개념은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권력은 ‘배제한다’, 권력은 ‘억제한다’, 권력은 ‘억압한다’, 권력은 ‘단속한다’, 권력은 ‘추상한다’, 권력은 ‘가면을 쓴다’, 권력은 ‘은폐한다’와 같이 권력의 효과를 부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실제로 권력은 탄생시킨다. 권력은 현실적인 것을 만들어 낸다.”
권력은 특정한 누군가가 소유하는 특권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군주’나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처럼, 다른 사람들은 갖지 못한 특별한 힘이 곧 권력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와 사회』에서 푸코는 이러한 권력관에 이의를 제기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권력 가운데 소유될 수 있는 하나의 권한에 주목하기보다, 항상 긴장 상태에 있으며 끊임없이 작동하는 관계망이 만들어 내는 네트워크에 주목해야 한다. (…)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행사하는 것이며, 지배 계급이 획득하거나 유지하는 ‘특권’이 아니라, 이미 점하고 있는 전략적 위치의 총체적인 효과다.”
한마디로, 권력이란 특권을 지닌 자가 소유하는 압도적인 힘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형성된 곳에서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회사에서의 상사와 부하,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식처럼 말이지요. 사회적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에서는 언제나 권력이 작동합니다. ‘인간관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권력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고, 반대로 ‘권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간관계가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푸코의 권력론은 종래의 권력관과 크게 다릅니다. 기존에는 권력을 정치나 지배와 같은 특별한 영역에서, 특정 인물만이 지니는 특별한 힘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푸코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속에도 항상 권력이 작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이 권력을 만들어 낸다고 시사했습니다.
이러한 푸코의 권력관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권력, 누구나 행사하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면 ‘맞아, 그렇지’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나요? 푸코의 권력론이 발표된 이후, 가족이나 친구 사이의 권력 불평등 그리고 차별 구조가 새롭게 문제로 떠오른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합니다.
디지털 사회의 권력
푸코가 획기적인 권력론을 제시한 것은 1970년대의 일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활용되던 권력의 기술은 아날로그 중심이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기술은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 인터넷이 사회 전반에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권력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었습니다.
포스트파놉티콘 시대의 권력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마크 포스터(Mark Poster, 1941~2012)는 『정보 양식론(The Mode of Information: Post-structuralism and Social Context)』에서 푸코의 권력론을 디지털 사회에 맞게 새롭게 읽어 냈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고안한 일망 감시 시설, ‘파놉티콘(panopticon)’을 권력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파놉티콘은 중앙에 감시탑이 있고, 그 주변을 독방이 원형으로 둘러싸는 구조의 감옥입니다. 독방에 갇힌 죄수는 감시탑에서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고, 이를 통해 규율이 형성됩니다. 푸코는 이를 ‘규율 권력’이라고 부르며 근대 사회의 권력 형태로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군대에서도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푸코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근대 사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현대의 상황에 맞게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크 포스터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슈퍼 파놉티콘’이라는 개념을 제창했습니다. 다소 길어지더라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정보 양식론』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현재의 ‘의사소통 유통’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데이터베이스는 일종의 ‘슈퍼 파놉티콘’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벽도, 창문도, 탑도, 간수도 없는 감옥이다. (…) 개인은 사회 보장 카드,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도서관 카드 같은 것을 항상 지참하며, 계속해서 사용해야만 한다. 이러한 거래는 데이터베이스에 코드로 저장된다. (…) 개인은 정보의 원천인 동시에 정보의 기록자이기도 한 것이다. 홈 네트워킹은 이 현상의 최적화된 정점을 이룬다.”
여기서 묘사된 모습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라 새삼스러움을 느끼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푸코가 상정한 파놉티콘은 사람이 직접 눈으로 보고 서류에 기록하는 아날로그 세계였습니다. 반면 슈퍼 파놉티콘에는 감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권력의 작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서관 카드로 책을 빌리려 해도 연체한 책이 있으면 빌릴 수 없습니다. 신용카드로 쇼핑하려 해도 한도액을 초과하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사용하다 보면 추천 상품이 자동으로 표시되는데, 이는 이전 구매 이력이나 검색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추천받은 상품을 별다른 의식 없이 바로 구매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그 사람의 행동을 직접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과 취향까지 속속들이 파악되고 지배받게 됩니다. 이를 ‘권력’의 새로운 형태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자유: 자유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자유와 규제
밀: 민폐만 아니면 자유인가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 말하는 자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유론은 오늘날 자유관에 기본이 되었습니다.
밀의 자유론은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타자 위해의 원칙(The Harm Principle)’이라고 합니다. 자기 이외의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자유를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쉬운 기준입니다. 『자유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인류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어떤 사람의 행동의 자유에 개입할 수 있는 정당한 목적은 자기방어뿐이다. 또한 문명사회에 속하는 어떤 구성원이건, 그 의지에 반하는 권력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구성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
밀의 주장은 흔히 ‘타인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자유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수용되곤 합니다. 규범과 시선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서 밀이 말한 ‘위해’라는 엄밀한 기준이 일상적인 사교의 약점인 ‘민폐’라는 개념으로 대체된 셈입니다. 이처럼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그의 틀은 언뜻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도덕 규범으로 받아들여진 듯합니다.
하지만 밀의 자유론은 보기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타자 위해의 원칙’이 어디까지나 판단 능력을 갖춘 성인에게만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성인과 아동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오랜 논쟁거리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우선 아동을 제외한 성인 세계에서의 원칙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이는 판단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성인에게도 아이를 대하듯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태도를 ‘퍼터널리즘(Paternalism)’이라고 합니다. ‘가부장주의’ 또는 ‘온정주의’라고도 번역하지만, 아직 낯선 개념이라 영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를 비롯한 많은 문화권에서도 퍼터널리즘이 만연합니다. 어디를 가나 ‘ㅇㅇ하지 마세요’, ‘ㅇㅇ금지’와 같은 문구가 가득하고, 심지어 전철 안에는 ‘자리를 양보합시다’처럼 친절을 권장하는 포스터까지 붙어 있습니다.
밀의 타자 위해의 원칙은 부정적인 형태(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로 정식화되었지만, 긍정적인 형태로 주장할 때는 ‘자기결정론’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일은 스스로 결정해도 좋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다만 밀의 원칙에서 ‘타자 위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애당초 무엇을 ‘타자 위해’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일률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중학생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는 것이 타자 위해인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밀의 원칙을 역으로 활용하여 어른들에게 반론을 펼친다면, 어른들은 과연 어떻게 답해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 자유와 이성
프로이센 왕국의 철학자 칸트가 생각하는 자유 개념은 밀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다만 시대적으로 칸트가 밀보다 앞서기 때문에, 칸트가 밀에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칸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만드는 동인을 욕망, 칸트의 표현으로는 ‘경향성’이라고 말합니다. 경향성이란 태어날 때부터 지닌 충동 같은 것입니다. 그 욕망을 따르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충동이나 감정, 격정에 이끌려 자신을 잃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칸트는 경향성을 제어하고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봅니다.
밀의 입장에서는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범위 내라면, 충동에 휩쓸리든 격정에 이끌려 행동하든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타인이 어떻든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성 문제라고 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칸트가 자유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실천이성비판』의 정언 명령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여기서 ‘보편적 입법의 원리’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개개인의 행동 기준이 다른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타당한지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도 될지를 판단할 때,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인정할 수 있어야 칸트의 원칙에 부합합니다. 칸트는 이러한 보편적 원리에 합치하는 것을 ‘이성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칸트는 인간을 이해할 때 이성적 측면과 감성적·감각적 측면을 모두 인정하며, 항상 이 양면을 함께 파악했습니다. 그는 감정적 측면을 충동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성을 통해 이를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칸트의 인간 이해에서 이 두 측면은 서로 대립하지만, 이성으로 충동을 억제한다는 발상 자체는 전통적입니다.
칸트의 독자성은 이성을 통해 충동을 억제하는 행위가 바로 ‘자유’라는 점에 있습니다. 반대로 충동이 돌출되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면 ‘부자유’한 상태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충동에 지배되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박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도박하고 싶다’는 충동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충동에 지배되어 그것에 전복된 상태에 불과합니다. 2;
전쟁인가 평화인가
칸트: 영구 평화론
우선 칸트가 평화라는 개념을 어떤 논리적 구조 위에서 이해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칸트는 평화를 사유할 때, 기본적으로 ‘개인(인간)’의 내면적 작동 방식과 ‘국가’의 외적인 존재 방식이 완벽히 유기적인 평행 관계를 이룬다고 보았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개인과 국가 모두 두 가지 상반된 힘의 지배를 받습니다. 한쪽에는 이기적인 욕망과 사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이 존재하는데, 칸트는 이를 ‘경향성(Neigung)’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다른 한쪽에는 이러한 무분별한 경향성을 스스로 억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이성적 도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경향성’이 개인의 주관적인 욕망과 이익을 좇는 맹목적인 힘이라면, ‘이성적 도덕’은 전체가 공존할 수 있는 보편적 규칙을 추구하는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성은 곧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칸트는 이 개인 차원의 인지 구조를 ‘국가’라는 거대한 주체에도 그대로 대입했습니다. 국가 역시 아무런 통제가 없는 자연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오직 자국의 이익(경향성)만을 무자비하게 추구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칸트는 “국가의 자연 상태는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즉 전쟁 상태”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러한 칸트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홉스가 주창한 ‘자연 상태(무법적 투쟁 상태)’의 논리와 궤를 같이합니다.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제 없이 방치할 경우, 각국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슴없이 타국을 폭력적으로 침략하거나 기만할 것이므로, 이를 반드시 ‘이성적 도덕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해』에서 이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습니다.
“공동의 외적 법률이 부재한 자연 상태에서, 여러 민족은 단지 서로 이웃하여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호 간에 끊임없는 위협이자 해악이 된다. 따라서 모든 민족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개인이 국가를 세워 시민적 법치 체제를 구축한 것처럼 ‘국가 간의 연합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또한 타국을 향해서도 이 법적 공동체에 동참하여 서로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할 수 있으며, 마땅히 요구해야만 한다.”
이러한 칸트의 국가 간 연대 구상은 훗날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습니다. 칸트의 기획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결정적인 주의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칸트가 영구 평화론을 주창했다고 해서 무력이나 군대 자체를 맹목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해』에서 상비군을 손에 쥐고 자의적으로 침략 전쟁을 감행하는 전제군주의 호전성을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반면, 공화정 체제하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하는 자위권(自衛權)은 전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시민들이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국을 수호하고자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정기적인 군사 훈련에 임하는 것은, 국가의 폭력 기구인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이처럼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모든 전쟁과 무기를 단칼에 부정하는 종교적·도덕적 ‘절대평화주의’가 아닙니다. 그의 타깃은 어디까지나 군주가 제멋대로 상비군을 동원해 벌이는 유희로서의 침략 전쟁이었습니다.
헤겔: 전쟁은 필요하다
하지만 칸트의 세계주의적(Cosmopolitan) 영구 평화론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어서 현실 국제 정치에는 적용하기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칸트 역시 이러한 한계를 의식하여 초국가적 권력을 가진 단일 ‘세계 공화국’이라는 이상향 대신 현실적인 ‘국가 연합’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권력 정치를 중시하는 현실주의 철학자들에게 칸트의 구상은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칸트의 뒤를 이은 독일 관념론의 거두, 헤겔이 바로 그 대표적인 비판자였습니다. 헤겔은 저서 『법철학』에서 명백히 칸트를 겨냥하며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선언을 남겼습니다.
“전쟁을 그저 절대적인 악으로만 규정해서도 안 되며, 단순히 외부에서 찾아오는 부정적인 우연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 영구 평화는 묘사하고, 지속적인 평화가 장기간 이어지는 것조차 도리어 국민을 나태하고 부패하게 만들 것이다.”
현대의 평화주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문장이지만, 헤겔이 이토록 당당하게 전쟁을 긍정한 사상적 배경은 무엇일까요? 칸트는 코스모폴리탄으로서 개별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인류 사회’를 궁극의 지향점으로 삼았습니다. 반면 헤겔은 개별 주권 국가를 초월하는 상위의 도덕적·법적 권위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헤겔에게 국가란 역사 속에서 공동체적 도덕 질서, 인륜성이 최고도로 실현된 절대적 기준이었으며, 따라서 국가 고유의 자립적 통치권(Sovereignty)을 수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헤겔 철학에서 자립적 통치권이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성립하는 개념입니다. 만약 상대 국가가 우리의 자립적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인정을 위한 투쟁, 즉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헤겔은 국가 역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유기체로 보았습니다. 국가 간의 진정한 평화는 오직 상호 인정(Mutual Recognition)을 통해서만 도래하지만, 만약 어느 한쪽이 상대의 주권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그 자립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극단적 수단조차 불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명예’란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가치이기에, 이를 부정당했을 때는 투쟁을 통해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사유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헤겔은 전쟁 그 자체에 일종의 ‘윤리적 의의(Sittliche Bedeutung)’를 부여했습니다. 헤겔이 보기에 장기화된 평화 상태는 국민들이 사익과 개인적 욕망에만 침잠하여 국가적 통일성을 해체하는 파편화된 상태에 불과했습니다. 흔히 현대 사회에서도 안보 불감증이나 안일한 태도를 꼬집어 ‘평화 바보’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쓰듯, 헤겔 역시 평화가 영속되면 국민의 정신이 타락한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는 때때로 전쟁을 통해 젊음을 회복한다”라는 파격적인 언사를 남겼는데, 이는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국면을 통해 분열되었던 공동체의 결속과 통일성이 다시 한번 공고해진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러한 헤겔의 주장은 자칫 전체주의나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반면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이상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거장의 대립을 평면적으로 부각해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전쟁이라는 인류사적 난제를 향한 각자의 사유가 지닌 철학적 근거와 시대적 맥락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