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쓴 철학자
 
지은이 : F
출판사 : 글항아리
출판일 : 2026년 03월



  •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주아리는 철학의 역사가 사실은 다채로운 "가면"들의 역사였으며, 철학자들은 시대의 탄압과 통념의 벽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가면을 써왔다고 주장한다.



    가면을 쓴 철학자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에,
    지금 읽고 있는 바에서 숨겨진 의도를 찾아내겠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말해보세요.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네, 그게 다입니다."


    1980년 1월,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프랑스 철학자 F에게 『르몽드』 지에 실을 대담을 요청했다. 당시 『르몽드』의 일요판은 사상적 토론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었다. F는 요청을 즉시 수락하는데, 다만 몇 가지 원칙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이 대담이 익명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자기 이름을 대담 전체에서 결코 언급해서는 안 될뿐더러, 그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 또한 모두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F는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음처럼 설명한다. 지성의 무대는 이미 미디어의 먹잇감이 되어버렸고, 관념보다 스타성이 더 중요해졌으며 사유는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말해지는 바가 말하는 이의 개인성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 심지어 미디어화를 향한 이러한 비판은, F와 같이 그 자신이 원치 않았음에도 이미 미디어 시스템 내에 자리 잡힌 이가 발화했을 때, 그 가치를 절하당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가 고발하고자 하는 바를 도리어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같은 도착적인 효과들을 차단하기 위해, 그리고 이름으로 귀속될 수 없는 발화를 들리고 이해되게 만들기 위해 익명이 요구된다. 들라캉파뉴는 F의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했다. 이로써 특정된 정체성 없이 ‘가면을 쓴 철학자’와의 대담이 지면에 소개된다.

    F가 감행한 익명 시도는 그의 살아생전 지켜졌다. 이 책 또한 그를 F라고 지칭하며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상적 배경 및 정치성에 근거하였는지, 발화의 가치를 판단할 조건을 감추었다. 이로써 잠재 독자는 자연스레 F가 제안한 “이름 없는 한 해”라는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이 게임은 한 해 동안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책을 출판하는 것으로, 실재 위에 덧씌운 조건을 벗기고 본질만을 환한 빛 앞에 세운다. 독자는 F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그의 말에서 숨겨진 의도를 찾아내겠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말하게 될 것이다. 하나, F가 제안과 동시에 덧붙였듯이 “아마 비평가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모든 저자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이듬해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 출판에서 ‘익명’이라는 결단은 그의 말만큼이나 불가능을 전제하고 있다. ‘가면’으로부터 어떤 예상치 못한 효과가 용출하여 저자-독자의 접촉면을 확장시킬 것인가. 이 물음은 F의 시대나 오늘날에나 여전히 불확정성을 담보한 채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옮긴이 배세진의 말처럼 “미디어의 힘이 강력해졌을 뿐 아니라 그 수도 증가한 오늘, 게다가 지식인들의 불필요한 자의식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것이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대중의 앎의 의지를 강하게 위협하고 있는 오늘”, 가면의 잠재력은 오히려 더 긴요해 보인다.

    그러나 F의 비판을 냉소로 오해해선 안 된다. F는 들라캉파뉴가 우리 시대에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가진 정신, 혹은 위대한 작가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묻자, 이에 단호히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는 종종 사유의 수단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미디어가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투덜거리며 염세주의를 왼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 재미있는 것, 끔찍한 것, 본질적인 것, 사소한 것 들이 사실상 넘쳐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F는 우리의 정신이 이미 사유의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정신의 반작용을 촉진할 날카로운 호기심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F는 실재의 날카로운 감각을 벼르기 위해 호기심의 시대를 꿈꿔야 한다고 말하며, 지식인을 자청하는 이들이 내리는 평결, 판결, 선고, 배제 같은 것이 아니라, 또한 ‘참’으로 주어진 지배적인 철학도 아니라, 사유의 틀을 변형하고 일반화된 가치를 수정하며 지금껏 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을 해보려는 작업으로서 진실과 관계 맺기를 촉구한다. 이는 달리 말해 “새로운 어조, 새로운 보기의 방식, 새로운 행위의 방식”을 삶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며, 즉 F가 정의하는 철학이자, 철학하는 삶이다.


    -이런 게임을 제안하고 싶네요. ‘이름 없는 한 해’라는 게임을요. 한 해 동안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책을 출판하는 겁니다. 비평가들은 완전히 익명인 생산물들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해야 할 테고요. 하지만 한번 예측해보죠. 아마 비평가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저자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이듬해를 기다려야 할 거고요.  

    -지식인이라, 이 단어가 참 기이하게 느껴지네요. 왜냐하면 저는 지식인을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저는 소설을 쓰는 사람,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 그리고 전자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 들을 만나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교육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뭘 하고 있든 그다지 이해는 안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을 뿐이고요. 하지만 지식인, 이들은 만나본 적이 없네요.  

    -아니요. 저는 데카당스, 작가의 부재, 사유의 불모화, 출구 없이 음울한 지평이라는 상투어구를 전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러한 정신, 위대한 작가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공허 때문이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유할 수 있는 수단을 너무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야 할 것은 넘쳐나는데 말이죠. 본질적이거나 끔찍한 것들, 혹은 경탄할 만한 것들, 재미있는 것들, 사소하면서 동시에 중요한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앎에 대한 거대한 호기심, 필요 혹은 욕망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미디어가 사람들의 머릿속을 잠식했다며 항상 투덜대죠. 이러한 관념 속에는 염세주의가 놓여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사람들이 반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설득하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사람들은 질문을 던집니다. 정신이란 물렁한 밀랍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신은 반작용하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더 잘 알고자 하는 욕망과 그 외의 것들이,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를 믿게 만들고자 할 때 같이 자라나죠.  

    -호기심은 기독교에 의해, 철학에 의해, 심지어는 과학의 특정 개념화에 의해 차례로 규탄받아왔던 악덕입니다. 호기심이란 곧 쓸모없음이죠. 그렇지만 이 호기심이란 단어가 제 마음에는 쏙 듭니다. 이 단어는 마음속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떠올리게 만들거든요. 호기심은 ‘배려’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돌봄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재의 날카로운 감각, 동시에 이 실재 앞에서 결단코 잠자코 있지 않는 감각.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바가 기이하고 독특하다는 점을 발견하는 기민함. 우리의 친숙함을 해체하며 동일한 사물을 다르게 보도록 하는 고집스러움. 이미 일어난 일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붙잡으려는 열의. 중요한 것과 본질적인 것 간의 전통적 위계에 대한 무시. 저는 호기심의 새로운 시대를 꿈꿉니다.  

    -철학이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진실과 맺는 관계를 성찰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