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업이나 국가 같은 큰 조직만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 속 결정적 순간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속에 크고 작은 다양한 주체들의 복잡한 관계망이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는 그 주체들이 설계해놓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형성된 작은 충격들에 의해 결정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 남자의 삶이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추적한다. 어떻게 한 명의 해적이 동인도회사의 번영과 대영제국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한 사람이 역사 속에서 유의미한 불꽃이 되는 과정과 그 불꽃이 어떻게 세상을 활활 태우는 화재로 번져가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연과 선택이 얽혀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가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 저자 스티븐 존슨
저자 스티븐 존슨은 『뉴스위크』가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50인’에 포함된 과학 저술가이다. 브라운대학교에서 기호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바탕으로 저널리즘스쿨계의 명문 컬럼비아대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그의 저서는 모두 온·오프라인 매체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누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이머전스』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대표작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는 아마존 ‘최고의 비즈니스 도서’, 800 CEO READ가 선정한 ‘최고의 비즈니스 도서’, <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 <가디언> <하퍼스> 등을 통해 과학 대중화에 공헌하는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감염 도시』 『바보상자의 역습』 『공기의 발명』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원더랜드』 등이 있다.
■ 역자 강주헌
역자 강주헌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수학한 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등에서 언어학을 강의했으며, 뛰어난 영어와 불어 번역으로 2003년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펍헙(PUBHUB) 번역 그룹’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문명의 붕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습관의 힘』 『슬럼독 밀리어네어』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등 100여 권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 『강주헌의 영어번역 테크닉』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결정적 장면
1부 원정
1 주인공에 대하여
2 공포의 용도
3 무굴제국의 기원
4 인류 모두의 적
5 두 종류의 보물
6 스페인 원정 해운
7 세계의 정복자
8 원정대의 발을 묶은 관료주의
2부 선상 반란
9 만취한 갑판장
10 팬시호
11 해적의 노래
12 조사이아 경의 조작
13 서풍해류
14 건스웨이호
15 애머티호의 귀환
16 누가 쫓아와도 두렵지 않은 배
17 공주
3부 약탈
18 파트마흐마마디호
19 넘치는 보물
20 대항 담론
21 복수
22 전쟁하는 회사
4부 추적
23 도주
24 명백한 반란
25 추측은 증거가 아니다
26 바다의 파우지다르
27 귀향
5부 재판
28 해적의 나라
29 유령 재판
30 동의라는 게 무엇입니까?
31 해적 처형장
에필로그 | 리베르탈리아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 역사를 보는 눈
주
참고문헌
우리는 기업이나 국가 같은 큰 조직만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 속 결정적 순간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속에 크고 작은 다양한 주체들의 복잡한 관계망이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는 그 주체들이 설계해놓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형성된 작은 충격들에 의해 결정된다.<br><br>저자는 이 책에서 한 남자의 삶이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추적한다. 어떻게 한 명의 해적이 동인도회사의 번영과 대영제국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한 사람이 역사 속에서 유의미한 불꽃이 되는 과정과 그 불꽃이 어떻게 세상을 활활 태우는 화재로 번져가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연과 선택이 얽혀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가는 즐거움을 선사한다.<br>
인류 모두의 적
원정
공포의 용도
현대적 의미의 테러를 최초로 이용한 집단
처음부터 해적 행위는 민중의 상상력 범주에서나 법적인 정의에서나 요즘의 테러 개념과 공통점이 많았다. 영어에서 ‘테러(terrorism)’라는 단어는 1795년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이던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1831)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약 1년이 지난 후, 파리에서 보낸 편지에서 먼로는 ‘왕정이 아니라 공포정치’를 되살리려는 자코뱅파의 시도에 대해 언급했다. ‘공포정치’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 테러라는 용어는 그 후로 미국 정치계에서 급속히 확산된 듯하다. 실제로 그로부터 수 주 후에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1848)가 쓴 편지에 ‘로베스피에르의 통치를 열렬히 지지하던 자들’을 암시하며 ‘테러리스트(terrorist)’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테러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때에나 요즘에나, 테러는 어떤 표적을 향해 공개적으로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급진적인 정치관을 알리는 수단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의 중대한 점에서 요즘의 정의는 초기의 의미와 더 이상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20세기 이전까지 테러, 즉 공포정치는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를 비롯한 프랑스 혁명정부의 통치 기구들의 행위를 본보기로 삼았다. 달리 말하면, 테러는 국가기구에서 시행하는 정치 전술이었다. 한 세기 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등장하고 나서야 테러라는 개념이 비정부 행위자들, 즉 막강한 힘과 군사력을 지닌 정부들을 대리한 전쟁 수단으로서 폭발과 살육으로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소규모 집단과 관련성을 갖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의 테러, 즉 공포정치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며 극단적으로 행사했다. 따라서 이때의 테러는 지배 계급을 더욱더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수단이었다. 현대의 테러는 정반대다. 현대의 테러에서 소규모 저항 세력과 그림자 조직이 갖는 힘은 지극히 작다. 요즘의 군사적 충돌에서는 초강 대국이 인력과 군사력에서 수천 배나 미약한 적을 상대로 싸운다. 따라서 요즘의 많은 군사적 충돌을 특징짓는 ‘비대칭적 전투’ 개념은 이렇게 뒤집힌 테러의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의 테러는 작은 무기로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전력 증강자다. 수백만 명에게 괴로운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굳이 대규모 상비군이나 항공모함 함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폭발물, 심지어 칼이라도 적절한 위치에 설치해두고, 그것을 이용해 공격하겠다는 소식을 널리 알리는 미디어망을 갖고 있으면 충분하다.
테러라는 단어의 실질적인 어원은 로베스피에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형태의 테러를 실질적으로 가장 먼저 사용한 집단은 해적이었다. 현대의 테러는 비정부 행위자들이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매체를 통해 그 소식을 널리 퍼뜨림으로써 효과를 배가하는 전략이다. 이처럼 소수가 극악한 잔혹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국가 전체를 인질로 붙잡아두는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 최초의 확실한 증거는 1695년 팬시호와 무굴제국 보물선의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 모두의 적
최초의 ‘인류 모두의 적’
그런 약탈을 영국인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바버리 해적들은 ‘호스티스 후마니 제네리스(Hostis humani generis)’로 분류된다. 이 라틴어는 국제법에서 초창기에 사용되던 용어로 ‘인류 모두의 적’이라는 뜻이다. 해안 지역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행위는 일반적인 범죄 행위를 넘어서 관습에 대한 도전이었다. 바버리 해적들은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그들의 극악한 행위를 극단적으로 처벌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수 세기 동안 인류 모두의 적이라는 분류는 해적에게만 적용되었다. 해적들이 일반적인 범죄 행위의 경계를 넘어서는 잔혹 행위를 서슴지 않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범죄를 법적 관할권이 모호한 공해상에서 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국 해군이 알제를 겁주고 20년이 지난 후에 에브리와 그의 선원들에게도 똑같은 딱지가 붙었다. 해적을 인류 모두의 적이라 선포함으로써, 해적이 지구 반대편에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당국이 해적들을 심판할 법적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인류 모두의 적의 범위가 확대되어 전쟁 범죄인, 고문자, 테러리스트가 인류 모두의 적이 되었다. 9·11 테러가 있었을 때 미국 법무부 소속 법률가 존 유(John Yoo)는 테러리스트들을 인류 모두의 적이라고 언급하며, 그들에 대한 극단적 학대를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정당화했다. 관타나모와 아부그라이브의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학대를 정당화하는 법적 토대는, 해적들이 공해에서 행하는 잔혹 행위를 해결하려고 처음 놓였던 것이다.
17세기 영국은 바버리 해적들을 인류 모두의 적으로 규탄했지만, 위선적인 비난이었다. 세계에서 극악하기로 유명한 해적들 중에는 잉글랜드인이 적지 않았고, 영국 왕의 비호를 받으며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영국 법은 해적선과 사략선 구분의 의도적인 허점을 통해 이런 모순을 지워버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 행위에서 사략선은 해적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사략선도 마을을 약탈했고 보물을 탈취했으며, 선박을 나포해 선원들을 고문했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략선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 그런 짓을 한다는 게 달랐다. 그 허가는 주로 다른 국적의 선박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타국 선박 나포 면허장(letter of marque)’이라는 형태로 주어졌다.
역사학자 앵거스 콘스탐(Angus Konstam)은 “이런 법적인 보호의 대가로, 그 면허장을 발급한 국가는 수익의 일부를 상납받았다. 사략선이 계약을 준수하고, 면허장에 나열된 적국의 선박만을 공격하는 한, 해적으로 간주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평생 갤리선에서 노예로 일하는 처벌을 받지 않았고, 즉결로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했다. 사략선은 전쟁 선포로 공식화된 적국에 속한 선박만을 공격할 수 있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았다. 게다가 사략선 선원들이 약탈하는 삶에 길들면서, 공식적인 적대 관계가 종식된 후에도 약탈을 포기하지 않는 경향을 띠었다. 해적의 역사를 다룬 초창기 역사학자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은 『해적의 보편적 역사(A General History of the Pyrates)』에서 “전시의 사략선은 훗날 평화를 좀먹는 해적을 키우는 산실이다”라고 규정했을 정도였다.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허락받은 사략(私掠, privateering)은 에드워드 1세(Edward I, 재위 1272~1307)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적에게 공격받은 적이 있는 영국 상선에는 ‘보복 행위 (Commission of Reprisal, 타국 선박 나포 면허장의 전신)’가 허락되었다. 비영국 선박을 나포할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철저한 보복 원칙에 근거한 허락이었다. 따라서 보복을 허락받은 사략선은 원래 자신을 약탈한 해적단의 깃발을 매단 해적선만을 나포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구분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고, 빼앗긴 보물보다 훨씬 더 많이 약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선상 반란
팬시호
해적의 규칙
가장 중요한 조항은 전리품 분배에 대한 것이었다. 동인도회사의 투자자들과 마찬가지로, 각 해적은 모험 사업에 투자한 주주로 여겨졌다. 항해하는 동안 운이 좋아 보물을 강탈하면, 각자가 맡은 역할을 기준으로 포상금이 분배되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나 요즘의 모든 기업과 달리, 거의 모든 해적선에서 이익 분배는 원칙적으로 평등했다. 요즘 미국 기업 경영자의 보수는 중위 임금(median compensation)의 평균 271배이고, 에브리 시대에 영국 해군의 함장과 사관들은 숙련된 갑판원의 열 배 정도의 보수를 받았다. 상선이나, 스페인 원정 해운처럼 투기적 목적을 띤 배에서는 소득의 차이가 5대 1로 더 낮았다. 한편 해적의 분배는 상당히 공평했다. 18세기 해적 에드워드 로의 해적선(에브리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뜻에서 선명을 ‘팬시’로 했다)에 적용된 합의 조항을 보면, 전리품의 분배 방식이 세밀하게 쓰여 있다. “선장은 2배를 갖는다. 항해장은 1.5배, 의사와 항해사, 포수와 갑판장은 1.25배를 갖는다.” 그 밖의 선원들에게는 똑같이 1이 배분되었다. 한편 헨리 에브리와 선원들이 합의한 조항은 한층 간단했다. 에브리는 2, 나머지 모두는 똑같이 1이었다.
1720년대의 어느 시점에 작성된 이 미니 헌법의 몇몇 조항은 현대인의 눈에는 낡디낡아 보인다. 오늘날에는 어떤 정치 문서에서도 결투 방식을 명시하거나, 저녁 여덟 시 이후에 촛불까지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에서, 합의 조항이라 일컬어지듯 이 해적의 관례는 때때로 시대를 크게 앞선 것이었다. 로버츠의 합의 첫 문장, “중대한 사건을 결정할 때 모두가 동등한 투표권을 갖는다”를 생각해보라. 해적들은 이 민주적 원칙을 그들의 헌법에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거의 한 세기나 앞섰다. 선장은 선원들의 뜻에 따라 직무를 수행했고, 과반수로부터 호의를 잃으면 지휘권을 상실할 수 있었다. 해군 전함과 상선은 그야말로 독재적 조직이었다. 엄격하게 통제된 지휘 계통에 따라 선장이 배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휘둘렀고, 선장의 권력 남용을 억제할 만한 메커니즘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해적선은 유동적인 민주 조직이었다. 한 장(章)을 통째로 할애해 에브리와 그의 범죄를 자세히 다룬 찰스 존슨의 베스트셀러 『해적의 보편적 역사』에 따르면, “[해적선에서] 최고 권력은 공동체에 있었고, 그 공동체는 이해관계나 기분에 따라 권력을 위임하고 철회할 수 있었다.”
유동적인 민주 조직
동등한 투표권도 대단하지만, 해적의 지배 구조는 그 이상이었다. 그 시대에 대부분의 해적선이 채택한 선상에서의 권력 분립은 미국 헌법의 뼈대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선장의 권한은 선원 투표를 통해 선장직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의해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항해장의 권한에 의해서도 견제를 받았다. 전투 중에는 선장이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고, 전체적인 목표를 설정할 때에는 항상 실무적인 권한을 행사했지만, 대부분의 일상적인 문제는 항해장이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전리품 분배 책임자도 항해장이었다. 존슨의 설명을 보자.
팬시호의 선원들이었다면, 해적들이 관례적으로 도입한 다른 혁신적인 조항도 틀림없이 명시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버츠의 합의 조항 제9조에서 봤던 내용이다.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구가 되거나 팔다리 중 하나를 잃은 사람에게는 공동의 재산에서 800스페인달러가 주어지고, 부상 정도에 비례해서 그 액수를 조정한다.” 해적들은 일종의 보험을 그들의 헌법에 명기하는 걸 핵심 원리로 삼았다. 따라서 전투 중에 중대한 부상을 당한 해적은 그들 모두가 함께 모아둔 보물에서 상당한 몫을 받았다. 로버츠의 합의 조항에 서술된 수준을 넘어, 훨씬 정교하게 보험을 설계한 해적 공동체도 있었다. 예컨대 18세기의 해적이자 노예무역상이던 알렉상드르 엑스크믈랭(Alexandre Exquemelin, 1645~1707)의 해적선에서는 부상한 선원들에게 부상 정도에 따라 특별한 수준의 보상이 주어졌다. 오른팔을 잃으면 왼팔을 잃은 경우보다 보상이 더 컸고, 눈 하나를 잃으면 손가락 하나를 잃은 정도와 거의 같은 수준의 보상을 받았다.
건스웨이호
팬시호가 마다가스카르 해안에 다시 기울어져 있을 때, 인도양 반대편의 수라트 항구에서는 또 다른 배가 다른 종류의 항해를 위해 식량을 싣고 있었다. ‘간자 다우(ghanjah dhow)’, 즉 목재로 만든 무역선으로, 소유자는 무굴제국의 황제 아우랑제브였다. 그때 방문객이 타프티강의 반대편에서 수라트 항구의 스카이라인을 봤다면, 멀리에서도 그 배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강둑을 따라 정박한 동인도회사의 선박들과 갤리선들보다 훨씬 크고 높았기 때문이다. 배수량이 1,500톤이었고, 1,000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을 가진 그 무역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 중 하나였다. 아우랑제브는 그 배에 ‘간지이사와이(Ganj-i-Sawai)’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페르시아어로 ‘넘치는 보물’이라는 뜻이었다. 영어권 세계에 떠돌던 민간 설화 및 재판 자료와 새로운 보고서에서 그 배는 간단히 ‘건스웨이(Gunsway)’로 불렸다.
황제의 보물선
건스웨이호는 수라트를 모항으로 삼았고, 항해할 때는 역시 무굴제국에 속한 네 척의 소형 선박이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우랑제브가 그 배들을 건조한 목적은 명백했다. 무슬림이 홍해 동쪽의 아시르산맥 기슭에 위치한 성지들을 순례하는 연례행사, 즉 하즈(hajj)를 맞아 황제의 직계 가족과 고위 관리들을 메카까지 실어나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건스웨이호와 호위선들은 홍해 어귀 근처, 현재 예멘에 속한 모카라는 무역항에 잠시 정박했다. 당시 유럽 주요 도시들에서는 커피 열풍이 거의 광적이어서, 모카는 커피 국제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로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스타벅스에서 모카 카푸치노를 즐기는 소비자라면, 주문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 도시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커피콩은 다른 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무역상들의 관심을 끌었고, 아우랑제브가 건스웨이호를 메카 순례에 파견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장사와 종교적 신심을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는 이미 1,000년 전에 무역상들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건스웨이호의 적하 목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 배는 옥양목과 정교한 도자기, 상아 장식 등 온갖 값비싼 상품들로 가득했다. 순례자들과 선원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식량만이 아니라, 모카에서 거래할 향신료들, 특히 말린 후추 열매도 실려 있었다. 요즘에는 식당에서 공짜로 제공할 정도로 값싼 향신료로 보물선이 가득 채워졌다는 사실이 재밌게만 여겨질 수 있지만, 17세기에 후추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치품 중 하나였다. 후추 가격은 중세에 최고로 치솟은 이후로 점차 떨어졌지만, 가장 비쌌을 때에는 말린 후추 열매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쌌다. 값이 떨어지긴 했지만 큰 통에 담긴 후추는 모카에서 거액에 거래되었다. 건스웨이호의 주갑판에 설치된 80문의 대포와 400명 이상의 군인이 보물과 800명의 순례자를 보호했다.
약탈
넘치는 보물
결정적 장면
팬시호가 공격을 개시할 수 있을 정도로 건스웨이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첫째로, 건스웨이호가 에브리의 해적선에 반격하려고 준비할 때, 갑판에서 대포가 폭발하며 여섯 명의 포수가 즉사했고, 다른 포수들은 중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건스웨이호의 갑판은 불바다가 되고 대혼란에 빠졌다. 둘째로, 에브리가 실시한 집중 포격이 운좋게 건스웨이호의 주 돛대를 때리며, 주된 돛과 그에 연결된 모든 삭구가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로, 대포 폭발로 인한 혼란에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지경이 더해졌다.
셋째 역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에브리와 그의 선원들이 ‘건스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재물, 즉 ‘넘치는 보물’을 포획했다는 것이다. 건스웨이호의 거대한 선체에서 해적들은 엄청난 양의 금과 은, 장신구와 상아, 몰약과 유향, 사프란을 비롯해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많은 향료를 찾아냈다. 에브리가 인도 보물선에서 얼마나 많은 보물을 약탈했느냐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찰스 존슨은 『해적의 보편적 역사』에서 그 양을 계산하기 어렵다면서 “동양인들은 최대한 호화롭고 웅장하게 여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예와 수행원을 모두 데리고, 온갖 장신구로 꾸미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 또 금과 은, 육지를 여행할 때 지불해야 할 막대한 돈도 갖고 다녔다. 따라서 이 해적이 약탈한 전리품은 쉽게 계산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건스웨이호에서 이탈한 보물의 가지는 약 20만 파운드,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0만 달러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훗날 동인도회사는 그 가치를 세 배 정도로 높게 계산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에브리의 건스웨이 약탈은 범죄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를 탈취한 사건 중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하다.
복수
압둘 가파르의 복수
9월 12일, 분노한 지역민들이 동인도회사의 무역 사무소 정문 앞에 모여, 동인도회사의 악습에 복수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때 카피 칸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고, 파트마흐마마디호 선원들을 인터뷰하며 결국에는 아우랑제브에게 전해질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했다. 처음에 애니슬리는 그런 집단 항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침착하게 대응했다. 애니슬리는 정문을 닫으라고 지시했고, 기다리면 폭풍이 가라앉을 것이라 생각했다. 라이트에 따르면, “그는 무역 사무소의 방어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잘 무장된 역내 거주자들과 혼란의 시기에 수라트 시장에서 모여든 오합지졸 간의 혹시 모를 충돌 결과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서너 시간이 지난 뒤, 수라트 주둔 무굴제국군 사령관 우셰르 베그(Usher Beg)가 기병 부대를 이끌고 정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수라트 총독의 서신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며 무역 사무소에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서신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당국이 파트마흐마마디호의 약탈을 조사하는 동안 애니슬리와 직원들을 가택 연금해두려고 베그를 파견한 것이었다. 물론 베그는 정문 밖의 폭도들로부터 영국인들을 보호하려고 자신과 기병 부대가 무역 사무소에 파견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니슬리가 더 음험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베그의 말을 믿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국인들은 수라트의 ‘무타사디(mutassaddi, 총독)’ 이티마드 칸(I'timad Khan)과 우호적인 관계를 줄곧 유지해온 데다 믿을 만한 뇌물을 꾸준히 제공하며 그의 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니슬리는 가택 연금과 무굴제국의 보호를 받아들이며 길거리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틀 후 건스웨이호가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은 생존자들을 싣고 수라트에 정박했을 때, 이런 금전적 계산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무함마드의 눈에 왕실 순례선 포획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신성모독이었다.” 영국 해적들은 부유한 상인의 것을 도둑질하는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아우랑제브 궁정의 여인들, 그것도 무슬림에게 가장 신성한 행위로 여겨지는 성지 순례에 참여한 여인들에게 끔찍한 성폭력을 저질렀다. 이보다 아우랑제브를 격노하게 할 범죄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알았든 몰랐든 간에 헨리 에브리는 세계의 정복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소유물들, 즉 재물과 믿음과 여인을 동시에 침해하는 범죄를 저지른 셈이었다.
재판
해적의 나라
아우랑제브가 수라트 무역 사무소 직원들의 가택 연금을 풀어준 뒤, 동인도회사는 남동아시아 무역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나, 존 게이어는 건스웨이호 위기와 그 영향에 대해 분석한 편지를 런던에 보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영국 정부가 국내외에서 해적 행위에 단호히 대처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드레이크 시대, 즉 해적들이 해외에서 영국 이익의 비공식적인 대변자로 여겨지던 시대의 관습이, 적으로 선포된 국가들이나, 네덜란드인들이 거의 독점한 향료제도 같은 부족 사회를 상대할 때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인도 같은 진정한 무역 상대국에게는 드레이크 시대의 너그러움이 더는 타당하지 않다는 게 게이어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게이어는 아우랑제브가 ‘건스웨이’ 협약에서 동인도회사에게 합법적으로 부여한 홍해 경찰권을 영국 정부도 똑같이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해적들을 진압하고 그곳에 범한 잘못에 따라 해적들을 응징할 권한을 위임하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국에 돌아갈 때마다 해적들에게 가한 행위로 인해 비난받을까 두려울 것이고, 해적들은 빈번한 손실을 복수하겠다며 시시때때로 우리 목을 따려고 할 것입니다.” 게이어는 동인도회사의 경제적 이익을 호소하며 그 편지를 끝맺었다. 특히 홍해 해적들을 눈감아주면 ‘인도와의 무역도 결국에는 완전히 잃고 말 것’이라고 예측했다.
공개재판의 시작
해적들과의 싸움은 애니슬리가 제안한 ‘바다의 파우지다르’의 영역 밖에서도 진행되었다. 에브리의 선원 중 여덟 명을 생포하자, 영국 정부는 그 인류 모두의 적들을 매섭게 응징하기 위한 공개재판을 시작했다. 이미 에브리 선장의 모험적이고 낭만적인 신화가 발라드몽거와 소책자 집필자에 의해 널리 퍼진 뒤였다. 하지만 정부에게는 그런 신생 출판물에는 없는 ‘형사재판’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1600년대 동안 해적 사건에 대한 민사 판례가 해적들을 기소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방해한다는 게 분명해지자, 법을 개정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 해적과 관련된 범죄가 특별한 범주로 분류되며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해적 행위가 기술적으로는 해사법원 관할의 민사 범죄로 규정되지만, 영국의 안정과 무역 관계에 미치는 위협뿐만 아니라 해적 행위 자체의 극단적인 면을 고려해 관습법 법정으로 사법 관할권을 넘긴 것이었다. 에브리 해적단이 한 세기 전에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재판은 ‘큰 획을 그은 해적 이야기’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고, 선원들도 사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습법으로 관할권이 이동했다고 해적들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실낱 같은 이점도 있었다. 관습법 재판은 배심원단에 의해 결정됐다. 달리 말하면, 해적 행위 자체를 혐오하는 성향을 띠던 해군성의 연로한 정치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해적들의 유무죄를 결정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해적 행위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은 ‘호스티스 후마니 제네리스(인류 모두의 적)’라는 법적인 규정보다 발라드몽거와 소책자 집필자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의라는 게 무엇입니까?
영국 정부가 에브리 해적단을 기소한 사건에서 패소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떤 법적인 책략이 역효과를 낳았거나, 피고들이 한정된 지식으로도 자신들의 행위를 기막히게 변론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의 사건들을 고려하면, 이런 두 가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사건을 주도한 해군성과 법무성이 헨리 에브리의 신화가 민중에게 파고들어 남긴 깊은 인상을 과소평가한 탓에 충격적인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정부는 법정에 피고로 선 해적들이 무굴 황제와 인도라는 국가의 재산을 약탈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대담한 헨리 에브리와 무모한 모험가들의 영웅적인 이야기에 이미 길들여진 데다 8,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외국의 황제와 그 백성에게는 아무런 연민도 없었던 까닭에, 그런 행위로는 범죄가 성립되지 않고, 사형을 받을 만한 범죄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피해자 바꿔치기
어떤 이유에서든 배심원단의 평결은 영국에게 재앙이었다. 에브리와 그 선원들은 건스웨이호를 약탈하고 거의 1년 동안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섯 명이 체포되고, 두 명의 증인이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는데도 그들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무죄 평결은 영국 정부에 대한 모든 혐의(영국 정부는 해적이 ‘인류 모두의 적’이라며 독설을 퍼붓지만 암묵적으로 해적을 지원한다거나 해적에게 강력히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혐의)를 확인해주는 결과였다. 하지만 해군성은 에브리 해적단을 기소한 사건을 여론 조작용 재판, 즉 영국 정부가 해적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새로운 정책을 세계에 선포하는 기회로 활용할 계획을 세운 터였다. 게다가 해군성은 세션스하우스야드까지 찾아오지 못한 대영제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재판 기록을 알려주겠다며 존 에버링엄(John Everingham)이라는 출판업자를 고용하기도 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에버링엄은 재판 기록을 출판하지 못했다. 런던의 한 정기간행물은 재판을 보도하지 못하는 걸 사과하며, 편집진의 이름으로 “우리는 해적 재판에 대해 많은 기사를 준비했지만, 당국의 금지에 따라 모든 기사를 빼버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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