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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도시 이야기
 
지은이 : 찰스 디킨스 (지은이), 정회성 (옮긴이)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5년 11월




  •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 인간의 선택이 역사를 바꾼다. <br>『두 도시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다. 절망과 광기의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를 묻는 디킨스 문학 세계의 정점이다. 



    다시 살아나다

    시대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이 솟구치던 시기였고 불신이 드리우던 시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그리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사람들 앞에는 모든 것이 놓여 있었고,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고, 동시에 모두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요컨대, 그 시대는 우리의 현재와 너무 흡사하여, 목소리 큰 일부 권위자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극단적으로 비교해야만 당대의 상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국의 왕좌는 강인한 턱의 왕과 평범한 얼굴의 왕비가 차지하고, 프랑스 왕좌는 강인한 턱의 왕과 아름다운 얼굴의 왕비가 앉아 있었다. 양국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안겨준 사유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현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전망을 투명한 보석처럼 굳게 믿고 있었다.

    서기 1775년, 그 무렵 영국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너도나도 영적 계시를 받아들이는 은혜로운 시기였다. 얼마 전 사우스콧 부인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했는데, 예지력을 지녔다는 근위 기병대 병사가 런던과 웨스트민스터를 집어삼킬 재앙이 머지않아 닥칠 거라고 공언하며 그녀의 숭고한 등장을 미리 알렸다. 더군다나 콕레인의 유령에 대한 소문이 잦아든 지 채 열두 해가 지나지 않았고, 불과 일 년 전에도 혼령들이 (초자연적인 존재치고는 독창성이 부족했는지) 똑같은 방식으로 무언가 두드리는 식으로 메시지를 남기고 간 참이었다.

    한편 프랑스는 방패와 삼지창을 든 자매국에 비하면 영적인 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종잇돈을 마구 찍어내고 탕진함으로써 내리막길로 막힘없이 치닫고만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수사들의 초라한 행렬을 보고 무릎 꿇고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젊은이의 양손을 자르고 집게로 혀를 뽑는 것도 모자라 산 채로 불태운 사건도 있었다. 이는 모두 가톨릭 사제의 비호 아래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들은 이 행위를 인도적인 업적이라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술집
    커다란 포도주 통 하나가 길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수레에서 통을 내리다 그만 사달이 난 것이다. 포도주 통은 굴러떨어지면서 쇠 테두리가 터져나갔고, 술집 문 앞에 깔린 돌바닥에 부딪혀 호두 껍데기처럼 부서졌다.

    그러자 그 주변에서 일하거나 빈둥거리며 놀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앞다투어 포도주를 들이켰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바닥은 마치 다가오는 이들을 일부러 절뚝거리게 하려는 듯 길을 막았고, 흘러넘친 포도주가 그 틈에 가로막혀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웅덩이 크기에 따라 몇몇, 또는 떼를 지어 모인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아우성쳤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포도주를 떠서 홀짝거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남자들은 포도주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기 전에 어깨 너머로 몸을 구부린 여자들이 마시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이 빠진 사기 컵을 웅덩이에 담그기 바빴다. 심지어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웅덩이에 푹 담가서 적셨다가 아이 입에다 포도주를 짜서 넣어주는 여인도 있었다. 몇몇은 포도주가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진흙으로 조그맣게 둑을 쌓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높은 창문에서 내다보는 구경꾼들이 일러주는 대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포도주 줄기를 막는 사람도 있었다. 또 포도주가 묻은 통 조각을 혀로 핥아 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런 축축한 통 조각을 주워서 질겅질겅 씹기도 했다. 애당초 포도주를 흘려보낼 배수 시설도 없었건만, 사람들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마셨고, 그도 모자라 포도주가 스며든 진흙을 삼키기도 했다. 그래서 거리는 마치 청소부가 다녀간 것처럼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물론, 그곳에 청소부라는 기적 같은 존재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포도주 쟁탈전이 벌어지는 동안, 거리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즐거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려심 넘치고 장난기 가득한 축제 같은 광경이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어울리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동료애마저 느낄 수 있었다. 운이 좋아 포도주를 넉넉히 마셨거나 성격이 명랑한 사람들은 악수하기도 하고 서로 장난스레 껴안기도 했으며, 십여 명씩 손에 손잡고 어울려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러다 포도주가 다 떨어지고 가장 흥건히 고였던 곳도 손가락으로 박박 긁은 바람에 갈퀴 자국만 남게 되자, 축제 같은 광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무를 켜다 말고 톱을 놓고 달려온 남자는 다시 톱질하기 시작했다. 한 여인은 자신과 아이들의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이려고 뜨거운 재가 담긴 작은 단지 앞에 앉아 있다가 황급히 뛰쳐 나온 바람에, 다시 단지가 놓인 문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텁수룩한 머리를 한 지하실 생활자들은 겨울의 별바른 자리로 나온 것도 잠시, 창백한 얼굴로 훤히 팔을 드러낸 채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거리 위로 음울함이 밀려들었다. 이는 햇빛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적포도주가 쏟아진 파리 생탕투안 근교의 좁은 길바닥은 붉게 얼룩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손과 얼굴과 맨발과 나막신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톱으로 나무를 켜던 남자의 손도 포도주 물이 들어서 나무조차 붉게 얼룩졌다. 아기를 돌보던 여인의 이마를 감싼 낡은 천에도 얼룩이 번져 붉게 물들었으며, 술통 조각을 게걸스럽게 빨던 이들의 입가는 마치 호랑이 주둥이처럼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키가 홀쩍 큰 농담꾼 하나가 나타나, 너무 더러워 헐렁한 자루처럼 머리에 걸쳐 쓴 나이트캡을 이리저리 흔들며, 진흙투성이 포도주 찌꺼기에 손가락을 적셔 벽에 이렇게 끄적였다. ‘피’.

    포도주를 머금은 그 붉은 글씨가 흘러내려 길바닥뿐 아니라 그곳의 수많은 사람까지 붉게 물들이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굶주림은 어디에서든 똬리를 틀었다. 범죄와 악취로 가득한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 거기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에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누더기를 걸치고 나이트캡을 쓴 사람들이 우글거렸고, 언제나 악취가 진동했다. 눈 닿는 곳마다 음울하니 병색을 띠었는데, 사람들은 쫓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를 대비해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야생 동물처럼 보였다.

    가게 수만큼이나 많은 간판에는 모두 ‘빈곤’이라는 음침한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푸줏간 주인은 말라비틀어진 고기를, 빵집 주인은 거칠고 딱딱한 빵을 간판에 그려 놓았다. 주점 간판에 그려진 사람들은 붉은 포도주와 맥주를 두고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음울하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느 하나 풍요롭게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연장과 무기는 예외였다. 날붙이 장수의 칼과 도끼는 늘 날카롭게 빛났고, 대장장이의 망치는 묵직했으며, 총포 제작자의 무기는 살기가 등등했다. 

    노면에는 위험천만하게 돌들이 튀어나와 있어서 진흙탕과 물웅덩이를 여기저기에 만들어 놓았다. 인도 따위는 없었고, 집 문간을 나서면 바로 노면이었다. 마치 선심이나 썼다는 듯 배수로가 거리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큰비가 내려야 그곳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정작 불어난 도랑물이 집 안까지 흘러들어오기 일쑤였다. 도로 양쪽에는 어설픈 가로등이 밧줄과 도르래에 치렁하니 매달려 있었다. 밤이 되어 점등하는 사람이 등을 내리고 불을 붙여 내걸면, 가냘픈 심지를 태우는 희미한 등불이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기라도 한 듯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실제로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 있었으며, 배와 선원들은 폭풍이라는 위험 앞에 놓여 있었다.

    도시 귀족
    궁정에서 권세를 떨치는 벼슬 높은 귀족이 파리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격주마다 연회를 열었다. 이 귀족 나리는 내실에 있었다. 바깥방에 모여 든 숭배자들의 눈에는 그곳이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귀족 나리는 이제 막 코코아를 마시려는 참이었다. 그는 먹성 좋게 여러 음식을 한입에 먹을 수 있었는데, 못마땅히 여기는 몇몇 이들은 그가 프랑스마저 빠르게 집어삼킬 모양이라고 믿었다. 귀족 나리가 그렇게 매일 아침 코코아를 목구멍으로 삼키려면 요리사를 비롯하여 네 명이나 되는 건장한 하인들이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과연 그러했다. 귀족 나리 곁에는 화려한 장신구를 두른 하인이 넷이나 필요했다. 개중 우두머리는 주머니에 금시계를 두 개나 넣고 있었는데, 귀족 나리의 고상하고도 소박한 취향을 곁에서 보고 배운 덕분이었다. 첫 번째 하인이 코코아 단지를 성스러운 귀족 나리 앞으로 가져오면, 두 번째 하인이 맞춤한 작은 도구로 코코아를 휘저어 거품을 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 하인이 특별한 냅킨을 대령하면, 마지막으로 금시계가 두 개나 있는 네 번째 하인이 고급스러운 그릇에 코코아를 따랐다. 넷 중 하나라도 없다면 귀족 나리는 하늘의 축복 아래에서 누리는 그 찬란한 위세를 유지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한 명이라도 빠진다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었을 것이고, 두 명이 빠진다면 그는 죽고 말 것이었다.

    어젯밤 귀족 나리는 희극과 그랜드 오페라가 상연되는 아름다운 연회장에서 가벼운 만찬을 들었다. 그는 거의 매일 저녁 한껏 멋을 부린 일행과 만찬을 즐기려고 만찬장에 들렀다. 그토록 점잖고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이었던 귀족 나리에게는 국정이나 국사(國事)의 따분한 조항들보다 희극과 그랜드 오페라가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전체의 필요보다도 말이다. 프랑스로서는 참으로 잘 돌아가는 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슷하게 굴러가던 나라들처럼 ‘은혜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한심한 스튜어트가 나라를 팔아먹은 그 통탄할 만한 시절과 다름없었다.

    귀족 나리는 전반적인 공적 업무에 대해 참으로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매사를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별적인 공무에 관한 그의 생각 또한 참으로 고귀했다. 모든 사안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야 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자신의 권세를 드높이고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쾌락에 관해서는 한결 관대했다. 온 세상이 자신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그야말로 고귀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나리의 공무 집행 결의서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나리의 것이로다.” 그가 신봉하는 경전에서 대명사 하나만 바꾼 것이었다.

    하지만 귀족 나리는 최근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골치 아프고 곤란한 문제가 하나둘씩 끼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리는 부득이하게 징세 도급인과 손을 잡았다. 공적인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로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맡길 필요가 있었다. 사적인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부유한 징세 도급인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귀족 나리의 가문은 여러 대에 걸친 사치와 향락 탓에 차츰 가난해지고 있었다. 

    급기야 귀족 나리는 누이가 수녀가 되어 싸구려 수녀복과 베일을 쓰기 전에 서둘러 수녀원에서 그녀를 빼낸 뒤, 돈은 엄청나게 많으나 가문은 보잘것없는 징세 도급인에게 물건 건네듯 주었다. 징세 도급인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자신의 부에 걸맞게 지팡이 꼭대기에 황금으로 빚은 사과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귀족 나리의 접견실에서 다른 무리와 놀고 있었고, 다들 그 앞에서 굽실거렸다. 그러나 귀족 나리의 혈통인 우월한 인류는 예외였다. 귀족 나리의 아내를 비롯하여 그의 혈족들은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징세 도급인을 업신여겼다.

    그는 사치스러운 남자였다. 마구간에는 말 서른 필, 저택에는 남자 하인 스무 명이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몸종이 그의 아내 시중을 들었다. 징세 도급인은 어디서든 기회만 있으면 수탈과 징벌을 공공연히 일삼으면서도 적어도 위선이나 가식은 없었다. 그날 나리의 저택에 참석한 인물 가운데서는 가장 진실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혼인을 치름으로써 사회 도덕에 미치는 영향은 잠시 접어두고 보더라도 말이다.

    접견실은 보기에 무척 아름다웠다. 당대 최고의 취향과 기술로써 가능한 온갖 장식으로 그득했다. 그러나 그리 건전한 장소라 할 수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나이트캡을 쓴 허수아비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곳이었다(노르트담의 망루에서 내려다보면 귀족 나리의 저택과 빈민굴은 서로 멀지 않았다).

    서기 1780년, 파리 생탕투안에서 열린 귀족 나리의 연회에 참석한 무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곱슬한 머리에 분을 바르고, 금빛 레이스를 두르고, 굽 높은 구두에 흰색 비단 양말을 신은 사형 집행인에게 의지하는 자신들의 체제가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하리라는 것을!

    귀족 나리는 네 하인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코코아를 재빨리 들이켜고는 성스럽기 이를 데 없는 성소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한 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추종자들이 서로 앞다투어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거리면서 천박하게 아양을 떨었다. 납작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천국의 자리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천국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귀족 나리는 이쪽에서는 약속의 말을 내뱉고, 저쪽에는 미소를 남기는 한편, 자기를 보고 행복해하는 노예에게는 두어 마디 속삭이고 그 옆의 노예에게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우아하게 몇 개의 방을 지나, 가장 바깥쪽 방에 도착했다. 앞서 말한 “진리의 둘레” 종파가 모여 있는 먼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리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몸을 돌려 코코아의 시중꾼들이 기다리는 성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회가 끝나자 공기의 떨림이 작은 폭풍을 일으켰다. 앙증맞은 방울들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귀족 나리의 접견실에는 단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모자를 끼고 손에는 코담뱃갑을 든 채 여러 개의 거울 사이를 지나 출구로 향했다.

    “악마에게나 떨어지라지!” 그가 마지막 문에서 걸음을 멈추고 성소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발에서 먼지를 털듯 손가락에서 코담배 가루를 털어내고는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예순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태도가 거만했으며, 얼굴이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다. 그리고 마치 가면을 쓴 듯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표정이 딱딱했다. 자세히 보면 그의 냉정한 인상은 입술과 눈매의 선에서 비롯되었다. 입가와 눈가의 선이 지나치게 가늘고 수평으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수려했고 한눈에 띄었다.

    그 얼굴의 주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안뜰에서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귀족 나리의 연회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줄곧 따로 떨어져 서 있었다. 귀족 나리가 그런 그를 좀 더 살갑게 대하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있다가 그가 말을 몰고 나설 때 평민들이 허둥지둥 흩어져 그의 말굽에 차이지 않으려 비켜서는 모습을 보며 묘한 만족을 느끼는 듯했다. 그의 마부는 마치 적에게 돌진하듯 마차를 몰았다. 그런 무모한 질주를 보고도 그의 얼굴과 입술은 평소처럼 태평하기만 했다.

    제아무리 귀와 입을 틀어막는 시대였다지만 이따금 항의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 적도 있었다. 인도도 없는 좁은 길에서 마차를 험하게 모는 귀족들의 야만적인 관습 탓에 일반 평민이 위험에 빠지거나 불구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두 번 생각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는 귀족은 거의 없었고, 비천한 사람들은 다른 사안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알아서 위험을 피할 도리밖에 없었다.

    마차는 요란하게 덜컹거리고 달그락거리면서 거리를 거침없이 질주하다가 모퉁이를 휩쓸 듯이 돌았다. 요즘 같으면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비인간적이고 배려없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달리는 마차에 치일까 봐 비명을 질렀고, 남자들은 서로 끌어당기거나 아이들을 와락 끌어안아서 길 밖으로 피신시켰다. 이윽고 분수 옆 길모퉁이를 급히 돌던 중 마차 바퀴 하나가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거기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사람들의 비명이 날카롭게 울렸고, 말들이 앞발을 쳐들었다가 뒷발을 쳐들었다가 하면서 요동쳤다.

    말들이 그렇게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마차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마차를 몰다가 사람이 다치든 말든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겁먹은 하인들이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고, 스무 개의 손이 말고삐를 잡아챘다.

    “뭐가 잘못된 건가?” 마차에 탄 고귀한 인물이 밖을 내다보며 침착하게 물었다.

    나이트캡을 쓴 키 큰 사내가 말발굽 사이에서 꾸러미 같은 것을 안아서 분수대 바닥에 내려놓고는 진흙탕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용서하십시오, 후작 나리!” 순종적인 얼굴에 누더기를 입은 남자가 납작 엎드려서 말했다.
    “어린애입니다.”
    “저자는 왜 시끄럽게 구는 거냐? 저자의 아이인가?”
    “송구합니다, 후작 나리. 안타깝게도 그러합니다.”

    길가에 가로세로 10에서 12미터쯤 되는 공터가 있었고, 그 바로 옆에 분수대가 있었다. 키 큰 사내가 진흙탕에서 일어나 마차를 향해 달려오자 후작이 재빨리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아이가 죽었습니다!” 키 큰 사내가 양팔을 머리 위로 쳐들고 후작을 응시하며 절망에 젖은 목소리로 거칠게 소리쳤다. “아이가 죽었어요!”

    사람들이 모여들어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간절함뿐 다른 감정은 배어 있지 않았다. 위협이나 분노의 기미도 배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 처음 비명이 터져 나온 뒤로는 모두 조용했다. 조금 전 엎드리고 말했던 순종적인 남자의 목소리는 고분고분하면서도 단조롭고 무기력했다. 후작이 사람들을 쓱 훑어보았다. 시궁창에서 기어 나온 쥐를 보듯 경멸하는 눈초리였다.

    이윽고 후작이 지갑을 꺼냈다.

    “정말 한심한 인간들이군.” 후작이 말했다. “네놈들은 어째서 제 몸뚱이도, 자식들도 건사할 줄 모르는 거냐? 이놈이나 저놈이나 허구한 날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기나 하고 말이야. 네놈들 때문에 내 말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가? 어이! 이걸 저자에게 갖다줘라.”

    후작은 하인 앞에 금화 한 닢을 던졌다. 사람들은 떨어지는 금화를 눈으로 쫓으면서 목을 앞으로 길게 뺐다. 키 큰 사내는 다시 한번 섬뜩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죽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재빨리 달려와서 키 큰 사내를 제지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남자에게 길을 내주었다. 불쌍한 사내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끼고 울부짖으면서 분수대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몇몇 여인들이 꾸러미처럼 아무 움직임이 없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그 주위를 천천히 오가고 있었다. 여인들도 남자들처럼 조용했다.

    “알아, 안다고.” 마지막에 온 남자가 말했다. “힘내게, 가스파르! 저 가엾은 아이는 사는 것보다 저렇게 죽는 게 나아. 고통 없이 한순간에 죽었으니까. 저 어린 것이 한 시간이라도 행복하게 살았겠는가?”

    “철학자 납시었군그래.”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뭔가?”
    “드파르주라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지?”
    “술장사를 합니다요, 후작 나리.”

    “어이, 술장수 겸 철학자.” 후작이 금화 한 닢을 더 던지며 드파르주에게 말했다. “그걸 주워 요긴하게 쓰게. 거기 말들은 어떤가? 아무 이상 없나?”

    후작은 더는 군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곧 떠날 채비를 했다. 어쩌다 실수로 하찮은 물건 하나를 깨뜨렸지만 그에 대해 배상한 만큼 홀가분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후작이 신사다운 분위기를 풍기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을 때, 금화 한 닢이 마차 안으로 날아들었다. 동전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서 그의 평온함을 흩뜨려 버렸다.

    “멈춰라!” 후작이 소리쳤다. “말을 멈춰! 누가 던졌느냐?”

    후작은 술장수 드파르주가 조금 전에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이를 잃은 가엾은 아버지가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엎드려 있었고, 그 옆에는 가무잡잡하고 건장한 여인이 뜨개질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후작이 말했다.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였고, 콧등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빼고는 표정 변화도 없었다. “어떤 놈이든 걸리기만 해봐라. 당장이라도 마차로 깔아뭉개 저세상으로 보내줄 테다. 어떤 놈이 동전을 던졌는지 나와보라고. 마차 바퀴로 짓이겨줄 테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작이 법을 넘나들며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누구 하나 고개를 쳐드는 사람도 없었다. 남자들은 더 그랬다. 그런데 뜨개질하며 서 있는 여인만은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후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빛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려 그녀에게 주목한다는 것은 후작의 위신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후작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와 그 주변의 쥐떼를 훑어보았다. 그러고선 다시금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큰 소리로 명령했다. “가자!”

    후작이 탄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른 마차들도 연이어 빠르게,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갔다. 장관, 정책 자문관, 징세 도급인, 의사, 변호사, 성직자 들이 마차를 타고 지나갔다. 그랜드 오페라와 희극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지나갔다. 마치 밝고 화려한 가장무도회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쥐들이 시궁창에서 기어 나와 한참 동안 마차 행렬을 구경했다. 군인과 경찰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이따금 시야를 가리곤 했는데, 그러면 쥐들은 그들 뒤에서 틈을 찾아 살금살금 움직이며 빼꼼히 내다보곤 했다. 아이 아버지는 이미 한참 전에 꾸러미를 가지고 자리를 떴다. 그 꾸러미 같은 아이가 분수대 바닥에 놓였을 때도 그것을 지켜주던 여인들은 이제 자리에 앉아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마차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에 뜨개질하며 서 있던 여인도 눈에 띄었는데, 그녀는 운명의 여신처럼 굳건한 자세로 계속해서 뜨개질하고 있었다.

    분수의 물이 흘렀고, 거센 강물이 흘렀고, 낮이 저녁으로 흘러갔다. 도시의 그토록 많은 생명이 규칙에 따라 죽음으로 흘러갔다. 언제나 그러했듯 시간과 흐르는 강물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쥐들은 다시 어두운 시궁창으로 기어들어가 서로 몸을 바짝 붙인 채 잠들었고, 무도회장은 화려한 만찬을 위해 불을 밝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제 갈 길을 찾아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