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AI가 이끄는 인지 혁명
 
지은이 : 박종성
출판사 : 이든서재
출판일 : 2026년 04월




  • 기초 과학의 심장부로 침투한 AI가 인류의 지적 탐험 규칙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노벨상이 공증한 과학 혁명의 생생한 기록을 통해 기술적 성찰과 윤리적 나침반을 제시한다. 기계가 스스로 답을 찾는 시대에 인간으로서 우리가 던져야 할 본질적인 질문의 출발점을 함께 확인해 보자.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의 여명

    인간 계산원에서 실리콘 두뇌로
    별을 세는 여인들: 실리콘 이전에 인간이 있었다
    천문학자가 행성의 궤도를 예측하거나 군인이 전쟁터에서 포탄이 떨어질 지점을 계산할 때, 그 복잡한 수식의 해답을 내놓은 것은 거대한 슈퍼컴퓨터가 아니었다. 연필과 종이 그리고 탁상용 계산기를 든 이들 ‘인간 계산원’들의 끈질긴 손끝에서 모든 데이터가 처리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인내심과 정교함이 요구되는 이 고된 노동의 현장을 지탱한 것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빛나는 장면은 19세기 후반, 미국 하버드 대학 천문대에서 펼쳐진다.

    당시 천문대장이었던 에드워드 피커링(Edward Pickering)은 밤하늘의 모든 별을 사진 건판(Glass Plate)에 담아 그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무모할 정도로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문제는 ‘데이터의 양’이었다. 매일 밤 망원경을 통해 찍어 낸 수십만 장의 무거운 유리 건판에는 수십만, 아니 수백만 개의 별이 깨알 같은 점으로 박혀 있었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눈으로 확인하고, 분류하고, 숫자로 정리하는 일은 오늘날의 ‘빅 데이터’ 처리를 수작업으로 하는 것과 같았다. 당시 천문대에 고용된 남성 조수들에게 이 일은 ‘과학자가 아니라 서기나 하는 일’이라며 기피하는, 너무나 지루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단순노동일 뿐이었다.

    불평과 태업이 이어지자 참다못한 피커링은 홧김에 이렇게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우리집 가사 도우미도 너희보다는 낫겠다!”

    이 말은 단순한 상사의 푸념으로 끝나지 않았다. 피커링은 정말로 자기 집에서 청소와 빨래를 하던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 가사 도우미, 윌리어미나 플레밍(Williamina Fleming)을 천문대로 데려왔다. 앞치마를 벗고 돋보기를 든 그녀는 곧 이 반복적이고 지루한 데이터 분석 작업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플레밍의 성공에 확신을 얻은 피커링은 이후 대담한 결단을 내린다. 재능 있고 꼼꼼한 여성들을 대거 고용해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전문 ‘컴퓨터’ 팀을 꾸린 것이다. 여기에는 냉철한 경제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당시 여성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시간당 25센트 수준으로, 남성 인건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피커링은 같은 예산으로 두 배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해 훨씬 더 꼼꼼하고 성실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가성비 최고의 데이터 공장’을 구축한 셈이다.

    규칙을 따르는 기계, 덴드랄의 꿈
    1950년대, 현대적인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Stored-program Computer)’ 즉 소프트웨어를 메모리에 저장해 두고 꺼내 쓰는 방식이 등장하면서, 과학계는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복잡한 계산을 수행할 강력한 새 도구를 얻었다. 하지만 초기 컴퓨터들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것들은 주로 미사일이 날아가는 탄도 궤적을 계산하거나, 원자 폭탄 폭발 시뮬레이션의 수치를 대입하는 것처럼, 이미 정해진 수학 공식을 인간보다 수만 배 빠르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슈퍼 계산기’에 불과했다. 

    그러던 1965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실에서 기계가 과학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야심 찬, 다소 엉뚱한 시도가 시작되었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조슈아 레더버그(Joshua Lederberg)와 인공지능 분야의 선구자 에드워드 파이겐바움(Edward Feigenbaum)이 의기투합하여,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최초의 인공지능 ‘덴드랄’ 프로젝트를 출범시킨 것이다.

    덴드랄의 목표는 명확했다. 유기화학자들이 ‘질량 분석기(Mass Spectrometer)’라는 장비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보고, 미지의 유기 분자 구조를 추론하는 과정을 자동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질량 분석 데이터’란 마치 ‘산산조각 난 도자기 파편’과 같다. 과학자들은 분자를 강제로 쪼개어 그 파편들의 무게를 잰 뒤, 그 정보만을 가지고 원래 도자기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역추적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고도의 추리력이 필요한 영역이다. 숙련된 화학자는 이 암호 같은 파편들을 보고 자신의 오랜 경험과 직관을 총동원해 “이 조각을 보니 벤젠 고리가 있었겠군”이라며 원래 분자의 모습을 그려 낸다.

    덴드랄은 바로 이 ‘숙련된 화학자의 머릿속’을 컴퓨터 코드로 그대로 옮기려는 시도였다.

    연구팀은 실제 화학자들을 찾아가 집요하게 인터뷰했다. 그들이 문제를 풀 때 어떤 규칙을 사용하는지, 어떤 직관을 발휘하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어 수백 가지의 ‘휴리스틱(Heuristics)’을 뽑아냈다. 휴리스틱이란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경험적으로 ‘대체로 맞다’고 여겨지는 ‘주먹구구식 법칙’ 혹은 ‘장인의 감’을 뜻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덴드랄은 특정 종류의 유기 분자에 대해서는 박사급 화학자만큼이나 정확하게 그리고 인간이 며칠 걸릴 일을 단 몇 초 만에 해치우는 속도로 구조를 추론해 냈다. 이는 컴퓨터가 단순히 숫자를 더하고 빼는 계산기를 넘어,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가지고 논리적 ‘추론(Reasoning)’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바야흐로 과학자가 자신의 고된 지적 노동 일부를 기계 파트너에게 위임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덴드랄도 명백하고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스승을 넘지 못하는 제자의 운명’이었다. 덴드랄은 프로그래머가 입력해 준 규칙의 총합, 그 울타리를 결코 넘어설 수 없었다. 덴드랄은 주어진 지식을 바탕으로 추론할 수는 있었지만, 데이터로부터 스스로 새로운 화학 법칙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규칙을 학습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인간 전문가가 미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유형의 분자가 나타나거나, 입력된 규칙에 어긋나는 예외 상황이 발생하면, 덴드랄은 바보처럼 멈춰 서거나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지식 공학(Knowledge Engineering)’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광부가 석탄을 캐내듯 공들여 채굴하고 정제해서 기계에 주입하는 방식이다. 덴드랄의 꿈은 인간 전문가를 완벽하게 복제하는 것이었지만, 그 꿈은 역설적으로 ‘인간 전문가가 아는 것’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다.

    과학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데이터 속에서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고, 이 울타리를 스스로 부수고 나갈 새로운 차원의 기계 지능이 필요했다. 

    데이터의 홍수와 새로운 과학의 지도
    과학 연구의 역사에서 컴퓨터의 역할이 조연에서 주연으로, 계산기에서 파트너로 격상된 결정적인 전환점은 1990년에 시작된 인류 최대의 생물학 프로젝트,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와 함께 찾아왔다. 13년에 걸쳐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유전 정보 전체, 즉 30억 쌍에 달하는 염기 서열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는 이 무모한 도전은 생물학판 ‘아폴로 계획’이라 불렸다.

    이 프로젝트가 과학계에 던진 충격은 생물학적 발견 그 이상이었다. 바로 ‘데이터의 폭발’이었다. 한 사람의 유전체 정보를 담은 원본 데이터의 크기는 200기가바이트에 달한다. 이는 오늘날 스마트폰 저장 용량과 비교하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으나, 플로피 디스크가 주된 저장 매체이던 1990년대에는 가늠하기 어려운 큰 숫자였다. 수십억 개의 조각으로 산산조각 난 염기 서열 데이터를 다시 조립하고, 그 안에서 유의미한 유전자를 찾아내는 일은 더 이상 인간의 눈과 손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이때부터 과학은 데이터와의 전쟁이 되었고, 컴퓨터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전우가 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은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의 전설적인 컴퓨터 과학자 짐 그레이(Jim Gray)는 과학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인류의 과학 발견의 역사를 네 단계의 진화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명쾌한 개념적 지도를 제시했다.

    제1 패러다임: 경험과학
    수천 년간 인류가 세상을 이해해 온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고대 천문학자들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그 위치를 점토판에 기록하거나, 다윈이 갈라파고스 군도를 돌며 핀치새의 부리 모양을 스케치하고 분류하던 활동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대의 과학은 인간의 오감을 총동원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말 그대로 ‘경험의 산물’이었다.

    제2 패러다임: 이론과학
    지난 수백 년간 근대 과학을 지배해 온 방식이다. 복잡한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어 수학적 모델로 정리하는 것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리한 뉴턴이나,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E=mc2이라는 짧은 수식으로 압축한 아인슈타인이 대표적이다. 소수의 우아한 원리로 방대한 우주를 설명하려는 이 접근은 인간 지성의 승리였다.

    제3 패러다임: 계산과학
    지난 수십 년간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열린 시대다. 이론만으로는 풀기에는 너무 복잡한 현상들, 예를 들어 수십 년 뒤의 기후 변화나 은하계의 충돌, 핵폭발 실험 같은 것들을 컴퓨터 속 가상 세계에서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이다. 현실에서 실험하기 어렵다면, 수식으로 만든 가상의 실험실에서 모의실험을 하면 된다. 과학자들은 실리콘 칩 안에서 태풍을 만들고 우주를 폭발시키며 미래를 예측했다.

    그리고 짐 그레이가 정의한 네 번째 시대,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제4 패러다임: 데이터집약적과학
    실험, 이론, 시뮬레이션의 과정을 통해 생성되는 데이터의 양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넘어서면서 도래한 시대다. 이제 과학적 발견은 막대한 데이터를 탐색하고, 그 안에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패턴과 지식을 찾아내는 능력에 의해 주도된다. 과거에는 과학자가 ‘이럴 것이다’라고 가설을 먼저 세우고 데이터를 모아 검증했다면, 제4 패러다임에서는 데이터가 먼저 말을 건다. 과학자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상관관계를 AI가 데이터의 바다에서 먼저 건져 올리고, 인간은 그것을 보고 새로운 가설을 역으로 만들어 낸다. 데이터는 이제 단순한 이론의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발견의 출발점이자 목적지가 된 것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이 제4 패러다임의 서막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 동력, 즉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엄칠 수 없는 방대한 데이터의 대양을 항해하며 보물을 찾아주는 엔진이 바로 ‘AI’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기계
    루프 속의 인간: 과학자의 역할 재정의
    고요하고 분주한 실험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의 한 실험실 창문에는 대낮처럼 환한 불이 켜져 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곳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연구원들은 이미 오래전 퇴근해 따뜻한 침대에서 잠들어 있다. 대신, 텅 빈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된 로봇 팔들이다. 녀석들은 마치 유령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처럼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선반에서 시약병들을 꺼내고, 하얀 가루를 마이크로그램 단위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계량해 작은 도가니에 담는다.

    실험실의 다른 한쪽에서는 자동화된 고성능 용광로가 자체 판단으로 조용히 온도를 높이고, 합성이 끝난 완성된 물질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엑스선 분석 장비로 옮겨진다. 모니터 화면 위로는 실험 결과 데이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기계는 이 데이터를 스스로 정리할 뿐만 아니라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실험을 위한 레시피와 계획을 실시간으로 수정하고 개선한다. 실험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분주하고 치열하게 돌아가지만, 그곳의 공기를 채우는 것은 인간의 말소리가 아닌, 냉각팬이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과 모터의 미세한 허밍(Humming)뿐이다.

    이 고요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분주한 풍경은 다가올 과학의 미래를 압축적,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과거에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영역들, 즉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 가설을 수립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정교하게 설계하며, 도출된 복잡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결론을 내리는 ‘과학적 발견’의 전 과정이 이제 인간의 손을 떠나 완벽하게 자동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동화된 발견의 거대한 교향곡 속에서, 그동안 지휘봉을 들었던 과학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밤새도록 지치지 않고 스스로 돌아가는 저 텅 빈 실험실의 풍경은, 마침내 인간이 필요 없어진 ‘과학의 종말’을 알리는 쓸쓸한 기념비일까, 아니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역할’의 서막을 알리는 웅장한 무대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AI가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로봇이 물리적 실험을 수행하는 이 시대에, 과학자의 역할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AI와 로봇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여 설 자리를 뺏는 경쟁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을 반복적이고 지루한 실험 노동과 데이터 처리의 늪에서 해방시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지적 활동으로 이끄는 강력한 ‘증강 도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의 종말에 관한 우울한 비가가 아니다. 이것은 과학자가 마침내 좁은 실험대와 피펫 앞에서 벗어나, 가장 인간다운 본연의 활동으로 되돌아가는 ‘회귀’이자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그 새로운 역할이란 바로 데이터 너머의 의미를 깊이 사유하고, 기존의 법칙을 뛰어넘는 대담한 상상을 펼치며, 기계는 결코 던질 수 없는 현명하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기술자’로서의 과학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사상가(Thinker)’로서의 과학자가 중앙 무대에 등장할 것이다.

    예술가에서 설계자로의 역할 변화
    그렇다면 과학자의 역할 꾸러미가 해체되고, 반복적이고 기술적인 업무들이 모두 기계에게 넘어간 텅 빈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기계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아니 오히려 기계 덕분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간만의 고유한 핵심 역량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피펫을 다루는 정교한 손놀림이나, 수백 개의 화학식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암기량이 아니다. 미래의 과학자를 정의하는 자질은 다음 네 가지의 근본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능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본질을 꿰뚫는 ‘위대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AI는 주어진 문제에 관한 가장 좋은 답을 찾아내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문제 중 ‘어떤 문제’가 지금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며, 도전할 가치가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지는 못한다. 본질적으로 AI는 입력된 데이터에 반응하는 강력한 ‘답변 기계’인 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 기계’다. 알츠하이머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보며 치료법을 찾겠다는 뜨거운 열망,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의 기원을 알고 싶어 하는 순수한 갈망 그리고 다가올 기후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은 모두 데이터가 아닌, 인간의 결핍과 감정 그리고 꿈에서 비롯된다. AI는 ‘어떻게(How)’를 해결해 줄 수는 있어도, ‘왜(Why)’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따라서 AI 시대에 과학적 성과의 수준은 도구의 성능이 아니라, 우리가 그 도구에게 얼마나 깊고, 독창적이며, 인류에게 시급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둘째, 발견 시스템을 창조하는 ‘창의적인 설계자’로서의 능력이다. 이제 화학자는 더 이상 실험실 구석에서 플라스크를 흔드는 ‘장인’이 아니다. 이들은 이제 발견 과정 전체를 조망하고 설계하는 ‘전략가’로 진화해야 한다. 이제 과학자의 위대함은 직접 실험 기구를 다루는 정교한 손끝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쉼 없이 쏟아 내는 ‘지능형 시스템’을 구상하는 두뇌에서 결정될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의 과학자들은 AI 모델 LLM에게 “완벽한 수학자가 되어 답을 내놓으라”고 단순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LLM이 가진 통제 불가능하고 엉뚱한 창의성을 마음껏 발산하게 두면서도, 거기서 나오는 오류는 알고리즘으로 완벽하게 걸러 내는 ‘펀서치’라는 우아하고 정교한 협업 시스템을 설계했다. 그들의 가장 창의적인 업적은 수학 문제의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답을 찾는 ‘새로운 방법론’을 발명한 데 있었다. 과학자는 이제 넓은 모래사장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바늘 하나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채집자가 아니라, 바늘 자체를 끊임없이 찍어 내는 공장의 설계자이자 생산자가 되어 가고 있다.

    셋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적인 연결자’로서의 능력이다. AI는 수만 편의 문헌 속에서 통계적인 유사성이나 숨겨진 단서들을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생물학의 원리를 건축에 적용하거나, 음악의 구조를 수학에 대입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분야의 이질적인 개념들을 직관적으로 연결하여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통섭’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구글의 AI 공학자가 보낸 이메일 한 통이 천문학자와 연결되어 외계 행성 발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역사적 사례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식의 고립된 섬들을 잇는 다리는 오직 인간만이 놓을 수 있다. 기계는 ‘상관관계’를 보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의미’를 본다. 따라서 미래의 과학자는 자신의 전공 지식에만 갇힌 존재가 아니라 AI 도구와 로봇 실험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혁신을 만들어 내는 ‘지적인 허브(Intellectual Hub)’가 되어야 한다.

    넷째, 기술의 폭주를 막고 방향을 제시하는 ‘윤리적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이다. AI와 자율 실험실이라는 강력한 도구는 인류에게 질병 정복과 에너지 문제 해결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지만, 동시에 생물학적 무기 제조나 편향된 데이터로 인한 차별 등 예측하지 못한 치명적인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다. AI가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에서 “이것을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과학자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이것을 윤리적으로 해야 하는가?”라고 되물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한다면, 어떤 원칙과 안전장치 아래에서 해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기술의 힘이 강해지고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힘의 방향을 인류의 공영과 번영을 위한 이로운 쪽으로 이끄는 인간의 지혜와 윤리적 판단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는 과학 연구의 전략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과거의 과학 연구는 하나의 정교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과 자본을 집중 투자하는 ‘고위험 단일 투자’ 모델과 같았다. 실패했을 때의 비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다. ‘AI 공동 과학자’는 단 며칠 만에 수백, 수천 개의 그럴듯한 가설 포트폴리오를 생성해 내고, ‘완전 무인 실험실’은 그것들을 믿을 수 없이 저렴하고 빠른 속도로 검증해 낸다. 과학 진보의 병목 구간이 ‘아이디어의 생성’에서 ‘아이디어 검증과 선택’으로 옮겨 가면서, 과학자의 역할은 마치 유망한 스타트업을 고르는 ‘벤처 캐피털리스트’와 유사해지고 있다. 수많은 가능성 목록 중 어떤 가설을 검정하는 데 한정된 자원을 집중 투자할지, 실패한 실험 결과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고 다음 연구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재구성할지를 결정하는 ‘전략적 자원 배분 능력’과 ‘안목’이 연구의 성패를 가르는 새로운 핵심 역량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