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전쟁으로 다시 읽는 한중일 세계사
 
지은이 : 이동민
출판사 : 갈매나무
출판일 : 2026년 04월




  • 동북아가 왜 여전히 충돌의 화약고로 불리는지, 임진왜란 이후 500년 한중일 관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복잡한 국제정세를 균형 있게 바라볼 안목을 건네고, 소모적 대립을 넘어 오늘의 현실을 더 입체적으로 읽어 보게 돕는다.



    동아시아 ‘천하’의 파열음, 임진왜란 이후

    세계 해양무역 네트워크, 한중일을 삼키다
    종주국 명나라-우방국 조선-변방 일본, 흔들리는 삼각 구도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후반 한중일의 지정학적 관계는 조선과 명나라가 ‘천하’라는 전근대적 관념 속에서 긴밀히 연결된 반면,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전국시대의 내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명나라의 ‘천하’는 기본적으로 해금 정책이라는 쇄국정책에 가까운 폐쇄적 체제였다. 16세기 중반부터 만리장성 북쪽 몽골의 위협이 심각해지면서, 명나라는 유라시아 내륙 방면의 안보에 전념하기 위해 해상무역은 물론 고기잡이까지 엄격히 규제했다. 몽골 방면에 군사 역량을 대부분 투입하면서 바다로 돌릴 자원과 여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관리하기 힘들어진 바다라는 영역을 사실상 차단한 조치였다. 이때 조선은 ‘천하’의 종주국 명나라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었다.

    - ‘천하’를 잠식하기 시작한 신대륙의 은
    16세기 중반 이후 일본을 포함한 ‘천하’에는 새로운 세력이 유입되었다. 동남아시아를 발판 삼아 건너온 에스파냐 무역상이었다. 바닷길을 따라 무역하러 온 그들을 통해 천하, 특히 명나라와 일본에는 진기한 서구 문물과 함께 신대륙의 은이 대거 유입되었다. 

    일본의 은은 에스파냐 무역상들의 교역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는 화폐이자 납세 수단으로 쓰였다. 에스파냐가 은으로 구축한 해상무역 네트워크가 동아시아까지 뻗어 온 가운데 명나라의 은 수요는 크게 늘었고, 그 과정에서 해상무역 네트워크에 편입된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도 눈에 띄게 강해져 갔다. 한 마디로 에스파냐발 은의 국제유통과 해상무역 네트워크가 조공 무역에 토대한 명나라 천하의 질서를 흔드는 가운데, 그러한 천하 속에서 주변부를 점유하던 일본이 해상무역 네트워크로 부를 축적하며 강력한 세력으로 대두한 것이었다.

    은과 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은 일본이 더 큰 수익을 가져다줄 무역의 확대를 열망한 것은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 순이었다. 문제는 천하의 종주국 명나라가 일본이 원하는 만큼 자유로운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일본은 불만이 생길 뿐 아니라, 안 되면 힘으로라도 무역 또는 밀수에 나서고자 하는 욕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전국시대라는 혼란기는 일단 막을 내렸다. 일본에는 이제 100년이 넘는 전쟁 속에서 단련될 대로 단련된 세계 최정예 수준의 지상군이 수십만 명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영토 확장과 전쟁만 바라보며 살아온 야심 가득한 다이묘, 즉 전쟁터에서 고위 장수 역할을 할 무사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배출할 통로가 필요해졌다.

    도요토미는 신대륙의 은 유입으로 촉발된 동아시아 천하의 지정학적 변화 속에서, 통일 이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끓어오른 군사적, 경제적 에너지를 어디로 분출했을까? 전란의 시대를 기회 삼아 하층민에서 최고 권력자로 전례 없는 출세를 한 그는, 이 시대적 도전에 외부 세계와의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응전했다. 명나라 정벌은 다소 허황해 보이긴 해도, 은 유입이 일본의 대명 무역 수요를 크게 자극했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명분을 바탕으로 전쟁계획을 세운 도요토미는, 지리적 위치의 특성상 일본과 중국을 잇는 교량이자 에스파냐 상인들과의 직접 접촉이 제한되었던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출병했다. 1592년, 이렇게 임진왜란의 막이 올랐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가 ‘천하’를 뒤집기까지
    1592년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그 해가 가기 전 한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조선 정복과 명나라 침공을 눈앞에 둔 듯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머지않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그리고 조선 의병의 대대적 반격에 직면해 고전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연파하며 해상보급로를 교란한 탓에, 전쟁을 지속할 힘에 큰 타격을 입는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이어진 끝에 도요토미가 사망한 1598년 일본의 패배, 즉 조선으로부터 완전 철수로 막을 내렸다.

    - 조선 땅을 바꾸어 놓은 왜란의 트라우마
    한편 임진왜란은 조선인의 마음속에 거대한 집단 트라우마를 남기는 동시에, 전무후무한 국난을 극복했다는 집단 정체성과 연대 의식도 심어주었다. 물론 조선의 승리에는 명군의 참전이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지만, 일본군과의 전투를 주도하며 그들을 격퇴한 주체는 엄연히 조선 관군과 승병을 포함한 의병이었다. 명군은 어디까지나 조선군을 도와 함께 싸운 ‘원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임진왜란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미증유의 국난을 일치단결해 극복했다는 집단 기억이 확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는 조선인들, 특히 유학자이자 지배층인 사대부 사이에 퍼져 있던 ‘세계는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천하이며 조선은 그에 속한 하나의 영역’이라는 세계관이, 한반도라는 독자적 영역을 향한 관심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임진왜란으로 재편된 한중일 스케일
    임진왜란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된 야망이 불러온 참극으로 여겨지지만, 보다 심층적 원인은 단순히 도요토미 개인의 야망을 넘어선 에스파냐발 은의 유입에 따른 동아시아 지정학적 질서의 변동과 균열에 있었다. 전쟁의 결과 또한 단순히 전쟁이나 전란의 끝 또는 옛 질서로의 회귀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근대 동아시아 ‘천하’를 뒤흔든 전쟁이 끝나면서, 명나라의 천하는 새로운 지정학적, 문화지리적 영역으로 변모할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제국의 각축장이 되다
    지리적 입지가 갈라놓은 19세기 한중일 근대화의 다중스케일
    아편전쟁 이후 한중일 세 영역은 서구 세력의 대대적인 진출과 침략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과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압도적 경제력, 기술력, 군사력을 얻은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는 산업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값싼 원료를 공급받고, 본국에서 생산한 공산품을 판매할 시장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 식민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미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에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한 서구 열강이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서구 열강의 침략은 주로 서쪽에서 이루어졌고,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충족할 자원과 이권을 원했다. 한중일은 서로 다른 지리적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었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접근성이 달랐고, 따라서 접근하는 관점과 방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지리적 입지조건 차이라는 제국주의 세계 스케일의 요인 및 환경은, 각국 내부의 정치적/지정학적 상황이라는 국가 스케일 요인 및 환경과 맞물리며 한중일 근대화의 양상과 성패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다. 한마디로 한중일 근대화의 성패는 다중스케일의 지리적 입지조건과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다.

    ‘잠자는 사자’에서 ‘동아시아의 환자’로 전락한 대륙
    - 서구 열강이 탐낸 남중국해와 만주
    제국주의 시대의 지정학적 질서는 서구 열강이 청나라에 간섭하고 침공할 이유를 더해 주었다. 19세기 중후반 서구 열강은 인도를 넘어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은 동남아시아로 침략의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중국의 중남부 해안지대는 남중국해를 통해 이 지역과 맞닿아 있어,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하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가 세력을 확대하던 인도차이나반도의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청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왕조와 조공책봉 외교관계를 맺어 온 지역이었다. 이로써 청나라와 서구 열강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운 흐름이 되었다.

    아편전쟁 이후에도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 사이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영국은 청나라에 무역 확대와 아편 합법화를 강요했고, 이는 제2차 아편전쟁(1856~60)으로 이어졌다. 한편 베트남을 침략해 차례로 보호령과 식민지로 편입하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명목상 그 종주국이던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청프전쟁(1884~85)이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모두 패배했다. 쇠락해 가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영향력을 유지하던 베트남마저 완전히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넘어가자, 청나라의 지정학적 가능성은 더 한층 위축되었다. 사실 청나라는 이미 18세기 말부터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내부 부패, 한족의 이반, 건륭제 시기의 무리한 대외 원정에 따른 재정난이 누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편전쟁과 이후 서구 열강과의 연이은 전쟁, 그리고 태평천국운동까지 겹치면서 몰락은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동의 매력 적은 땅에서 성취한 섬나라의 근대화와 산업화
    일본은 아시아 북동부에 위치한 섬나라다. 동남아시아나 중국에 비해 천연자원도 풍부하지 않았다. 물론 17~18세기에는 은이 풍부했다지만 19세기 무렵에는 일본의 은도 대부분 고갈되었다. 무엇보다 산업자본주의 경제에 전력을 기울이던 제국주의 열강 입장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고무, 석탄, 석유, 주석 등 산업에 필수적인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가 훨씬 매력적인 지역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막강했다 하더라도,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식민화하고 중국의 이권을 침탈하는 데는 시간과 인적, 물적 자원이 상당히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입장에서 일본은 침략의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 침략은 없는 성공적 서구화
    일본은 이처럼 제국주의 열강이라는 외세의 치명적 위협을 지리적 위치 덕분에 비껴갈 수 있었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에도막부라는 구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근대화를 가로막던 제도적, 문화적 장애물도 제거했다. 그 결과 일본은 1870년대 이후 빠른 속도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며,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근대 산업국가이자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서구 열강의 침투가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지리적 조건 속에서 추진된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는, 외적으로는 매우 빠른 성공을 거둔 듯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또 다른 한계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경제력과 국력의 성장에 비해 시민계급의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메이지유신은 애초에 오늘날 일본 야마구치현인 조슈와 오늘날 일본 가고시마현 서부인 사쓰마를 중심으로 하는 반에도막부 세력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왕정복고’였다. 이 때문에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서구 열강과 달리 시민계급의 충분한 성장을 가져오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정부 주도의 근대화와 산업화가 강력하게 추진되는 가운데 정격유착과 같은 부조리도 심각해졌고, 시민과 노동자 계급은 정치와 경제의 중심부에서 소외되어 갔다. 그러다 보니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거듭난 일본은 출발부터 다분히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체제와 문화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는 훗날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가 거대한 침략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요충지에서 버텼으나 막지 못한 한반도의 불평등조약
    19세기 조선의 지리적 입지조건은 청나라나 일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늦어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고, 동쪽으로는 일본 열도가 태평양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또한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마주하지도 않았다. 물론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황당선이라 불린 서양 선박이 한반도 근해와 해안지역에서 여러 차례 발견되었고, 이는 조선 조정과 지배층에게 서구 세력의 침략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서구 세력의 대규모 침략 행위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난 지 2년 뒤인 1875년, 조선의 군사 요지였던 강화도의 초지진과 영종도는 일본 해군의 측량선 운요호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파괴되었다. 운요호는 애초에 전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함선이 아니라 배수량 245톤에 불과한 소형 측량선이었고 탑승 병력도 20여 명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과 몇 년 전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침공까지 격퇴했던 강화도의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두 차례 양요로 이미 피해가 누적된 데다, 흥선대원군 하야 이후 강화도에 충분한 국방예산이 투입되지 못하면서 한성으로 바로 이어지는 수도방위의 거점인 강화도의 방어태세가 크게 약화된 점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탈냉전’과 ‘신냉전’으로 막오른 경제 전쟁
    한중일은 어떻게 탈냉전 경제 공동체가 되었나?
    냉전 시기 한중일은 ‘대한민국/일본 대 중국/북한’이라는 구도로 분단된 측면이 다분했다. 한국과 일본은 자본주의 세계이자 해양 세력인 미국의 전방 기지 역할을 했고, 대륙 국가 중국은 소련과 함께 공산권의 중심 국가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대립 구조 속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와 중국 간 교류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까지 중국을 ‘중공(중국공산당)’이라 부르고 타이완을 ‘자유중국’이라 칭할 정도로 두 체제에 대한 인식 차이가 컸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 냉전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중국은 점차 자본주의 세계와 접점을 넓혀 갔고, 그사이 한국과 일본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어 1980년대 이후 중국은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로 전환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중요한 축으로 부상한다. 이와 함께 냉전 시기 ‘대한민국/일본 대 중국/북한’이라는 구도로 분단되어 있던 한중일 스케일은 또다시 자본주의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는 새로운 지리적 스케일로 변화해 간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대립을 넘어 공생을 택한 이유
    - 일본, 냉전을 활용해 금융 선진국까지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경제 재건 기회를 박탈당할 위기에서 벗어나, 경제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획득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산업 시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과거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서 기술, 학문, 문화, 인적 자원 등을 이미 갖춘 덕분이었다. 1956년에는 인구가 9,000만 명을 넘어섰고, 높은 교육 수준의 노동력도 사회 전반에 축적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비교적 저렴한 유가는 석유를 생산하지 않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949년 미군정기에 확립된 ‘1달러=360엔’의 고정환율제는 환율 변동의 부담을 줄이며 무역 확대를 뒷받침했다. 일본 경제는 1955년부터 약 20년간 연평균 10퍼센트를 웃도는 초고속 성장을 이어 갔다. 1968년에는 서독을 제치고 자본주의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1964년 개통된 고속철도 신칸센은 일본 주요 지역을 빠르게 연결한다. 특히 도카이도 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은 태평양 연안의 경제벨트를 하나로 묶어 수출 중심 경제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같은 해 열린 제18회 도쿄 올림픽은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으로, 전후 일본 경제의 부활을 전 세계에 널리 각인했다.

    - 한국, 토건으로 일으킨 한강의 기적
    냉전 체제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냉전 질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단기간에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외부 조건 또한 제공했다. 한국이 공산화될 경우 자본주의 진영은 동아시아 대륙의 거점을 잃게 되는 만큼,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대규모 원조와 경제 지원을 쏟아붓는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빈곤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정권 안정은 물론 국가 체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50년대부터 교육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인력 양성에 힘쓴다. 이어 1960년 4.19 혁명으로 출범한 제2공화국은 환율정책을 정비해 무역 정상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을 추진한다. 당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이 수입대체 산업화에 집중하던 상황에서, 수출 중심 전략은 매우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제2공화국 시기에 정비된 환율정책은 무역 확대의 기반을 마련했고, 냉전 속에서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도 한국과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교육 수준이 높고 빈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한국 노동자들은 가격 경쟁력을 갖춘 상품을 생산하며 산업 발전과 무역 확대를 이끌었다. 1960년대 한국은 10년 사이 수출이 무려 26.1배 증가하며 신흥공업국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신냉전으로 다시 불거지는 갈등, 세 나라의 미래는?
    신냉전의 도래로 재편되는 동아시아 지정학 질서
    201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사이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히 팽창했다. 한편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는 냉전 종식 뒤 겪은 경제 혼란을 수습하고,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빠르게 회복했다. 이러한 변화는 ‘신냉전’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국면을 불러왔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그 패권에 도전하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신냉전은 글로벌 스케일은 물론 한중일 스케일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급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패권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일대일로 추진과 중국 기업의 세계적 팽창 등 경제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에 맞서 미국은 반도체 장비 등 첨단산업 핵심 품목의 대중 수출을 규제하고 무거운 관세를 부과하는 등 견제에 나서고 있다. 중국 또한 희토류를 전략 자원으로 활용하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미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지역을 일대일로 체제로 더욱 깊이 끌어들였다. 이러한 구조적 충돌은 결국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조지아 침공(2008)과 크림반도 병합(2014)에 이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속하며 미국과 서방에 맞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적 협력은 더욱 긴밀해졌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도 러시아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하며 중국 및 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했다. 그 결과 한중일 지역 질서는 다시금 ‘중국/북한 대 대한민국/일본’이라는 대립 구도로 변모하는 모양새다.

    - 신냉전 체제 아래서 한중일의 미래는?
    한중일 스케일은 오래전부터 긴밀한 교류 속에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그러나 동시에 한중일 스케일의 정세 변화와 힘의 재편은 임진왜란,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와 중국 침략,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한중일 스케일도 새로운 전환의 문턱에 서 있다. 신냉전 체제의 부상과 신자유주의 질서의 위기라는 글로벌 변화 속에서 한중일 관계는 다시 한번 중대한 갈림길에 놓였다. 이러한 변화가 과거처럼 비극과 충돌로 이어질지, 아니면 평화적 방식으로 넘어설 수 있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그 방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과 대응에 달려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중일이라는 스케일이 형성되어 온 과정과 그 지리적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단순한 교양이나 지식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생존 및 발전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신냉전 속에서 한중일 스케일이 직접 포섭된 새로운 지정학적 질서는 이 지역에 대한 더욱 깊고 입체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한중일 스케일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살피는 일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중일이라는 지리적 스케일과 그 안의 문제들은 다양한 역사지리적/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해 왔다. 최근 경쟁의 심화, 신자유주의의 한계, 신냉전 체제의 등장이라는 현실적 악재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교류와 상호이해의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합적인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 위에서 소모적 대립과 극단적 갈등을 넘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질서를 모색할 때다. 이 책이 그러한 성찰을 제공하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