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연결하는 최소한의 양자역학
 
지은이 : 김상협 (지은이)
출판사 : 지상의책
출판일 : 2026년 03월




  •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이 어떻게 과학과 기술의 혁신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보자. 태양 빛, 식물, 별, 철새처럼 멀어 보이는 장면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연결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양자역학이 우리의 일상과 미래 기술을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도 함께 짚어볼 수 있다.



    과학을 연결하는 최소한의 양자역학


    검은 선의 정체를 밝혀라! - 빛 속을 헤엄치는 양자역학
    분광학의 해결하지 못한 질문
    사라진 색과 우주의 비밀
    1802년 런던, 구름이 낮게 드리운 오후. 잠시 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비칩니다. 빛은 낡은 실험실의 좁은 창문을 통과해서 유리 프리즘에 부딪혔습니다. 순간, 빛은 여러 색으로 갈라지며 테이블 위를 무지갯빛으로 물들였습니다. 이 실험을 하고 있던 사람은 영국 왕립학회 회원인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입니다. 그는 의사이자 화학자였고, 빛과 시각에 관심이 깊은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프리즘 앞에 좁은 틈인 슬릿을 두어 빛을 한 줄로 통과시켰습니다. 빛의 띠는 더 선명해졌지만, 그는 그 안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붉은색과 노란색 사이, 초록과 파란색 사이에 가느다란 검은 선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빛이 약해진 부분이 아니라, 빛이 완전히 사라진 어둠의 선이었습니다.

    울러스턴은 프리즘을 돌려 보고, 유리를 바꾸고, 빛의 방향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검은 선들은 항상 같은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위치를 종이에 스케치하며 ‘스펙트럼의 자연스러운 경계선’이라 적었습니다. 그는 편리하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쉬운 해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죠.

    그로부터 몇 해 뒤, 독일 바이에른의 한 유리 공장. 열두 살 소년 요제프 프라운호퍼는 깨진 유리구슬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부모를 여읜 그는 먹고살기 위해 유리 깎는 일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힘들다며 불평할 때, 프라운호퍼는 빛이 유리를 통과하며 보여 주는 색의 변화에 매료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숙련된 렌즈 기술자가 되었고, 점점 더 정밀한 광학 기기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꿈은 가장 정밀한 망원경 렌즈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좋은 렌즈란 단순히 깨끗한 유리가 아니라, 빛이 통과할 때 왜곡되지 않는 유리를 말했죠. 빛은 색마다 굴절되는 정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퍼지듯, 렌즈에서도 색이 번져 보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빛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완전히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는 수없이 실험했습니다. 태양 빛을 슬릿에 통과시키고, 직접 만든 회절격자를 이용해 빛을 정밀하게 분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도 그것을 보았습니다.

    무지갯빛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가느다란 검은 선들. 칼로 도려낸 듯한 날카로운 어둠의 실선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10개, 30개, 50개, 100개, 결국 그는 570개가 넘는 어두운 선들이 스펙트럼 곳곳에 박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프라운호퍼는 실험을 반복하며 선들의 위치를 정확히 기록했습니다. 알파벳을 붙여 A, B, C, D1, D2... 등으로 하나하나 표시했습니다. 이 선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시간대가 달라져도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햇빛 속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특정 파장의 결핍, 즉 사라진 색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확신했습니다. 햇빛에는 우리가 아직 해독하지 못한 정보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행히 울러스턴과 다르게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습니다. 그가 남긴 선들은 훗날 ‘프라운호퍼선’이라 불리게 됩니다. 프라운호퍼의 연구는 높은 성벽을 돌아 성을 열 수 있는 문 앞에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문 앞에서 멈췄습니다. 그는 과학자가 아닌 유리 장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문을 열 물리학의 열쇠가 없었습니다. 즉 빛의 근원을 해석할 이론적 기반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밀한 기록 덕분에, 후대 과학자들은 우주의 비밀을 읽을 수 있는 빛의 사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185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조용한 연구실 안에서 알코올램프의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로베르트 분젠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금속 막대를 불꽃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금속 막대에 묻은 원소는 타면서 특별한 색의 불꽃을 냈습니다. 분젠은 그 빛으로 원소의 정체를 알아내는 법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옆에서는 물리학자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회절격자를 조정하며 불꽃에서 나오는 빛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원소마다 색이 달랐고 같은 원소는 항상 같은 색깔로 빛났습니다. 실험은 단순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트륨을 불꽃에 넣었습니다. 선명한 노란색 불꽃이 타올랐고, 키르히호프는 그 빛을 분광기로 분석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스펙트럼 위에서 선명한 노란색 선 하나를 보았습니다.

    “이건 태양 스펙트럼에서 검게 보였던 바로 그 자리잖아!”

    키르히호프는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수십 번을 관찰했지만 50년 전 프라운호퍼의 검은색 빈칸과 이 실험을 연결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분젠은 망설였습니다. 태양과 나트륨은 관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죠. 키르히호프는 혹시 몰라 다른 원소로 실험을 반복했습니다. 칼륨, 스트론튬, 칼슘... 원소마다 불꽃의 색이 달랐고, 그 색을 분해한 스펙트럼은 모두 고유한 선의 패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놀랍게도 태양 스펙트럼의 검은 선들과 퍼즐처럼 정확히 겹쳤습니다. 키르히호프는 태양에서 만들어진 연속 스펙트럼 가운데 일부가 나트륨에 가려지거나 흡수되어 검은색 빈칸이 나타난 것이라고 결론 냈습니다. 그리고 태양에는 나트륨 성분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죠. 그는 이 결과를 해석할 한 가지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특정 원소는 고유한 색의 빛을 방출하기도 하고, 그 빛만 흡수할 수도 있다.”

    즉, 나트륨이 불타면 노란 D선을 방출하지만, 반대로 나트륨이 포함된 기체는 그 노란 D선의 빛만 흡수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키르히호프 복사 법칙(Kirchhof’s law of thermal radiation)의 시작입니다. 태양에 직접 가지 않고도 태양에 나트륨 성분이 있다고 예상했듯이, 별에서 오는 빛을 분석해서 별의 구성 성분을 알아내는 방법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이 연구는 오늘날 천체분광학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그들은 다음 해에 ‘화학 원소의 스펙트럼과 태양 스펙트럼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분광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프라운호퍼선 x 양자 도약 
    원자의 진짜 모습을 밝히다
    “원자는 대체 왜 특정 파장만 골라서 흡수할까?”
    원자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는 답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원자를 더는 쪼갤 수 없는 단단한 알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1897년, 조지프 존 톰슨이 진공관에 전류를 흘려 보내는 실험을 하다가 음전하를 띤 아주 작은 입자를 발견했습니다. 전자였습니다. 이 발견은 원자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걸 의미했죠. 원자 안에 음전하를 띤 부품이 있다면, 원자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덩어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세기 초,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이 문제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원자 내부를 직접 볼 수 없으니 알파입자를 쏴서 반응을 보기로 했죠. 이것이 바로 가이거, 마르스덴과 함께 1909년에 시작한 금박 실험입니다. 그는 금을 종이처럼 얇게 펴서 여기에 알파입자를 쏘고, 입자들이 어디로 튀는지 측정했습니다.

    대부분은 예상대로 통과했지만, 몇몇 입자들은 30도, 60도, 심지어 180도로 완전히 튕겨 나왔습니다. 러더퍼드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죠.

    “얇은 티슈에 포탄을 쐈는데 되튕겨 나오는 것 같았다.”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원자 중심에 아주 작고 단단한 양전하 덩어리가 있다는 것. 바로 원자핵입니다. 러더퍼드는 이에 더해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원자 내부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대략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전자가 에너지 계단을 오르내릴 때
    1900년대 초, 과학은 새로운 문턱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자꾸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원자의 구조였습니다.

    당시 실험물리학은 이미 여러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1900년, 막스 플랑크는 흑체복사 문제를 풀기 위해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작은 덩어리(양자)로 흡수되고 방출된다는 가설을 내놨습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이를 광전 효과에 적용해 빛도 입자성을 가진다는 해석을 제시했죠.

    보어는 이 개념을 원자에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전자는 아무 궤도나 돌지 못하고, 정해진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

    보어의 모형을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건물에 계단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1층, 2층, 3층에 서 있을 수는 있지만 1.5층이나 2.3층 같은 중간 높이에는 절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계단이 거기 없으니까요. 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한 에너지 궤도만 허용되고, 궤도와 궤도 사이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어떻게 될까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높은 층을 오르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어디서 얻을까요? 바로 빛입니다. 전자가 빛을 흡수하면 에너지를 얻어 더 높은 궤도로 도약합니다. 반대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때는 높이 차이만큼의 에너지를 빛으로 내보냅니다.

    이것이 보어가 도입한 양자 도약(quantum jump) 개념입니다. 전자는 궤도에 머물러 있을 때는 에너지를 내지 않습니다. 오직 궤도 사이를 이동할 때만 빛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그 빛의 에너지는 정확히 두 궤도 사이의 에너지 차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나옵니다. 궤도가 정해져 있다면, 궤도 사이의 에너지 차이도 정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전자가 내뿜거나 흡수하는 빛의 에너지도 정해진 값만 가능합니다. 연속적인 무지개가 아니라, 특정한 색깔만 나타나는 거죠. 바로 선 스펙트럼입니다.

    보어는 이 모델을 수소 원자에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계산해 봤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의 식은 수소의 선 스펙트럼 관측값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실험으로 측정되어 온 수소의 방출선들(라이먼 계열, 발머 계열, 파센 계열) 이 수학적으로 정확히 예측되었습니다.

    - 빛을 흡수한 순간의 기록
    보어의 이론으로 드디어 프라운호퍼선의 진짜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태양 빛의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가느다란 어두운 선들. 프라운호퍼가 기록한 그 수많은 검은 틈은 태양 표면에서 방출된 연속적인 빛이 태양 대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대기 속 원소들이 특정 파장의 빛을 흡수했기 때문이죠.

    그 특정 파장이란 바로 원자의 전자들이 낮은 에너지 궤도에서 높은 에너지 궤도로 옮겨 갈 때 필요한 에너지였습니다. 즉, 프라운호퍼선은 태양 대기 속 전자가 빛을 흡수한 순간을 보여주는 자연의 기록지였던 셈입니다.

    보어의 이론은 프라운호퍼선과 각 원소의 고유 스펙트럼이 결국 원자 내부의 전자 에너지 준위 차이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해 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태양 빛에 검은 선이 왜 있는지, 그 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죠.

    그런 의미에서 보어의 모형은 혁명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연속의 세상에 불연속의 규칙을 도입했습니다. 전자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허용된 에너지의 ‘층(level)’ 위에만 존재할 수 있고, 층과 층 사이를 도약할 때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합니다. 이 개념은 이후 양자역학이 발전하면서 더 정교한 이론으로 대체되지만, 양자화된 에너지 상태라는 핵심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


    고리 속에 갇힌 진실은? - 분자를 얽는 양자역학
    기술을 혁신하는 양자역학
    추상적 이론에서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여러분의 스마트폰에는 수천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을 겁니다. 가족사진, 연인과의 사진, 친구들과의 추억까지. 그런데 잠깐, 이런 걱정을 한 적이 있나요? ‘휴대폰 전원이 꺼지면 사진이 지워지지 않을까? 휴대폰의 사진은 분명 전기를 이용해서 저장될 텐데 배터리를 완전히 빼 버리면 지워지는 것 아니야?’

    다행히도 우리는 전원을 차단해도 휴대폰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여러분의 사진을 지켜 주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 몰랐을거예요. 비결은 양자역학의 가장 신기한 현상 가운데 하나인 ‘양자 터널링(quantum tunneling)’에 있습니다.

    언덕 아래에 있는 공을 생각해 봅시다. 공이 언덕을 넘어가려면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갈 만큼 큰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중간까지 갔다가 다시 굴러 내려오겠죠. 언덕이 공에 ‘장벽’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퍼텐셜 장벽(potential barrier)’이라고 부릅니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규칙이 간단합니다. 장벽을 넘으려면 반드시 장벽 높이보다 큰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절대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확률 0퍼센트입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다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전자는 파동의 성질을 갖습니다. 그래서 장벽을 만나면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을 풀어 보면 전자의 파동이 장벽 속으로 살짝 스며들거든요. 만약 장벽이 충분히 얇다면? 파동의 일부가 장벽을 완전히 통과해서 반대편까지 퍼져 나갑니다. 그 결과, 에너지가 부족한 전자가 장벽 너머에서 발견될 작은 확률이 생겨요. 이 현상을 양자 터널링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전자가 터널을 뚫고 나온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전자의 파동이 장벽 너머로 이어진 거죠.

    - 플래시 메모리와 양자 터널링
    1927년, 독일의 물리학자 프리드리히 훈트가 파동이 장벽을 통과할 가능성을 처음 제시했습니다. 소련 출신 물리학자 조지 가모프는 1928년 이 아이디어를 핵물리학에 적용해서 오랜 수수께끼를 풀었습니다.

    알파입자는 원자핵 속에 강한 핵력으로 꽉 붙잡혀 있습니다. 마치 강한 자석에 끌어당겨지는 것처럼 강한 힘으로 붙들려 있죠. 고전 물리학에서는 이 알파입자의 에너지가 핵력을 이기지 못하므로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알파입자의 파동이 원자핵의 장벽 바깥까지 스며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드물지만, 알파입자가 원자핵을 뚫고 나와 방출되곤 하는 거죠.

    가모프는 이 원리를 이용해 방사성 원소들의 반감기를 계산했는데, 실험 결과와 놀랍도록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터널링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 된 겁니다.

    양자 터널링은 일상과 상관없어 보이는 핵물리학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 속에서도 매 순간 일어나고 있거든요. 바로 플래시 메모리가 전자의 터널링 현상을 이용해 데이터를 기록하는 부품입니다. USB 메모리, SD 카드, 스마트폰 저장 공간 모두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하죠. 이 메모리의 특별한 점은 전원을 꺼도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플래시 메모리 안에는 아주 아주 얇은 절연막으로 둘러싸인 ‘플로팅 게이트(floating gate)’라는 작은 방이 있습니다. 이 방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습니다. 고전 물리학에 따르면 전자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죠.

    데이터를 저장할 때 우리는 전압을 걸어 줍니다. 그러면 전자가 에너지를 얻어 절연막이라는 장벽을 터널링으로 통과해 플로팅 게이트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자가 들어가면 그 셀은 ‘1’로 기록됩니다. 반대로 데이터를 지울 때는 전압을 반대 방향으로 걸어 줍니다. 그러면 전자가 터널링을 거쳐 빠져나가고, 그 셀은 ‘0’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전자가 장벽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파동의 성질 때문에 장벽을 ‘통과’한다는 점이죠. 절연막이 수 나노미터로 매우 얇기 때문에 터널링이 가능하고, 덕분에 플래시 메모리는 매우 빠르게 데이터를 저장하고 꺼냅니다. 전원을 끄면 어떻게 될까요? 전압이 걸리지 않으면 전자가 절연막을 넘어갈 에너지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자는 그대로 플로팅 게이트 안에 갇힌 채로 남습니다. 이 원리 덕분에 우리는 배터리가 없는 USB 메모리에도 데이터를 오래도록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겁니다.

    - 터널링의 양면성
    터널링은 아주 신기하고 유용한 현상이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반도체 소자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원하지 않은 터널링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마이크로칩의 회로 간격이 너무 좁아지면 전자가 원래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새어 나갑니다. 마치 물이 새는 수도관처럼요. 그러면 오류가 생깁니다. 이 때문에 반도체를 무한정 작게 만들 수 없습니다. 터널링 현상이 갖는 한계가 더 작고 촘촘한 회로를 설계하는 데 제약을 주는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플래시 메모리를 가능하게 만든 터널링은, 동시에 반도체 기술 발전의 물리적 한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