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어령이 아닌 강의실에서의 모습, 사유하고 질문하며 끊임없이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던 한 ‘선생’의 얼굴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어령은 전쟁과 식민지라는 격변의 시대를 통과하며,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가르쳐야 했던 세대를 살았다. 강의록을 만들며 학문을 구축해 나갔던 그의 여정은, 곧 한국 현대문학의 지난한 형성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강의와 사유의 흔적을 제자들의 증언과 기억을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단일 저자의 서술이 아닌 이어령의 강의를 직접 경험한 제자들과 동료 학자들의 다양한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한 지식인의 강의와 사유를 통해 한국 문학과 지성사의 한 단면을 복원하는 작업이자, 아직 시작에 불과한 ‘이어령 연구’의 출발점이다.
■ 엮은이 강인숙
엮은이 강인숙은 1933년생으로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이자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동기 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하였으며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논문집 ‘자연주의 문학론 1, 2’,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 등이 있으며, 문화기행집 ‘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 ‘이집트 문화기행’, 자전적 에세이 ‘글로 지은 집’, ‘만남’, ‘성안집 사람들’, ‘나는 글과 오래 논다’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머리말-강인숙
프롤로그
-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김정운
- 대립과 통합의 시학-김치수
경기고등학교의 기억
- ‘화전민’의 달변과 침묵-김화영
- 던져진 존재들의 만남-주광일
서울대 강사 이어령
- 마로니에 잎이 푸르르던 시절-오세영
이화여대 교수 이어령
- 큰 스승 이어령의 발자취-김현자
- 독수리, 날개를 펴다-김혜니
- 나의 지적 호기심은 잠들지 않는다-이수자
- 분석 비평가 이어령-김옥순
- 50년 전의 기억을 연다-신선희
- 마지막 노트-나정순
- 도쿄에서 온 편지-한정희
- 능소화는 피고 지고-유인순
에필로그
- 강의실에서 본 교수 이어령 촌평
부록
- 이어령 대학원 강의의 주제와 항목
- 이어령 강의와 강의 노트 목록
- 이어령 평론, 논문 목록
- 이어령 교육 경력
강의실에서 사유하고 질문하며 텍스트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던 한 선생의 얼굴을 복원한다. 전쟁과 식민지라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 형성된 강의와 사유의 흔적을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내며 한국 문학과 지성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강단에서 만나는 이어령
프롤로그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김정운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를 만나도, 속으로 ‘그 정도 생각은 나도 한다’며 항상 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고 나면 열등감에 풀이 죽는다. 팔십 노인에게 당할 재간이 도무지 없다. 매번 좌절이다. 도대체 그런 새로운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어령은 아주 단순하다고 했다. 그는 기호학적 개념인 ‘선택(paradigmatic)’과 ‘결합(syntagmatic)’의 구조를 설명했다.
음악을 작곡할 때, 작곡가는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고, 이어지는 음 또한 7음 중에서 또 하나를 뽑는다. 처음에 ‘레’를 뽑았다면, 다음에는 ‘솔’을 뽑고, 그 다음에는 ‘도’를 뽑는 식으로 멜로디를 만들어나간다. 이때 각각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는 것은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뽑힌 각각의 음들을 이어가는 것은 ‘결합’이다. 음악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려면 현존하는 음악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즉, 각각의 음들이 어떻게 선택되었고, 왜 그러한 순서로 결합되었는가를 의심해보면 된다는 말이다. 바흐의 대위법,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은 모두 그런 식으로 창조된 것이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주어, 술어, 목적어 등으로 구성되는 문장의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동시에 주어, 술어, 목적어가 선택된 각각의 맥락에서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고민한다는 말이다. 이어령은 이 과정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한다.
이어령은 자신의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의 핵심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의 ‘전’자는 책을 받들고 있는 모양을 상징화한 것이다. 다들 책, 즉 텍스트를 받들고만 있을 때, 자신은 이 텍스트를 해체하는 일부터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로 납득이 안 되면 일단 들이받았다. 텍스트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는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적 사고는 이해 안 되는 것을 묻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런 자신의 태도가 뭐 그리 특별하냐고 되묻는다.
경기고등학교의 기억
던져진 존재들의 만남-주광일
“이 방에 주광일이 있느냐?”
1959년 4월 어느 날, 봄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미 문학평론가로 명성이 높았던 이어령 선생님이 경기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부임하셨다. 그런데 그분은 교실마다 돌아다니며 한 학생을 찾고 계셨다.
“이 방에 주광일이 있느냐?”
우리 2학년 9반 교실 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오셨을 때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든 학생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하며 일어선 나를 보시더니, 칠판 옆 게시판에 붙어 있는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고교판의 창간호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여기에 주광일의 시가 있는데, 이게 참 고등학교 놈이 쓴 것으로는, 좋은 시다.”
그때, 교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경기중학교 3년을 나온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아직 학교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촌놈’이었는데,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문예반실에서의 나날들
그날부터 이어령 선생님과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1년간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하시며 문예반 지도를 맡으셨다. 방과 후면 어김없이 문예반실로 내려와 우리들을 가르치셨다. 문학 이야기부터 인생론까지,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17세 소년에게는 영원히 가슴에 간직해야 할 잠언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료 조교같은 노릇을 했다. 선생님은 내게 온갖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그것마저 영광스러웠다. 1959년 여름인지 가을인지, 선생님이 ‘저항의 문학’이라는 평론집을 내셨을 때는 선생님의 분부에 따라 판매하는 일까지 맡았다. 참으로 열심히 책을 팔아드렸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내 평생 최초이자 최후의 장사꾼 노릇을 한 셈이었다. 그 결과 나는 1959년 10월 23일 이선생님과 강인숙 사모님 내외분의 결혼 1주년 기념 저녁 식사에 유일하게 초청받는 영광을 얻었다. 그 당시 종각 맞은 편에 있었던 신신 아케이드의 어느 양식 식당에서였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써 보았기 때문에,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추억으로 내 가슴에 남게 되었다.
나의 운명을 바꾸려 했던 스승
1년을 함께 지내며 선생님은 나의 장래에 깊은 관심을 보이셨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신 선생님은 내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권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선생님은 나를 단순한 제자가 아닌, 문학의 후계자로 보셨다.
“너의 재능을 법대 같은데 묻어두지 말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에 들어가서 문학 공부를 하고 시인이 되고 문인이 되라.”
참으로 지엄한 분부이었다. 그 말씀이 나를 설레게 했다. 어린 날의 나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간곡한 권유에 그때는 “예,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던 연유이다. 그러나 고3 말기에 대학 입시를 위하여 학과를 선택하여야 하는 순간이 닥치자, 내 속마음은 복잡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법대 입학이 더 어려웠고, 법대에 가면 장래가 더 안정적일 것 같았다. 가난했던 17세 소년에게는 현실적 고려가 더 절실했던 것이다.
평생에 걸친 애정 어린 핀잔
그 후 내가 검사가 되고 검사장, 고등검사장이 되어서도, 선생님을 뵐 때마다 들어야 했던 말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 서면 으레 하시는 말씀이었다.
“이 주광일의 검사장 벼슬은 높아도, 누가 알아줘...... 내 말을 들었더라면 천하가 다 아는 주광일 시인이 되었을 텐데!”
때로는 농담처럼, 때로는 진심을 담아 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죄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나를 아껴주신다는 따뜻함을 느꼈다.
던져진 존재들의 숙명
하이데거가 말한 ‘던져진 존재(Geworfenheit)’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본다. 1959년 봄 경기고등학교 2학년 9반 교실에서 만난 선생님과 나도 시공간에 던져진 존재들의 우연한 만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만남이 우연이었다 해도, 그 이후 66년간 이어진 인연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7세 소년에게 문학의 길을 제시해주신 것, 평생에 걸쳐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신 것,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를 격려해주신 것. 이 모든 것은 스승의 깊고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원하셨던 시인의 길을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걷지는 못했다. 하지만 검사로서의 길을 걸으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에는 선생님께서 심어주신 문학의 씨앗이 있었다. 그 씨앗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세월이 흘러 공직 생활 36년 만에 늦깎이 야인이 되어서야 다시 싹을 틔웠다.
검사로서 공소장이나 불기소장을 쓸 때도, 변호사로서 준비서면 또는 답변서를 쓸 때도,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정확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젊은 시절부터 문학을 생업으로 하지 않은 제자가 스승께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고 생각했다.
이화여대 교수 이어령
큰 스승 이어령의 발자취-김현자
지식의 욕망을 일깨운 정신 항로의 안내자
이어령 선생님은 동시대 사람들보다 10년 쯤, 아니 한 세대 30년 쯤을 늘 앞서가는 화두를 던졌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장 먼저 홀로 걸은 거인의 고독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은 수업 시간이나 강연 시 약간 하이톤의 고성으로, 때로는 금속성의 고음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은 새와 물고기, 종이비행기와 바람개비를 사랑하셨다. 특히 앉아 있는 새가 아니라 땅을 박차고 나는 새, 헤엄치는 물고기가 아니라 상류를 향하여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그저 뜨는 헬기가 아니라 역동의 양력으로 높이 나는 비행기의 창조적 상상력을 강조하셨다. 또 오방색 보자기, 쌈지공원, 가위 바위 보, 청산별곡과 보들레르에 대해 즐겨 말씀하셨다. 이대 학관 앞 십자로의 사루비아 꽃, 이상과 서정주, 그리고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선생님은 돌아가셨어도 우리는 여전히 선생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는 너의 네가 되어라”
“훌륭한 상상력을 지닌 창조적 인간이 되어라”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온리 원’이 되어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그리고 특별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신 선생님,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까지도 서재에서 부축을 받으시며 책을 정리하던 모습,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 선생님 혼자 먼저 재빠르게 후루룩 한 입 하시고 나서 눈빛을 반짝이며 새로운 화두를 펼치시는 바람에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메모하느라 바빴던 기억, 제자들에게 장난스런 얘기 슬쩍 건네시고 소년같이 즐겁게 웃던 모습, 그 모습을 그립고 아프게 기억한다.
수업을 통한 지적 자극과 도전의식
부임 초기에 선생님은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 수사학’, ‘문학연구방법론’, ‘문예사조사’, ‘현대문학강독’ 등의 전공 수업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수업은 3대 명강의로 꼽힐 만큼 최고 인기였다. 강의 내용은 새롭고 창의적이어서 늘 지적 자극과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강의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수업 시간은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했고 가르치는 사람과 수업 받는 사람 사이의 감동적인 교감으로 큰 울림을 주었다.
“작품이, 시의 구절이 읽는 사람에게 왜 감동을 주는가. 그냥 ‘좋다’, ‘아름답다’, ‘공감을 준다’가 아니라 그 미감을 논리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학문이 된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물 샐 틈 없이 빈틈없는 논리로 텍스트를 분석했다. 때로 메마르고 건조하기 쉬운 논리에 특유의 감성과, 유머, 위트로 수업 분위기에 윤기를 더했다.
선생님은 대학원 수업을 매 학기 새로운 방법론으로 강의하셨다. 그 시절 수강생들은 현대문학 전공자들은 물론 고전문학, 국어학 전공, 영문과, 불문과, 철학과 대학원생들까지, 소속된 과나 장르, 대학을 넘나들며 수업을 들었다. 목마른 제자들은 스승의 우물에서 신선한 물을 길어 올리며 지적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진실로 한 주일 내내 기다려지는 수업 시간이었다. 그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장 앞서가는 첨단의 이론들을 매번 새롭게 준비하면서 때때로 선생님도 그 고달픔을 토로하기도 하셨다. 밤을 새우셨는지 수업에서 뵙는 선생님의 눈은 자주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상태였다.
1995년 석좌교수로 돌아와서는 강의의 범주가 문화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문화의 뉴패러다임’, ‘한국인과 정보사회’, ‘문학과 기호학’ 등의 수업은 전교생의 가장 인기 있는 교양과목으로 꼽히면서 시대를 앞서가는 최첨단의 화두를 제시했다. ‘한국인과 정보사회’ 수업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상황과 전망, 한국문학에 나타난 의식의 특성 등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2000년, 2001년의 강의록을 살펴보면 그 중심 주제는
첫째, 수신 지향적 사회와 발신 지향적 사회의 통합,
둘째, 다원주의 시대의 복합적 가치,
셋째, 인터넷 환경의 개방성, 수평성, 분산성
넷째, 21세기의 정보 기술과 한국인의 조건을 종합, 제시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AI, 재택근무 등 정보화 시대의 중심어들의 개념을 제시했다.
선생님이 몇 년 후 이루어질 유비쿼터스 혁명으로 재택근무의 일상화가 이루어질 것이라 예언했을 때, 당시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2025년 현재 스승의 예언은 고스란히 우리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며 놀라워한다.
동시에 선생님은 통제 불능의 정보화가 불러올 역기능으로 “정보화가 폭력과 독점의 아나키로 돌변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인류의 해결책으로 “천 년 전 원효의 원융회통과 같은 전통이 오히려 21세기를 여는 새로운 키워드로 작용될 수가 있다. 선형의 논리에서 원형의 순환 논리로, 분리와 지배의 정책에서 융합과 상생의 글로벌리즘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은 근대화에는 실패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앞서갈 수 있는 문화적 자원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노트-나정순
학부 시절 매 수업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늘 새로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가장 구현하기 어려웠던 이 ‘새로움의 시선’은 문학 이론의 장이나 창작의 지점에서 나에게는 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되었다. 졸업 무렵 이화 문학상에 투고하여 당선되었을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시가 새로워서 괜찮다”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학생들의 창작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선생님의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는 뉴크리티시즘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당시 대학 3~4학년의 수준에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무척 낯설었지만 서정시나 소설의 이해에 있어서 심상과 상징을 체계적으로 재단하는 비평 이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문학비평이라는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학부 수업 시간에 하셨던 ‘공무도하가’의 해석은 당시 나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중국의 ‘고금주’에 기록으로 전하는 관련 설화를 예로 들면서 ‘백수광부’를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같은 한국의 주신 즉 술의 신으로, 공후를 타고 노래했던 백수광부의 아내를 그리스 신화의 뮤즈인 음악의 신으로 비견하는 신비평적 작품 읽기가 강의실 내에 물 흐르듯 펼쳐졌던 그 시간은 특별하게 여겨졌다. ‘강’을 매개로 한 님의 죽음과 이별로 이어지던 분석에는 바슐라르의 미학도 함께 설파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외국의 비평 도서를 영어, 불어 등 원어로 읽으신 후 직강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서구 비평 이론에 관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번역본 서적이 출간되기도 전에 그 내용을 수업 시간에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이화 국문인만이 누릴 수 있었던 학문적 특권이었다. 고전의 세계에도 서구 비평 이론이 적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기도 했다.
현대 시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한편으로는 그 근원적 계기성에 주목하다 보니 나는 한국 시의 전통성을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전통 시의 전형인 시조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이어령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정병욱 선생님과 함께 저술하신 ‘고전의 바다’를 읽었을 때 나는 선생님의 학문적 대상이나 범위가 넓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고 고전의 바다 속에서 선생님과 만나는 간접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시조가 종장의 예술이라는 점, 시조의 관습성이나 논리적인 성격에 대하여 이미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를 정립하고 계셨다. 시조 문학에 대한 이어령 선생님의 체계적 개념은 한시와 시조를 비교하여 시조의 특성을 밝혀내려 했던 나의 석사 논문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선생님께서 석사 학위 논문 심사 위원으로 오셨을 때 하셨던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동안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내가 말한 것들을 제대로 인용한 걸 이제야 보게 되네.” 고전 시가 논문에 당신의 학설을 인용했다는 사실이 대견하셨던지 큰 소리로 말씀하셨던 그날의 일화는 추억의 흑백사진처럼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석박사 과정의 강의에서도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내용이 있었다. ‘모든 시는 논리적 모순에 의해 통합하고 합치되었으므로 그 상상력이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일차적 문화적 기호를 재해석해서 자기 시적 체계를 만든다’는 것, ‘모든 문학은 이항 대립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구조주의, 기호학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역사 사회를 포함하기 때문에 사회학과 관련될 수 있지만 이에 따라 문학 연구가 문학에서 멀어지는 것을 매우 경계하셨다. 말하자면 사실주의 문학 연구 등에서 단순한 역사 사회 현상 찾기는 진정한 문학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의 문학비평 연구의 관점은 명료하면서도 언제나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 있었다.
문외한은 이어령 선생님께서 사회 현실과 무관하게 문학 그 자체만을 연구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의 강의를 깊이 있게 들어보았다면 그러한 의견에 수긍하기 어렵다. 선생님께서 윤동주 시인의 시를 분석하면서 강조하셨던 것도 궁극은 단순한 리얼리즘으로의 귀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윤동주의 시에서 역설의 구조를 통해 희망과 재생으로 나아가는 현실적 의미를 찾아내어 시인의 텍스트를 ‘논리적인 역전의 구조’로 바꾸어 읽어내는 힘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