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금 이야기
 
지은이 : 레베카 조라크, 마이클 W. 필립스 주니어 (지은이), 정세라 (옮긴이)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6년 05월




  • 대륙을 넘나든 정복과 발견, 수십만 명이 목숨을 걸고 몰려든 골드러시와 제국의 건설, 그리고 끊이지 않는 내전까지 모두 하나의 물질이 원인이었다. 초신성 폭발에서 탄생하여 수십억 년의 시간을 넘어 지구에 도달한 찬란한 파편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뒤흔드는 장대한 드라마로 펼쳐진다.



    세계사를 바꾼 금 이야기


    별의 죽음에서 태어난 금, 인류의 욕망을 깨우다
    운석이 가져다준 선물, 처음부터 금은 인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운석 충돌은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었다. 남아프리카 비트바테르스란트(Witwatersrand) 금광지구에서 지금까지 채굴된 금의 40퍼센트가 나온 광상은 무려 30억 년 전의 것이다. 지구 나이보다 15억 년이나 젊다. 이런 사건들과 비교하면 인간과 금의 만남은 지극히 최근의 일인 셈이다. 그렇기는 해도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줄곧 금을 사용해왔다. 모든 대륙에서 발견되는 금은 선사 시대 인류가 채굴하고 사용한 최초의 금속 가운데 하나였다.

    금 하면 누구나 흔히 떠올리는 반짝이는 너깃은 대개 ‘사금(placer gold)’ 광상에서 발견된다. 사금 광상이란 강과 하천 바닥에 암석에서 침식, 운반된 금 입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밀하게 농축된 퇴적층이다. 그러나 역대 최대 크기의 너깃들은 대부분 지하 광산에서 산출되었다. 사상 최대의 너깃으로 알려진 ‘웰컴 스트레인저(Welcome Stranger)’는 1869년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Victoria) 주에서 발견되었다. 정련 중량 71.018킬로그램에 달하는 이 너깃은 발견된 그해에 바로 용해되었다.

    금 탐색자들은 숨겨진 광상을 찾기 위해 다채로운 기법들을 동원해왔다. 특수하게 가공한 막대기로 매장된 금의 자기 반응을 감지하려는 ‘탐지봉 점술(dowsing)’, 꿈에서 얻은 계시를 따라 보물을 찾는다는 19세기 아일랜드 보물 사냥꾼들의 ‘황금 예지몽(gold-dreaming)’, 현대의 ‘식물 지표 활용’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금 채굴의 시작은 대부분 물속에서 우연히 박편이나 너깃을 발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제임스 W. 마셜(James W. Marshall)이 자신이 건설 중이던 제재소 방수로에서 금을 발견해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의 불씨를 지핀 것이 전형적인 사례다.

    1840~50년대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는 ‘수력 채굴(hydraulicking)’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고압 수류를 산비탈이나 강둑의 충적층에 쏟아붓는 방법으로, 때로는 산비탈 전체를 씻어버리기도 했다. 쏟아진 토사는 저지대에 쌓여 강의 물길을 바꾸고 대규모 홍수를 일으켰다. 하류 농부들이 1884년 법적 소송 끝에 이 관행을 중단시켰으나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1893년 이후 배수 제한 규정을 강화한 채 이를 다시 허용했다.

    골드 러시의 의미는 채굴 기술 혁신에 그치지 않는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듬해인 1849년 한 해에만 약 9만 명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미국 동부는 물론 멕시코, 칠레,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뒤섞이며 전례 없는 다민족 사회가 형성되었다. 인구 수백 명의 소읍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불과 몇 년 만에 수만 명이 거주하는 항구도시로 탈바꿈했다.

    골드 러시가 불러온 인구 이동과 경제적 팽창은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앞당기고 서부 개척을 가속화했다. 그 끝에서 미국은 19세기 말 세계 최강의 산업 국가로 부상했다. 금은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를, 나아가 세계의 판도를 바꾼 촉매이자 추동력이었다.


    황금을 몸에 두른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 ‘착용하는 금’이 만든 6,000년 문명사
    트랙터 운전사가 신발 상자에 담아온 것이 인류 최초의 황금 문명이었다고?
    1972년 10월, 라이초 마리노프(Raycho Marinov)는 불가리아 동부 도시 바르나 근교에서 트랙터로 공사용 도랑을 파던 중 예사롭지 않은 금속 물체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중 몇 점을 집어 신발 상자에 담아두었다가 일주일 뒤 예전 역사 선생님에게 가져갔고, 그제야 흙을 털어내며 그 물체들이 순금임을 알아챘다. 우연한 ‘매장 보물’ 발견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극적인 순간이었다.

    마리노프가 어느 날 흙을 털어내고 마주한 것은 로마 시대 보물보다도 5,0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는 훗날 ‘바르나 네크로폴리스(Varna Necropolis)’로 알려지게 될 동석기 시대 묘역이었다. 이 무덤군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600년경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르나 만큼이나 이른 시기에 아나톨리아(Anatolia), 오늘날 튀르키예에서도 금 제품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만큼 금 유물은 다른 유적지에서도 발견되기는 한다. 하지만 바르나는 인류의 금세공 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 금 유물 중 가장 크고 정교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바르나는 인간이 사후에도, 즉 죽음을 넘어서까지 몸을 치장하기 위해 금을 착용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증거를 제시한다.

    인류는 금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왔는데, 그중 가장 주를 이루며 꾸준히 지속된 두 가지 용도는 화폐와 장신구다. 바르나를 비롯한 여러 고고학 기록은 장신구로서의 용도가 먼저 나타났음을 시사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현재 새로 채굴되는 금의 전 세계 소비량은 보석과 금융 투자 목적으로 거의 균등하게 양분되며, 치과용을 포함한 산업 용도는 전체의 10퍼센트 안팎에 머문다.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 사람들은 금으로 몸을 단장해왔다. 왕관, 귀걸이, 코걸이, 디아뎀 같은 얼굴 장식, 목걸이, 팔찌와 팔을 감싸는 장식, 흉판, 손가락 반지 등은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많은 양의 금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화폐가 아닌 장신구로만 사용했다. 많은 문화권에서 금은 빛, 태양, 신성과 연관된 여러 찬란한 재료, 곧 다른 금속, 운모(mica), 수정(crystals), 보석(gems)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금을 몸에 두르는 행위는 이 금속의 부적 같은 효험, 다시 말해 몸을 보호하거나 불완전한 육신을 온전하게 하며, 더 매력적이거나 위엄 있게 만드는 힘을 믿었기 때문일 수 있다. 금으로 만든 그릇에 먹고 마시면 독에 중독되지 않는다고 믿었듯이 말이다. 금의 화폐 가치가 인정받는 체계에서 금을 드러내는 행위는 더욱 중첩된 의미를 지닌다. 현대 문화에서는 이러한 것을 ‘블링(bling)’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의 힙합(hip-hop) 맥락을 넘어 쓰임새가 확장되었다. 이는 부를 과시하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금 장신구는 단순한 과시 수단이 아니라 재산을 몸에 지니고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왕실과 궁정에서 크고 작은 장신구부터 의복과 공간 전체를 휘황찬란한 금으로 치장하든, 영화 속에서 황금색 천을 휘감고 나오든, 인류가 온몸을 금으로 감쌀 수 있게 되면서 금은 현실을 초월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다.


    황금 송아지를 부순 자들이 황금 성전을 지었다 - 금과 신앙의 6,000년 역설
    죽은 자의 혀 위에 금화를 올린 그리스인, 황금 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인
    종교적 맥락에서 금은 글을 새기는 재료로도 특별히 애용되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사람들은 ‘라멜라이(lamellae)’라 불리는 얇은 금판에 글을 새겨 사후 내세로의 여정에서 일종의 ‘여권’으로 삼았다. 이 판들에는 명계로 향하는 여정에서 보게 될 것들에 관한 안내와 위로, 권고의 말이 담겼다.

    그리스에서는 ‘카론의 오볼(Charon’s obol)’이라 하여 금박 동전을 시신의 혀 위에 얹거나 곁에 두고 매장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구약성서로 알려진 히브리 성서는 예배에서의 금 사용에 관한 가장 생생한 기록들을 담고 있다. 금은 먼저 부정적인 빛 아래 등장한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증거판을 받는 동안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신들을 만들어달라고 간청한다. 백성들은 금귀걸이를 빼어 아론에게 건네고, 아론은 그것을 받아 황금 송아지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금이 종교 안에서 차지하는 역설적이고 이중적인 자리의 출발점이다.

    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제기하는 물음들은 끝이 없다. 금이 신에게 공경을 표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아니면 그 물질성이 금의 영적 힘에서 주의를 빼앗는가? 금의 신성한 가치가 어느 문화에서든 화폐로서의 역할에 앞서 존재했는가?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은 문화마다, 시대마다 달랐다. 그러나 금이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권력, 욕망과 비판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금을 녹여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었다. 도구로 빚어낸 그 형상 앞에서 그들은 외쳤다.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신이다.”(‘출애굽기’ 32:2~4)”

    황금 송아지를 만든 행위는 계명 여럿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는 첫 번째 선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금령,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율이 모두 어겨졌다. ‘아직 전달받지도 못한 계명을 어겼다고 하여 처벌을 받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물음은 제기될 만하다. 그러나 우상 제작에 깃든 의도라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훗날 유럽 종교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되살아날 우상 숭배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은 아론이 송아지를 만들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모세가 나중에 아론에게 경위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백성이 금을 내게 주기에 내가 불 속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습니다.”

    아론이 정말로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부끄러워 숨기려 한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면은 수세기에 걸쳐 되풀이되는 하나의 우려를 반영한다. 인간은 종교적 형상을 만들어놓고도 그것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임을 이내 잊거나 외면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빚어낸 사물에 신적 존재를 부여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핵심이다.


    황금을 쥔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 주화에서 금본위제까지, 금이 만들어낸 세계 경제 5,000년
    주화에 황제의 얼굴을 새긴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고대 금화가 바꾼 권력의 판도
    주화 발행이 국가의 성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를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찾아온 혼란 속에서 그의 장군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Ptolemy)는 이집트에 대한 군사적, 행정적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다. 그 행정적 지배의 핵심은 이집트에 화폐를 도입하는 정책이었다. 이집트는 금 유물과 금에 얽힌 이야기들로 넘쳐났으나 자체 화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땅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나일 계곡 전역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궁정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전임자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을 주화에 새겨 이집트 통치권에 대한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했다. 이 역시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전에도 일부 주화에 실존 인물의 얼굴이 새겨진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유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일상적인 경제 거래가 그 유명한 황제와 상징적으로 연결된 국가의 후원 아래 이루어짐을 의미했다. 기원전 306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살아 있는 통치자의 얼굴을 새긴 최초의 주화를 발행했다. 그 얼굴은 물론 자신의 것이었다.

    주화는 실제로 사용될 때만 화폐로서 기능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내 외국 화폐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자신의 주화가 반드시 유통되도록 했다. 법령에 따라 이집트로 반입되는 외국 주화는 모두 프톨레마이오스 주화로 교환되었으며, 이를 녹여 새 주화로 다시 주조했다. 그 이전까지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주화가 교역망을 통해 닿는 어디서든 통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주화의 가치는 그 위에 찍힌 문양보다 함유된 금속의 양으로 매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칙령은 앞서 말한 국가 건설의 기능과 더불어 재정적 기능도 수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화에는 경쟁국 주화보다 금이 적게 들어갔다. 따라서 순도 높은 외국 주화가 이집트 주화로 교환될 때마다 이집트는 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

    지중해의 다음 패권 국가가 될 로마(Rome)는 그리스 문화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으나 주화 도입은 늦어서 기원전 300년경에야 이루어졌다. 공화정 시기 로마는 주로 청동화나 은화를 사용했고 금화는 기원전 3세기 말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처럼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만 발행했다.

    황금시대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기원후 3세기에 이르러 로마의 화폐 제도는 붕괴했다. 그 원인은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다. 은광과 금광의 사실상 전면적인 고갈, 인플레이션 조치, 주화 품질 저하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황제 시대에는 주화 속 금이나 은 함량이 거의 바닥을 보일 정도였다. 기원후 312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품질이 저하된 아우레우스(aureus) 금화를 솔리두스(solidus) 금화로 교체했다. 솔리두스는 이후 1,000년 동안 비잔티움과 유럽의 표준 화폐로 자리 잡았다. 그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로 살아 있다. 봉급, 채무, 판매를 뜻하는 프랑스어 ‘솔드(solde)’와 용병에게 이 로마 금화로 급여를 지급한 데서 비롯된 영어 단어 ‘솔저(soldier)’가 대표적이다.


    장인의 손이 닿는 순간 금은 예술이 된다 - 채식 필사본에서 현대 미술까지 금이 빚어낸 인류의 미적 욕망
    중세 필사본에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금이 예술의 재료가 된 3,000년
    수천 년에 걸쳐 금세공 장인들은 금을 온갖 형태의 물건으로 빚어왔다. 장식, 예배, 권력의 상징, 화폐가 그 용도였다. 장식품으로서의 금은 다른 것들을 한층 빛나게 하는 조연이다. 보석상들은 금을 이용해 보석과 귀한 물건들의 틀을 만들었다. 근세 유럽의 수집가들은 코코넛 껍데기나 타조알, 각종 공예품처럼 먼 나라에서 건너온 이국적인 물건에 금을 입혀 자신만의 것으로 새롭게 빚어냈다. 일본의 긴쓰기 예술에서 금은 깨진 도자기를 잇는 이음매가 되어 부서짐 속에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군주와 신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문화권에서 건물의 안팎을 금으로 덮었다.

    도금의 역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의 금세공 장인들은 재료 표면에 홈을 새겨 금박을 고정하는 기법을 이미 능숙하게 구사했다.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의 금세공 장인들은 ‘아말감 도금(fire-gilding)’ 기법을 개발했다. 금가루를 수은에 녹인 아말감을 청동이나 다른 금속 표면에 바르고 열을 가해 접합하는 이 방식은 로마 제국으로도 전해져 조각가들이 조각상을 도금하는 데 널리 쓰였다. 런던 대화재 기념비(Monument to the Great Fire of London) 정상을 장식한 도금된 청동 화염 항아리는 그 전통이 근세까지 면면히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수 세기에 걸쳐 금은 천과 가죽, 유리와 책의 지면에도 입혀졌다. 필경사와 삽화가들은 금가루를 섞어 만든 잉크로 화려한 채식 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을 제작했다. 금가루를 뿌린 종이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직물 장인들은 금실로 황제의 옥의, 즉 옥으로 만든 장례용 수의를 꿰매는 한편 지갑과 전례복에 수를 놓고 태피스트리(tapestry)에 금실을 엮어 넣었다. 유리 사이에 금박을 끼워 만든 테세라(tesserae) 모자이크는 교회와 모스크의 내부를 장식했다. 베네치아의 유리 장인들은 금박 조각을 얹거나 금가루를 뿌린 뒤 유리를 불어 그릇을 빚었고 완성된 물건 위에 같은 방식으로 금을 입히기도 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가죽에 금박을 눌러 새기는 금박 압인 기법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페르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장인들이 15세기에 이 기법을 이탈리아에 전했고 이후 유럽 제본 분야에서 널리 유행했다.

    이 모든 기법의 밑바탕에는 하나의 논리가 있다. 금은 자신이 장식하는 물건보다 훨씬 희귀하고 값비싸다. 순금으로 만든 물건은 엄두를 내기 어려워도 약간의 금으로 귀한 물건을 꾸미는 일은 가능했다. 금세공 장인들은 바로 그 간극 속에서 수천 년에 걸쳐 자신들의 기예를 갈고닦았다.


    금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보여준 1,000년의 집념 - 연금술에서 우주과학까지
    교황이 연금술을 범죄로 규정하고 연금술사를 화형에 처한 ‘정치적’ 이유
    벤 존슨의 희곡 ‘연금술사’는 연금술 지식 추구를 조롱한다. 연금술은 흔히 다른 금속으로 금을 합성하려는 욕망과 동일시 되어왔다. 존슨이 연금술사를 조롱거리로 삼은 첫 번째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오랜 시간 동안 연금술은 매우 진지하게 여겨지던 학문이었다.

    14세기 초 서유럽에서는 광산이 고갈되면서 은 부족 사태가 빚어졌고, 통치자들은 국고를 채우기 위해 연금술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교황 요한 22세는 1317년 ‘스폰덴트 파리테르 콰스 논 엑시벤트(Spondent pariter quas non exhibent)’, 즉 ‘그들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약속한다’라는 뜻의 교서를 반포하여 연금술을 범죄로 규정했다. 뒤이어 도미니크 수도회는 소속 연금술사 전원을 파문했고, 이탈리아의 점성술사이자 연금술사인 체코 다스콜리(Cecco d""Ascoli)는 볼로냐 대학교 교수를 지낸 학자였음에도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연금술에 반대한 이들의 우려는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경제적, 정치적 차원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었다. ‘연금술’은 금속에 다른 물질을 혼합하여 금속 화폐를 늘리는 위조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금속에 값싼 금속을 섞어 위조하는 행위가 그것이었다.

    연금술에 쏟아진 비판은 그 성공 여부에 품은 의구심이나 흑마술에 내린 단죄만큼이나 연금술사들의 마음속 탐욕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14~15세기에 전쟁이 잦아지고 비용이 불어나면서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해지자 통치자들은 연금술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기대로 연금술사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1404년 잉글랜드의 헨리 4세는 금이나 은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헨리 6세는 연금술에 깊은 호기심을 품고 자신이 신뢰하는 이들에게 연구 면허와 특권을 부여했다.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그림을 바탕으로 필립스 할러(Philips Galle)가 1558년에 제작한 판화에는 연금술사의 작업실이 혼돈 그 자체로 묘사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서 연금술사의 아내가 텅 빈 지갑을 펼쳐 보이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연금술은 그것에 매달린 이들을 오히려 파산으로 이끄는 아이러니한 학문으로 악명 높았다. 훗날 어떤 출판업자는 이 그림에 ‘알-헤미스트(Al-Gemist)’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연금술사를 비튼 네덜란드어 말장난으로 ‘온통 뒤죽박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연금술사의 작업실을 그린 그림들 가운데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더 은근하게 무질서를 담아낸 것들도 많다. 그중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과학자 곁에 원숭이가 등장하는 작품도 있는데, 원숭이는 모방과 허위를 조롱하는 상징이었다.

    연금술사를 ‘사기꾼’이나 ‘협잡꾼’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연금술은 거침없는 조롱의 표적이 되었고, 근대 과학사 분야 역시 이 편견을 그대로 흡수했다. 낡은 관행들을 걸러내고 근대의 객관과 합리에 바탕을 둔 방법론, 그 성과로 직접 이어지는 선례를 강조하려 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