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기후 위기를 단순한 기상학적 현상으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38억 년에 걸친 생명사의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중학교 과학교사인 저자는 기후가 생명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능동적으로 대기를 설계하고 기후를 조각해 온 주체임을 강조한다. 산소를 내뿜고 오존층의 형성에 영향을 준 미생물부터 탄소를 땅속에 묻어 지구를 식힌 석탄기의 식물들까지 기후와 생명은 늘 함께 춤추며 진화해 왔다. 서로를 빚고, 영향을 주고받던 상보적 관계는 인간이라는 종의 만용과 무분별한 개발로 위기를 맞이했다. 그렇게 생명 시스템에 닥친 기후 위기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 시대에 들어선 인류에게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저자는 생존을 위해 던져진 이 숙제의 해답을 38억 년간 검증된 ‘생명의 법칙’에서 찾는다.
■ 저자 김미정
저자 김미정은 하늘빛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복잡한 생명현상의 근원을 밝혀가는 생명과학에 매료되어, 그 즐거움을 학생들과 함께 나누고자 노력해 왔다.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 ‘가치를 꿈꾸는 과학교사 모임’,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활동 중이며, 과학 교육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한 ‘2025년 올해의 과학교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고등 통합과학 탐구 질문 수업’, ‘한 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고등 생명과학’, ‘한 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중등 생명과학’, ‘세상을 바꿀 미래 과학 설명서’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위험한 건 지구인가, 인류인가
PART 1. 생명과 기후는 어떻게 서로를 바꿔 왔는가 - 위기를 진단하는 출발점
1장. 38억 년의 실험, 생명이 만들어 낸 기후의 역사
- [여명] 생명 이전의 지구와 최초의 숨결
- [산소 혁명] 독이 축복이 되다
- [녹색 혁명] 식물이 대기를 다시 쓰다
- [인류세] 인간의 책임이 막중한 이유
2장. 속도와 극한, 기후변화가 위험한 진짜 이유
- [속도의 배신] 생명이 따라잡지 못하는 변화
- [극한의 시대] 평균이라는 함정 너머를 보라
- [예측 가능성의 종말] 문명이 기댄 홀로세의 안정성
PART 2. 대멸종에도 살아남은 회복의 법칙 - 시스템의 지혜가 주는 실마리
3장. 수차례의 극한을 견뎌낸 되살림의 비결
- [생명의 조건]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힘
- [항상성]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
- [유전] 기억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시스템
- [진화와 회복력] 다시 번성하는 종의 비결
4장. 연결과 다양성, 함께 살아남는 생명의 전략
- [단일함의 위험] 다양성과 연결로 위기를 극복하라
- [다양성] 집단 멸종을 막는 생태계의 안전장치
- [공생] 경쟁보다 강력한 협력의 힘
- [시스템의 지혜] 생태계가 함께 위기를 버티는 방식
PART 3. 인간과 자연이 함께, 다시 쓰는 기후의 미래 - 변화를 이끄는 해법과 실천
5장. 인간이 만든 위기, 인간의 의지로 해결하라
- [생물로서의 인간] 인간이 과연 진화의 정점일까?
- [인지 혁명] ‘이야기’를 함께 믿는 인간의 능력
- [인간의 가능성] 우리는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다
6장. 생명의 설계로부터 배우는 기후의 미래
- [생명의 해법] 38억 년의 해결책을 벤치마킹하다
- [토양과 기후] 발밑 땅의 탄소 균형이 기후의 열쇠다
- [블루카본] 바다와 갯벌이 함께 식히는 지구
에필로그 - 생명과학의 눈으로 다시 쓰는 기후 이야기
기후 위기를 단순한 기상학적 현상으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38억 년에 걸친 생명사의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중학교 과학교사인 저자는 기후가 생명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능동적으로 대기를 설계하고 기후를 조각해 온 주체임을 강조한다.
생명과학의 눈으로 보면 기후의 미래가 바뀐다
생명과 기후는 어떻게 서로를 바꿔 왔는가 - 위기를 진단하는 출발점
38억 년의 실험, 생명이 만들어 낸 기후의 역사
여명. 생명 이전의 지구와 최초의 숨결
- 최초 생명체의 고향, 심해 열수구
1953년, 스물두 살의 대학원생 스탠리 밀러가 플라스크 안에 메테인, 암모니아, 수증기, 수소를 채우고 전기 스파크를 흘려보냅니다. 놀랍게도 일주일 후 플라스크 안에는 생명의 기본 재료인 아미노산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이 실험은 특정 화학적 환경에서 에너지가 충분하다면 생명의 씨앗이 될 유기 분자가 무기물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제 원시 지구에서 에너지와 재료가 되는 무기물이 풍부했던 곳이 어디였을지 찾으면 생명 탄생의 후보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후보 지역 중 과학자들이 생명 이야기의 시작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 곳은 바닷속입니다. 지구가 막 식어 가던 원시 지구의 바다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요. 화산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소란한 곳이었답니다.
바닷속 깊은 곳에는 지구 내부에서 데워진 뜨거운 물이 바다로 분출되고, 철,황, 탄소 같은 다양한 화학 물질이 솟아 나오는 해저 열수구가 있어요. 이 열수구 주변이 바로 에너지와 재료가 되는 무기물질이 풍성해서 생명의 씨앗인 유기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으로 꼽힙니다. 실험실에서도 열수구와 비슷한 조건을 만들면 아미노산이나 간단한 유기 분자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죠.
열수구 주변은 아미노산, 지방산, 당, 염기 같은 단순한 유기 분자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입니다. 이런 분자들이 모여 막으로 둘러싸인 작은 주머니 형태의 구조를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주머니 안에서 합성과 분해, 복제 같은 여러 화학반응이 일어나며 점차 생명체의 모양을 갖추어 갔을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생명체, ‘LUCA’였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합니다. 38억 년에 이르는 기나긴 생명의 역사가 바로 그 작은 주머니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깊은 바다 바닥,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열수구 주변을 상상해 봅시다. 이곳에는 햇빛이 전혀 없음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빛 대신 화학반응에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 미생물, 지구의 첫 온도 조절자
산소가 거의 없던 초기 지구의 바다에서는 지금과 다른 화학반응들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바다와 대기에 이산화 탄소가 풍부했고, 열수구에서는 지구 내부로부터 수소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수소와 이산화 탄소가 반응해 메테인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일부 초기 미생물이 이러한 반응을 이용해 에너지를 얻는 대사를 발전시켰을 것으로 추측해요. 이 미생물들은 이산화 탄소를 이용해 살아갔습니다. 초기 생명에게 이산화 탄소는 오염물질이 아니라 ‘식량’ 같은 물질이었던 것이죠. 오늘날에도 열수구 주변에는 이런 방식으로 에너지를 얻는 메테인 생성균이라는 미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답니다.
이 과정에서 이산화 탄소와 메테인 같은 기체들이 서로 전환되며 바다와 대기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지구에서는 산소와 이산화 탄소가 순환하지만, 초기 지구에서는 이와는 다른 종류의 기체 순환이 이루어졌던 것이죠. 생명 활동이 대기의 화학 성분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지구 대기의 첫 번째 숨결이라고 할 수 있어요.
흥미롭게도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초기 태양의 밝기는 지금보다 낮았다고 합니다. 단순히 태양 빛의 양만 고려한다면 당시 지구는 얼어붙어 있어야 한다고 해요. 그러나 오래된 암석 속에는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계산과 지질 기록이 서로 맞지 않는 문제를 ‘젊은 태양의 역설’이라고 불러요.
이 역설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테인입니다. 메테인은 이산화 탄소보다 훨씬 강력하게 열을 가두는 온실기체이기 때문에 대기 중에 충분히 존재했다면 지구의 온도를 예상보다 높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초기 미생물이 만들어 낸 메테인이 지구 대기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덕분에 바다는 얼어붙지 않았고, 생명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잠깐,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짚고 넘어가 볼게요. 지금 우리가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산화 탄소가, 생명의 역사가 시작될 때는 없어서는 안 될 에너지원이었어요. 같은 물질도 시대와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 기후 이야기를 읽을 때 꼭 기억해 두면 좋겠어요.
속도와 극한, 기후변화가 위험한 진짜 이유
속도의 배신. 생명이 따라잡지 못하는 변화
- 기후변화의 시계는 진화보다 빠르다
작은 숲속에도, 흙 한 줌에도, 심지어 한 그루의 나무에도 많은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초기 지구와 달리 오늘날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지구에 번성한 것은 긴 진화의 시간을 거쳐 왔기에 가능했습니다.
진화는 세대를 거쳐 일어납니다. 개체 한 마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자손 세대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죠. 그런데 ‘한 세대’가 바뀌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대장균은 20분마다 세대가 바뀝니다. 하루면 72세대가 지나가죠. 1년이면 2만 6천 세대나 됩니다. 그래서 대장균은 항생제에 노출되어도 우연히 내성 유전자를 가진 몇 마리가 살아남고 며칠 만에 그 자손들이 확 퍼지게 되죠. 빠른 세대교체 덕분에 환경 변화에 적응이 빠르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코끼리는 다릅니다. 코끼리 한 마리의 일생은 60년에서 70년 정도이고, 임신 기간만 22개월입니다. 새 끼를 낳아 키우고, 그 새끼가 다시 번식할 수 있을 때까지 자라는 데 20년이 넘게 걸려요. 기후가 변하고 숲도 변해 가면 코끼리는 서식지를 이동하며 어떻게든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기후가 너무 빠르게 변한다면 어떨까요? 코끼리는 적응할 시간 없이 멸종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면 답이 보입니다. 생물 집단이 세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 그게 진화입니다. 개체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들이 무작위로 나타나는데, 이런 특징들의 비율이 변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연선택입니다. 환경에 잘 맞는 특징을 가진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기면서 그 특징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환경이 갑자기 추워졌다고 해 봅시다. 두꺼운 털을 가진 개체가 얇은 털을 가진 개체보다 더 잘 살아남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명확한 인과관계죠. 마치 비가 오면 우산을 가진 사람이 덜 젖는 것처럼 예측할 수 있는 결과입니다.
둘째는 유전적 부동입니다. 생존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과 상관없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 어떤 특징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입니다. 두꺼운 털이 유리한 상황인데도, 우연히 두꺼운 털을 가진 개체들이 산사태에 휩쓸리거나 번식기에 짝을 못 만나면 그 특징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동전을 네 번 던지면 이론적으로는 앞면 두 번, 뒷면 두 번이 나와야 공평하지만, 앞면 세 번, 뒷면 한 번으로 치우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자연선택이든 유전적 부동이든, 핵심은 이것입니다. ‘변화가 집단에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진화생물학적 계산에 따르면, 생존에 유리한 형질조차 집단의 절반으로 퍼지는 데 약 200세대가 걸립니다. 대장균에게는 며칠이지만, 코끼리에게는 5,000년입니다. 그러나 과거 대멸종 시기에는 환경의 변화가 생물의 진화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1850년부터 지금까지, 약 175년 동안 지구 평균 기온은 13도 올랐습니다. 이걸 1,000년 단위로 환산하면 약 7.5도입니다. 지질학 역사상 가장 급격한 온난화였던 페름기 대멸종 때, 평균 기온은 1,000년당 약 0.13~0.17도 상승했습니다. 지금의 온난화는 페름기 대멸종 당시보다도 수십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더 놀랍습니다. 만약 지금처럼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된다면, 2100년까지 산업화 이전 대비 4~5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산업화 이후 약 350년 동안 5도가 오르는 셈이죠. 이는 1,000년당 14도로, 페름기 대멸종 시기의 거의 100배 속도입니다. 지구 생태계가 이 변화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진화는 세대를 거쳐 일어나지만, 기후변화는 우리 한 세대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멸종에도 살아남은 회복의 법칙 - 시스템의 지혜가 주는 실마리
수차례의 극한을 견뎌낸 되살림의 비결
생명의 조건.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힘
방을 깨끗하게 치워 놓고, 하루이틀 생활하다 보면 반듯했던 것들이 흐트러집니다. 책도 이불도 종이와 펜들도 비뚤어지고, 먼지도 쌓이죠. 다시 치우려 마음을 먹지만 귀찮기만 합니다. 건물들도 마찬가지예요. 새로 지어 깔끔했던 건물이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부서지고 녹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무너질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죠. 오죽하면 재건축이라는 단어가 있겠어요. 세상이 모두 시간과 함께 이렇게 무질서하게 변해 가는 것만 같죠.
그런데 생명은 다릅니다.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유지하고, 심지어 더 복잡한 체계를 갖춰 나가요. 아무도 치우거나 잡아 주지 않아도, 아무도 고쳐 주지 않아도요. 물리학자들은 이 세상이 무질서해지는 방향,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말해요. 그런데 생명은 에너지를 써서 끊임없이 그 흐름을 거스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생명’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어요. 하나는 생명체, 다른 하나는 생명 현상이에요. 그렇다면 생명체는 무엇이고, 또 생명 현상은 무엇일까요?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질문과 씨름해 왔고, 몇 가지 핵심 특성을 찾아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생명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요. 스스로 에너지를 얻고 사용하는 것, 자신과 닮은 자손을 만드는 것, 환경 변화에 반응하는 것,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특성의 기본 단위가 바로 세포예요. 생명 현상은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통해 실현되고, 필요한 물질을 들이고 노폐물을 내보내면서 내부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요. 이 균형이 바로 항상성이에요. 이 특성들을 보면 생명이 어떤 면에서 돌이나 건물과 다른지가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번 장에서는 교과서의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려고 합니다. 기후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생명이 개체로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들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생명은 혼자 존재하지 않아요. 다양한 종들이 서로 연결되고 경쟁하고 공생하면서,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어요. 그 관계망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후 해법이 왜 어려운지, 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가 보이지 않아요. 생명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 사이에, 기후 해법의 차이가 있습니다.
- 세상은 무너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열은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요. 향수 뚜껑을 열면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지지만, 저절로 다시 병 안으로 돌아오지는 않아요. 우주의 모든 것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흘러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은 이 흐름을 거스릅니다. 단순한 분자들이 모여 세포를 만들고, 세포들이 모여 기관을 만들고, 기관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어요. 무질서에서 질서로,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가는 방향이에요. 우주의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 생명체와 생명 현상
그렇다면 생명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현대 생물학은 이렇게 답해요. 생명체는 살아 있는 존재 자체, 즉 세균, 나무, 고래, 사람처럼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생명 현상은 그 존재들이 보여주는 활동, 즉 숨 쉬고 자라고 번식하고 반응하는 것들이죠. 돌도 존재하고 불도 존재하지만, 생명체만이 생명 현상을 보여요. 그리고 그 생명 현상의 핵심은 에너지를 써서 끊임없이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물리화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는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생명의 층위가 달라질수록 분자 수준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특성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세포 하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던 것이, 세포들이 모여 조직을 이루면 나타나고, 조직들이 모여 개체를 이루면 또 다른 특성이 나타나요. 이것을 창발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이해하려면 분자를 넘어 관계와 네트워크를 봐야 한다는 것이죠. 이 관점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퍼즐을 생각해 볼까요? 퍼즐 조각들을 다 맞추면 그림이 완성되지만, 그 그림은 이미 조각 하나하나에 나뉘어 들어 있어요. 조각을 충분히 많이 모으면 전체를 예측할 수 있죠. 그런데 레고는 달라요. 각각의 블록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집의 모양은 보이지 않아요. 블록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집이 되기도 하고, 성이 되기도 하고, 우주선이 되기도 하죠. 블록 하나에는 없던 것이 연결로 인해 새롭게 생겨나는 거예요. 생명은 퍼즐이 아니라 레고에 가까워요. 분자 하나하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생명을 이해할 수 없어요. 세포가 모이고, 기관이 만들어지고, 개체가 되고, 생태계가 되면서 각 단계마다 전혀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거든요. 생명을 이해하려면 분자뿐만 아니라 그 관계와 연결을 함께 봐야 해요.
연결과 다양성, 함께 살아남는 생명의 전략
단일함의 위험. 다양성과 연결로 위기를 극복하라
- 똑같은 감자는 다 같이 죽는다
1845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경작한 대부분의 농작물을 빼앗기고, 감자 농사로 겨우 연명했습니다. 그나마 크고 맛있는 감자여서 다행이었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밭에 심어 놓은 감자가 하룻밤 사이에 시커멓게 썩어 버린 거예요. ‘감자역병균’이라는 곰팡이가 퍼져 나갔는데, 하필 아일랜드인들이 먹던 감자 대부분이 이 곰팡이에 취약한 ‘럼퍼’라는 품종이었던 겁니다. 감자를 여러 조각으로 썰어서 심는 방식으로 농사지었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거의 같은 개체들이 널리 퍼졌고, 대부분의 감자가 감염되어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7년에 걸쳐 약 100만 명이 굶어 죽었고,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떠났어요. 인구의 4분의 1이 사라졌습니다. 더 참담한 것은, 그 와중에도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밀과 고기는 영국으로 계속 실려 나갔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땅에서 식량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죠.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하나. 만약 그때 여러 가지 품종을 골고루 심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 곰팡이에 강한 종이 있어서 피해는 있었을지언정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교훈을 얻고도 인류는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의 99퍼센트는 ‘캐번디시’라는 단 하나의 품종이에요. 마트에서 파는 바나나가 전부 똑같이 생긴 이유입니다. 쌀도, 밀도, 옥수수도 마찬가지예요. 수천 년 전 인류가 농사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야생종 중에서 수확량이 많고 맛있고 키우기 쉬운 종만을 골라 심었습니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늘날 우리 밥상을 채우는 식물들은 사실 극히 일부 품종으로 단순해진 상태예요. 가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조류인플루엔자가 돌 때마다 수십만에서 수백만 마리의 닭을 한꺼번에 살처분하는 장면을 뉴스에서 본 적 있지요? 공장식 축산으로 키우는 닭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한 품종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요. 그래서 바이러스 하나가 들어오면 모두가 똑같이 취약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퍼져 나가요. 아일랜드 감자밭과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단일함은 효율을 만들어요. 관리하기 쉽고, 수확량도 많고, 맛도 균일해요. 하지만 그 편리함의 이면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다는 것은, 하나의 위협에 모두가 똑같이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리고 기후변화는 바로 그 약점을 건드리고 있어요. 기온이 오르고 강수 패턴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없던 병충해가 새로운 지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거든요. 단일한 농업 시스템은 기후변화 앞에서 아일랜드의 감자밭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 숲은 왜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
이제 숲을 한번 들여다볼게요. 숲에도 병충해가 찾아오고, 가뭄이 들거나 산불이 나는 해도 있어요. 그런데 건강한 숲은 아일랜드 감자밭과는 달리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아요. 왜일까요?
숲에는 수십에서 수백 종의 나무와 식물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떤 해충이 참나무를 공격해도 소나무는 멀쩡하고, 소나무를 공격하는 병원균이 돌아도 단풍나무는 끄떡없어요. 피해가 일부에 머물고, 다른 나무들이 빈자리를 채우면서 숲 전체는 살아남습니다. 다양성이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거예요.
산불도 마찬가지예요. 소나무나 침엽수만 가득한 숲은 불에 매우 취약합니다. 바닥에 깔린 솔방울, 건조한 침엽, 송진이 작은 불씨 하나를 순식간에 번지게 만들거든요. 반면 침엽수와 활엽수가 뒤섞인 숲에서는 수분 함량이 높은 활엽수가 불의 확산을 늦추는 역할을 해요.
1996년 강원도 대형 산불 이후 숲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선택이 맞붙었어요. 빠르게 숲을 되살리려는 쪽은 생장이 빠른 소나무를 심는 인공조림을 택했어요. 반면 자연 복원을 주장하는 쪽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숲이 스스로 다양성을 회복하도록 내버려두자고 했죠. 결국 일부 지역은 인공조림으로, 다른 지역은 자연 복원으로 각각 진행됐어요.
30년이 지난 지금,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났어요. 인공조림 한 숲은 같은 키의 소나무가 줄지어 단정해 보이고, 자연 복원된 숲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뒤섞이고 키도 제각각인 복잡한 모습이에요. 그런데 겉보기에 단정한 숲보다 어수선해 보이는 숲이 실제로는 산불에 생태적으로 더 강합니다. 숲의 빠른 복원이 단기간으로는 이로워 보이지만, 긴 시간이 지나면 다양성이 승리하는 거죠.
다양성은 생태 시스템을 유지하는 역할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밤에 가로등 주변에서나 숲속에서나, 예전만큼 곤충을 찾기 힘들어졌어요. 곤충이 줄어드니 곤충을 먹고 자라는 새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철새들은 곤충이 가장 많이 부화하는 시기에 맞춰 이동하도록 진화해 왔어요. 그런데 기후변화로 곤충의 부화 시기가 달라지면서 철새가 도착했을 때 먹을 곤충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생태학자들은 이것을 ‘생태 엇박자’라고 불러요. 다양성이 무너지면 이렇게 연쇄적으로 시스템 전체가 흔들려요.
기후변화는 바로 이 다양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온이 빠르게 오르면서 특정 환경에만 적응한 종들이 살 곳을 잃어 가고 있어요. 종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숲의 완충지대는 조금씩 얇아지고, 아 일랜드의 감자밭처럼 하나의 충격에 훨씬 취약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