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이 쉬워지는 최소한의 세계사
 
지은이 : 후쿠스케 (지은이), 이정현 (옮긴이)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6년 04월




  • 고대 그리스 전쟁부터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 세계대전까지 역사가 바뀌는 순간에는 언제나 수학이 있었다! 수학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왔는지를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역사×수학 드라마. 수식을 최소화하고 역사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수학적 개념을 녹여내어 수포자, 문과생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수학에 다가갈 수 있다.



    수학이 쉬워지는 최소한의 세계사


    기원전부터 중세까지: 수학의 기틀이 만들어지다
    대무역 시대에 혁명을 일으킨 숫자 체계 _피보나치의 아라비아 숫자 도입
    우리는 0,1,2,3,4,5,6,7,8,9라는 열 개의 기호를 이용해 아주 작은 수부터 엄청나게 큰 수까지 모두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숫자 기호와 ‘자릿값’이라는 개념을 이용하는 덕분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이 기호를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는데, 7세기에 인도에서 완성된 이후 아라비아를 거쳐서 13세기에 유럽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인도-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숫자 체계의 가장 놀라운 점은 0의 도입입니다. 지금은 흔하게 사용하는 0의 등장은 수학의 역사에서 매우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어떻게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0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0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0은 숫자의 ‘자릿값’을 표현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0이 없다면 1과 100을 구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0을 이용해서 일의 자리, 십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표시한 덕분에 100과 1의 차이를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지역마다 수를 표기하는 방식이 달랐으며 아라비아 숫자에 비하면 비효율적이고 복잡해서 수를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컸습니다. 오늘날 쉽게 숫자를 비교하고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된 덕분입니다. 

    그런데 이 획기적인 숫자 체계가 인도와 아라비아에만 머물지 않고 유럽까지 널리 퍼진 데에는 어느 수학자의 역할이 컸습니다. 피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라는 인물입니다. 

    이슬람 문화가 발전시킨 중세 수학
    피보나치는 1170년경 십자군의 기항지였던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레오나르도이지만 이후에 ‘보나치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피보나치’라고 불리게 되었고, 현재는 그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인 굴리엘모 보나치는 북아프리카의 부지에서 대규모 무역 거래소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이슬람인 교사를 붙여 계산과 아라비아어를 가르쳤습니다. 6세기 이후 유럽은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을 경시하는 중세 암흑기에 접어들어서 피보나치의 시대에는 유럽보다 이슬람에서 학문이 더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암흑기 동안 수학의 발전은 알콰리즈미(Al-Khwarizmi)로 대표되는 이슬람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알콰리즈미는 페르시아에서 최초로 수학책을 만든 수학자로, 인도 숫자를 아라비아에 널리 알린 수학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수학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수학의 분과인 '대수학(Algebra)'이라는 명칭이 그가 쓴 저서의 제목을 따서 만들어졌으며, 문제를 푸는 단계적 절차를 의미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단어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말하자면 굴리엘모는 아들에게 최신 수학을 배울 수 있는 교사를 붙여준 것입니다.   

    이슬람인 교사에게서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한 계산법을 배운 피보나치는 이후 아버지를 따라 이집트, 시리아, 시칠리아, 남프랑스 등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상거래에 아라비아 숫자가 편리하다는 확신을 얻은 피보나치는 1200년에 유럽의 상인들에게 아라비아 숫자를 전파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유럽에 0이 도입되다
    피보나치는 이탈리아로 돌아간 지 2년 만에 『산반서』를 완성합니다. '계산의 책'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책은 도입부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인도인이 사용한 아홉 가지 기호란 9, 8, 7, 6, 5, 4, 3, 2, 1이다. 이 아홉 가지 기호에 아라비아인들이 '제피룸(zephirum)'이라고 불렀던 '0'이라는 기호를 이용하면 어떤 수라도 표기할 수 있다.   

    유럽에서 0은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었으므로 이 숫자를 일컫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습니다. 알콰리즈미는 0을 비웠다는 의미의 아랍어인 '시프르(sifr)'라고 불렀는데, 피보나치는 이를 라틴어로 '제피룸'이라고 번역했고, 베네치아에서 '제로(zero)'로 축약되어 오늘날에 이릅니다.

    『산반서』의 1부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수를 표기하고 필산하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방식대로 324×539를 계산하려면 먼저 곱하려는 두 수의 자릿수에 맞게 격자를 그린 다음, 곱할 두 개의 숫자를 각각 격자의 맨 위와 맨 오른쪽에 씁니다. 격자의 각 칸을 대각선으로 나누고, 해당하는 칸의 열과 행에 있는 숫자를 곱하여 십의 자리는 왼쪽 위에, 일의 자리는 오른쪽 아래에 적습니다. 

    예를 들어, 4와 5가 만나는 맨 위 오른쪽 칸을 보면 4×5=20이므로 왼쪽 위에 2, 오른쪽 아래에 0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 오른쪽 아래부터 왼쪽 위 대각선을 따라 모든 숫자를 더해서 끝에 적습니다. 그림을 보면 대각선을 따라 오른쪽 맨 아래는 6이며 그다음 대각선은 2+3+8=13입니다. 이때 십의 자리는 다음 대각선으로 올리고 일의 자리만 적는 것입니다. 이렇게 덧셈을 계속하여 그 결과를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 나열하면 곱셈의 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즉, 324×539의 답은 174636입니다.

    아라비아 숫자에 빛이 비추던 날
    중세 유럽은 과학적 올바름보다 신을 향한 믿음이 우선시되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자연과학 연구로 이름을 남긴 것만 보아도 피보나치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가 그의 역량을 확인하기 위해 주최한 수학 대회에서 피보나치는 출제된 세 문제를 모두 풀어내며 압도적인 수학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한 다른 수학자들은 세 문제 중 하나도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유럽에 전파한 아라비아 숫자는 상거래에 유용했음에도 당시에는 널리 퍼지지 못했고 피렌체에서는 아라비아 숫자 사용을 금하기에 이릅니다. 당시에는 인쇄 기술이 미비했기 때문에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옮겨 쓸 수밖에 없었는데, 쓰는 사람마다 모양이 조금씩 달라서 거래에서 상대방을 속이는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또한 0을 하나씩 붙일 때마다 자릿수가 올라간다는 편리함이 커다란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100데나리우스라고 적힌 청구서에 0을 하나 더 붙이면 1,000데나리우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산과 검산에는 아라비아 숫자를, 서류에는 로마 숫자를 사용하는 과도기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이유로 피보나치가 유럽에 아라비아 숫자를 전파한 것은 13기의 일이이었지만,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낸 수학
    가장 평균적인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_ 케틀레의 평균
    어떤 14세 남학생이 건강검진 결과를 받고 "작년보다 키가 자라서 165센티미터였어요"라고 했다면 이 남학생의 키는 큰 편일까요, 작은 편일까요? 아직 성장 중인 청소년이니 이 정보만 들어서는 주관적인 느낌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14세 남자의 평균 키는 166.8센티미터래요." 여기까지 들으면 이 남학생이 14세 집단 안에서 키가 작은 편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평균값을 알면 집단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때 유용합니다. 시험 성적표를 받을 때도 자기 점수 다음으로 확인하는 것이 평균값(평균 점수)입니다. 내가 80점을 받았다고 해도 평균이 70점이라면 시험을 잘 봤다고 할 수 있고, 설령 90점을 받았더라도 평균이 95점이라면 시험을 잘 봤다고 말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평균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19세기 벨기에의 수학자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가 평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평균값이라는 개념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회를 연구할 때는 주로 연구자의 주관이나 경험치에 근거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평균값을 구하는 것과 같은 통계적인 방법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케틀레는 통계학을 사회학에 응용하면서 평균값이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지표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비만도를 확인하는 데 주로 사용하는 체질량지수(BMI, body mass index)를 최초로 만든 사람도 케틀레인데, 이 역시도 평균적인 인간의 신체 조건을 통계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이처럼 다방면에 걸친 업적 덕분에 케틀레는 '근대 통계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수학으로 인간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을까
    케틀레는 벨기에 혁명을 겪으며 ‘무엇이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가’ 하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기 위해서 인구수나 범죄율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평균값을 구하는 접근법을 사용했지요. 천문학을 연구할 때 쓰던 방식을 사회 연구에 접목한 것입니다. 이렇게 케틀레는 ‘사회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됩니다. 사회 물리학이란 범죄율, 자살률, 혼인율 같은 사회 현상을 물리학, 통계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 아래 숨은 법칙을 찾는 학문입니다. 케틀레는 이러한 연구를 통해 사회 현상의 이면에 있는 인간의 개인의 감정 및 행동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케틀레는 자신의 연구를 널리 알리기 위해 1835년에 『인간과 그 능력의 발달에 대하여: 사회 물리학적 시론』을 발표하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평균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케틀레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을 정규분포로 나타내고 그 분포의 중심인 평균값에 해당하는 인간을 ‘평균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이때 케틀레가 사용한 ‘평균인’이라는 표현은 현대와 달리 이상적이며 사회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의미했습니다. ‘평균’이라는 말이 ‘평범’에 가까운 뉘앙스로 사용되는 지금과는 크게 다르지요. 실제로 그는 저서에서 평균인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물체의 무게중심과 마찬가지로 평균인은 국가의 중심점이다.

    천문학을 연구해오던 케틀레는 천체 관측 결과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역시 평균값과의 오차가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매우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이때 케틀레가 연구한 두 가지 주요한 데이터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가슴둘레를 측정한 데이터입니다. 케틀레는 병사 5,732명의 가슴둘레 측정치를 정리하여 평균값인 약 39.75인치(약 101센티미터)를 중심으로 데이터가 정규분포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만 평균인에 대한 정의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케틀레의 분석은 오늘날과 조금 달랐습니다. 현대에 데이터를 분석하는 방식에 따르면 평균보다 가슴둘레가 큰 사람은 신체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케틀레는 가슴둘레가 39.75인치인 병사가 이상적이며, 그보다 가슴둘레가 큰 경우는 흉근을 지나치게 단련했거나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을 타고나는 등 우연한 사건들이 조합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평균값을 '이상적인 값'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출된 결론지요.   

    두 번째 데이터는 프랑스군의 징병 신체 검사에서 키를 수집한 데이터였습니다. 그런데 이 데이터는 조금 특이한 데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평균을 중심으로 정규분포를 이루지만, 일부 데이터가 튀는 영역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157센티미터 직전 구간에서는 인원 수가 급격히 늘고, 조금 넘는 구간에서는 급격히 줄어드는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157센티미터 이상인 남성을 징집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케틀레는 157센티미터보다 키가 조금 큰 젊은 남성들이 키를 속여 징병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징병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통계를 통해 증명된 최초의 예인 샘입니다.   

    또한 케틀레는 지금도 주요한 지표로 사용되는 체질량지수BMI를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몸무게(kg)를 키(m)의 제곱으로 나눈 값이기 때문에 신장과 체중만 알아도 간단하게 비만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세계보건기구(WHO)도 이 지표를 사용하고 있지요. 현대에는 비만도, 질병 위험 등 건강 상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케틀레가 이 지표를 고안한 이유는 이상적인 사람의 체형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구한 BMI는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그의 연구에는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사회를 연구하는 수학이 시작되다
    케틀레가 연구 결과를 발표한 이래로 사회 현상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려는 그의 시도에 많은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그중 가장 큰 비판은 평균인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평균인은 통계적인 개념이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정 집단 사람들의 키에 관한 데이터를 빠짐없이 모아서 평균값을 구하면 소수점 아래로 숫자가 끝없이 이어지는 매우 정밀한 값이 나오는데, 실제로 키가 그 평균값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시험의 평균 점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 시험에서 문항당 점수는 2점, 3점, 4점 단위로 매겨지므로 평균 점수가 62.5점이라면 평균값과 일치하는 점수를 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적인 학생이라고 하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케틀레는 그런 사람이 실재하는 것처럼 여기고 평균인을 사회 분석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연구 방법에 대한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비판은 평균인의 개념이 현실에 존재하는 개인의 다양성을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실제 인간의 특성과 행동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한 가지 평균만으로는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케틀레는 평균인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평균보다 더 뛰어난 사람도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취급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케틀레는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평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나갔습니다. 이렇게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는 사실 자체체가 케틀레의 사상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반증입니다. 케틀레는 1853년에 제1회 국제 통계 회의를 주최하여 통계학의 발전과 보급에 기여했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인물 중에는 '백의의 천사'라고 불리는 나이팅게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케틀레가 열정적으로 학문 활동을 이어간 덕분에 사회를 수학적으로 연구하는 근대적인 통계학이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