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 헬스를 15년 동안 이어온 이야기는 ‘대단한 목표’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저 출근 전에 남아 있던 자투리 시간을 삶의 균형을 되찾는 데 써보기로 한, 아주 소박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선택은 몸을 살리고, 마음을 살리고, 삶의 흐름을 다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운동이란 특별한 기적을 가져오지 않아도, 매일 나를 버티게 하는 단단한 뼈대가 된다. 어떤 사람에게 루틴은 의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루틴은 구조가 되고 안전망이 된다. 저자에게 모닝 헬스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거창하지 않기에,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일상. 바로 그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 저자 성영주
숨 쉬기, 밥 먹기 다음으로 오래한 게 운동이다. 앞으로 살 날도 운동 ‘안’ 하기에 실패할 것이므로, 이 순서가 바뀔 일은 없을 것 같다. 마흔 넘어 돌아보니 안 했으면 좋을 일도 많았는데, 해서 100% 좋았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게 운동이다. 가급적이면 죽는 날까지 머리 말고 몸 쓰는 자로 살고 싶다.
잡지 기자로 오래 일했다. 에세이 〈오늘만 사는 여자〉, 〈잔나비를 듣다 울었다〉(공저)를 썼다.
■ 차례
1 모닝 헬스가 나에게 5
2 날카로운 첫 ‘헬-쓰’의 기억 10
3 재미‘없음’의 능력자 16
4 팔 굽혀 펴기 하는 여자 23
5 ‘간지’는 너무 중요해 30
6 의심은 나의 힘 37
7 내가 해본 운동, 복싱 편: 나는 이시영을 이겼을지도 모른다 44
8 배짱은 코어로부터 51
9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56
10 내가 해본 운동, 주짓수 편: 그저 자빠뜨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61
11 운동의 효용이란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던가 67
12 마흔의 운동을 달라야 한다 72
13 내가 해본 운동, 요가 편: 마음의 평화는 개뿔, 이건 전쟁이야 77
14 바보야, 문제는 회복이야 83
15 ‘운동군자’처럼 말했지만 질투쟁이가 맞아요 90
16 아프면 쉬어야지, 그렇지, 맞는데…… 95
17 고것 참 요물인 달리기 102
18 ‘열심히’란 무엇인가 108
19 50 대 50, 지독한 제로섬 게임 115
20 시작은 진.짜.로. 반이다 122
모닝 헬스를 15년 동안 이어온 이야기는 ‘대단한 목표’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저 출근 전에 남아 있던 자투리 시간을 삶의 균형을 되찾는 데 써보기로 한, 아주 소박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선택은 몸을 살리고, 마음을 살리고, 삶의 흐름을 다시 세우는 힘이 되었다.
모닝 헬스가 나에게
알람이 울린다. 울리기 전부터 어슴푸레 나는 깨어 있다. 그러고는 따르릉의 ‘ㄸ’이 시작될 때 황급히 알람을 끄고 화들짝 몸을 일으킨다. 아침 운동을 할 때다.
“아직도?” “여전히?”
주변 사람들이 나의 안부를 물어 올 때면 8할이 이런 부사로 시작된다. 그럼 나는 한결같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혹은 배반하는 답변을 한다.
“예,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아침에 운동을 한답니다.”
15년쯤 된 습관이자, 15년째 같은 대답이다.
‘모닝 헬스’를 주제로 책을 써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고 좀 망설였다. 요즘 같은 ‘5천만 운동인’ 시대에 운동 이야기 하나 더 보태는 것이 특별할 게 있을까. 사람마다 신체 리듬과 일과 시계는 다 다른데, 굳이 아침형 인간 더하기 운동까지 설파하는 것? 좀 깍쟁이 같고 시시하지 않은가. 더구나 ‘운동이 가져온 기적(?)’류의 간증이 넘쳐나는 가운데 운동의 ‘운’ 자만 들어도 눈살 찌푸리는 운동 혐오인들에게 나는 더한 스트레스를 얹어줄 의지도 열정도 없었다.
더 싫은 건,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여전히 선입견이 존재한다는 것. ‘성공하는 이들의 10가지 습관’ 같은 것을 꼽을 때 4~5번 항목쯤에는 꼭 들어가 있을 것만 같은. 어떤 기업의 CEO라든가,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거나 남다른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의 일과에는 언제나 아침 운동이 있었다는 그런 뻔한 이야기.
나는 보시다시피(?) 기업의 CEO는커녕 비슷한 자리에 올라본 적도, 빼어난 능력을 가지고 어떤 특별한 성취를 일군 적도 없다. 이 땅의 자랑스러울 것 ‘없는’ 일개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는 그냥 운동을, 그것도 아침에 하는 사람일 뿐. 그렇게 실컷 시큰둥해질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다름 아닌 ‘내가’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쳐들어왔다.
여러분, 성공하는 이들의 10가지 습관을! 무려 15년 동안! 실천해도 이렇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답니다?! 이 연사, 목 놓아 외쳐보겠다는 이상한 오기가 샘솟아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사회적 성공의 비법으로서 아침 운동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 아침 운동이 나에게 준 엄청난 깨달음이라든가, 가슴 울리는 교훈을 꼽아가며 독자를 설득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다시 한번 이 땅의 크게 자랑할 것 없이 평범한 한 인간이(라고 쓰고 술꾼이라 읽는다) 15년을 쉬지 않고 아침 운동을 해온, 크게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으로 통과해 온 15년이라는 시간.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데 아침 운동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이야기.
어쩌면 이 글은 운동하는 몸이 된 이후로 내게 새롭게 새겨진 두 단어, 흘러가는 시간의 ‘당연’함과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에 대한 내 식대로의 정의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15년 동안 아침 운동을 해왔고, 여전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아침에 굳이 운동을 할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게 “평생 운동할 것”이라고 필연적으로 내뱉고 마는, 아주 평범한 아침 운동인의 단 하나뿐인 이야기다.
재미 ‘없음’의 능력자
누군가 운동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오, 무슨 운동 하세요?”
이 질문을 받으면 나는 왠지 모르게 멋쩍어진다. “아이 뭐, 그냥 헬스 해요. 허허.” 하고 괜히 머리를 긁적인다. 당최 머리는 왜 긁는지 나도 알 수 없지만, 추측해 보면 대략 이런 마음 아닐까 싶다.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할 새로움, 요즘 핫하다는, 막 트렌디하고 힙한 운동이 아니라서 미안합니다. ‘딱 보니 되게 근육질이거나 막 모델 몸매는 아닌 것 같은데……?’ 의심하는 여러분이 대개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곤 후속 질문이 곧잘 이어진다.
“근데 헬스는 재미가 없지 않아요?”
아마도 전 국민이 한 번쯤 발 담가본 적이 있을 그 ‘헬스’라는 이름의 체육관. 대부분은 작심삼일로 등을 지고, ‘아차차’ 막바지에 짐 찾으러나 가던 그곳. 아마 김종국 부류의 머슬맨, 최소 몇 년 이상 꾸준한 헬스 경력과 무게 치는(?) 능력을 보유한 헬스인들은 발끈하며 이렇게 대답할 거다.
“쇠질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근육이 날로 잡혀 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성취감이 있는데요?”
헬스 동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딱 잘라 말하겠다. 맞다. 재미없다, 헬스.
이전에는 복싱도 잠깐 배워보고, 요가나 수영, 취재 덕분에 주짓수, 암벽 등반까지 두루 경험을 해보면서 운동에는 꽤나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취미 삼아 해보면 대충 다 따라가니까. 말 그대로 익스트림한, 한 번쯤 이 악물고 바짝 해내면 당장의 난관을 넘는 데에는 큰 문제 없는 그런 종류의 운동들. 오히려 그 잠깐의 한계를 넘어설 때 쾌감마저 컸었다. ‘그래, 나 운동 신경 꽤 괜찮잖아, 훗!’ 어깨 뽕 차는 재미를 느끼는 부류였달까.
내게는 그때까지 헬스는 재미없어서 안 하던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꽤나 다이내믹하고 성취감 느낄 만한 신체 활동에 스스로 취해 있었을 수도 있다. ‘북한산 인수봉 정복!’ ‘복싱 KO!’와 같이 한 문장에 설명이 되는, 눈에 보이는 성취가 드러나는 활동 말이다. 하지만 헬스를 시작할 때의 나는 달랐다. 삶은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도, 잠깐 바짝 한다고 성취되지도 않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당시의 내게는 그 재미없는 것이 딱 맞았다. 아니,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늘 평가에 노출된, 매번 자기 증명을 해야 하는 K-직장인. 덜 잘하는 건 그냥 못하는 것, 꾸준함보다는 탁월함이 미덕인 사회생활에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 혼자 죽어라 해봐도 혼자 해낼 수는 없는, 혹은 혼자 박수 받는 건 언감생심인 직장 생활. 반대로 팀이 다 같이 했던 일도 그중 하나는 꼭 자신의 지분만 주장하며 남 깎아내리는 꼴을 봐야 하는 그곳. 협동과 경쟁 사이의 살얼음판.
만화적인 상상을 해보자면, 직장이란 실은 서로를 부지런히 밀어내면서도 겉으론 어정쩡하게 어깨동무한 채 기어코 옆 사람을 이겨야 하는 곳이 아닐까. 이런 모순적 상황에서 나는 어쩌면 경쟁의 ‘ㄱ’자조차 내 삶에 더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운동은, 개중에도 헬스는 오롯이 나 혼자,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는 데드리프트+스쿼트+벤치 프레스 3대장 OOOkg 같은 목표를 세우고 부단히도 도달하려 애를 쓸 테지만, 그 또한 개인의 목표 설정. 남이 세워놓은 기준에 따를 것이 아니라, 나의 몸에 맞게 선택하면 되는 일이다. 누굴 이겨야만 내가 산다는 경쟁 없이 헬스는 그저 혼자 이 시간을 건너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좋든 싫든 내가 평생 데리고 살 내 몸에 성공 또는 실패가 어디 있겠나. 오케이, 넌 이만큼 했으니까 승진 혹은 정직, 감봉 뭐 그런 잣대가 어디 있겠나. 미우나 고우나 내 몸인 것을. 그놈의 결말과 처분을 죽을 때까지 유예할 수 있는 게 운동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결과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같은 처분이 없는 공간. 내가 놓지 않으면 놓아지지 않는 것.
매번 어떤 성취로 증명해야 하거나 누군가와 비교 우위를 따지는 평가는 적어도 내가 하는 운동에서는 필요 없었다. 수많은 감정 소모와 사바사바(?) 사내 정치 같은 것들이 끼어들 틈이란 없었다. 일정 시간을 견디고 버티면 기어코 지나가는 것이 운동이었다. 회사에서 주는 돈과 나의 능력을 일분일초 저울질하는 자기 검열의 세계 아니라, 나 혼자 나의 시간을 발굴하고 조금이나마 능력을 개발하고, 그게 몸의 실질적 변화로 나타나는 것. 삼시 세끼 밥 먹는데 이유를 묻지 않듯, 그냥 닥치고 루틴처럼 따박따박 해내기. 그게 나의 운동이었다. 재미가 없어서 헬스를 시작도 ‘안’ 했다면, 같은 이유로 헬스를 ‘지속’하게 되는 아이러니.
‘이 재미없는 거, 너무 재미있잖아?’
이 모순적인 한 마디가 나의 아침 운동 15년을 설명한다. 어떤 일이든 거기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면, 동기부여로 그만큼 좋은 게 또 있겠냐만은. 그렇게 재미를 죽자고 찾는다는 건, 역으로 재미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다면 재미없는 순간을 15년 동안이나 꽤 잘 견뎌온 재미 ‘없음’의 능력자. 내게 꾸준함이란 ‘해나감’ 그 자체다. 돈도 안 되는 일에 (오히려 돈 써가며) 15년을 매진하는 힘이다.
재미를 찾을 수 없는 순간에도 재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 대신, 재미가 없음에도 그냥 하는 것. 그냥 하고 또 하다 보니 어느새 재미없음을 재미있어하는 궁극의 모순을 만드는 일. 모순덩어리 운동인은 오늘도 이 재미없음의 재미를 느끼러 간다.
운동의 효용이란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던가
누군가 “호수 위에 비친 달그림자”를 운운하며 전 국민의 뒤통수를 때리던 그날. 내 머릿속은 엉뚱한 공상으로 내달렸다. ‘그렇지, 운동의 효용이야말로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 말이다. (애초 발화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기.)
효용: 보람 있게 쓰거나 쓰임. 또는 그런 보람이나 쓸모.
보람 있게 쓰임, 보람이나 쓸모……
그래, 운동을 함으로써 몸에 지방이 좀 덜 쌓이게 근육을 길러 좀 더 건강한 삶을 지향하게 되었을 수 있다. 아침을 운동으로 열면서 하루를 좀 더 보람차게 시작했다고 생각한 나날들이 있었을 게다. 운동 일절 안 하는 또래의 누군가보다는 체력을 좀 더 길렀을 수 있고, 코어, 즉 배짱을 기르는 데 물리적으로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배짱은 코어로부터! 꼭 기억하고.)
팔굽혀펴기를 팔 굽힌 그 자리에서 20개는 거뜬히, 물구나무서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느끼는 느낌으로는 어깨가 2mm가량 넓어진 것도 같다.
그러다가도 다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질 때가 있다. 진실은 이렇다. 근육량을 비교해 보면, 평생 운동 따위는 그림자조차 들이지 않은 내 지인이가 15년 근력 운동을 했던 나보다 지금도 여전히 더 좋다. (타고난’ 그대 앞에만 서면 우리는 왜 작아지는가.) 아침 운동 하는 그 시간에 외국어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 3개 국어는 나끈히 했을지도 모른다. (착각은 자유니까.) 하물며 운동해서 길러진 체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술 같은 건 끊고 지금쯤 간~끗한(간이 깨끗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상은 능력이다.) 당최 팔굽혀펴기를 하는 팔뚝과 2mm가량 넓어진 어깨로 팔을 굽혔다 펴거나 어깨 2mm 더 넓어진 것 말고, 또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 말이다.
의문은 숱하게 쳐들어온다. 50개째 스쿼트를 하며 숨을 헐떡거릴 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달리기 애호가들이 장시간 달리면서 느끼는 쾌감)는 개뿔, 2km도 안 뛰었는데 목에서 피 맛 날 때 ‘이 짓을 대체 왜 하고 있는지 짜증 난 적이 없다면 단연코 거짓말이다. 아침에 더 자고 싶지 않았다면 15년 동안 거짓말한 거다.
그럴 때마다 선택은 ‘그래도 한다’ 쪽이었다. 효용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다만 효용이 있는 말든 운동했다.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를 좇는 게 허망한 일일지언정 부지런히 좇았다. 생각해 보면, 달그림자라는 것도 실제 달이 떠야 생기는 것 아니던가. 하늘에 조각구름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란 게 있다면, 나는 운동이라는 달을 나만의 하늘에 띄워 장천 띄웠던 것이다. 그게 호숫가에 비친 달그림자일지언정 내 발로, 내 몸으로 죽어라 좇았으니 내게는 튼튼한 다리가 길러졌다. 그게 정신 승리에 불과할지언정 나는 정신 승리를 할 줄 아는 몸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를 비웃지 말자. (아, 여기서 최초의 발화자는 제외.) 운동이 실로 달그림자라 하더라도 허상인지 실제인지 굳이 구분해 효용을 따질 필요도 없다. 다른 몸 아니라 내 몸으로 부딪혀온 운동의 잔재는 곳곳에 고스란히 남았다고 믿는다. 타고난 근육량이 현저히 부족해도 15년 동안 그 차이를 조금은 극복했을 테고, 타고난 근수저 언니와 흑수저인 나의 근육량 차이는 좀 더 줄어들었을 거다. 팔굽혀펴기를 할 줄 아는 몸과 몰랐던 몸에 대한 만족도는 당연히 전자가 월등하고, 물구나무서기 좀 보여달라고 조르는 친구들에게 괜히 묘기처럼 보여줄 수 있는 내가 그 순간만큼은 꽤 대견하다. 이 정도 합리화는 정신 건강에 좋다.
나는 오늘도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를 열심히 좇는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다가 처참하게 져도 누차 덤빈다. 게다가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란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더욱이 “아침 해가 떴습니다~”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하는 내 모습이란……! (자아도취 중이니까 훼방 금지!)
바보야, 문제는 회복이야
저속 노화라는 말이 모두의 추구미가 된 요즘. 저속 노화 식단과 함께 빠지지 않고 오르내리는 것이 바로 운동이다. 천천히 늙기, 그러니까 ‘잘’ 늙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고, 건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운동은 단시간으로 보면 고속 노화에 딱 좋은(?) 활동이다. 강도 높은 운동을 하게 되면 몸 안에서 노화에 관여하는 활성 산소가 무지막지하게 만들어지기 때문. 그렇다면 도대체 왜! 어떻게!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렇게 잔뜩 무리한 몸이 스스로 ‘회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건강해지는 것이다. 활성 산소를 빠르게 발생시키고 휘발시키는 활동을 반복함으로써 나쁜 활성 산소가 생길 때마다 “어라? 너? 나쁜 활성 산소? 꺼져!”라고 명령할 줄 아는 몸. 그것을 몸이 빠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기르는 과정이다. 운동은 이렇게나 다면적인 활동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운동만큼 중요한 것이 회복이다. 나이가 들수록 회복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한다. 신체의 기능이 정점을 찍는 젊을 때야 무리 좀 했다 해도 금세 회복되지만, 노화에 들어서면 회복할 시간을 불러 만들 필요가 있다. 운동 전에 준비 운동으로 워밍업을 하듯, 무리한 이후라면 쿨다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냥 누워서 쉬라는 것이 아니다. 심장이 뛸 만큼의 동적인 활동 후에는 정적인 스트레칭으로 몸이 회복할 시간을 줘야 한다. 회복은 내 몸에 내가 주는 피드백이다.
강도 높은 근력 운동이나 장거리 달리기를 하고 난 후 바로 눕거나 앉지 말고 스트레칭을 하라고 모든 운동 전문가가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는 이유다. 내 몸 어디가 오늘 특히 무리를 했고 불편한지, 거친 숨을 헐떡일 때 느끼지 못한 몸의 변화를 찬찬히 살피는 것이다. 내가 내 몸의 피드백이 되어주는 시간. 그게 바로 운동만큼이나 중요한 회복의 시간이다.
4년 전, 기자로 일하다 다른 직종으로 적을 옮기고 나서 인생 처음으로 번아웃이 왔었다. 주변을 살필 여유도 없이 일에 매달렸다. 회사 이름값이 당최 뭐라고 걸맞은 인정을 받고 싶어서 마구 달렸다. 그 글로벌 회사라는 곳은 글로벌답게도(?) 출퇴근이 불분명했고, 거의 24시간 돌아갔다. 내가 잘 시간에 미국에서는 뭔가 날아왔다. 하룻밤 사이에도 몇 명의 참조가 걸렸는지 가늠 안 되는 메인 체인이 줄줄이 이어졌다.
번아웃이 온다는 것은 내가 나를 밀어붙이고 밀어붙이다 막다른 길에 몰려 내지르는 비명 같은 거다. 주변은커녕 나 자신조차 돌볼 시간 없이 온통 일에 휘둘려 결국 내가 나를 놓아버릴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 그땐 그랬다.
디지털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컨펌하는 일이라 내가 자는 밤에도 온라인은 ‘온앤온 on&on’, 나갈 것은 나가야 했다. 24시간 스마트폰 알림 소리가 나를 불면으로 몰아갔다. 놓치기로 작정하면 그뿐인 것을, 하나도 안 놓치려고 스스로 불면을 이어갔다.
그렇게 1년여가 넘어갈 때쯤, 몸도 마음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가정의학과를 찾았다가 당장 일을 줄이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의사의 엄포를 들었다.
“이보세요 환자분, 번아웃이 온 거예요. 지금 환자분이 겪는 그게 번아웃이에요.”
몸과 마음 모두 탈탈탈, 바닥까지 힘을 써서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제야 반강제로 돌아보게 됐다. 내가 결단하지 않는 이상 일의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그대로 방치하면 연봉이고 명예는커녕 그보다 큰 병만 얻는 거였다. 나는 일 안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일과 나는 각자였고, 내 곁에 일은커녕 나조차도 없었구나 깨달았다. 내가 나를 발에 채는 돌처럼 굴렸구나, 현타의 순간이 왔다.
그게 바로 번아웃, 회복 없는 밀어붙임의 결과였다. 내가 어떤 것을 어려워하는지, 뭘 의미 있어 하고 재미있어하는지, 중간중간 스스로 되묻지 않으면 결과의 성공 여부에 따라 내 삶이 송두리째 휘둘린다는 걸 이때 알았다. 이뤄낸 것은 손에 잡히지 않고, 건강은 다 잃은 채 시간만 훌쩍 가 있었다. 그것도 고속으로.
당시 회사와 바이바이 하고 3개월을 내리 쉬었다. 월급 걱정만 하다가는 병원비가 더 들 거라고 스스로 타협했다. 쉬는 동안 그간의 일상에서 많은 것을 덜어냈다. 매분 매초 시달리던 업무 카톡에서, 아침 기상 때 업무 걱정에 찡그리던 미간에서, 쉼 없이 이어지던 릴레이 미팅에서, 사람들의 기대와 실망 사이 줄타기에서, 무엇보다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다가 하루하루를 길고 지루하게 썼다. 그렇게 나를 달래고, 늘려주고, 누그러뜨렸다. 그렇게 나는 회복이란 것을 했다.
일만 밀어붙이면 번아웃이 오는 것처럼 회복 없이 운동만 몰아붙이면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된다. 매일의 운동 이후 나는 짧게라도 반드시 스트레칭을 한다. 아기 자세로 매트 위에 엎드려 가빠진 숨을 서서히 달랜다. 팔을 위로 쭉 뻗어 지친 어깨를 풀어준다. 깊은 런지 자세로 한 다리씩 쭉쭉 늘려주고, 누워서 다리로 숫자 4 모양을 만들어 당기며 골반을 스트레칭 해준다. 양팔 벌리고 누워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양쪽으로 허리를 비틀어 긴장한 코어를 누그러뜨린다.
달래고, 늘려주고, 누그러뜨리기. 회복의 핵심이다.
단시간 나를 과도하게 썼다면 천천히 달래줘야 한다. 업무와 업무 사이, 운동과 일상 사이, 내가 나에게 주는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가 나를 돌보는 것은 무작정 나를 아껴주라는 전언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주는 실질적 피드백이다. 몸이 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으라는 신호다. 일순간 비명을 질러버리기 전에, 가만가만 읊조리며 뱉어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