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견하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법
 
지은이 : 챠오쟈 (지은이), 이에스더 (옮긴이)
출판사 : 알토북스
출판일 : 2026년 03월




  • 거창한 성공이나 대단한 답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매일 겪는 작은 흔들림을 차분히 들여다본다. 왜 감정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는지, 왜 비교와 평가에 쉽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현실의 사례로 풀어낸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다시 나를 만나는 시간

    감정을 다룬다는 것의 진짜 의미
    감정은 왜 엉뚱한 곳에서 터지는가
    우리는 성인이 된 뒤에도 감정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 불안정함은 혼자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 또렷하게 체감된다. 타인의 시선과 말, 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긴장이 느껴지는 순간 감정은 어느새 방향을 잃고 만다. 그래서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는 일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능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거나 훈련하지 않는다. 외부 상황을 기준으로 ‘지금 화를 내도 되는지’, ‘이정도 감정 표현은 허용되는지’를 가늠할 뿐, 정작 ‘왜 지금 화가 나는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지’, ‘내가 끝내 놓지 못하는 핵심은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를 권하곤 한다. 그 감정을 곧바로 해석하거나 결론부터 내리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찬찬히 바라보라는 것이다. 지금 느끼는 불편한 마음이 정말 방금 일어난 이 일 때문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든 것인지를 구분해 보라는 뜻이다.

    감정은 대개 이성적 판단보다 먼저 반응한다. 그 근원을 차분히 살펴나가면 ‘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스치듯 부딪히거나 발을 밟고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대개 그 일로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 행동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마음 상하는 일을 겪었거나, 상사의 기분 나쁜 말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동일한 일에서도 감정은 쉽게 거칠어지고, 평소라면 가볍게 넘겼을 일에 예상보다 큰 화가 앞서 튀어나온다.

    그때 우리가 분노를 쏟아내는 대상은 정작 그 원인을 만든 그 사람이 아닐 때가 많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람이나 가장 만만한 존재가 대신 감정을 떠안는다. 평소의 나였다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을 그날의 나는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감정은 언제나 현재의 자극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이미 쌓여 있던 감정이 작은 계기를 빌려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래서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그 순간에 벌어진 일을 급히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이전에 이미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마음을 찬찬히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감정을 관찰한다는 것은 지금의 불쾌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묻는 과정이다.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오래 억누르다 보면, 결국 터지지 말아야 할 순간에 표출된다. 그때 감정은 정작 원인이 되었던 곳이 아니라 우연히 곁에 있던 사람이나 상황에 전가된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과 상황들이 내가 미처 다루지 못한 감정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

    따라서 감정을 전이시키지 말아야 하며 문제가 생긴 그 자리에서 가능한 정리를 해야 한다. 바깥에서 생긴 마음의 무게감을 그대로 집 안으로 가져오지 말아야 하며, 집에서의 감정 역시 바깥으로 끌고 나가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불편한 감정이 새로운 공간에서 또 다른 충돌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작은 마찰이 반복되고 점점 엉키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그저 ‘오늘은 운이 없었다’고 말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게 될 수 있다.

    모든 감정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하는 일을 피하려 한다. 화가 난 감정을 말하는 순간, 자신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 걱정이 전혀 근거 없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시간을 겪는다. 마음이 옹졸해지고 복잡해지며, 판단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밀어내느냐, 아니면 알아차리느냐다. 우리는 종종 불편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이유와 핑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다 보면 사실은 단순했을 문제도 괜히 복잡해진다. 상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 역시 마음이 조급해진다.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자신을 꾸미는 일이 아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바라보고, 그다음의 행동을 선택하는 일이다.


    관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
    상처가 나를 움츠러들게 하지 않도록
    자신감처럼 보이는 불안
    인터넷에서 “외국에 나간 뒤 당신의 시선은 어떻게 달라졌나요?”라는 질문을 본 적이 있다. 여러 답변 가운데 유독 오래 마음에 남은 답변이 있다.

    “밖에 나가 보니 나 역시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게 칭찬받아도 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 글을 접했을 때 나와 동갑인 친구 S의 고백이 떠올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너를 알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게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준 적이 없었어. 더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이미 충분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지. 다들 계속 바꿔야 한다고만 했어. 그런데 사실 나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었거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이 이미 충분히 애써 왔다.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해냈고, 인간관계에서도 함부로 굴지 않으려 애썼다. 찾아온 기회 앞에서도 가볍게 넘기지 않고, 나름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런데도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협력업체는 사소한 문제를 과하게 문제 삼고, 약속된 대금은 이유 없이 미뤄진다. 윗사람들은 말을 바꾸고, 직원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어긋난 방향을 쉽게 고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다시 같은 말을 듣는다.

    “조금만 더 힘내서 열심히 해 보자.”

    하지만 이런 말은 위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이미 충분히 애써온 사람에게 더 노력하라는 말은 자신을 계속 부족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이 곧 자신의 몫을 줄이는 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을 누르거나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 한다. 그 말에는 ‘너는 내가 희생해 줄 만큼의 가치가 없어’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사람의 마음이 닫힌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칭찬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우나 보상은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분명 잘해 낸 일이 있는데도 그것을 능력 부족의 문제로 돌린다면, 그 원인은 상대에게 있기보다 나의 태도를 돌아봐야 한다. 괜히 사소한 흠을 들춰내며 상대를 낮추고, 마땅히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이런 모습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색함이자, 은근한 냉정함의 한 형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늘 비교 속에서 자라왔다. 이른바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기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늘 부족한 쪽에 자리하곤 했다.

    “너는 왜 그만큼 못 하니?”,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

    부모는 그 말이 아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 믿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여밀 수밖에 없다. 그 단단함은 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붙잡아 온 결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긍정하며 살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는 조건이 조금만 좋아져도 쉽게 들뜨고, 반대로 조금만 불리해져도 곧바로 위축되는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자신감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비교와 불안이 깊게 자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생각보다 많은 이가 ‘괜찮은 나’를 안정적으로 믿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요즘 부모 세대는 자신이 자라며 겪었던 압박과 상처를 기억하기에 자녀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지금의 너도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의 필요
    우리는 타인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꺼낸다. 하지만 그 친절이 경계를 잃는 순간, 요구는 점점 커지고 부담은 한쪽에 쏠린다. 그렇게 관계는 불균형해지고, 누군가는 자신의 몫을 조금씩 빼앗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요구받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정말 이 모든 게 내 잘못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백 점이 아니면 틀린 걸까. 눈에 띄는 성과가 없으면 실패한 걸까. 거절당한 경험이나,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 일, 다수의 길에서 벗어난 결정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어느 것도 본질적인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가 아니라 잘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된 태도에 있다. 애초에 조건을 달고 주어지는 인정은 오래가지도, 온전히 가능하지도 않다. 어느 대만 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높은 EQ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 목적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데 있지 않다. 타인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EQ가 높은 것이 아니라 가장 나쁜 선택이다.”

    오늘날 우리는 외모든 성격이든, EQ든 IQ든 어떤 부족함도 허용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마치 흠 하나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존중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지나치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부르는 많은 것은 결함이라기보다 한 사람을 이루는 고유한 특성에 가깝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을 드러낸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모두에게 호감을 얻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조심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타인의 옹졸함이나 부당한 요구까지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잘해야 한다’는 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조금 덜 완벽해도, 그 삶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나를 소모하지 않는 거리
    즐거움을 가로막는 잘못된 전제들
    나는 왜 늘 뒤처진 것처럼 느껴질까
    실제 삶에서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그 고민의 한가운데에는 대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 자리한다. 특히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불만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친구들은 모두 나보다 잘 지내는 것 같고, 또래들은 어느새 한발 앞서 있는 듯 보인다. 한때는 나보다 출발선이 낮아 보였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훨씬 안정된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에게는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내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운이 따르지 않았던 걸까?’

    사람의 마음은 참 아이러니하다. 혼자 힘으로 정신적, 감정적 만족을 만들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비교를 통해 감정을 느끼는 일은 놀라울 만큼 쉽다. 나보다 더 잘나 보이는 사람을 떠올리면 이유를 따질 새도 없이 좌절감이 밀려온다. 반대로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떠올리면 안도감이나 묘한 만족감, 때로는 연민 같은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비교는 이렇게 우리의 감정을 빠르게 흔들며, 잠시나마 마음을 붙잡을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런 위안은 오래가지 않는다. 비교가 멈추지 않는 한, 마음 역시 좀처럼 평온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동창들이나 익숙한 업계 지인들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가 크게 출세했다는 소식, 트렌드의 중심에 섰다는 이야기, 혹은 경제적으로 한층 여유로워졌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마음이 가라앉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빨리 가는데, 나는 아직도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까?’
    ‘저 사람은 성공한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보일까?’

    이 질문들은 대개 비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비교는 늘 가장 눈에 잘 띄는 몇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다 보면 마음은 금세 조급해지고 자신을 괜히 더 몰아붙이게 된다.

    그 순간 아주 잠시만 여유를 갖고 인내할 수 있다면, 시야는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을 한 사람씩 떠올리며, 지금 각자가 어떤 삶의 자리에 서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선택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하나씩 들어본다면,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편안해질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대개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쉽게 얻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
    둘째, 나보다 운이 좋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동시에 나보다 훨씬 더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것.
    셋째, 인생의 경로는 서로 달라도, 결과의 결은 생각만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

    이쯤에 이르면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우리가 그동안 집요하게 바라본 것은 늘 잘나가는 몇 사람의 모습뿐이었다. 그들의 속도와 성과를 기준으로 삼아 내 삶도 그래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쳐 왔던 것이다. 비교의 범위를 조금만 넓혀 보면 삶은 생각보다 덜 가혹해진다.

    유명 연예인들을 떠올려 보아도 비슷하다. 어떤 이는 하루에도 수천만 원을 벌고, 1년이면 수십억을 벌며, 수백억 원짜리 집을 사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저만큼 벌고도 왜 멈추지 않을까?’

    하지만 이 질문은 곧 다른 물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멈출 수 있을까?’

    현실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하루에 수백만 원을 버는 사람들은 몸을 갈아 넣듯 하루를 견뎌낸다. 그렇다면 하루에 수천을 버는 삶은 어떨까. 한 사람의 성취 뒤에는 수많은 스태프와 시스템이 함께 움직이지만, 그보다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체력이다. 수년간 쌓아온 준비와 반복되는 소모는 매일같이 이어지고, 잠시 생긴 틈마저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데 쓰인다.

    숫자만 놓고 보면 부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느냐일지도 모른다. 비교는 잠시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지만, 삶은 결국 각자가 견딜 수 있는 무게만큼만 이어진다.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원하고, 또 성공을 동경한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우리가 정말로 끌리는 것은 성공 그 자체라기보다 그 위에 덧씌워진 ‘우연성’인지도 모른다. 마치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머리 위로 커다란 선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성공을 하나의 건축물에 비유해 보면 이렇다. 우리는 완성된 외관을 바라보며 감탄하지만, 그 건물을 세우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지는 쉽게 떠올리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를 얼마나 깊이 다졌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견뎌냈는지는 잘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과연 그만한 수고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압박을 오래 견딜 수 있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을 묵묵히 버텨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이 이 질문 앞에서 한 번쯤은 걸음을 멈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누군가는 운이 좋아 노력 없이 성공했다고 믿고, 왜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오지 않는지 괴로워하며 자신을 몰아붙인다. 비교는 이렇게 과정을 지워 버리고 결과만 남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성공은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우연에 맡겨진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갑자기 출세한 것처럼 보이는 친구 역시 그 이전에 남들보다 더 긴 시간과 더 많은 인내를 견뎌냈을지도 모른다.

    그가 참고 버티는 동안 우리는 상대적으로 편안함을 선택하며 살아왔을 수도 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인생 목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할 뿐이다. 누군가가 선택한 길에는 그에 맞는 종점이 있고, 내가 선택한 길에도 또 다른 종점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운명적인 요소도 섞여 있겠지만, 결국 어떤 길을 택했는지가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절대적으로 동경할 만한 인생은 없다. 우리는 각자 다른 출발선에서 다른 길을 선택해 살아갈 뿐이다. 다만 길의 중간쯤에 이르러 흔들리기도 한다. 마치 어떤 길의 끝에만 보상이 있고, 그곳에 닿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선택이 모두 틀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하나의 길로만 증명되지 않는다. 어디에 도착했느냐보다 내가 선택한 길을 어떤 태도로 걸어왔는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