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괜찮다
 
지은이 : 이의수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0년 01월




  • 20대에는 30대가 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 여긴다. 30대에는 40대가 되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어도 중년은 여전히 불안하고 흔들린다. 여전히 아프다. <br><br>저자는 남편으로, 아버지로, 사회인으로 살아온 중년 남성들의 삶에 주목한다. 여러 가지 역할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허덕이며 충실하게 살아온 그들이 왜 인생의 중턱에서 주저앉아 힘겨워하는지 그들의 아픔에 공명한다. <br>


    다, 괜찮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영혼은 없다

    더 많은 아픔과 상실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한다

    중년의 상실감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온다. 꼭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만 찾아오는 게 아니다. 실제로 잃어버린 것이 없어도 상실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중년기를 흔히 ‘제2의 사춘기’ 또는 ‘사추기(사추기)’라고 부른다. 사춘기 못지않은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는 의미다. 중년이 되면 뚜렷한 이유 없이 마음이 허전해지고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곤 한다.


    이전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없는데도 소중하게 여겨온 것을 갑자기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빠지곤 한다. 아무리 활기차게 살려고 해도 더 이상 젊어질 수 없고, 젊은이들처럼 힘차게 해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오는 상실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중년에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인생의 반 이상을 살아오면서 시행착오를 거쳐 쌓아온 통찰력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깊이 있게 헤아리는 것은 젊은 시절에는 하기 어렵다. 오랜 경험으로 단련된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이루어나가는 중년은 경험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해나가는 젊은 시절과는 다르다. 젊은 시절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이제는 생각할 수 있고 시도해볼 수 있다. 청년기에는 젊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중년기와 노년기에는 연륜이 쌓였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무엇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고 생각해야 한다. 돌아갈 수 없는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지 말고 지금 자신의 나이를 안아주어야 한다.


    중년에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여 성공이라는 눈에 보이는 과실을 따먹는 삶보다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동안 보지 못했고 느껴보지 못했던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한다. 타인과 경쟁하고 비교하며 1등만 최우선으로 여기는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모든 것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상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생각과 마음이 넓어지고 성숙해진다는 의미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재산을 늘리는 것과 욕망을 줄이는 것. 전자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후자는 마음가짐으로도 언제나 가능하다.”


    상실을 절대로 겪지 않겠다는 욕망을 버리고 상실이 언제든 우리 앞에 닥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 상실로 인한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언젠가는 겪게 될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겪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을 열고 숨을 크게 쉬며 넓은 가슴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잘 감당했던 것처럼 앞으로 닥쳐올 인생의 폭풍들을 담담히 이겨내야 한다. 상실을 잘 감당해나갈 때 삶의 가장 어둡고 슬픈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상처를 치유하는 여섯 가지 명약

    진심 어린 후회가 인생을 리셋한다


    큰딸아이가 대학 졸업생이던 시절, 딸아이는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공부를 계속 해야 할지, 아니면 현장에서 경험을 넓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신입생 때 아빠가 대학생활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얘기해 주시곤 했잖아요. 그때 제가 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지 후회돼요. 그땐 그냥 너무 놀고만 싶어서 어떻게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할지 생각도 안 했거든요.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요.”


    딸아이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앞두고 지나온 삶을 후회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미 이룰 수도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 챙기고 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깊이 후회ㅣ하고 반성하며 고통의 터널을 건너고 있었다. 나는 딸아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소중한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데 시간을 낭비했구나 싶을 거야. 누구나 그렇게 후회하면서 살아. 그래도 네가 보낸 순간들이 즐거웠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시간이니 너무 자책하지 마.”


    그날 딸아이의 이야기는 마치 중년들이 털어놓는 고민 같았다. 중년기는 가정과 일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면서 제법 안정되는 시기다. 그래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떠올리거나 새로운 일과 사람을 경험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성취한 것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고, 새로운 일과 사람을 접하기엔 두려움이 엄습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려면 지나온 삶을 되짚어야 하는데 여태 저지른 실수와 실패를 되새길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 또한 마흔을 앞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이것밖에 이루지 못했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나 후회하며 매일 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고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도 싫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힘들고 하루 일과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남들보다 더 노력한 끝에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도 발견했다.


    그런 마음속 진실을 깨닫고 난 뒤, 나는 내 안의 교만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 애썼다. 교만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러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교만은 그런 두려움이 드러나지 않도록 나를 포장하는 감정적인 껍데기였다. 나의 마음과 삶을 후회하는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이고 뛰쳐나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나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내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려 노력했다.


    그렇게 나와의 외로운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최선을 다한 일들은 결과와 상관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앞으로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끝나든 겸허히 인정했따. 일하는 과정 속에서 성실하게 노력한 나를 마주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나쁜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였따. 결과만을 두고 나를 격려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 자체를 격려하게 된 것이다. 쉰 살이 훌쩍 넘은 지금, 그때 했던 후회들이 뼈가 되고 살이 되었음을 절실히 느낀다.


    살아간다는 건 후회할 일들을 쌓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후회할 일을 가슴 깊숙이 후회하기란 쉽지 않다. 잘한 일은 부풀려 자랑하고 싶지만 잘하지 못한 일은 떠올리기조차 불편해한다. 진심으로 후회한다는 건 잘하지 못한 일을 담담히 마주하고 왜 잘하지 못했는지 진솔하게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게으름과 무지로 주어진 일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는지, 교만과 자만으로 사람들을 낮추어 대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회피하고 싶은 일들을 용기 있게 마주하고 진심으로 반성할 때에야 진정한 후회가 가능해진다.  



    버리고 비우는 단순한 삶의 즐거움

    오로지 오늘의 나로 살아가는 기쁨

    사람들은 누구나 힘든 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내일이라는 미래는 더 나은 기쁨과 여유, 성공을 안겨줄 거라고 기대한다. 어쩌면 내일은 지금이라는 힘든 시간을 잊조 희망을 품게 하는 도피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내일로 미루면 정작 오늘이라는 현재를 제대로 살기 어렵다. 오늘 한 일이 내일 할 일을 결정한다는 사실도 깨닫기 어렵다.


    우리는 시간만 지나면 당연히 내일이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일은 오늘을 잘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오늘을 열심히 산 사람만이 내일도 열심히 살 수 있다. 오늘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내일도 가치 있는 시간들로 채울 수 있다.


    인간은 평생 동안 세 권의 책을 쓴다고 한다. 첫째는 과거라는 이름의 책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이것은 이미 완성되어 책장에 꽂혀 있다. 둘째는 현재라는 이름의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지금 나의 선택과 현실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셋째는 미래라는 이름의 책이다. 나의 꿈과 소망, 기대에 따라 앞으로 쓰일 책이다. 어떤 책을 더 열심히 쓰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리에게는 어제라는 과거와 오늘이라는 현재, 내일이라는 미래가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죽지 않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여기며 오늘을 의미 없이 허비한다. 그 끝에는 나의 죽음이 있고 시간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중년에게 죽음은 더 이상 이방인 같은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순식간에 앗아간다. 특히 무한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주어져 있다고 여기던 하루하루의 시간을 단숨에 빼앗아버린다. 죽음이 찾아오고 나서야 우리는 오늘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당연하게 여겨 그 가치를 인정하지 못했던 오늘의 시간을 소중하고 충만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낀다. 살아 있는 존재만이 오늘을 충만하게 살 수 있고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갈 수 있다.


    중년이 되면 새로운 것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누리는 것에 변화가 생기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즐거움을 오늘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새로운 아침을 기대하기 어렵다. 어제 누린 즐거움은 어제의 것이지 오늘의 것이 아니다. 오늘 펼쳐지는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날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아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매일을 새롭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설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친구를 먼저 보낸 뒤 나는 결심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오늘 내가 누려야 할 나만의 즐거움과 목표만을 생각하며 살기로. 오늘 누려야 할 즐거움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오로지 오늘이 즐거운 삶을 살기로.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만 오늘의 태양은 내일의 태양과 다르다. 나는 매일을 살아가지만 오늘을 사는 나와 내일을 사는 나는 다르다. 나는 오늘 떠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오로지 오늘의 나로 살아가고 싶다. 오늘을 잘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 배웅해주는 사람은 가족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

    자녀들은 부모의 이해와 사랑을 원한다. 어설픈 위로와 훈계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을 열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된다. 그래야 아이도 자신의 심정과 상황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 그러려면 가족 사이에도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요즘도 가정돠 회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많다. 모처럼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오느새 아이보다 우위에 서서 자꾸 무언가를 가르치고 지도하려고 한다.


    “요즘 공부는 어때? 어떤 식으로 공부하고 있어?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는 게 좋지 않겠어?”


    그건 이렇게 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잘못됐다... 학생과 면담을 하는 건지 자녀와 대화를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졸지에 아버지는 선생님이고 아이들은 학생이 된다. 자녀와의 대화가 면담 시간으로 바뀌는 건 평소 자녀와 함께하던 시간이 적다 보니 기회가 있을 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려는 아버지의 의욕 탓이 크다. 문제는 의욕이 지나쳐 자녀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한 번 닫힌 자녀들의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걸 꺼리는 경향이 있다. 문자메시지나 이메일, 인터넷 채팅과 메신저 같은 디지털 기기로 대화하는 데 익숙하고 그것을 편하게 여긴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땐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한다. 기기 속으로 ‘은둔한’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훼방꾼일 뿐이다. 아이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이 대화가 단절된 채 조용한 가족으로 살아간다. 사랑만 해도 모자랄 가족들이 왜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마음을 닫고 침묵할까. 사랑의 힘으로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사랑을 계속 키워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족인데 무슨 노력이 필요해?” “사회생활도 피곤한데 집안에서까지 노력을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게 가족 아니야?”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집 밖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는데 집에서까지 특별한 노력을 하고 표현을 해야 한다니 너무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절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많은 아이들이 아버지보다 엄마를 더 편하게 여기고, 엄마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며 정서적으로 더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 있다. 굳이 뭔가를 억지로 가르치고 주입하지 않아도 아이들 앞에서 걸어가는 아버지의 삶 자체가 아이들 삶에 등불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가장으로 열심히 살았으니 내 역할은 다했다는 식의 아버지 상은 지나갔다. 이제는 묵묵히 앞장서서 걸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아이들과 손잡고 함께 걸어가는 아버지가 필요한 시대다. 뒷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다. 아이들과 적극적으로 친밀감을 형성하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진심으로 다가가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가장이란 그저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은 돈으로만 자라지 않는다. 진심 어린 관심과 말 한마디가 아이들을 키운다.



    나는 나로 충분하다

    나의 관심이 가장 필요한 건 나 자신

    우리는 알 필요 없는 정보까지 인터넷 검색만 하면 세세히 알 수 있는 정보 과잉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나와 하루 종일 같이 사는 것도, 행복한 삶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런데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말로 잘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관성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어제까지 그 일을 해왔으니 오늘도 그 일을 할 뿐이고,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관성의 법칙대로 살다 보면 어느새 관성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사람들이 하루 동안 가장 많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질문은 “지금 몇 시지?”라고 한다. 자기 자신은 살피지 않더라도 시간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너 어디 있니?”라면, 가장 많이 만지는 물건은 휴대전화라고 한다. 휴대전화는 생활필수품을 넘어 거의 신체 일부가 됐다. 생각해보니 내 이야기 같아서 순간 뜨끔해진다.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시간도 휴대전화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내가 나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나의 하루는 즐거운 24시간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하고 통제받아야 하는 하루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될 수 있다. 내가 나에게 관심 갖는 순간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는 출근해서 언제나 하는 일이 있다. 나 자신을 위해 커피를 갈고 정성스럽게 드립하는 일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커피를 내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따뜻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오늘도 이 커피처럼 기분 좋게 살아보자!’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하게 되면 일상에 숨어 있는 작은 행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하찮은 일들이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나를 배려하고 내가 원하는 행복을 준비해둘 거리는 기대는 거두는 게 좋다.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십분 만이라도 나만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이기주의자가 된다면 굳이 누군가의 관심과 배려를 갈망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행복을 준비하고 실천해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 자신을 배려할 줄 알아야 타인도 배려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나의 행복을 책임질 줄 알아야 타인의 행복도 책임질 수 있다.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여러 번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나만의 인생 여행 가방을 꾸려라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무엇일까. 바로 짐을 잘 싸는 일이다. 여행 가방을 쌀 때 필요 없는 물건은 덜어내고 꼭 필요한 물건만 남겨야 한다. 그래야 여행 내내 가뿐하게 움직이고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은 마치 꼭 필요해서, 또는 꼭 필요해질 거라고 생각해서 잔뜩 짐을 집어넣어 불룩해진 여행 가방과도 같다. 중년에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로만 채워 넣은 새로운 인생 여행 가방을 꾸려야 한다. 앞으로 남은 여행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중년의 인생 여행 가방은 꼭 정리되어야 한다.


    나는 나의 인생 여행 가방 정리하는 법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배웠다. 2014년 여름, 산티아고로 떠나겠다는 결심을 한 뒤 나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특히 짐이 가장 문제였다. 한 달 일정이다 보니 챙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목디스크에 비염이 있는 나는 한 달간의 순례길을 위해 약과 스프레이만 1.5킬로그램을 챙겨야 했다. 평상시에 입는 내의보다 무겁지만 땀 흡수율이 좋은 기능성 속옷도 두세 벌 넣었다. 이렇게 가득 채우고 나니 정작 중요한 짐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언가를 덜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마침내 13.5킬로그램의 배낭이 준비되었다. 더는 줄이기 힘들었다. 중년은 필요한 게 참 많은 나이다. 그만큼 필요한 걸 구하는 지혜도 늘어난다. 문제는 지혜가 염려나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곤 한다는 점이다. 나 또한 순례길로 떠나기 전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3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지고 한 달 동안 걸어본 경험이 없기에 혹시 중간에 병이라도 나지 않을까, 중간에 포기하면 어쩌나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 저녁에 연습 삼아 10킬로미터를 걸어보았다. 걸을 만했다. 짐도 잘 쌌고, 걷는 데도 문제가 없으니 은근히 자신감이 생겼다.


    순례길이 시작되는 첫날, 프랑스 생장에서 나는 새벽 6시부터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깨달았다. 걸을 만하다는 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산티아고 순례길은 서울의 우면산이나 청계산을 오를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다리통은 터질 것 같고 땀은 주룩주룩 흐르고 숨은 내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빠왔다. 젊은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데 나만 뒤로 처지기 일쑤였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배낭 안의 모든 짐들을 다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무리 작정하고 왔다고 해도 하루 종일 낯선 길을 걷는 건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첫날부터 발에 물집이 잡혔고 등에 멘 짐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옷을 세 벌이나 버렸다. 무거워서 감당이 안되거나 없어도 되는 짐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처음에 짐을 쌀 때는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우겨 넣었던 짐들인데 시간이 갈수록 없어도 되는 물건이 되어갔다. 그렇게 짐을 계속 줄이다 보니 돌아올 때는 7킬로그램 정도가 되었다. 가져간 짐 중에 반 정도는 필요 없었다는 얘기다. 양말 두 켤레와 긴 바지와 티셔츠 한 벌, 갈아입을 반바지와 짧은 셔츠 하나면 충분했다.


    짐을 줄이니 걷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짐이 무거울 때는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이 나고, 내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나 후회스럽기도 했는데 배낭이 가벼워지니 기분마저도 가벼웠다. 보통 하루에 40~50킬로미터를 걸었는데, 새벽 6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오후 4시 정도면 다음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다. 20킬로미터를 걷고 점심을 먹은 뒤 30킬로미터 정도를 걸으면 되는 여정이었다. 걷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보니 여유 있게 걸어도 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풍경을 감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사진에 담고, 너무 힘들 때 쉬었다 걸어도 충분했다.


    산티아고에 가기 위한 짐을 싸고, 그 짐을 산티아고에서 버리면서 나는 사는 것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굉장히 많이 필요하고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주 최소한의 것으로도 충분하다. 무언가 많이 짊어지려고 할 때 우리 인생길은 피곤과 짜증과 부담이 된다. 나에게, 혹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집중할 수가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행착오가 나를 완주하게 했다. 나는 실패의 순간을 시행착오 또는 노력 중이라는 단어로 바꿨으면 좋겠다. 첫날의 시행착오는 내가 도착지까지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며 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이 세상에 어려움을 한 번이라도 겪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처음 부딪친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남은 어려움도, 앞으로 닥칠 어려움도 잘 풀어갈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사실, 인생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복잡하게 살려면 한없이 복잡하지만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그것에 확신이 있다면 심플하고 명료하게 살 수도 있다. 그렇게 명백한 목적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힘든 게 인생이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니 나만의 배낭에 나만의 짐을 꾸려 천천히 지치지 않고 가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긴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이긴 자라고. 우리 모두 인생의 승자가 되는 날까지 지치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가자. 묵묵한 성실함은 그 무엇보다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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