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지은이 : 베스 에번스(역: 이은숙)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1년 08월




  • 사소한 실수 때문에 전전긍긍하느라, 내 마음 같지 않은 인간관계에 힘겨워하느라,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에 묶여있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br><br>누구나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꿈꾸고 완벽한 어른이 되길 원하지만, 어른이 되는 매뉴얼은 세상에 없다. 누구나 수많은 실수를 거듭하며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수없이 실패하며 어른으로 성장해나갈 뿐이다. <br><br>다른 사람들이 앞서 나가 있다고 해도 괜찮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고, 나보다 못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다들 나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온라인 상에서 여러 인맥을 쌓고 넓히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는 특별한 영역의 지옥이 있다. SNS의 ‘친구찾기’ 기능은 학교 동창들을 찾아내서 눈에 불을 켜고 자기 자신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왜곡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SNS는 밤이면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부여잡고, 알고 보니 자신이 평균 수준도 안 된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하려는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된다.


    동창들이 일하는 근사한 직장과 그들의 인맥을 보노라면, 지금 나의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SNS에 들어가 보면, 내가 불행한 이유가 수천수만 가지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거의 모든 면을 남들과 비교한다. 내가 누군가보다 어떤 점이 더 나은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사람들의 프로필을 눈여겨보고, 그들의 사진이 참 어른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며 몇 시간씩 허비하곤 했다. 의대생, 교사, 법대생 같은 사람들은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결혼해서 가정까지 꾸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쓸데없이 경쟁심이 고개를 들고, 내가 그들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돌아보는 일은 충분히 힘들다.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변변찮게 말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 애들은 좋은 직장을 구하고, 친구들도 엄청 많아. 하지만 난 오늘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았지.”


    발전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작은 일이라고 해도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발전이고 대단한 일이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고, 나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비교와 경쟁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이다. 발전과 성공에 대한 정의는 스스로 만들기 나름이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의뢰하거나, 온라인에서 아는 사람을 찾아보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 것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 발짝 뒷걸음질 친다고 해서 세상 끝이 아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자체가 대단할 수 있다. 때로는 그런 것이 실질적인 발전이다. 엄마 친구 아들이나 딸이 어떠하든, 이 점은 놓쳐서는 안 된다. 나답게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공이다.


    감정 표현은 퀵 배송처럼

    내가 느끼는 감정이 편한 것이든 불편한 것이든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깨우치는 건 극도로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무예를 배운 적이 있었다. 방과 후 활동으로 시작한 무예를 배우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학급 친구들과 어울리고, 너무 격하지 않게 조심하며 대련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하지만 새로 온 남자 사범이 수업을 맡으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그 사범은 지나치게 진지해서 딱 봐도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수업 전에 들렸던 웃음소리는 이내 사라졌고, 우리는 조용히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그 사범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그가 맡은 반이 많지 않아서, 나는 계속 다른 사범들과 함께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며 수련할 수 있었다. 동작이 서투르긴 했지만, 그래도 나아지려고 노력하면서 여전히 즐겁게 지냈다. 내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 때면 사범들이 인내심을 갖고 도와준 덕에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내가 상급 레벨이 됐을 즈음, 그 남자 사범이 무예 수업을 전부 맡게 됐다. 대련 연습 때 다른 사범들은 학생들의 실력을 염두에 두고 그걸 고려해서 상대했다면, 그 사범은 인정사정없이 온 힘을 다해 나에게 덤벼들곤 했다. 늘 내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기 직전에 멈추기는 했지만, 중년 남자가 전력을 다해 덤벼드는 바람에 매번 지는 뻔한 결과를 겪게 되니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 사범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게 되면서는 의욕이 열 배는 더 줄어들곤 했다.


    그는 수업 전에 웃음소리가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수업 중에 우는 건 질색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수업 시간마다 매번 울게 되곤 했다. 내가 동작을 제대로 하려고 애쓰면서 다른 아이와 겨루고 있으면, 그가 끼어들어서 내 동작을 지적하며 면박을 주곤 했다. 보통 다른 사범들은 내가 긴장한 듯 보이면, 긴장을 풀 시간을 주면서 다시 한 번 해보자고 용기를 북돋워 줬다.


    하지만 그는 배려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또 울 거냐?”라고 물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나는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동작을 정확하게 못 할까 봐 불안해서, 한편으로는 내가 눈물을 흘릴까 봐 너무 두려워서 결국 울게 되고 말았다.


    그는 “울 거면 교실에서 나가”라며 권위적인 태도로 친구들 앞에서 나를 내쫓았다. 학부모들이 기다리고 있는 복도로 쫓겨나는 일은 굴욕적이었다. 거기서 내 감정을 추슬러야 했지만, 너무 창피해서 애꿎은 신발 끈만 몇 번이고 풀었다 다시 매곤 했다. 그러면 알람을 맞춰놓은 것처럼 정확하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복도로 나와서 “이제 좀 진정됐으면 들어와”라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내가 긴장해서 자제력을 잃으면 그가 내게 면박을 주고 교실에서 내쫓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는 결국 무예 수업을 그만두게 됐다.


    비록 무술 동작과 반응 시간, 그리고 신체 조정력을 키우는 데 몇 년이라는 긴 시간을 쏟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고작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어떤 감정이든 드러내는 건 좋지 않다는 것과 완벽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해져야 했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감정은 뭐든 억누르는 법을 터득했고, 누구든 내가 우는 모습을 볼까 봐 전전긍긍했다. 눈물은 창피함의 이유가 됐고, 모든 일에 완벽하게 대처하는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이 내 삶의 불타는 염원이 됐다.


    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과 좋지 않은 감정은 뭐든 감추는 것에 집착했다. 그러면서 그냥저냥 내 역할을 했지만, 그건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듬어진 모습만 세상에 보여줬고, 그래서 사람들은 내 안에서 커지고 있는 모든 큼과 균열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건 건강한 방식의 삶이 아니었다. 좋은 나쁘든, 유쾌하든 불쾌하든, 감정은 감정이다. 그런 감정은 원하던 원치 않던 드러내야 한다.


    누구나 감정을 다스려야 할 때가 있을 텐데, 그것을 감추면 괴로움만 더 깊어진다. 자기감정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인정할수록,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편해질 것이다.


    행복은 정말 선택할 수 있는 걸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살아!”

    “요가를 해봤어?”

    “행복은 선택이야!”

    “정말이야.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도 좋아져.”


    정신 건강 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누군가 우울해하거나 불안에 시달리는 걸 알게 되면 “이런 걸 먹어라”, “저런 운동을 해라” 하면서 간섭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울한 기분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노력하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옆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해대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진다.


    ‘긍정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좋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그러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힘든 일이다.


    긍정성이란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중요한 일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개념이다. 긍정성이란 말의 정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내게 적절한 정의는 나만이 내릴 수 있다. 긍정성은 우리 각자에게 맞도록 조정해야 하는, 고유하면서 또 개인적인 개념이다. 내가 내린 정의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이 내린 정의를 강요할 수 없다.


    정신 건강에 효과가 있다는 방법이 나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시리얼을 먹을 때 기운이 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는 요가를 집어치우고 강도 높은 달리기를 하는 것이 기분 전환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하루하루가 좀 더 편해질 것이다. 그런 방법은 나에게만 중요하고 특별하다.


    계속 앞으로

    학창 시절 괴롭힘에 시달렸다면, 그런 사실을 잊고 살기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나는 성인이 된 오늘날까지도 비웃음, 놀림, 괴롭힘과 싸우고 있다. 사람들로 인해 오랫동안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면 여전히 그런 상황에 계속 머물러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괴롭힘을 당했을 때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분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할 때는 특히 더 어렵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괴롭힘의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모른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우쳤다.


    문제는 결단코 내가 아니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는 모든 이유가 내게 있다고 생각했다. 안경을 썼고, 매력적이지도 않으며, 별난 것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괴롭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웠다. 그들이 하는 말이 다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게 훨씬 나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뭘 어쨌기에 사람들이 나를 그토록 싫어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지독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마음에 끌리는 것을 좋아하면서 내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런 삶이 정말 아름답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괴롭힘은 미래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학교와 직장,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집단 괴롭힘도 생겨나고 있다. 이런 괴롭힘을 경험하게 되면 사람들과의 교류에 부담을 느끼며 피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는 친절하지만, 등 뒤에서는 비웃는 것을 수년 동안 겪어 왔기에 여전히 그런 문제와 싸우고 있다. 이런 싸움에서는 내가 맺고 있는 긍정적인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반드시 전통적 의미의 관계일 필요는 없다. 일례로 나는 식물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식물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험담을 하지는 않는다. 괴롭힘 때문에 여전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괜찮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편해진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는 아무 의미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말이다. 예전에 내가 힘들어 할 때면,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거고, 언젠가는 끝날 거라고 조언해줬다. 그때는 그런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힘든 상황을 잊고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책과 음악, 그리고 진정한 친구들과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 것은 시간이었다. 시공간적으로 나를 괴롭힘 사람들과 거리감이 생기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


    어른이 되었다고, 삶이 길이 늘 상상했던 대로 펼쳐지는 건 아니다. 못된 사람들이 여전히 내 주위에 있지만, 그들을 무시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내 곁에 있는 괜찮은 사람들이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고, 좋아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허구한 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 생각을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 자체가 한 걸음 나아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에게 친절해도 괜찮아

    내 머릿속 생각 중 절대 떨쳐낼 수 없는 고민 한 가지는 내가 괜찮은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머리는 최악 중의 최악의 기억만 꺼내주었고, 나는 지난날의 인간관계와 실패한 일들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나 자신을 평가하곤 했다. 또한 주위 사람들로부터 내가 끔찍한 사람은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어 했다. 이는 솔직히 모두를 피곤하게 하는 일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내 머리는 좋은 사람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왜곡된 정의들을 다음과 같이 수없이 제시한다.


    ‘좋은 사람은 불쾌감을 주는 말이나 생각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좋은 사람은 매 순간 선해야 하고 누구도 기분 나쁘게 해서는 안 된다.’

    ‘좋은 사람은 나쁜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걱정하면서도, 내가 추구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을 마음대로 바꾸고 새로 만들어내곤 한다.


    무엇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가에 대한 기준들은 없다. 이런 점은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에 좌절감을 주기도 하고, 나름대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네 하는 생각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괜찮은 사람인지 어떤지 하는 걱정에 곧잘 사로잡혀서 이미 좋은 사람임을, 일상생활을 적극적으로 잘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친구를 위로해준 적이 있는가? 누군가를 위로할 생각으로 유머러스한 문자를 보낸 적이 있는가? 길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주운 적은? 강아지에게 웃음을 보여준 적은? 이런 모든 행동이 좋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마도 개를 포함해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보살핌은 건강한 삶을 이끄는 데 특별하며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일,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무형의 것들을 소중하게 여겨라.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잊지 말자. 세상에는 친절함이 많을수록 좋다.


    누구든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고, 우리 감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킨다.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목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가치 있는 목소리를 갖고 있다. 우리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만 기억하자. 그러면 힘겨운 순간들이 닥쳐와서 우리 삶에 먹구름을 드리운다고 해도 우리는 어둠을 뚫고 빚을 찾아갈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