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코드>는 주로 내륙 지방의 숲이나 호수에 관한 책을 많이 남긴 소로가 바다에 대해 쓴 유일한 책이다. 박물학과 자연사에 대한 그의 지식은 실로 방대해서,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동식물의 이름을 학명까지 함께 소개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시인 엘러리 채닝(Ellery Channing)과 함께, 때로는 홀로 케이프코드를 여행하면서 뛰어난 관찰력을 발휘해 그곳의 자연, 동물과 식물의 상태와 청교도들이 처음 이곳에 도착한 이후의 변천사를 <케이프코드>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토지를 측량하는 일과 가업인 연필을 제조하는 일도 하였으나, 평생 부와 명예 등 세속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연과 교감하며 소박하게 살면서 글을 썼다. 스물여덟 살인 1845년 여름부터 1847년 가을까지 월든 호숫가의 숲에서 지냈고, 이때의 경험으로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월든Walden>(1854)을 썼다. 간디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한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1849)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케이프코드Cape Cod>(1865)는 소로가 바다에 대해 쓴 유일한 책으로, 1849년 10월과 1850년 6월, 1855년 7월에 ‘대구곶’이라고도 불리는 케이프코드를 여행하여 자연 풍경과 바다,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기록이다. 소로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개혁가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역자 김병순
전문번역가. 역서로는 <두 발의 고독>, <성장의 한계>, <음식과 자유>, <옥스퍼드 음식의 역사>, <텅 빈 지구>, <불로소득 자본주의>, <빈곤자본>, <21세기 시민혁명>, <양심 경제>, <인재쇼크>, <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 <제자 간디, 스승으로 죽다>,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탐욕의 종말>, <그라민은행 이야기>, <생명은 끝이 없는 길을 간다>,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경제, 공정 무역>, <경제 인류학으로 본 세계 무역의 역사> 등이 있다.
■ 차례
옮긴이 서문
서문-클리프턴 존슨
1. 난파선
2. 역마차에서 본 케이프코드 풍경
3. 너셋 평원
4. 해변
5. 웰플릿의 굴 양식업자
6. 다시 해변으로
7. 곶을 가로지르며
8. 하이랜드 등대
9. 바다와 사막
10. 프로빈스타운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월든Walden>(1854)과 간디에게 영향을 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1849)의 저자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대대로 연필 제조업을 하는 등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평생 부와 명예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자연을 탐구하면서, 그 탐구의 결과를 글로 쓰면서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 교감하는 소박한 삶을 살다 갔다.
케이프코드
난파선
내가 케이프코드를 찾아간 것은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였다. 지구 표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덮고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생전에 한 번도 그 자취를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세상, 그 바다의 풍경에 젖어보려고 말이다.
1849년 10월에 처음으로, 이듬해 6월에 두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1855년 7월에 트루로를 찾았다. 첫번째와 마지막 방문은 한 친구와 동행했고, 두번째 방문은 홀로였다. 그곳에 머문 기간은 모두 합해서 3주가량이었다. 이스텀에서 프로빈스타운까지 대서양 쪽에서 두 번 걷고, 케이프코드만(灣) 쪽에서 한 번 걸었다. 마차를 타고 6~8킬로미터 간 것은 제외하고 걸어서 케이프코드를 가로지른 것이 총 여섯 차례다. 하지만 그렇게 바다에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해풍에 실려오기 마련인 소금기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케이프코드만 어귀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어우러진 산들바람이나 9월의 강풍 이후 바닷가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내륙의 어느 집 창가나 숲속 나무껍질에 하얗게 내려앉아 말라붙은 소금 가루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콩코드에서 15킬로미터 안쪽에 있는 연못들을 천천히 돌아보곤 했지만, 이번에는 바닷가로 범위를 넓혔다.
1849년 10월 9일 화요일, 우리는 매사추세츠 콩코드를 떠났다. 그리고 보스턴에 닿았을 때, 전날 프로빈스타운에서 출발해 이미 도착했어야 할 증기선이 심한 폭풍 때문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리에 뿌려진 ‘코하셋에서 145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보고 우리는 코하셋을 거쳐서 가기로 했다. 객실 기차에는 코하셋으로 가는 아일랜드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시신을 확인하고 생존자들을 위로하고 그날 오후에 열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 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코하셋에 도착했을 때는 기차에서 내린 거의 모든 승객이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변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수백 명이 똑같이 코하셋을 거쳐서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역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사냥 재킷을 입고 총과 사냥 주머니를 차고 사냥개를 대동한 수렵꾼들도 있었다. 어느 교회 인근의 묘지를 지나면서 우리는 갓 뚫은 지하실처럼 생긴 큰 굴을 보았다. 해안가를 조금 앞둔 구불구불하고 돌이 많지만 상쾌한 느낌을 주는 도로 옆에서는 예배당을 향해 가는 여러 대의 짐수레와 농장 마차들을 만났다. 저마다 서둘러 마련한 듯한 커다란 궤짝을 세 개씩 싣고 있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 마차들의 주인은 보나마나 장의사일 터였다.
해안가 근처 울타리에는 마차를 끌고 갈 많은 말들이 묶여 있었다. 1.5킬로미터 조금 넘게 구불구불 이어진 해변은 시신을 확인하고 난파선의 부서진 파편들 사이를 샅샅이 살피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해안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그만 오두막이 한 채 있는 브러시 아일랜드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그곳은 매사추세츠에서 바위가 가장 많은 해안으로 알려져 있다. 낸태스컷에서 시추에이트에 이르는 해안가는 세차게 부딪치는 파도에 맨살을 드러내지만 절대 부서지지 않는 매우 단단한 성장암으로 이어져 있고, 그래서 난파선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일랜드의 골웨이를 출발한 쌍돛대 범선 세인트존호가 난파한 것은 일요일 아침이었고, 우리는 화요일 아침에 난파 현장에 도착했다. 파도가 여전히 해변의 바위들을 격렬하게 때리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푸른 언덕 위에는 똑같은 크기의 커다란 궤짝 18~20개가 놓여 있고 사람들이 그 주위를 무리 지어 둘러싸고 있었다. 난파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들이 거기로 옮겨져 있었는데, 모두 27구 혹은 28구로 보였다. 일부 사람들은 신속히 못을 박았고, 다른 사람들은 궤짝들을 마차에 실었다.
그곳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 슬픔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은 배가 난파해서 죽은 시신들을 정성껏 보살필까? 그 시신들에는 벌레나 물고기 말고는 친구가 없다. 그 시신의 주인들은 콜럼버스와 청교도들이 그렸던 것처럼 신세계로 오는 중이었고 해안에서 1.5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거기에 닿기 전까지 꿈꿨던 곳보다 더 새로운 세상, 당시에는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아서 콜럼버스가 그 존재를 의심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훨씬 더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믿는 신세계로 이주했다.
단순히 뱃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이나 바다에 떠다니는 일부 유목(流木)과 해조류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안선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바닷물의 흐름은 거기에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했다. 나는 육지에 도달한 그들이 타고 온 난파선의 빈 선체를 보았다. 그사이 그들은 파도에 떠밀려 우리가 향하고 있는 좀더 서쪽의 해안으로 올라왔다. 아마도 그들은 폭풍우와 어둠 속에서 거기까지 흘러갔을 것이고, 마침내 우리도 그들처럼 그곳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한테는 신에게 감사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데, 그들이 ‘난파한 뒤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지금 천국으로 안전하게 입항하고 있는 뱃사람은 어쩌면 지상의 친구들이 보기에는 조난해서 죽은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 친구들은 보스턴 항구가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천국의 숙련된 도선사가 조난해서 죽은 그를 맞이하러 오고 적당한 훈풍이 해안 쪽으로 불면서 그가 단 배는 아주 평온하게 육지에 닿는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해안에 내려 땅에 입맞춤을 한다. 그사이 그가 타고 온 낡은 선체는 파도에 흔들린다.
사람의 몸과 헤어지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일단 몸이 떠나면 그것 없이도 충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세인트존호는 이생에서 여기에 입항하지 못했지만 저쪽 천국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아무리 강한 바람도 신을 휘청거리게 할 수는 없다. 바람은 신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의 목적은 그램퍼스암과 같은 물질적 바위에 부딪쳐도 깨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바위를 깨뜨릴 것이다.
너셋 평원
다음 날인 10월 11일 목요일 아침, 여전히 비가 많이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걸어서 여정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먼저 대서양 변의 해안길을 따라 프로빈스타운까지 걸어갈 수 있는지, 가다가 개울이나 습지 같은 것을 만나 곤란한 처지에 빠지지는 않을지에 대해 몇 가지 사전조사를 했다. 여인숙 주인 히긴스는 가는 길에 장애물이 전혀 없으며 도로를 따라가는 것에 비해 그다지 멀지 않다고 말했지만, 모래밭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발걸음이 매우 ‘무거울’거라고 했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가더라도 길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굽 윗부분까지 진창에 빠질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 여인숙에는 비가 올 때 그 길을 걸어본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우리가 무리 없이 그 길을 잘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때로는 곤란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르나, 특히 동풍이 불면서 큰 파도가 칠 때 모래톱을 걸으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모래사장이 파여서 오히려 걷기가 수월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 7~8킬로미터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케이프코드에서 가장 좁은 팔꿈치에 해당했는데, 거기서부터 북쪽으로 길의 방향이 바뀌었다. 만약 해로로 거기에 왔다면 우리 오른쪽에 보이는 올리언스의 너셋 항구로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도로 양편에는 도보여행자들을 위한 여행용품들을 팔고 있었다. 그것을 실어나를 말들에게는 ‘무거운’ 짐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우산을 뒤로 펼치고 걸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비바람이 짙은 안개와 함께 등뒤로 들이쳤기 때문이다. 그 바람 덕분에 빠른 속도로 모래사장을 통과할 수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우리가 낯선 해안에 도착했음을 말해주었다. 도로는 으스스하고 황량해 보이는 언덕지대가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길에 불과했다. 멀리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모두 낡고 자그마했다. 그 집들은 사람의 손길이 꾸준히 닿은 듯 보였다.
담장을 치지 않아 확 트인 안마당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아니면 강풍 덕분에 깨끗이 치워진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곳에 나무가 별로 없고 장작더미나 나무로 만든 세간살이를 보기 힘든 것은 이런 광경과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변에 드문드문 들어선 가옥들의 모습은 마치 그동안 항해를 하면서 거센 파도에 시달렸던 선원들이 육지의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몸가짐이나 복장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그곳은 풍요롭고 쾌적한 낙원인 ‘페르틸리스와 유쿤다의 땅’이 아니라 단단한 땅이 있는 확실한 육지인 ‘피르마와 코니타의 땅’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풍경이 내게는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그 풍경이 지닌 아름다움이 날씨 덕분에 더욱 빛났다. 주위의 모든 것이 바다에 대해 이야기했다. 황량한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든 울부짖는 파도 소리에 귀기울이든, 어디서나 바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갈매기들, 들판의 손수레, 해변의 가옥들을 향해 뒤집혀 있는 작은 배들, 그리고 가끔씩 보이는 고래 갈비뼈를 엮어서 두른 도로변의 울타리가 저마다 바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땅이 움푹 꺼진 지대에 있는 몇몇 작은 과수원의 사과나무를 빼고는 그곳에서 나무를 찾아보기란 해변에 흩어진 가옥들을 찾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 나무들은 비바람을 맞고 자란 거대한 비치플럼나무처럼 곁가지가 잘려나가는 바람에 길게 뻗은 줄기 상층부에서 가지들이 옆으로 뻗어나가 평평한 지붕 같은 모습을 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대개는 퀸스 관목처럼 땅바닥 가까이에서 바로 가지를 뻗은 키 작은 나무들이었다. 이것은 비슷한 자연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모두 비슷한 성장 패턴을 따른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뒤로도 나는 케이프코드에서 다 자란 사과나무들을 많이 보았는데, 모두 사람의 키보다 크지 않았다. 실제로 어느 과수원에서는 사다리 따위의 도움 없이 땅바닥에 그냥 선 채로 나무에 달린 과일을 모두 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무 밑을 기어갈 수는 없었다.
과수원 주인의 말에 따르면 20년 된 어떤 나무는 키가 약 1미터에 불과한데, 땅바닥으로부터 15센티미터 높이에서 가지가 나와 사방으로 1.5미터나 뻗어나갔다. 게다가 해충인 자벌레를 잡기 위해 타르 상자들을 주위에 둘러놓아서 마치 화분에 심어놓은 나무 같았다. 겨울이 되면 집 안으로 들여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곳에는 까치밥나무보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도 보였다. 그해 가을에 그 나무들에서 사과 165킬로그램을 땄다고 주인이 귀띔해주었다. 사과나무들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면 단숨에 모두 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트루로의 하이랜드 등대 근처에 있는 사과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묘목일 때 인근의 관목숲에서 가져와 접붙이기를 한 것들이었다. 10년 된 나무는 평균 높이가 45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 꼭대기의 가지는 3미터에 가까운 폭으로 넓게 뻗어 있었다. 2년 전 그 나무에서 27킬로그램의 사과를 땄다. 씨앗을 심은 지 20년 지난 것으로 보이는 또다른 나무는 1.5미터 높이에 폭이 약 5.4미터로, 다른 사과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땅바닥에서 가지를 뻗었기 때문에 그 밑을 기어갈 수 없었다. 이 나무에서는 2년 전에 사과 110킬로그램을 수확했다.
사과나무 주인은 나무들을 지칭할 때 예외 없이 인칭대명사를 썼다. 예컨대 “나는 그를 숲에서 가져왔어요. 그러나 그에게는 열매가 달리지 않아요”처럼 말이다. 내가 그 이웃집에서 본 가장 큰 사과나무는 꼭대기의 이파리까지 높이가 2.7미터, 폭이 10미터로 땅바닥에서부터 다섯 갈래로 가지가 뻗은 나무였다.
내륙 사람들에게 케이프코드에서 가장 이국적이고 그림 같은 구조물을 말하라고 하면 제염소도 빼놓을 수 없지만 단연 풍차를 들 수 있다. 뒤쪽으로 긴 장대가 비스듬히 땅바닥에 버티고 서 있는 팔각형 탑 모양의 회색빛 건물, 그리고 지붕에 달린 수레바퀴에 연결된 거대한 날개들이 바람을 맞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은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 풍차들은 바람의 힘에 맞서는 지지대 구실을 어느 정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풍차의 날개가 돌면서 팔각형 탑 주변에 거대한 바퀴 자국을 남겼다. 풍차를 돌려서 방아를 찧으려고 모여드는 동네 사람들은 풍향계가 없어도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아는 것 같다. 그곳의 풍차들은 큰 상처를 입어 날개나 다리 한쪽을 늘어뜨리고 나는 새처럼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네덜란드의 풍경이 담긴 사진 한 장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건물 자체도 높이 솟은 데다, 고지대에 있는 풍차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그곳에는 수평선 저멀리에서도 볼 수 있는 커다란 나무 같은 물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육지 자체의 윤곽이 매우 선명하고 뚜렷하긴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원뿔 모양의 건물이나 모래사장의 벼랑은 먼 바다에서도 보인다.
육지를 찾는 항해사는 대개 풍차나 예배당을 보고 항로를 정해 나아간다. 시골 전원에서는 예배당이 유일한 이정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예배당은 풍차와 닮았다. 일주일에 딱 하루 문을 열고, 교리나 공론의 바람, 또는 매우 드물기는 해도 천국의 바람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우리가 먹는 곡식과는 다른 종류의 곡식을 찧는다. 겨만 풀풀 날리고 먹을 만한 곡식 가루는 안 나오는 일이 없다면, 곡식 가루에서 곰팡내가 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곡식을 빻았는데 회반죽에나 쓸 쭉정이만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당이 생명의 양식을 만드는 곳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날 아침 내내 몇 킬로미터 떨어진 동쪽 해안에서 바다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세인트존호를 난파시킨 폭풍우의 위력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한 남학생이 우리 옆을 지나갔는데 아마 그 남학생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더라도 사나운 파도 소리에 이미 귀가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조가비에서 나는 똑같은 바다 소리를 누구보다 실감나게 들었을 것이다. 그 소리는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을 흥분시킨다. 육지를 향해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 소리가 몇 킬로미터 떨어진 내륙까지도 들렀다. 문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개보다는 케이프코드 전체를 향해 으르렁대는 대서양을 가슴에 품기를!
우리는 대체로 폭풍우를 반겼다. 바다의 가장 성난 모습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찰스 다윈도 거센 강풍이 지나간 뒤 칠로에섬 해안의 파도 소리를 “구릉지가 많고 숲이 우거진 지역을 가로질러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여덟 살쯤 되는 소년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케이프코드에서의 삶이 한 소년에게 어떤지는 성인 남성의 경우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소년으로부터 이 인근 어디서 가장 맛있는 포도가 나는지를 알아냈다. 소년은 자신이 먹을 저녁식사를 들통에 넣어 들고 가는 중이었다. 무례할까봐 묻지 않았지만, 들통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호기심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셋 등대-우리가 있는 곳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등대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에서 도로를 벗어나 동쪽 해변을 끼고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마침내 이스텀 예배당에 도착했다. 어쩌면 다른 곳과 구별되도록 등대를 그렇게 여러 개 세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그런 식으로 등대를 세우는 것은 매우 주변머리 없고 비용 면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방법으로 보였다.
문득 우리가 나무 한 그루, 울타리 하나 없는, 끝없이 펼쳐진 듯한 평원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 한 채가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울타리는 없었고, 대지가 융기해서 생긴 가늘고 길쭉한 이랑이 간간이 보였다. 동행한 친구는 그곳을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일리노이의 대평원과 비교했다. 마침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이었는지 그 광경은 실제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황량해 보였다. 언덕 같은 것은 전혀 없고, 메마른 불모지 한복판에 땅이 움푹 꺼진 곳만 군데군데 보일 뿐이었다.
멀리 수평선은 안개 속에 감춰져 있어서 높은지 낮은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배회하는 고독한 여행자는 어른거리는 거인처럼 보였다. 그는 어깨끈이 몸을 위로 끌어올리고 땅바닥이 받쳐주는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걸었다. 조금만 멀리 떨어져도 어른과 어린아이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기준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륙 사람들에게 케이프코드의 풍경은 끝없이 펼쳐진 신기루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풍경이 2~3킬로미터씩 넓어졌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한때 나무가 울창했던 ‘너셋 평원’이다. 지금은 겨울바람이 윙윙거리며 울부짖고 눈발이 여행자의 얼굴을 유쾌하게 때린다.
나는 시내를 벗어난 것이 좋았다. 시내에 있으면 극도의 비굴함과 수치심을 경험하곤 한다. 매사추세츠의 술집에 잠시라도 앉아 있으면 아직까지도 시가를 입에 물고 죽죽 빨아대는 다 큰 어른들의 야만적이고 더러운 모습에서 실망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은 외부의 황량함과 비례해서 성장했다. 도시는 환기가 필요하다. 신들은 그들의 제단에서 순수한 정화의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들의 욕망은 시가 연기로 달래지지 않을 것이다.
프로빈스타운
이곳에서는 때때로 가을에 암소들에게 대구 머리를 먹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머리처럼 정교하고 경이로운 구조의 존귀한 대구 머리에는 아주 작은 뇌만 있을 뿐이다. 결국 그렇게 종말을 고한다! 암소에게 아작아작 씹혀서 말이다! 그 생각을 하니 내 해골이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천상의 신비한 섬에 사는 인간보다 우월한 암소가 인간의 머리를 잘라내어 우적우적 씹어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사고와 본능의 거처라 할 수 있는 고상하고 우아한 당신의 뇌가 반추동물의 입속으로 사라졌다가 되새김질로 부풀려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현지의 한 주민은 이곳에선 암소에게 대구 머리를 먹이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다만 암소들이 가끔씩 스스로 먹기는 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 평생을 산다고 해도 암소가 대구 머리를 먹는 모습은 결코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염분이 부족한 암소가 덕장에 널려 있는 대구의 살을 혀로 핥아먹는 일은 종종 일어났다. 그 주민의 말은 대구와 관련된 소문의 근거로서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사람들이 바다와 육지가 모두 굽어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조용히 사색에 잠기고 싶어할 만한 날이었다. 고등어잡이 선단의 스쿠너 범선들은 아침에 둥지에서 날아올라 먼 들판으로 흩어지는 새들처럼 차례로 빠르게 항구를 출발해 케이프코드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거북등과 같은 낮은 지붕의 염전 해주(海宙)들이 시내 바로 뒤 편 언덕들 구석구석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아 멈춰 선 풍차들이 해안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이 자연의 어떤 투박하고 단순한 화학작용을 통해 얻어지는지를 아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숙련된 염부 한 사람과 그를 거들어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도제 한 명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거대한 염전 하나를 일구고 있었다. 그 일은 햇볕이 가장 강렬하게 내리쬘 때 해야 하기 때문에 열대 지방의 노동과 같다.
소금을 채취하는 일은 어느 면에서 보면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선광하는 작업과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자연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생산할 때 언제라도 인간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 전에 보스턴 앞바다의 헐에서 본 잿물 만드는 과정이 그랬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시마의 일종인 켈프 줄기를 불에 태워서 그 재를 물에 끓였다. 정말이지 화학은 풋내기 아일랜드인 연구자 몇 명이 실험실에 모여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시시콜콜 따지기나 하는 쓸데없는 연구가 아니다.
이곳은 모래언덕으로부터 햇빛이 반사되고 민물이 항구 쪽으로 조금도 흘러들지 않는 지형적 특성 덕분에 동일 면적당 소금 생산량이 그 어느 지역보다 많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기를 맑게 하고 빨리 소금꽃을 피워 양질의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비가 조금 내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 여름 더위 때 비가 많이 내리면 습도가 높아져 페인트칠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수분이 증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케이프코드의 모든 지역과 마찬가지로 염전들을 정리해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었다.
그 높은 곳에서는 가옥의 지붕들이 바람에 날아간 것처럼 현지 주민들의 움직임을 거의 완벽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들은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집 주변을 둘러싼 덕장의 고리버들 선반 위에 얹느라 바삐 움직였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의 집 뒷마당도 앞마당과 마찬가지로 대구를 말리기 위해 개조되었음을 알았다. 한 집의 작업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다음 집 작업이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마당에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대구를 보배처럼 소중히 수레에 싣고 그 안으로 들어가 덕장의 선반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우리는 대구를 널어 말리는 데도 요령뿐 아니라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며 분업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남자는 이웃집 암소가 목을 쭉 빼서 울타리 너머에 닿지 못하게 하려고 대구를 암소의 코에서 10여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널고 있었다. 그 일은 옷을 말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사노동의 일종처럼 보였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들이 그 일을 하기도 한다.
나는 케이프코드의 여러 곳에서 옷을 말리기 위해 설치한 덕들을 눈여겨보았다. 그들은 마당에 잔가지들을 펼쳐놓고 모래가 날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둘레에 울타리를 친 다음, 그 위에 옷가지를 펼쳐놓았다. 이것이 바로 젖은 옷을 말리는 케이프코드의 마당 풍경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날씨가 따뜻할 때 해변을 찾는다. 하지만 그때는 안개가 자주 끼어 대기가 탁하기 마련이라 매혹적인 바다 풍경을 어느 정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가을이 이곳의 바다 풍경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그 시기에는 대기가 매우 청명해져서 바다 멀리까지 또렷이 보이기 때문에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매우 큰 만족과 기쁨을 준다. 맑고 상쾌한 공기, 가을 그리고 심지어 겨울에도 휘몰아치는 폭풍우는 바다가 인간에게 주고 싶은 깊은 인상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준다.
날씨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춥지는 않은 10월이 좋다고 생각한다. 산천초목이 가을 빛깔로 물들면서 케이프코드만의 고유한 가을 색감을 뽐낼 때, 게다가 머무는 동안 폭풍우가 몰아친다면 바로 그때가 그곳을 찾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가을이 오면, 심지어 8월에도 그곳에서는 사색의 계절이 시작된다. 케이프코드의 어디를 걷든 무언가 얻을 수 있다. 살을 에는 추위와 황량함조차 밤의 안식처가 왜 필요한지를 느끼게 하고, 그런 조건이 오히려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모험심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 해안이 해변을 찾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정말로 휴양지가 될 날이 앞으로 틀림없이 올 것이다. 아직까지 이 곳은 부유한 사교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의 모습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 곳을 찾을 관광객이 원하는 것이 단지 볼링장이나 환상철도, 위스키 칵테일로 넘치는 바다라면-뉴포트 항구에 가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바다 풍경을 즐기기보다는 술 마시고 노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면-단언컨대 그는 오랫동안 이곳을 실망스러운 장소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이 해안이 어떻게 변하든 결코 지금보다 더 매력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먹고 마시며 즐길 만한 해변은 감히 말하건대, 끊임없이 모래를 이동시키는 바다에 의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린과 낸태스컷! 보스턴 근처에 있는 이곳들이 아늑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작은 만을 형성한 것은 바로 맨살을 드러낸 이 구부린 팔뚝 케이프코드다. 바닷가의 샘과 폭포를 보고 싶은가? 당신이 지금까지 만난 샘과 폭포 중 최고가 될 샘과 폭포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을이나 겨울, 그때가 바로 그곳을 방문해야 할 때다. 등대와 어부의 오두막은 그때 그곳을 찾는 사람이 묵어야 할 진정한 숙소다. 북아메리카 대륙을 등지고 홀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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