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지은이 : 이어령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2년 03월




  • 시대의 지성이자 큰 스승이었던 이어령 선생은 날카롭고 단호한 시선으로 세계를 꿰뚫어보는 명철의 소유자였지만, 또 사람의 마음을 믿고 자신의 세상과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이어령 선생을 그의 유고 시집과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까마귀의 노래

    당신에겐 눈물이 있다

    당신에게 눈물이 있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

    사랑이 있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뉘우친다는 것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비가 그치자 나타난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는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가난을 넘어서는 사랑의 눈물에서만

    영혼의 무지개가 뜬다.



    생물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천의 물결로 빛나는 강물이거나

    천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수풀이거나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살아서 소리 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천의 지저귀는 새소리거나

    천의 갈래로 쏟아지는 빗소리거나


    소리 나는 것은 모두 다 즐겁다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그리고 이슬에 젖은 포도알을 터뜨리는

    여름 아침


    살아서 어금니로 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까치밥

    감나무에 감들이

    저녁 해처럼

    빨갛게 빨갛게 익으면

    가을이 오고

    나뭇잎이 지고

    서리가 내리고

    그러면 겨울이 온단다


    사람들은 겨울에 먹으려고

    감을 딴단다

    그러나 감나무 꼭대기에

    가장 큰 녀석 하나는 따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단다


    왜?

    까치가 먹으라고

    그래서 나뭇가지 위에 혼자 남은 감을

    까치밥이라고 한단다

    겨울, 추운 바람에 배고픈 까치가 와서

    배불리 먹으라고

    까치밥이라고 한단다.



    한 방울의 눈물에서 시작되는 생

    빈 운동장의 경주

    어머니 운동회 날입니다

    줄마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하얀

    운동장을 달렸습니다 햇빛이 너무 부셔

    모자 차양을 세우고 달렸습니다


    숨이 차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심장이 터지라고 뛰었습니다

    상장이 탐나고 박수를 받고 싶어

    그렇게 뛴 게 아닙니다

    마치 먹잇감을 쫓는 사자처럼

    혹은 사자에게 쫓기는 가젤처럼

    옆에 아이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오늘에서야 압니다 어머니 운동회가 끝났는데도

    운동모자와 러닝셔츠를 벗었는데도 나는

    지금도 뛰어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누가 호루라기를 불어서가 아닙니다


    목숨이 있어서 바람이 불어서 숨차냐 하고

    어머니가 물으셔도

    나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생명의 나무들과

    함께 경주를 합니다.



    생각하지

    ‘사랑’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생각’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희랍말도 그래요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오래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것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줍시다

    어머니가 읽어준 동화 한 편, 어머니가 불러준 노래 한 곡조,

    어머니가 꽂아준 꽃 한 송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지 못한 이처럼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달리기

    무릎을 깨뜨리면서도 아이들은 달리기를 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기 위해서,

    남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기 위해서,

    아이들은 달리기 내기를 합니다

    산다는 것은 달리기이지요

    그것은 경쟁, 그것은 승부, 그것은 성취입니다

    아이들이 달릴 때 우리는 대신 달려줄 수는 없지만,

    응원을 할 수는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에다 하나를 보태는 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에디슨을 비웃었을 때

    그에게 용기를 준 이는 어머니였습니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이해하고 도와준 사람은 어머니였지요

    어머니는 달리는 아이의 응원가입니다

    관심, 그것이 바로 힘찬 응원가입니다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

    아이들은 엄지손을 안으로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열 달 동안 자기를 키운 아기집이 상처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음에 태어날 동생들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내 손자와 그 손자의 손자들을 잉태하고 키워갈 천년의 모태를

    백 년도 못 사는 몸 하나 보신하자고 강철의 손톱으로 찢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임자가 아닙니다

    잠시 맡아 있는 관리자일 뿐


    그래요, 그 옛날 고려가요에서 천년을 노래 부른 서경별곡처럼,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도 그 끈은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즈믄 해를 외로이 있어도 믿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아기의 주먹 쥔 작은 손 안에 그 끈이 있어요

    그 믿음이 있어요

    아기집을 상처 지게 하지 않으려고

    엄지손을 안으로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푸른 숲, 푸른 대지, 푸른 강을 위해서 주먹을 쥐세요

    천년 동안 내 아기들이 살아갈 아기집을 위해서 주먹을 쥐세요.



    잠은 솔솔

    잠은 아무 소리도 없이 오는데

    사람들은 

    잠이 솔솔 온다고도 하고

    잠이 살살 온다고도 하고


    눈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리는데

    사람들은 눈이 펑펑 내린다고도 하고

    눈이 사락사락 내린다고도 하고


    새는 아무 소리도 없이

    하늘에서 날고 있는데

    사람들은

    새가 훨훨 난다고도 하고

    새가 씽씽 난다고도 하고


    그러나 나도 들을 수가 있어요

    내가 엄마에게 뽀뽀를 할 때

    엄마 가슴이 뛰는 소리를

    내가 아빠에게 뽀뽀를 할 때

    아빠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잠처럼 솔솔

    눈처럼 펑펑

    새처럼 훨훨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요.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살아 있는 게 정말 미안하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네가 혼자 긴 겨울밤을 그리도 아파하는데

    나는 코를 골며 잤나보다


    내 살 내 뼈를 나눠준 몸이라 하지만

    어떻게 하나 허파에 물이 차 답답하다는데

    한 호흡의 입김도 널 위해 나눠줄 수 없으니


    네가 울 때 나는 웃고 있었나보다

    아니지 널 위해 함께 눈물 흘려도

    저 유리창에 흐르는 빗방울과 무엇이 다르랴

    네가 금 간 천장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바깥세상 그 많은 색깔들을 보고 있구나


    금을 긋듯이 야위워가는 너의 얼굴

    내려가는 체중계의 바늘을 보며

    널 위해 한 봉지 약만도 못한 글을 쓴다


    힘줄이 없는 시

    정맥만 보이는 시를

    오늘도 쓴다

    차라리 언어가 너의 고통을 멈추는

    수면제였으면 좋겠다


    민아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살아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것이

    미안하다 민아야

    너무 미안하다.



    사진처럼 강한 것은 없다

    사진처럼 힘이 센 것도 없더라

    웃고 있는 너의 미소를

    눈빛 속의 생명을

    세상 어떤 고통 어떤 질병도

    너의 얼굴을 지우지 못한다


    사진처럼 영원한 것도 없더라

    죽음의 그림자도 너의 빛을

    가리지 못한다

    겨울이 오고 바람 불고

    밖에 서리가 내려도

    사진 속 장미는 시들지 않아


    사진처럼 슬픈 것도 없더라

    손을 뻗어도 다가오지 않는 너

    정적밖에는 듣지 못하는 너

    나는 울고 있는데 너는 웃는다

    딴 세상 속의 고요


    하나님은 사진사

    사진처럼 힘세고 슬픈 것도 없더라.



    네가 앉았던 자리

    네가 앉았다가 떠난 의자에

    내가 앉는다

    네가 빠져나간 것만큼

    가벼워진 나의 몸무게


    과학실험을 했더니

    영혼의 중량은 21그램

    라면 한 젓가락의 무게

    영화 제목이 그렇게 말하더라

    정말

    그렇게 가벼우면 좀 좋으랴


    그렇게 가벼우면 떠서 난다

    구름이 흘러간 자국처럼

    네가 앉았던 자리에 놓인


    물건들마다 공중부양

    요술처럼 떠다닐 거다

    너처럼 지하에 묻히겠는가


    네가 앉았던 자리가

    소파와 방석과 하얀 시트가

    눈부신 하늘의 구름이 된다


    오늘 살아서

    나 혼자 땅끝

    하늘의 구름을 본다


    네가 못 보는 강가의 조약돌

    바다의 모든 것

    산의 모든 것


    황혼과 그냥 까맣기만 한

    밤을 나 혼자 본다


    네가 못 듣는 빗방울 소리

    나 혼자 누워서 듣는다


    오늘 살아서

    시계를 보고 집을 나선다

    어제처럼 네가 없는 시간 속으로

    혼자 간다


    네가 없다

    같이 있었는데

    같이 있었는데


    정말 같이 있었는데

    네가 없다


    거기 그 자리 네가 앉아 있었는데

    네가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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