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지은이 : 고선경 (지은이)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5년 01월




  •                                                                     “독자들이 먼저 알아본 한국시의 미래” “텍스트힙의 선두주자” 고선경 시인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이 열림원 시인선 시리즈 ‘시-LIM 시인선’의 첫 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고선경 시인은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당시 이문재, 정끝별 시인으로부터 “넘치는 시적 패기로 써 나갈 시의 힘이 기대된다”는 평을 받았으며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통해 “구겨진 뒤축 같은 오늘을 딛고 끝내 내일이라는 약속을 지켜내는” 씩씩함과 유쾌함으로 많은 독자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장난스럽기도 사랑스럽기도” “시집도 재미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MZ라는 말로 고선경 작가를 담기에는 너무 협소하다” 등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서 ‘스트릿 문학 파이터’로서 개그 본능을 펼치던 시인은 ‘도전! 판매왕’이 되어 돌아왔다. <br/><br/>“떨군 고개를 원래 스트레칭하려 했던 척 한 바퀴 돌리는 것까지가 제 시집의 장기입니다.”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유희 가득한 문학을 하고 싶다고 밝힌 적 있는 고선경 시인은 이번 신작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에서도 유머와 재미, 솔직한 고백 속에서 빛나는 진심, 용기와 사랑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한층 더 깊어진 마음을 전한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붉게 빛나고 있는 토마토 한 알로부터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건 사실 “심장보다 단단한” “마음”이라는 걸 깨달은 시인은 함께 살아 있기에 나눌 수 있었던 기쁨과 슬픔 모두를 긍정한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삶의 과정에서 너무 큰 슬픔을 감당하지는 않도록, 눈물도 슬픔도 없는 깨끗한 자리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우리가 살아서 나눠 가진 아름다움”을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에 담는다.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맨발은 춥고 근데 좀 귀여워

    길을 걷다 눈사람을 발견했다

    가슴에 붙은 종이쪽지에는 어린이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내가 본 눈사람 중 제일

    못생김! 

    근데 좀 귀여워”


    나는 싫은데 길 미끄럽고 신발 젖고

    위험한 거 싫은데


    바쁜데 

    하라고 재촉하는 사람 없는데

    밀린 일 진짜 많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났을 때는

    다른 세상에 도착한 것만 같았다

    거울에 비치는 건 늘 같은 풍경이지만


    미지근한 수돗물

    올겨울 처음 사 입어 본 내복

    맨발은 춥고


    사람들 마음 못생긴 거 다 아는데

    눈사람은 부수지 말고


    가슴에 면접 수험표나

    마음에도 없는 명찰 붙어 있다고

    기죽지 말고


    저마다 글씨체는 다르지만

    기지개를 켤 때는 누구나 느낌표가 돼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두꺼운 양말을 신어도 춥지만

    좀 귀엽지


    한양아파트

    놀이터에 하트가 크게 그려져 있더라

    많은 놀이터가 우레탄으로 바닥을 교체했다는데

    여기는 여전히 모래


    한 번에 예쁘게 그린 하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엉망이었어

    여러 번 그어 가며 덧댄 선이었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아이가 하트를 밟고

    밟을 때마다 신발에서 빽빽 소리가 난다

    벤치에는 부모들이 앉아 아이를 기다리고 있어


    중고생 커플이 그네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

    그네에서 내리면 싸움을 하네

    네가 지난번에 그랬잖아

    지난번 이야기를 왜 지금 꺼내


    잘 걷던 아이가 넘어지고

    부모가 벌떡 일어서고 여자애가 뛰어간다


    아무도 울지 않는다


    내일도 놀이터에 하트가 남아 있을까?

    아이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제자리보다 테두리를 생각하네


    지우기 위해서도 덧댐이 필요하고

    짙어지기 위해서도 덧댐이 필요하다면


    우레탄 심장을 가지고 싶어


    나는 떠날 거야

    모래가 성이 되고 무너지는 도시를

    놀이터에 담배꽁초가 뒹구는 아파트를


    내일 다시 이야기해

    돌아서는 여자애를 남자애가 쫓아간다


    심장은 밟으면 삑삑 소리가 나는구나

    생각할 때

    약속이나 마법처럼

    석양이 폭신폭신 녹아내리고 있었다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

    축하를 말하기 전에

    분홍색 스니커즈를 신고 길을 나섰을 때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져 버리기 전에 벚꽃이 모두 쏟아져 내리기 전에 축하를 말해야 했는데


    아직도 울고 있니?


    왜 그런 말만 생각났을까


    회사는 잘 다니고 있어? 사람들이 너에게 잘해 줘? 며칠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고, 어디가 아픈 거야? 아프지 마


    근심 어린 말들 말고 축하를 해 줘야 했는데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이 나를 밀며 스쳐 지나갔다 계단이 와르르 놓인 육교를 간신히 건넜다 멀리서 봤을 때는 불 켜진 줄도 몰랐던


    꽃집에 들러 튤립을 샀다 살아 있는 꽃의 냄새가 났다


    네가 이 냄새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기쁨과 슬픔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몇 날 며칠이고 기다려 온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기어코 오늘이 당도한 것을 네가 놀라워한다면


    싫을 것 같다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다는 듯한 표정 짓지 마


    닳고 닳은 스니커즈 밑창보다 나는 네가 더 기특해


    아니 아니, 이런 말 해서 미안해


    다른 특별한 일은 없어?


    비도 오지 않는데 벚꽃이 우수수 떨어질 때 바람의 부피를 생각했다 벚꽃도 바람처럼 종류가 여럿인 걸 아니? 튤립의 꽃말이 여럿이라는 걸, 너는 어떤 꽃말을 마음에 들어 할지


    어떤 꽃말도 너의 하루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말해야 했는데, 축하를 말하기 전에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미래에 내리던 비에는 아무도 잠기지 않고

    마당 한구석에 편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기억하고 싶어서겠니 잊고 싶어서겠니 걸리적거리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모조리 뽑아 버렸지 고작 편지 한 장일 뿐인데 이렇게 깊은 구덩이를 파도 될까 의심하지 않았어


    언젠가 나는 울면서 땅을 판 적이 있다 묻어 둔 것을 꺼내려고 아무리 파도 오직 흙 점점 더 차갑고 부드러운 흙만 나왔어 모종삽을 던지고 너를 봤다


    그것 봐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했잖아


    마음이라든지 영혼이라든지 전부 옛날 일들인 걸까 흙투성이가 된 손을 너는 탈탈 털어 주었어 너의 손이 나의 손처럼 더러워져 가는데...... 그 순간 나는 그 손이 미래와 가깝다고 생각한 거야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게 할 거야


    편지를 심고 사탕을 심고 컵을 심고 귀걸이를 심고 흙과 바람도 심어야지 우주는 우리의 손을 기억할 거야 미래가 더 깊이 뿌리를 내려 멀리서 웅성거릴 때까지 아무렇지 않게 다시 태어나 자라도 되고 자라지 않아도 된다......


    너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내게 물 한 줌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더 많았다 내일은 비가 내린대 예보를 무를 수는 없고 그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너의 팬이야

    카푸치노 감정

    하얀 머그잔 속

    부풀어 오른 우유 거품을 바라본다


    왜 이런 것이 나를 끓게 하는지

    넘치게 하는지 알 수 없다


    기다리라는 문자 메시지 하나에

    시간은 무수히 알을 까게 되는데


    씁쓸한 시나몬 향을 맡다 보면 담배를 배우고 싶어져

    그런 것이 나의 최선은 아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태어나는 기분


    우유 거품 아래에는 커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도 같다


    침착하게 식어 가기

    최선을 다해 가라앉기


    나는 이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어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은색 스푼이 거품을 걷어 내면

    날벌레 한 마리 떠올라 있을지라도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거품의 자세

    넘치지 못하지만 부푼 채로 멈춰 있다


    빈 잔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어


    내 어깨를 붙잡는 차가운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부드럽게 감싼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