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평온하고 무탈하게만 살고 싶었던 도연이 가사조사관이 되고 법원에서 만난 사람들, 동료, 주변 사람들과의 느슨한 연대와 우정을 통해 어두운 과거에 ‘마침내, 안녕’을 고하게 되는 이야기다.
저자는 가사조사관의 일과 그 주변인들을 때로는 아주 가까이, 때로는 매우 멀리서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만 좇지 않고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지켜보고, 성찰한다.
이 소설은 자신의 상처를, 혹은 깊이 숨겨둔 마음을 누군가에게 내보이며 공감받기를 바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룬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깊은 동굴에 숨어들 때조차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길 원한다. 삶이라는 고통을 짊어진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에나 삶의 고삐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위로받는다. 결국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봄으로써 자기 자신도 치유해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고통이 사사롭게 처리되지 않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고통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을 때 우리 모두 조금씩 회복될 수 있다.
■ 저자 유월
저자 유월은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임상심리사이다.
■ 차례
#1 가사조사관
#2 아이는 늘 어른들을 용서한다
#3 요란한 법원 생활
#4 건강한 감자
#5 가장 가까운 타인, 가족
#6 안일함의 무게
#7 우진과 무헌
#8 사랑의 형태
#9 도연의 첫 번째 직업
#10 탈주하는 기차
#11 두 사람의 거리
#12 스산한 시절
#13 로봇 티셔츠를 입은 남자
#14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
#15 지도와 영토
#16 한여름 밤의 우진
#17 우리는 동료니까
#18 지원과의 재회
#19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것들
#20 마침내, 안녕
법원에서 가사조사관으로 일하게 된 도연은 보수적이고 불합리한 조직과 개인적인 아픔 속에서 무기력해졌지만, 타인의 고통을 듣고 공감하는 일을 통해 조금씩 삶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인간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따뜻하고 윤리적인 시선으로 고통과 연대, 회복을 그려냈습니다.
마침내, 안녕
아이는 늘 어른들을 용서한다
40대 후반의 남자는 손가락뼈가 그대로 드러나 보일 만큼 마르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거뭇한 수염 아래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 엄마가 가출해서 저 혼자 10년을 키웠습니다. 아이가 학교생활도 잘하고 착해서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해요. 아이가 커갈수록 부담도 커져서 이제라도 아이 엄마에게 양육비를 받아야겠습니다.”
탁한 눈과 떨리는 손은 만성적인 음주의 증거였다. 남자의 입과 몸에서는 오래 묵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남자와 조사를 마무리할 무렵 조용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조그마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지며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사실을 휘감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여자에게 날아가 꽂혔다. 도연은 서둘러 남자와의 조사를 마무리하고 이후 절차를 설명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는 모든 신경을 차단한 듯 여자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여자는 온몸이 굳은 채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아이 아빠는 혼인 기간 내내 술에 취해 있었어요. 술을 마시면 습관처럼 때렸고요. 아이 때문에 참고 살았지만 깨진 맥주병을 제 목에 들이대는 걸 보고 이렇게 있다간 죽을 수 있겠다 싶어 가출했어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아이 통해서 남편이 찾아올 것 같아 연락도 못 했어요. 2년 전에 이혼소송 할 때에도 아이 아빠를 대면하는 것조차 무서워서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다 맞추겠다고 했거든요. 아이 만나는 건 엄두도 못 냈고요.”
여자는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문 쪽을 힐끔댔다.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조사실 전화기가 울려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 퇴실한 남자였다.
“애 엄마 조사 중이죠? 오늘 아들과 같이 왔는데 아들이 대기실에서 그 사람을 봤나 봐요. 인사...하고 싶다는데요....”
여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지만 흐르는 눈물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이준이...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여자는 한참을 주저했다. 도연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조사실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남자 옆에서 손가락을 만지작대다가 도연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굽혀 인사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는 또래보다 키가 작았고 얼굴부터 눈, 코, 입까지 동글동글했다.
“너만 괜찮으면 오늘 엄마 만날 수 있는데, 선생님이 엄마랑 얘기 나눌 동안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조사실에서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여자에게 조사 날짜는 다시 정하겠다고 알렸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여기서 우는 건 괜찮은데 이준이 앞에서는 울지 마세요. 힘들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참아봐요. 엄마가 울면 이준이도 슬퍼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울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도연도, 여자도 알고 있었다. 빈 상담실에 불을 켜고 방석 두 개를 나란히 두었다. 아이를 상담실에 들여보내고 남자에게 괜찮겠냐고 물었다. 아이가 원하니까 만나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약간의 서운함과 체념이 묻어났다. 도연은 관찰실에서 엄마와 아이가 손을 꼭 잡은 채 입이 작게 열렸다 닫히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엄마랑 무슨 이야기 했어?”
자세를 낮추고 아이에게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엄마가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해서....”
“이준이가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뭐야?”
“보고 싶었다고요. 엄마 얼굴... 상상만 했거든요.”
여자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외에는 모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엄마... 저 엄마 미워한 적 없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이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했다.
“오늘 이준이가 용기 내서 엄마 만날 수 있었던 거야. 아빠한테 전화해달라고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엄청 용기 냈네. 그 정도로 엄마가 보고 싶었던 거지?”
아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고는 감사합니다. 나직이 인사했다. 도연은 허리 숙여 인사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저 작은 아이의 속이 얼마나 깊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이는 엄마를 만나는 동안 환히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꾹꾹 누르는 게 익숙해 보였다.
도연은 남자와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 없는 애라는 놀림을 묵묵히 견디는 아이, 늦는 아빠를 홀로 기다리는 아이, 술 취해 들어온 아빠를 돌보느라 아빠보다 더 늦게 잠드는 아이, 주민 센터에서 지급되는 몇 가지 반찬으로 혼자 식사를 하는 아이, 떨리는 손으로 밥 차리는 아빠를 보는 아이, 술 마시는 아빠가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은 아이,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 자신의 삶을 무던히 받아들이는 아이가 너무도 어른 같았다. 그 용감함이 애잔해서 도연은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건강한 감자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바짝 올리고 빨간색 립스틱을 빈틈없이 바른 여자는 몸에 딱 붙는 원피스 차림으로 선글라스를 손에 들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얼굴에 새겨진 고단함까지 가리진 못했다. 여자는 자녀들의 성을 현재 남편의 성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안동지원에서 기각된 지 한 달 만에 다시 신청한 것이었다.
“각자 사정이 있는 건데, 법원에서 이렇게 오라 가라 할 일은 아니잖아요?”
자리에 앉으며 신경질적으로 불평하는 여자에게 도연은 기각된 이유를 물었다.
“애들 친부랑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애들 외할머니가 반대해서 그랬겠죠. 친부는 양육비를 준 적도 없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반대하는지 모르겠고, 외할머니는 자기가 애들 키웠다고 하는데 나 일할 때 잠깐씩 애들 봐준 게 전부예요. 지금 남편이 애들 버린 친부 대신 아빠 역할 다했고요. 지금 남편 성으로 변경하는 것도 딸들이 원해서 그런 거예요.”
쏘아붙이는 동안 30분이 지났다. 그러면서도 가는 길이 머니까 빨리 끝내달라고,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빠른 말로 도연을 재촉했다. 덩달아 마음이 바빠진 도연은 여자를 대기실로 보내고 첫째 딸부터 조사실로 불렀다.
“엄마는 우리가 원하면 하고 아니면 하지 말라고 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요. 저는 성본 변경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엄마가 원하니까 강하게 원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딸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조사를 이어갔고 엄마의 목적을 위해 성실히 움직였다. 뒤늦게 도착한 둘째 딸이 문을 두드렸다. 작은 체격에 초승달처럼 웃는 얼굴이 조사실 문틈으로 쏙 들어왔다.
“김시재 님?”
시재는 자리에 앉아 크로스백을 빈자리에 두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첫째 딸과 달리 가볍고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그동안 제 이름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불편한 게 없어요. 굳이 새아빠 성을 따를 이유도 없고요. 동생 성과 다른 건 엄마가 불편한 거지 내가 불편한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알바하느라 시간 없는데 성 바뀌면 또 서류 떼러 여기저기 다녀야 하잖아요. 생각만 해도 너무 귀찮아요.”
시재의 답변에는 꾸밈이 없었다.
“엄마가 시재 씨 성본 변경을 왜 이렇게 원하는 걸까요?”
“친아빠랑 엮이는 게 제일 싫은 것 같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가 원래 한 가족이었다고 보여주고 싶어서? 우리가 친아빠 성을 사용하니까 재혼가정인 걸 사람들이 알게 되잖아요. 남동생이 조금 있으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든요. 그때 아마 무슨 서류를 제출해야 할걸요. 엄마는 아직 동생한테 저희 성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애가 언젠가는 알게 될 텐데 그 전에 바꿔두려고 이렇게 아등바등하네요. 그런다고 아빠가 같아지는 것도 아닌데.”
시재는 기억이 시작되는 무렵부터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엄마는 새아빠와 살았다. 엄마를 가끔 만났지만 데면데면했고 새아빠는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시재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무렵 욕실에서 미끄러진 외할머니가 얼마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손녀들을 돌볼 수 없었던 외할머니는 코끼리처럼 부은 자신의 다리보다 아이들의 거취를 더 걱정했다. 주변에 달리 부탁할 데도 없고, 재혼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딸에게 맡길 생각을 하니 속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몇 주면 회복될 거라는 의사의 말에, 그래도 니 새끼들인데 이럴 때라도 어미가 챙겨야 하지 않겠냐고 읍소 아닌 읍소를 했다.
외할머니의 회복이 늦어진 탓에 의사가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 엄마 집에서 생활한 지 4개월쯤 되었을 때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 무렵 친구에게 새아빠 험담을 한 문자를 엄마가 발견했는데, 엄마는 마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일로 시재를 혼내지도, 따져 묻지도 않았지만 엄마의 당혹스러움은 매질로 이어졌다. 제때 씻지 않아서, 밥 먹을 때 흘려서, 연필을 제대로 잡지 않아서, 엄마 말을 듣는 데 고개를 들지 않아서.... 이유는 다양했고 체벌은 조금씩 심해졌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옆에 있던 새아빠는 엄마의 매질을 묵인하고, 용인하고, 때로는 부추겼다. 늘 아빠의 눈치를 살피던 엄마는 시재를 혼내고 매를 드는 게 자신의 역할인 듯 최선을 다했다. 그때 엄마는 시재가 학교에서 배운 아주 작은 음지 생물 같았다. 새아빠라는 그늘에서 자라는.
엄마의 회초리는 외할머니로 인해 겨우 멈췄다. 넉 달 만에 돌아온 외할머니는 시재가 입은 반바지 위로 노랗게 물든 멍 자국을 보고 그 자리에서 짐을 챙겨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엄마, 외할머니, 새아빠, 친아빠 전부 지긋지긋해서 독립했어요. 새아빠랑은 원래 연락 안 했는데 이거 신청한 후부터 이삼일에 한 번씩 문자 와요. 엄마는 계속 본인이 시키는 대로 말하라고 하고, 외할머니는 엄마 욕하고. 친아빠는 다시 만난 지 이제 2년 됐는데 매일 전화하라고 하고요. 돈 없어서 고시원에서 지낼 때는 아무도 신경 안 쓰더니 안동에서 성 바꾸는 게 안 되니까 엄마가 월셋집 구해주면서 전입신고 하라고 하대요. 뭐, 고시원보다 지금 집이 나으니까 개이득! 근데 같이 살지도 않는 언니까지 전입 신고해놨어요. 여기서 이거 신청하려고.”
“엄마 얘기 듣는 거 힘들지 않아요?”
도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저 듣는 거 되게 잘해요. 외할머니와 엄마가 싸우면 외할머니는 엄마 욕하고 엄마는 외할머니 욕하는데요. 외할머니랑 통화할 때는 할머니 속상하게 엄마가 왜 그랬대 하고, 엄마가 외할머니 욕하면 할머니가 왜 그랬지 하고 말아요. 그냥 들어주면 돼요.”
시재의 헐렁하고 방실방실한 웃음 너머로 보이는 곡진한 삶의 궤적이 도연의 마음에 남아 계속 맴돌았다.
“집안 어른들이 다 엉망진창인데 우리 19세 작은딸이 너무 어른 같아서 좀 슬프네요.”
조사 후 자리로 돌아온 도연의 말에 선이는 역시 그 유명한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말이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자가 적절한 온기와 바람, 수분만 있으면 아무런 조작을 하지 않아도 싹을 틔우듯이 적절한 환경만 만들어진다면 자연스럽게 한 존재가 자기다움을 드러내게 된다고 했지요. 아주 오래전 그 현명한 선생님께서.”
아이들은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학교, 사회에서 또래, 선후배, 교사들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적당히 버리고 배운다. 스스로 적절한 온기와 바람과 수분을 찾아다니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간다. 도연은 감자, 감자, 하고 몇 번 되뇌었다.
며칠 전 도연은 가정방문 출장조사에서 홀로 손자를 양육하는 할머니의 하소연을 몇 시간이나 들은 다음에야 겨우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한 세월 묵힌 마음을 누구에게 토해낼까 싶어 묵묵히 들었지만 도리어 그 이야기에 체한 건 도연이었다.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나 찾아 들어가 숨을 돌리고 있던 그때, 어깨를 살짝 치는 손길에 놀라서 돌아보니 시재가 왼쪽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웃고 있었다. 도연이 시재의 가슴께 달린 이름표를 쳐다보자 시재가 이름표를 탁탁 쳤다.
“제 이름은 잘 유지 중입니다. 엄마가 법원 욕도 엄청 하고 친아빠 욕도 잔뜩 하고... 그중에 선생님 욕도 있었는데 그건 굳이 전하지 않을게요.”
인심 쓰는 듯한 말에 도연은 고맙다고 답했다.
“제가 평일에는 여기서 일하고 주말에는 이자카야에서 알바하거든요.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무엇보다 하이볼이 최고예요. 시간 되면 꼭 한번 놀러 오세요. 그럼 저는 이제 일하러 갑니다!”
시재는 또박또박 이자카야의 이름까지 알려주고 계산대로 돌아갔다.
얼떨결에 시재를 만났을 때도, 이자카야에 오라는 초대를 받았을 때에도, 시재를 보러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근처를 지나게 되더라도 그곳은 피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도연은 이곳에 앉아 있었다.
언니의 기일이었다.
태움이라는 건 뉴스에서만 봤지 신규도 아닌 경력직으로 이직한 병원에서 언니가 겪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언니의 일기장에는 분노나 원망보다 그들의 요구를 따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이 가득했다.
이전 병원에서 도대체 뭘 했냐며 김 선생님이 화를 냈다. 스테이션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김 선생님이 지시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점심을 먹지 못했다.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 나이트 업무가 너무 많다, 환자가 컴플레인할 때마다 내 일이 아닌데도 다그쳤다.... 언니는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괴롭힘을 견뎠다. 모욕적인 언사는 일상이었다. 제대로 처치를 하지 않았다며 명치를 때리고 지시한 대로 했음에도 거짓말한다고 때렸다. 언니는 이직한 지 7개월 만에 체중이 8킬로그램이나 빠졌지만 가족들에게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 생일날 가족끼리 모인 자리에도 언니는 결국 참석하지 못했다.
언니는 죽기 3개월 전에 도연을 찾아왔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에 어두운 표정,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걱정하자 언니는 간호사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는 도연의 말에 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최선을 다해야지 했다. 아빠가 언니와 도연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어느 곳에 있든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언니는 밤 근무를 마친 후 수면제를 먹고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웠다. 도연은 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일기를 보며 절대로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언니가 도연에게 남긴 유일한 말이었다.
열심히 말고, 그냥 살아.
“시재 씨, 열심히 살지 마요. 처음 법원에서 봤을 때부터 그 생각했어. 가족이라도 들이받을 때는 들이받고, 싫으면 싫다고 하고 일도 대충대충 해.”
도연은 조금 취한 것 같았다.
“남의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꼰대랬는데... 나는 꼰대니까 이래라저래라 할래. 시재 씨, 열심히 살지 마요. 나는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언니처럼 안 살 거야. 그러니까 시재 씨도 열심히 살지 마요. 아니야! 내 말도 듣지 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손사래를 치다가 테이블에 꼬꾸라졌다. 도연이 엎드린 채 웅얼거렸다.
늦은 오후에 눈을 떠 핸드폰 화면을 켰다.
‘언니 잘 들어갔어요? 감자는 이제 퇴근 중. 문자는 내일 보겠지만 번호 따인 김에 연락했어요. 술 많이 마셨으니까 해장은 꼭 해요.’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시재의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나 왜 언니 됐어요?’
‘언니는 사람을 감자로 만들어놓고 선생님에서 언니로 바뀐 게 뭐 대수라고. ㅋㅋㅋ’
지난밤 눈 풀린 상태로 시재에게 감자야, 참지 마! 우리 발 달린 감자,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손으로 마른 얼굴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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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