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요동칠 때, 기꺼이 나는 혼자가 된다
 
지은이 : 김지호 (지은이)
출판사 : 몽스북
출판일 : 2025년 04월




  • 분주한 일상, 복잡한 생각들도 몸을 움직여 집중하다 보면 가볍게 탈탈 털어낼 수 있습니다.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 나에게 집중하는 힘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만나봅시다.     


    마음이 요동칠 때 기꺼이 나는 혼자가 된다


    좋은 건 시작이 힘들지

    어느 날 요가가 나에게로

    그 시절 난 강남 엄마였다. 간간이 들어오는 드라마 대본이나 방송은 죄다 거절하고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10년 전. 방송인 김지호 대신 엄마로 살기를 선택했지만 아이는 점점 커갔고 그만큼 다시 내 시간이 늘어났다.


    뭔가 집중할 게 필요했다. 그때도 운동을 꾸준히 했는데 운동을 마치고도 에너지는 넘치고 뭔가 부족한 아쉬움에 혼자 뭐라도 하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변에서 “넌 체대를 갔어야 했다.”고 말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고 꾸준히 했는데 혼자 좀 해보려고 하면 뭐부터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상하네, 어떻게 운동 기구나 선생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걸까?


    집에서도 몸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윗몸일으키기라도 해볼라치면 몇 개 하고는 이내 포기다. 아니, 아예 시작을 안 한다. 구령과 강제에 의한 운동에 익숙해지니 자기 몸도 원하는 대로 못 움직이는구나. 누군가가 강요하거나 틀에 넣으려 하면 튕겨 나가는 성격이라며, 늘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고 하던 나 아니던가.


    운동의 주권을 찾아오려 궁리하다가 매트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요가를 해보기로 했다. 기구도 필요 없고 오로지 내 몸과 의지, 매트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았다. 동네 가까운 곳에 요가원을 찾다가 ‘아쉬탕가 요가(Ashtanga Yoga)’를 하는 곳을 발견했다. 이효리가 해서 유명해진 요가. 호기심이 일었다. 오래 요가를 했다는 그녀의 선택을 믿어보자 싶었다. 이전에 두세 달 요가를 했던 적도 있어 기초는 알고 있으니 맨 뒷자리에 조용히 들어가 따라 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10년, 지금도 요가를 하고 있다. 주 5회 수련을 거의 빠짐없이 나가다 보니 맨 뒷줄에서 눈치 보며 따라 하던 초보 찌질이에서 순서도 외우고 용어도 제법 다 외우며 산스크리트어로 요가 자세를 뜻하는 아사나를 구현해 내는 맨 앞줄의 요기가 되었다.


    요가를 콘텐츠로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니 다들 궁금해하며 물어왔다.


    “개인 레슨 받았어요? 아니면 소그룹 레슨?”

    “아니, 그냥 일반 단체 수업 받았어요.”


    혼자 하고 싶어서 요가를 시작했으나 수업을 받다 보면 함께 수련하는 열기, 그 좋은 에너지 덕분에 더 열심히 수련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게 된다. 옆 사람의 땀 냄새가 고스란히 내 코로 스미는 시간들. 다닥다닥 붙어서 수련하는 열기 가득한 수업을 난 더 선호했고 그랬기에 더 즐겁고 에너지 넘치게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하면 할수록 더 깊게 알고 싶고 그 시간이 소중해진다. 아니 행복해진다.


    “전생에 요가를 수련한 사람이 현생에서도 요가에 이끌리게 되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석이 이끌리듯 다가오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 6장 44절


    동적이고 체계적인 아쉬탕가 요가를 만든 파타비 조이스가 자주 인용하던 글이기도 한데, 힌두 철학적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 난 전생에 요가를 했던 요기였다. 때가 되고 인연이 되어 운명적으로 요가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지. 요가는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베다』, 『우파니샤드』와 더불어 힌두교 3대 경전. 힌두 철학과 영적 지혜를 담은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통찰을 준다. 수행 방법으로 요가의 여러 측면을 기술하고 있다.


    *아쉬탕가 요가(Ashtanga Yoga)는 인도의 요가 스승 스리 K. 파타비 조이스가 체계화한 역동적인 요가 스타일로, 호흡(Ujjayi Pranayama), 밴다(Bandha, 에너지 잠금), 드리쉬티(Drishi, 시선 집중)와 함께 정해진 순서대로 아사나를 수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힘과 유연성을 동시에 길러준다.


    모든 좋은 것은 시작이 힘들다

    아쉬탕가 요가는 수련 방식이 엄격하며, 매일 수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인지 요가를 시작하고 수련이 습관이 되었다. 안 하면 뭔가 해야 할 일을 안한 듯 많이 불편해졌고 모든 스케줄의 우선순위에 요가를 두게 되었다. 약속을 잡기 전에도 요가 먼저, 일상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운동을 하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내 대답은 한결같다. “일단 무조건 시작해 봐, 해보면 알게 돼.”


    시간이 없어서

    살을 빼고 시작하려고

    더워서 나중에

    추워서 나중에

    이 일 끝내고

    애 학교 보내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매트를 펴기까지가 어렵다. 그런데 일단 매트에 올라 요가를 시작하기만 하면, 괜히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정말 몸이 찌뿌둥한 날, 너무너무 하기 싫어 제칠까 싶다가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억지로 겨우겨우 시작하면 귀신같이 몸이 슬슬 펴지면서 컨디션이 좋아진다. “하길 정말 잘했어.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하며 안도한다. 신발 끈을 묶고 현관 문턱을 넘어서기가 힘든 거지, 알고 보면 시작이 반이라며 운동을 망설이는 모두에게 우리 같이 뭐든 해보자고 말을 걸어본다.


    반복된 훈련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은 힘들다. 그래서 이유 불문 무조건 ‘그냥 하는 거야’라고들 한다. 그런 수련의 반복 속에서 더 쉽게 내게 집중하게 되고 성숙해지는 것도 같다. 처음에는 열정이 안 생기더라도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뭔가 다른 감정과 열정이 시나브로 생겨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게 꼭 요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수련의 재미

    덜 실망하고 덜 욕심내고

    요가를 하면 할수록 화려한 아사나보다 기본 동작에 집중하게 된다. 몸의 정렬이 맞는지, 정상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돌아본다. 화려한 동작들에 매료되어 정렬이 흐트러지면 동작을 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사나 동작을 멋지게 취하기 위해 꽤나 집착하던 나를, 나의 인스타그램 친구들이 부디 잊어주시면 좋겠다.


    기본이 제일 중요하고 기본이 탄탄할 때 다음의 것들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걸, 그 외의 것들은 부수적이라는 것을 요가를 하며 점점 알아간다. 화려한 겉모습으로 얻는 만족감은 잠시일 뿐, 그런 것들은 금세 허무해지고 쉽게 지루해진다.


    사는 것도 그렇겠지? 내가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잘 서 있으면 바람이나 충격에 살짝 흔들리더라도 결국 내 자리로 돌아온다. 나로서 나답게 잘 서야 하는 것이다. 너무 힘주지 말고 뿌리를 잘 내려서, 수축과 이완을 잘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단계적으로 좋아지고, 또다시 안 되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아가고 있다. 이런 과정들이 나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덜 실망하고 덜 욕심내고 천천히 더 행복해지기를······.


    지구 평화를 위해, 호흡!

    선생님의 구령을 따라 요가 동작을 할 때 어려운 부분에 다다르거나 잘하고 싶어 욕심부리는 동작을 하다 보면 여지없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호흡하세요!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내쉬고~!”


    아, 무의식중에 또 숨을 멈추고 있었구나. 우리는 어려운 일에 맞닥뜨리거나 긴장할 때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게 된다. 이때 숨만 잘 쉬어도 몸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 당연하고도 손쉬운 진리를 그동안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요가를 하며 숨을 잘 쉬는 것이 점점 중요해졌다. 호흡으로 기분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긴장해서 숨이 안 쉬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화가 나고 감정이 통제가 안될 때 숨이 빨라지는 것도 문제다. 이럴 땐 가늘고 길게 숨을 쉬는 것만으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요가 수업을 하기 전,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면 몸뿐 아니라 마음도 같이 호흡한다. “요가는 호흡을 하면서부터 시작”이라는 말도 있다. 의식하며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달라진다. 생각은 더 차분해지고 몸은 예열이 된다. 그러면서 늘 굳어 있던 등 근육이 서서히 말랑해진다.


    호흡의 기본은 입은 다물고 코로 하는 것이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호흡하면서 숫자를 세는 것도 도움이 된다. 들숨과 날숨이 동일한 시간을 유지하는 게 좋은데 3초 들이마시고 3초 내쉬는 식이다. 이걸 다섯 번만 반복해도 완벽한 기분 전환이 가능하다. 30초, 아니 15초만 숨쉬기에 몰입해도 바로 차분해진다. 숨만 잘 쉬어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내 마음도 지킬 수 있다.

    숨쉬기는 아이의 사춘기 때 우리 가정을 지켜주기도 했지만 지구의 평화를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수련 방법이다. 들숨과 날숨을 같은 간격으로 쉬고, 코로 숨을 쉬고, 복식 호흡을 하다 보면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명상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좋은 호흡을 오랫동안 하려면 힘을 빼고 호흡 근육의 힘을 키워 천천히 늘려나가야 한다. 처음에 2~3초로 시작했다가 수련을 통해서 1분까지도 가능해진다고 한다.


    현재 나의 숨은 50초 정도. 프리다이빙 하는 분들은 4분 넘게까지 자유자재로 가능하다고 하는데, 호흡과 명상 전문가들은 자신이 쉴 수 있는 숨을 100% 다 쓰지 말고 70%만 쓰라고 권한다. 내 숨을 100% 다 쓰면 처음 몇 번은 가능하지만 결국 너무 힘이 들어 오래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100미터 달리기 하듯 전력 질주하지 않고 자기만의 페이스로 완주하는 노하우랄까? 숨을 잘 쉬다 보면 잘 사는 법도 저절로 모색하게 되는 것 같다.



    일상을 돌보며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마

    아이가 중학교 1학년쯤 되었던 어느 날, 오래 잊고 있던 소녀 시대의 나를 다시 만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사춘기가 되는 동안 이렇게 나와 재회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딸아이와 소녀 시대의 내가 오버랩되면서 동시에 부모님의 젊었던 시절까지 저절로 떠오르게 되던 순간.


    어렸을 때 나는 가만히 있질 못했다. 에너지가 넘쳐서 학교 안에서는 너무 활발했고 밖에서는 늘 걸어 다니는 걸 좋아했다. 두세 정거장쯤 되는 거리는 웬만하면 걸어 다녀서 고등학생 때 별명이 ‘만보 걷기 여사’였다. 중학생 때는 학교와 멀리 떨어진 석계역으로 이사를 가서 지하철 타고 다니는 즐거움을 잔뜩 누렸다. 다양한 내기와 게임으로 추억을 쌓아가며 등하교를 했었다. 그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학교와 집의 거리가 멀어진 거였는데 철이 없어서였는지 오히려 더 좋았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게 되면서 그냥 오늘 좀 걸어볼까 싶은 마음이 들면 혼자 훌쩍 걸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도 하면서,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이런저런 생각도 좀 하는 시간이 마냥 좋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와 함께 하교할 때면 걷다가 지하철을 탔다. 잠깐 정차한 지하철 매점에서 새우깡 사서 돌아오기 내기도 하고, 이에 엿이나 김을 붙이고 앞 사람을 웃길 수 있나 없나, 손잡이 안 잡고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누가 더 발을 오래 붙이고 있나 하는 시시한 내기들에 마냥 신나 하며.


    그때는 틀에 갇히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한가득이었다.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듣기 싫은 수업 시간이 있으면 탈의실에 책걸상을 숨겨두고 학교 담을 넘었다. 친구는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고 나는 그 옆의 구멍가게에서 가게 아줌마와 수다를 떨면서 종종 튀김만두를 사 먹었다. 지금은 핫 플레이스인 가로수길 아래 구멍가게의 파라솔 아래가 그 당시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도 먼 일탈이었다. 은행나무 잎사귀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걸 보는 게 수업 듣는 것보다 좋았다.


    그 시절 나는 부모님 모르게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오락 몇 판을 끝내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담을 타고 금세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탈출구. 옆 학교에 축제가 있으면 수업 시간이라도 교실 밖 창턱에 숨어서 구경도 하고. 듣기 싫은 수업은 기어코 빼먹곤 하던 사춘기 소녀시대. 그렇게 스릴 있게 학교를 다녔더니 학창 시절이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친구들은 고3 때를 생각하기도 싫다고 하는데 나는 다시 돌아가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좋았던 추억이 많다.


    그래서 딸아이의 사춘기 모습을 보았을 때, 부모님은 지금도 모를, 작은 일탈을 즐기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아이를 이해하고 싶어서, 아이에게 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나보다 착하고 나처럼 잘 저지르고, 나보다 보수적이라 안심이 되는 딸아. 엄마는 너에게 불편한 사람이 아니라 다 받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너의 일탈은 엄마보다 더 과감하지만 한결같이 나보다 믿음직스럽단다.’


    어른이 되고 나서 언젠가 부모님께 큰맘 먹고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인생에서 남의 눈, 남의 평가가 그렇게 중요했냐고.


    “남들이 뭐라겠니!”

    “남이 보면 어쩌려고!”

    “엄마 친구 딸은……”


    나의 질문에 부모님은 무척 당황스러워하셨다. 부모님에게는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당연한 말들이라 이런 질문을 하는 딸이 낯설었나 보다.


    누군가에겐 숨 쉬듯 자연스러운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숨 막힐 것 같은 제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제 안다. 그런 타인의 시선이라는 틀 안에서 평생을 살았기에 나도 자기 검열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 아이를 틀에 가두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늘 생각했건만, 막상 아이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었다. 사춘기 아이와 말다툼하다 화가 나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불현듯 떠오른 나의 사춘기 시절. 나의 소녀 시대와 인사를 했다.


    그래, 사춘기 너 왔구나. 내가 네 마음 안다, 엄마가 좀 더 어른스러워지는 수밖에.


    그렇게 나의 옛 시절을 생각하며 아이의 소녀 시대가 지나가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나이테가 드러나도

    평생 친구, 차(茶)

    그윽한 흙갈색.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나만의 중국식 티포트, 자사호를 들였다. 요즘 나의 요가 룸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라질 듯이 얇지만 맛있게 차를 우려낸다.


    차는 잘 모르는 분야였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려주면 한잔 홀짝 맛있게 먹는 정도로 족했다. 커피는 즐겨 마셨다. 물을 끓이고 온도를 맞추고 입맛에 맞는 원두를 고르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동작도 즐거웠다. 내가 마음이 어지럽고 무거운 날은 손의 힘 조절부터 잘못됐는지 커피 맛도 다르게 느껴졌다. 커피 맛이 달라지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한동안 아침에 눈뜨자마자 커피부터 내렸다.


    그러다 요가원에서 차를 만났다. 하타 요가를 마치고 나면 이어지는 차담 시간. 매번 기다려질 정도로 차가 '맛있는' 시간이었다. 난 이제 수업 마치고 제일 먼저 뛰쳐나가는 초보 시절의 소심한 '맨 뒷줄이'가 아니다. 수련을 마치면 선생님을 중심으로 둘러앉는다. 노련한 팽주답게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숨 쉬듯 능숙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데우고 다시 따라내 차를 우린다. 여럿이 나눠 마시는 차를 작은 잔에 따라 한 모금씩 홀짝이다 보니 선생님의 손은 쉬지 않고 차를 내린다.


    자사호에 물을 따라 붓고 다시 컵과 다기에 따르는 노련한 움직임. 그런 선생님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나도 제대로 차를 마셔보고 싶다는 마음이 보글보글 끓어올라 도구부터 다 주문했다. 남편에게 마침 좋은 보이차가 있었다. 보이차를 식칼로 막 뜯었다가 무식하다고 야단맞고 제대로 내리는 차를 맛보러 가기로 했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마음이 들면 배우면 된다. 숨은 고수들을 만나는 재미가 일상에 윤기를 더해 준다.


    음식에도 조예가 깊고 차를 늘 즐기시는 선재 스님이 소개시켜 준 경기 양평의 명성다원에 찾아갔다. 차 박물관이라고 해야 할 멋진 공간에서 설명도 듣고 차도 마시고 신중하게 찻잎도 골랐다. 내 생일 기념으로 자사호도 마련했다. 한눈에 반했다. 색과 선, 질감이 너무 좋아서 바라만 보고 있어도 흐뭇하고, 만져만 봐도 신기했다. 이제 나의 다기들이 매일 우려내는 차향을 켜켜이 머금고 은은한 광택을 띠겠지.


    집에 돌아와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내려서 마셔보니 분명 같은 찻잎인데도 선생님이 만들어주던 그 맛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혼자서 우직하게 계속 내려 마셔본다. 요가 룸에서 수련을 마치고 마시는 차 한잔의 생활이 나에게 여유를 더하는 것 같아서. 요가 하기 전에 보이차를 한잔 마시면 뜨끈하니 몸이 좀 릴랙스 되는 느낌이다.


    사 온 차를 다 마시고 다시 명성다원을 찾아갔다. 또 와서 반갑다고 귀한 차를 내어주셔서 딱 한 모금을 넘겼는데 가슴속에서부터 뜨끈뜨끈 열이 올라왔다. 향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깊고 진하다. 보통 4~5번 우리면 그만인데 좋은 차라서 10번을 내려도 맛이 그대로였다. 내가 내리는 차와는 맛이 천지 차이였다.


    요즘 나는 『건너가는 자』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는데 스토리 전개를 따라가는 소설이 아니어서 그런지 읽을 때마다 뜻이 다르게 다가온다. 읽으면서 의문을 가졌던 구절이나 표현이 조금씩 내게 맘을 열어주는 것처럼.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데 그래도 너무 좋은 책이라는 게 느껴져 계속 들추게 된다.


    책에서 “세계를 내가 정해 놓은 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내용에 밑줄을 그었다. 차 마시는 걸 괜히 다도라고 하겠나. 차를 내리는 사람과 그 차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과의 합으로 마시는 거지. 찻잎뿐 아니라 찻물의 온도, 우리는 시간, 같이 마시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차 맛을 좌우한다.


    차, 평생 같이할 친구 하나를 알게 됐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같이 가기로 한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