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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로 가야겠다
 
지은이 : 도종환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5년 11월




  • 오랜 침묵 끝에 도달한 내면의 결실이다. 삶의 고통과 상처를 통과해 얻은 언어는 한층 더 부드럽고 다정해졌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소음 속에서 자신만의 고요를 찾아간다.


    고요로 가야겠다


    소원
    올해도 소한 대한 지나며 폭설 퍼부을 것이다
    사나홀씩 눈 쏟아져 산짐승 다니는 길도
    사람들이 세상으로 낸 길도 다 지워지는 날
    내가 찍은 내 발자국 데리고 고요도 데리고
    더 깊은 곳에 깃든 내 집 찾아가고 싶다

    올해도 청명 곡우 지나면 꽃사태 나고
    남쪽에선 매화 산수유 벚꽃이 지천으로 필 것이다
    꽃 보러 가고 싶은 마음 눌러 앉히곤 꽃출석부 들고 나가
    뒤뜰에 오종종 핀 봄맞이꽃 주름꽃 꽃다지
    출석 부르며 내 집 마당 먼저 꽃교실로 가꾸고 싶다

    올해도 폭우 쏟아져 도시가 무릎까지 젖고
    천둥과 번개의 번쩍이는 채찍이
    인간의 마음과 캄캄해진 하늘을 쩍쩍 갈라놓곤 할 것이다
    그때마다 오만과 허세와 어리석음을 속죄하고
    가장 겸허한 언어로 기도하고 싶다

    올해도 비명 소리 아우성 소리 골목골목 넘칠 것이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고
    외면하지 않아야 할 목소리 있을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해 들을 줄 아는 귀와
    균형과 중정(中正)의 지혜를 갖게 해달라 간구하고 싶다

    올해도 가을 오면 굴참나무 잎은 지고 쓸쓸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도 한 장의 낙엽처럼 우주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순간순간이 은총이었던 날들과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마른 얼굴로 하늘 올려다보고 싶다


    과도한 소망
    도시로 나가 일하면서도
    아침이면 잠시 고요에 잠긴 뒤 일터로 나가
    오전에 일하고 이영소
    좋은 사람 만나고
    오후 시간에 짬을 내 
    짧게라도 글 읽거나 음악 듣고 
    밀린 일 마친 뒤
    천천히 돌아오는 저녁을 꿈꾸었다
    돌아와 찬물에 손 씻으며
    지치고 빛바랜 마음 헹구어 널고
    밤이면 강변을 산책하게 되길 바랐다
    휴일 날 창에 매달려 닝닝거리다가
    제풀에 지쳐 나뒹구는
    나나니벌 한 마리
    뜨락으로 내보내 살려주고
    햇감자 얇게 썰어
    된장 풀어 국 끓이며 생각해보니
    하루에 그중 한 가지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과도한 소망이었다 내 바람은 
    가만가만 말 걸어오는 나뭇잎과 
    침묵으로 대화하는 오후 
    고전음악의 고요한 선율이 
    물방울처럼 가슴을 적시는 저녁 
    밑줄 그은 시 몇 줄 공책에 옮겨 적고는 
    몇 번을 다시 펼쳐보는 밤 
    명상의 숨결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는 
    가만히 멈추어 있는 새벽 
    고요든 
    강바람이든 
    느린 시간이든 
    그중 어느 하나라도 만난 날은 
    며칠 만에 잠깐이라도 만난 날은
    그나마 사는 것 같았다
    아수라 한복판에서


    저녁
    지구가 하루 한 번
    반대편 쪽으로 돌아눕는 건
    고마운 일이다
    양귀비꽃을 가려주어
    붉은 꽃잎에게 긴장 풀 시간을 주고
    느티나무에게 바람의 손길을 내려보내
    바삭바삭 마르는 잎들의 체온을
    눅눅하게 낮춰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도
    내 안에 끓어오르는 것 때문에 힘들었다
    마른 구역질이 났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많이 걸어온 건
    다행이었다
    바람이 느티나무를 토닥이고 있다가
    내게 와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느티나무처럼 나도 체온이 조금 내려갔다
    먼 곳에서 찾아온 저녁 구름이
    내 곁에 한동안 같이 있어주었다
    내 안에서 나를 불 지르던 것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비를 조금 데려온다 하니
    그것도 다행이었다


    사랑해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랑해요 라는 말로
    맥박이 뜨거워지고
    낡아가는 나를 씻어낼
    맑은 힘이 생기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사랑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있다는 건
    낯선 것들로
    빼곡히 둘러싸인 세상에서


    저녁연기
    굴뚝을 빠져나온 연기가
    하늘로 오르려 애를 쓰다가
    지붕의 비스듬한 선을 타고 밀려 내려옵니다
    오후 내내 무겁던 공기가
    초저녁 무렵에는 더 차고 무거워져
    저녁연기를 내리누릅니다
    가등 한쪽 면을 감싸고 맴돌던 연기는
    꼬리를 여미어 쥐고 뒷모습을 감춥니다
    흉터는 남았지만
    상처는 아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끝났다고
    다 지나갔다고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었는지
    내게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는 상처를 침묵으로 덮고
    무게 없는 시간으로도 덮고
    여름과 가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제공받았고
    그렇게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으니
    지난날의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용히 지워지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가벼워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워
    나는 향을 다시 피웁니다
    향 연기의 꼬리가 끌고 가는 가느다란 침묵을
    따라가다 돌아오곤 합니다
    그 사이에 산벚나무들은 일찍 잎을 버렸고
    갈참나무 굴참나무 가득한 앞산 뒷산은
    구릿빛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목련잎이 돌아갈 준비를 하는 뜰을 거닐다
    낮달이 오랫동안 나뭇가지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목련잎을 지나 회화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구름빛 낮달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도 내게 터럭 같은 기대를 지닌 이들에게
    지금 이 저녁 구름을 보내주고
    늦가을 초저녁의 무거운 빛깔 일부를 잠깐
    보여주고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른 나뭇잎 밟는 소리가 유일한 소리인
    적막한 시간에
    가슴에 남아 있는 게 있다면 이렇게
    부서지기를 소망합니다
    잘게 잘게 부서져 흩어지기를 바랍니다
    허공으로 오르지 못하는 저녁연기가
    메마른 육신을 어루만지다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