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아래층에 반달곰이 산다
 
지은이 : 마리메 (지은이), 임지인 (옮긴이)
출판사 : 라곰
출판일 : 2026년 01월



  • 살고 있던 집의 화재로 급하게 이사를 하게 된 유리코. “죄송하지만 바로 입주할 수 있는 곳은 이 집뿐” 이라며 부동산 중개인이 소개한 곳은‘동물 입주 가능’한 준공 35년 차의 건물. 유리코는 동물 입주 가능이라는 말에 집을 보지도 않고 계약한다. 이삿날, 유리코는 가슴의 초승달 무늬가 인상적인 진짜 반달곰이 아래층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1년 차. “처음 뵙겠습니다”

    봄날의 이사
    올봄 나는 이곳으로 이사 왔다. 보송보송 맑게 갠 기분 좋은 어느 날, 5년간 살던 임대 맨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은 가다랑어였다.

    1층에는 대학생인 수달이 살고 있었다. 수달은 취미인 낚시를 갔다가 커다란 가다랑어를 잡았고 저녁으로 가다랑어구이를 해 먹기로 했다. 그러나 가다랑어가 너무 건강했던 탓일까, 조리도 하기 전에 어째서인지 되살아나 날뛰기 시작했다나 뭐라나.

    격투 끝에 수달은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자포자기한 가다랑어가 수달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수달 집은 새까맣게 타버렸다.

    “희망하시는 조건이라면, 지금 당장 입주할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

    일주일 뒤 부동산을 찾았다. 역에서 도보 15분 이내이면서 한갓진 동네. 화장실과 욕실은 구분되어 있고 월세는 되도록 저렴한 곳. 그렇게 말하자 부동산 아저씨는 “한 곳 밖에 소개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지은 지 35년 된 4층 건물
    동물 입주 가능

    “이 맨션엔 어떤 분이 살고 있나요?”
    “가만 보자. 거의 빈집이에요. 아, 1층에 반달곰이 살고 있었던 것 같네요.”

    부동산 아저씨는 고개를 비스듬히 올리고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회색 정장에 선명한 분홍색 넥타이를 맨 부동산 아저씨. 영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지만 좀 더 차분한 색상을 조합한다거나 이런저런 배합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럼, 여기로 할게요” 하고는 새집을 결정했다.

    이삿날 아침, 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이삿짐센터에서 나온 팀은 고릴라와 침팬지 그리고 체격 좋은 아저씨였다. 고릴라는 오른팔에 ‘리더’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있었다.

    새집은 2층이었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2층이어도 햇빛이 잘 들었다. 오래된 건물치고 허름하지도 않고 의외로 깔끔했다.

    짐을 옮겨준 그들을 배웅한 나는 다시 새집으로 올라와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1층으로 향했다. 이웃인 반달곰에게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인터폰을 누르자마자 “네!” 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짧게 용건을 전했다. ‘영업 사절’ 스티커가 붙어 있는 인터폰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쿵쿵 하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문을 열고 나온 건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커다란 반달곰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커서 살짝 놀랐으나 이렇게 가까이서 곰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삿짐 옮기는 소리가 시끄러우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이거, 별거 아니지만 받으세요.”

    나는 도톰한 종이로 만든 흰색 봉투를 곰에게 내밀었다.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어라, 이건?”
    “역 앞에 있는 케이크 가게에서 파는 롤케이크예요.”

    곰은 나와 종이봉투를 번갈아 보더니 돌연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혹시.......”
    “네, 벌꿀 롤케이크예요.”
    “야호!”

    곰은 양손에 든 종이봉투를 높이 들어 올렸다.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싱글벙글 활짝 웃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 저기...... 괜찮으시다면 커피라도 한잔 하실래요?”

    용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곰이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불쑥 죄, 죄송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요.......”

    조심스레 묻는 곰의 얼굴에는 ‘망했다’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불안한 듯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런 곰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나쁜 곰은 아닌 것 같아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네, 좋아요.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야호!”

    곰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방방 뛰었다. 곰이 뛸 때마다 땅이 울리고 흔들렸다. 역시 이 곰은 정말 크다. 그리고 분명 아주 무거울 테지.

    곰은 문을 활짝 열어 나를 안으로 들이고는 허둥지둥 부엌으로 사라졌다. 나는 조금 긴장되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곰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곰의 집은 마치 숲 같았다. 벽에는 나무껍질이 붙어 있고, 천장에는 덩굴이 한 무더기 뻗어 있다. 바닥에는 진녹색의 장모 양탄자가 깔려 있어 그야말로 숲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멋지네요.”

    집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하자 곰은 기쁜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별말씀을요. 쑥스럽네요.”

    정말 쑥스러운지 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익숙한 손길로 커피와 롤케이크 한 조각을 내주었다. 방 안 가득 퍼져 나가는 향긋한 커피 내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러자 엉겁결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곰이 내려준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곰 씨도 가다랑어구이 좋아하세요? 아, 맞다.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곰 씨’라고 부르고 나서 적절한 호칭일지 문득 걱정됐다. ‘반달곰 씨’라고 부르기엔 너무 길어서 무심코 ‘곰 씨’라 고 불렀는데 어쩌면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가다랑어구이는 아주 되게 좋아해요! 그리고 편하게 곰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게까지 정중하게 말씀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는 곰이라고 부를게.”
    “네!”

    곰은 싱글벙글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기뻐서인지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나카자와 씨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유리코야.”
    “유리코 씨! 좋은 이름이네요! 그럼 저는 유리코 씨라 부를게요!”


    2년 차. “같이 먹는 게 훨씬 맛있어”
    퇴근길
    “궁금해요?”
    “.......”
    “하지만 이건 술이라 아직은 안 돼요.”
    “.......”

    편의점 안쪽, 차가운 음료가 빼곡히 진열된 코너에서 느슨하고 방만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대화가 아닌가. 들려오는 건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익숙한 목소리뿐이니까.

    퇴근길에 달콤한 게 먹고 싶어 편의점에 들렀다. 잘 아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더니 역시나 곰이 있었다. 까맣고 커다란 반달가슴곰이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뭐 하고 있어?”
    “아, 유리코 씨! 안녕하세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는 곰.

    곰 발치에는 귀여운 병아리 한 마리가 있다. 폭신폭신 샛노랗고 오동포동 살이 오른 병아리.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얘는 누구야?”
    “심부름 나온 병아리예요! 엄마가 식빵이랑 우유를 사 오라고 한 모양인데, 이 오렌지 맛 츄하이가 눈에 들어왔는지 자꾸 신경 쓰이는 모양이에요.......”

    한편 병아리는 곰을 샐쭉한 표정으로 흘겨보고는 이내 나를 향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만약 커다란 나무 아래 병아리가 있다면 이런 모습으로 보이려나. 이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훌훌 풀린다.

    귀여워라. 몽글몽글한 마음으로 병아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위에서 뭔가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의 주인을 올려다보니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고 있다. 바늘로 쿡 찌르면 팡 하고 터질 것만 같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방금까지 헤벌쭉거리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써 담담한 표정을 만들었다.

    “이 술이 궁금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병아리. 아아, 귀여워라. 무심코 쓰다듬고 싶어지는 마음을 꾹 눌렀다. 여기서 헤벌쭉 웃어버리면 안 된다.

    “하지만 술은 어른이 돼야만 마실 수 있는 거야.”

    병아리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진다. 병아리도 나 같은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백번 천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캔의 디자인에 마음을 빼앗긴 거겠지. 작디작은 몸 뒤로 ‘이 사람도 나를 이해 못 해주는구나......’라는 마음의 소리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아, 부루퉁한 표정마저 너무도 사랑스럽다. 나는 무심코 풀어지려는 얼굴 근육을 간신히 잡아당겼다. 이 아이를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병아리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목소리를 낮추어 무언가를 알려주었다.

    병아리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냉장고 안의 술을 본다. 나를 본다. 술을 본다. 나를 본다. 병아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바삐 움직이고는 마침내 털썩 어깨를 늘어뜨리고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술 코너를 떠났다.

    병아리야, 용서해줘. 짓궂게 굴고 싶지는 않았는데. 왠지 마음이 조금 아려왔다.
    영차 하고 일어나 곰을 보는데 곰의 눈이 유리구슬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맑고 둥그런 눈동자에 내가 비쳐 있었다. 꼭 거울 같다.

    “유리코 씨, 대체 병아리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제가 그렇게 애원해도 안 됐었는데 그렇게 간단히 단념하게 만들다니.......”
    “후후후, 비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과즙 100퍼센트 오렌지 츄하이 두 캔을 바구니에 담고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 흘긋 뒤돌아보니 곰이 술 코너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맞다! 혹시 괜찮다면 저녁 같이 안 먹을래요?”

    디저트 코너에서 오늘 밤 후식을 커스터드 푸딩으로 할지, 아니면 우유 푸딩으로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곰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지쳐 있는 나에게는 그 화사한 미소가 다소 눈부셨다. 변함없이 활기찬 놈이다.

    “그래도 돼? 사실 오늘은 저녁 만들 힘도 없어서 누군가 만들어주면 좋겠다 싶었거든.”
    “맡겨주세요! 어제 정말 좋은 봄 양배추를 구했거든요.”
    “그럼 신세 좀 질까?”
    “신난다! 자, 얼른 집에 가요.”

    딸깍딸깍 열쇠가 돌아가고 곰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 딸깍 하고 현관 불을 켰다. 이 냄새는 뭐지? 맛있는 냄새가 집안 가득 풍겼다.

    곰이 권하는 대로 커다란 나무 테이블 옆의 통나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맛있어 보이는 알록달록한 수프가 나왔다. 봄 양배추 수프였다. 햇양파와 방울토마토, 브로콜리에 소시지도 들어 있다. 맛있는 냄새의 정체는 바로 이 수프였구나.

    왠지 조금 쑥스러워진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 부드러운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마치 볕이 든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이 수프 정말 맛있네.”

    그렇게 말하고 곰을 보자 곰은 싱글벙글 웃으며 부엌 안쪽으로 사라졌다. 뭐지? 내가 의아해하며 수프를 하염없이 먹고 있는데 띵!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뒤따라 고소한 향이 솔솔 풍겨왔다.

    “수프랑 같이 드세요.”

    곰이 얇게 썰어 노릇하게 구운 바게트를 가져왔다. 이것도 냄새가 아주 좋다.
    “염소 빵집에서 산 거예요.”

    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염소 빵집이라면 역 앞에 있는 아주 유명한 곳이다. 아침 일찍부터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나고 늘 손님들로 복작인다.

    “마트에서 실한 봄 양배추를 사서 수프를 끓였는데 무심코 너무 많이 만든 거예요. 그래서 유리코 씨랑 같이 먹으면 좋겠다 싶어 빵도 준비했어요.”

    곰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몫의 수프를 들고 맞은편에 앉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역시 혼자 먹는 것보다 유리코 씨랑 같이 먹으니까 훨씬 맛있네요.”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곰.

    “흐음, 그렇구나.”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괜히 쑥스러워질 것만 같아 황급히 바게트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이게 또 너무 맛있어서 덕분에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