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세계문학상 수상작가인 저자가 ‘선악의 경계’에 오래 천착하여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돈과 명예에 눈이 먼 자,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자, 오직 자신의 쾌락에 굴복한 자... 작가는 선인의 가면을 쓴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악인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처한 현재와 과거를 교차 편집함으로써, 세상 모든 자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상태로 태어나 그 경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탐욕과 이기심, 부정과 기만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에서, 다만, 선하고 정직하게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만이 자신을 구원하는 통로가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진실에 다가서는 이 소설은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선을 선택하는 힘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고민과 번뇌의 시간 끝에 다다르는 자기 자신의 응답임을 발견케 하는 성찰까지 아우르는 놀라운 작품이다.
■ 저자 이동원
저자 이동원은 ‘살고 싶다’로 제10회 세계문학상을, ‘천국에서 온 탐정’으로 제5회 추미스 소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얼굴들’은 저자의 깊은 관심사인 ‘선악의 경계’를 오래 천착하여 그려낸 작품이다. 차츰차츰 진실에 다가서는 이 소설은 추리/미스터리/스릴러의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선을 향한 각자의 의지와 선택, 믿음을 긍정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찬란한 선택’, ‘수다쟁이 조가 말했다’, ‘당신들의 신’, ‘완벽한 인생’ 등이 있다. 현재 ‘살고 싶다’는 영상화 준비 중이다.
■ 차례
프롤로그
1부
2부
3부
에필로그
작가의 말
일곱 번째 아동 연쇄살인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아 경찰이 된 오광심. 소위‘피 냄새’를 맡는 오광심은 사이코패스와 경찰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살인범을 검거해나간다. 그러던 중 최고급 아파트 꼭대기층에 살며 얼굴 없는 작가로 살아가는 베스트셀러 작가 주해환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스타 강사 고보경의 딸 실종 사건을 비밀리에 맡게 되는데.
얼굴들
주도는 완도 앞바다에 있는 섬이다. 항구에서는 200미터 거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맨몸으로도 오가고,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항구와 배 사이를 오가는 공용 뗏목을 사용하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주도에는 아무도 가지 못한다. 울창한 난대림이 원시 상태로 보존되어 있어 연구 목적 외엔 출입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금지된 장난에 끌리는 아이들에게 어려운 설명 대신 주도에 이무기가 산다는 전설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무기 전설은 오히려 아이들이 주도에 다녀와야 할 이유가 되었다. 완도에서는 해마다 어린이 장보고 선발 대회가 열렸지만, 아이들은 어른이 뽑은 바다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주도 꼭대기에 있는 제사 터에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놓고 온 사람을 그해 바다의 왕으로 추대했다. 제사 터에 두고 온 물건은 다음에 바다의 왕이 될 아이가 주도를 다녀왔다는 징표이자 전리품이었다.
스카이 하이는 유명한 식당과 각종 운동 시설, 쇼핑센터, 극장까지 모든 편의 시설이 내부에 있어 밖에 나가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했다. 편리함 못지않게 보안도 강력했다. 하층부 상가 구역은 외부인도 다닐 수 있지만 상층부 주거 구역은 엘리베이터가 따로 운영되었다. 승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광심과 옥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거구역 최상층에 내렸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복도 제일 바깥쪽 문 앞에 서 있었다.
광심은 아이를 보며 주도를 떠올렸다. 외부인이, 그것도 저런 아이가 여기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 집은 아이가 사는 곳이 아니다. 저 집의 주인을 아는 사람은 집 주인의 친형과 광심 옆에 있는 옥호뿐이니까.
옥호가 문을 열고 비켜서자 광심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광심이 들어가자 개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괴담과 달리 아담한 몸집을 가진 요크셔테리어였지만 광심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옥호가 따라 들어와 개를 들어 올렸다.
옥호는 개를 무릎에 앉히고, 종이 신문을 읽었다. 옥호의 맞은편엔 티브이 대신 족히 천 권은 넘을 책의 장막이 펼쳐졌다. 천장 높이에 맞춰 제작된 책장과 이동이 가능한 사다리가 북 카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현관을 열면 바로 옆에 보이는 화장실을 제외하고 다른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곧 나타날 거라는 집 주인이 귀신이 아니라면 아마도 책장 너머에는 거실만큼 넓은 공간이 있을 것이다. 거실의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책장은 무대를 가리는 커튼이었다. 책으로 만든 커튼이 열리면 주인 공이 나타날 터였다. 광심은 비밀 입구를 찾는 요원처럼 손으로 책장을 훑다가 책 네 권이 놓인 칸에서 멈췄다.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전부 다 광심이 아는 책이었다.
주해환 미스터리 시리즈, 각기 다른 제목을 가진 책 세 권은 이 집의 주인이 쓴 소설이었다.
작가 주해환이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은 옥호가 유명세를 얻은 사건을 옆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발표한 소설도 크게 성공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벌써 데뷔 6년 차였지만 주해환은 서면 인터뷰 외에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주해환은 오로지 글만 쓸 뿐, 집필 외의 모든 외부 활동은 대리인인 형을 통해서만 진행했다. 형 외에 작가 주해환을 본 사람은 집필을 도운 옥호밖에 없었다. 옥호가 비밀스러운 작가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유였다.
주해환의 소설 옆에 파란 표지가 보이도록 눕혀진 책이 한 권 있었다. 주해환이 쓴 책들은 다 합쳐 백만 부가 넘게 팔렸지만 파란 표지의 책만큼 널리 읽히진 않았다. 책장에 진열된 책 전부와 비교해도 그럴 것이다. 주해환이 쓴 소설 옆에 있는 책은 파란색 표지에 손때가 묻은 성경이었다. 광심이 성경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그 칸을 중심으로 책장 일부분이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문이 나타났다. 문 안쪽엔 어둡고 긴 통로가 있었고, 호텔 복도처럼 양쪽으로 방이 늘어서 있었다. 중간중간 천장에 조명이 있었지만 햇빛이 환하게 드는 거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책장 문 뒤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멋대로 자란 곱슬머리,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와 회색 바지, 거기에 양말까지. 곧 외출할 것 같은 차림새였지만 한여름에 저런 옷을 입고 갈 만한 곳은 없었다.
광심은 소매 끝으로 나온 남자의 손가락을 보고, 남자의 옷 차림과 서늘한 실내 온도와 거실을 떠다니는 운무를 이해했다. 남자의 손가락은 그을려 있었다.
옥호가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인사하지. 이 친구가 날 유명 인사로 만든 주 작가. 이쪽은 경찰 홍보단 오광심 경위.”
해환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옥호는 맞선을 주선한 사람처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호가 나가고, 해환과 광심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저씨한테 어디까지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해환은 옥호를 아저씨라 불렀다. 두 사람은 먼 친척뻘이었다. 첫 번째 소설에 도움을 준 이유도 그런 인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광심이 옥호에게 들은 거라곤 해환이 여자 형사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려 하니 취재에 응해달라는 말뿐이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경찰이 취조를 할 때는 용의자가 흘리는 말 한마디, 사소한 몸짓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영상을 녹화한다. 광심은 취재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환 앞에는 노트북은커녕 노트도 없었다.
“근데 여기서 하나요?”
광심이 계속 질문을 했다.
“네, 저는 글도 여기서 써요.”
“그러세요? 전 작업실이 따로 있을 줄 알았어요.”
“글쓰기는 요리와 비슷해요.”
“요리요?”
“독서를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잖아요. 음식이 몸에 영향을 끼치듯이 책도 우리 마음에 영향을 끼치죠. 읽는 사람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책도 있지만 암을 유발하는 나쁜 먹거리 같은 책도 있어요. 작가라면 읽는 맛이 나는 글을 쓸 뿐만 아니라 마음의 건강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주방에서 글을 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광심은 아까 열어봤던 냉장고 안을 떠올렸다.
“마음뿐 아니라 몸의 건강에도 신경을 많이 쓰시나 봐요.”
“네?”
“냉장고를 봤거든요. 채소만 잔뜩 있는 것 같아서요. 고기 같은 건 안 드세요?”
“아니요. 골고루 먹어야죠. 고기도 좋아해요. 구워 먹기보단 삶아 먹는 편이죠.”
“암을 유발하니까요?”
“굽는 냄새가 싫어서요. 사람 살이 탈 때도 고기 굽는 냄새 같은 게 나거든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광심이 완도를 떠나던 날, 아버지가 적어준 성경 구절이다.
광심은 아버지가 건넨 쪽지를 잊지 않았다. 같이 울어주진 못해도 피해자의 곁을 지켰고, 즐겁지 않아도 동료들을 따라 웃었다. 해환은 악수를 나눈 순간부터 지금까지 광심을 웃는 얼굴로 대했다. 광심은 늘 하던 대로 함께 웃어주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제가 불쌍해 보입니까?”
해환이 어정쩡한 얼굴을 한 광심에게 말했다.
“아니요.”
“저는 몸이 불편할 뿐이지 불쌍한 사람은 아닙니다.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특별히 작가님이라서 어려운 건 아니에요. 저는 모든 사람이 어렵거든요.”
광심은 평소 말이 많지 않았다. 말이 많아지면 실수가 생기고, 실수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아무도 광심을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도 그냥 ‘네’라고 답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광심은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다.
“모든 사람이 어렵다고요?”
“네. 안 되나요?”
“아니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경찰은 사람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택할 직업으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경찰이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아버지가 권하셨어요.”
“그런데 왜 하필 경찰이었을까요?”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제가 어릴 때부터 겁이 없었거든요. 공무원이니까 안정된 길이라는 생각도 하셨겠죠.”
“바로 받아들이셨어요? 따로 하고 싶었던 건 없었나요?”
광심이 눈을 돌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을 보았다.
“어릴 땐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대학에 가서 포기했지만요.”
예상치 못한 답이었는지 해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요? 왜 포기하셨는데요?”
광심은 대답할 말을 고르다 이미 적당한 답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택할 직업으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해환은 한 방 먹었다는 듯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진지하게 답하자면 사람을 불편하게 여겨도 괜찮습니다. 저도 그런 편이고, 심지어 사람이 싫어질 때도 많으니까요. 제 생각엔 사람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요.”
‘사람을 버린다라. 사람이 사람을 버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범죄자가 되는 것뿐 아닐까.’
강력반 형사 중에는 경찰이 되지 않았다면 건달이 되었을 것이란 소리를 듣는 인물들이 있다. 광심은 범죄자가 된 자신을 상상해봤다. 어렵진 않았다. 자신과 닮은 범죄자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보단에 오기 전에는 청소년계에 계셨다고요?”
“정확히는, 여성청소년계입니다.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사건을 다루지요.”
“분리가 돼 있군요?”
“네, 피의자나 피해자나 여성은 여성이 상대하는 편이 용이하니까요. 여자 경찰만 있지는 않지만요.”
“저도 그런 이유로 경위님 도움을 받고 있지요. 아무래도 남자 작가는 여성의 심리를 그리는 데 서투니까요. 그럼 첫 번째로 해결하신 사건부터 이야기해볼까요?”
“네, 그러죠.”
광심은 다소 딱딱한 말투로 처음 맡았던 사건을 이야기했다.
“경찰서 근처 고등학교에서 여고생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던 아이였죠.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심장을 갖고 태어났어요. 하지만 심장이 멈춘 장소와 시간이 이상했어요.”
“어떤 면에서요?”
“방과 후 음악실이었거든요. 그 아이는 특수반 학생이라 그 시간에 음악실에 갈 이유가 없었어요. 열쇠도 따로 관리가 되었고요. 사망 당시 음악실에 함께 있던 일반 학급의 남자아이가 신고했는데 충격을 받았다는 걸 감안해도 태도가 이상했어요.”
광심은 기억을 더듬어 담담히 말을 해나갔다. 해환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광심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몸짓과 달리 광심의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차라리 광심이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했을 때가 훨씬 흥미로워하는 듯 보였다.
“이 사건은 별로 도움이 안 될 이야기일까요?”
“아니요. 재밌는데요.”
해환이 웃으며 말했다.
광심은 조용히 따라 웃을 뿐,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해환이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안 믿는 눈치네요. 진짜 재밌는데. 정말 책으로 써도 좋겠다 싶어요. 그렇긴 한데... 그게 첫 번째로 해결하신 사건은 아니잖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경찰이 되기 전에 살인범을 잡으신 적이 있지요.”
해환이 불꽃같은 눈으로 광심을 보며 계속 말했다.
“한바로 말입니다.”
광심이 해환을 노려보았다. 그렇잖아도 서늘한 실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좀 이상했거든요. 왜 나일까? 나보다 경력이 풍부한 여자 형사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나를 택했을까?”
광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쇄 살인마의 손에서 살아남아 형사가 된 아이의 이야기. 확실히 화제는 되겠네요. 워낙 유명했던 사건이었으니까요. 당사자인 제가 취재에 협조한다면 리얼리티는 보장된 거고, 정말 대박이 날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어쩌죠?”
광심이 마시던 생수병의 뚜껑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홍보단 소속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한바로 사건의 생존자가 아니라요. 이건 마시던 거니까 가져갈게요. 잘 모르시겠지만 밖은 엄청 더워서요.”
“오해를 하신 거 같네요.”
“변명은 듣고 싶지 않은데요.”
“설명입니다. 변명이 아니라. 일단 앉아서 제 설명을 들어보시고, 변명 같거든 그 물을 제 얼굴에 뿌려버리고 새걸로 갖고 가시죠.”
광심은 해환을 바라보다 모래시계를 뒤집듯이 반쯤 마신 생수병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서서 듣겠습니다.”
광심이 태도를 분명히 하자 해환은 지체 없이 설명했다.
“한바로가 저지른 범행 수법이나 잔혹함에 대해선 묻지도 않을 겁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하나뿐이니까요.”
“뭔데요?”
“한바로는 타고난 살인자입니까?”
“네?”
“한바로가 그랬잖아요. 자기는 타고난 살인자라고. 경위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한바로가 사이코패스냐고 물으시는 건가요? 이해가 안 가네요. 한바로가 사이코패스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그건 한바로의 범행이 밝혀지고 나서지요. 처음 한바로를 마주했을 때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잖아요. 어떻든가요? 경위님이 만나본 한바로는 정말로 보통 사람과는 다른 타고난 살인자였나요?”
한바로는 전국을 다니며 여섯 명의 남자아이를 살해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범행 대상으로 점찍은 남자아이를 데리고, 완도 앞 바다에 떠 있는 주도로 들어갔다. 한바로는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바다에 수장시킬 계획이었다. 아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한바로가 건넨 음료수를 먹고 잠들었다. 광심이 나타나기 전까진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바로는 한여름에 내리는 눈이라도 본 사람처럼 광심을 쳐다봤다.
그만큼 광심의 등장은 현실감이 없었다. 주도는 출입이 통제된 섬이었고, 그날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려 날씨도 궂었다. 대체 어린아이가 무슨 이유로 혼자 주도에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바로는 광심이 귀신인지 사람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광심은 물에 젖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한바로에게 다가갔다.
한바로는 가까워지는 광심을 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광심은 한바로의 발 앞까지 다가가 힘이 다한 듯 풀썩 주저앉았다. 한바로는 그제야 물에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광심의 얼굴을 알아봤다. 하지만 한바로의 뇌가 몸에 명령을 내리기 전, 광심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광심이 바지 뒤춤에 숨기고 있던 형광색 손잡이의 물체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물체가 번뜩이자 차가운 눈이라도 닿은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한바로의 오른쪽 발목을 휘감았다.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강렬한 통증이 고속 엘리베이터처럼 발목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한바로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오싹한 기운이 몰려왔다. 무언가 뒤에서 한바로의 목을 구렁이처럼 휘감았다. 한바로는 흠칫하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바로의 눈앞에 가냘픈 여자아이의 손목이 보였다.
광심이 형광색 손잡이의 낚시 칼로 한바로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한바로는 감히 광심의 팔을 붙잡지 못했다. 매끄럽게 연결된 광심의 공격은 실제 상황을 가정하고 무수히 연습을 해오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동작이었다. 한바로는 잠시라도 엉뚱한 생각을 했다가는 바로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올 것을 알았다.
광심이 칼로 한바로의 목을 살짝 누르자 한바로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광심이 붉은 달을 배경으로 한바로를 내려다보았다. 한바로는 이 아이야말로 타고난 살인자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