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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
 
지은이 : 콜린 솔터 (지은이), 이상미 (옮긴이)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5년 11월



  • ‘편지’는 아주 특별하고도 매혹적인 주제다. 편지는 두 사람만의 은밀한 대화이자, 대중과 세상을 향한 목소리이며,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과연 자신이 쓴 편지가 훗날 역사적 자료가 될 것을 염두에 둔 인물이 있었을까? 바로 그렇기에 편지는 어떤 역사 기록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야말로 ‘손으로 써 내려간 내밀한 역사의 한 조각’인 셈이다.



    1215년 6월 19일

    잉글랜드 귀족이 대헌장 이후 법적 힘을 과시하려 하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즉 대헌장은 영국 민주주의의 신호탄이었다. 군주로서 절대 권력을 누렸던 잉글랜드의 존 왕은 귀족의 압력에 굴복해 그 권한을 포기해야 했다. 최근 발견된 편지는 러니미드에서 왕이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순간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중세의 정치와 권력 다툼은 마치 무자비한 게임과도 같았다. 존 왕이 젊었을 때 그의 형들이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존 역시 형이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중동에서 제3차 십자군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그는 이 권력 다툼에서 끝내 패배했지만, 1199년에 리처드 1세가 사망한 뒤 결국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된 존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앙주 지방의 영토를 대부분 잃으면서 "땅 없는 존(John Lacklan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프랑스 귀족의 미움을 샀을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귀족과 상의도 없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해 프랑스 원정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 이에 귀족들은 반발했다. 귀족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는 점차 조직적인 군사 반란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링컨과 엑서터를 넘어 런던까지 점령했고, 결국 존 왕은 캔터베리 대주교를 통해 왕국을 위한 평화 협상에 강제로 협조하게 된다.

    그 결과 평화조약인 대헌장이 탄생했다. 대헌장은 왕이 전통적인 봉건 관행을 남용하지 못하게 제한했다. 왕이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주어 귀족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자유민이 재산의 정도와 관계없이 사법 절차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서면으로 보장했다. 25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정의 연맹"을 설립해 이 권한을 감시하고 집행하게 했으며, 필요하다면 무력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적국은 어리둥절해하며, 이제 잉글랜드에는 26명의 왕이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오늘날 대헌장은 기본적인 인권을 규정한 문서로서, 전 세계 법체계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1215년 당시에는 서명한 당사자 중 누구도 이 문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역자들은 런던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어겼고, 존 왕은 평화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다시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계속 이어진 내전은 이듬해 존이 사망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발견된 편지를 통해 적어도 처음에는 일부 귀족이 그들의 새로운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대헌장에 서명한 지 불과 4일 만에 새로 구성된 위원 다섯 명이 켄트 자치주 당국에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에는 귀족들이 기사 12명을 임명하는 선서식에 참석해야 하며, 각 자치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켄트주에 임명되어 "주 보안관과 그 부하들이 저지른 극악한 악습을 조사하고 숲과 숲 관리인, 사냥터와 사냥터 관리인, 강둑과 강둑 관리인에 관련된 나쁜 관습을 억제"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는 대헌장의 조항 가운데 하나였다. 그 서한은 새로운 법체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즉, 그때까지 주 보안관과 부하들, 숲 관리인, 사냥터 관리인, 강둑 관리인이 저지른 모든 악습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뜻이었다. 새로운 질서로 기존의 부정적 관행과 문제를 청산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켄트의 보안관과 왕의 모든 집행관은 그들이 맹세할 대상이 왕이 아니라 위원회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했다.

    대헌장 서명 이후 잉글랜드 귀족 다섯 명이 켄트 자치주 당국에 보낸 서한
    우리는 지금, 이 편지를 전달하는 아인스포드의 윌리엄, 윌리엄 드 로스, 토마스 드 캔빌, 그레이브의 리처드를 당신들에게 보냈습니다. 우리는 국왕 폐하가 주 보안관과 앞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따라 이들이 우리를 대신해 당신들 모두의 선서를 받도록 위임합니다. 폐하의 편지에 명시된 양식에 따라 상기 네 명의 기사가 결정할 일정 시간과 장소에서 그들에게 선서할 것을 명령합니다. 또한 귀하의 주에서 12명의 기사를 선출할 때 네 명의 기사가 참석해 주 보안관과 그 부하들이 저지른 악습을 조사하고 숲과 숲 관리인, 사냥터와 사냥터 관리인, 강둑과 강둑 관리인에 관련된 나쁜 관습을 억제하겠다고 서약하기 바랍니다.

    1588년 7월 5일
    스페인의 왕이 무적함대로 잉글랜드르 공격하라고 명령하다
    무적함대는 1588년 5월 말,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공작의 지휘 아래 130척의 배를 싣고 스페인에서 출항했다. 시도니아 공작은 플랑드르에 집결한 군대를 호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시도니아는 해군 지휘 경험이 없는 귀족이었고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무적함대가 출항한 목적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그녀가 다시 세운 개신교 체제를 전복하고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스페인 식민지와의 무역을 심각하게 방해하던 잉글랜드의 사략선(전시에 적선을 붙잡을 권리를 인정받은 민간 무장선-옮긴이)을 막는 것이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펠리페 2세가 원래 임명한 지휘관인 산타 크루즈 후작이 사망하는 바람에 뒤늦게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펠리페 2세는 시도니아 공작이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도니아 공작은 군 복무 경험이 거의 없었고, 해군 경험은 더더욱 없었으며, 뱃멀미를 심하게 했다.

    함대는 리스본에서 출발한 직후, 비스케이만을 건너던 중 폭풍에 휩쓸려 흩어져버렸다. 이때 시도니아의 연약함이 시험대에 올랐다. 공작은 펠리페 2세에게 함대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했다. 라코루냐 로 돌아가 군을 재정비하고 함대를 수리하면서 양국 간의 평화 협상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도록 출격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펠리페 2세는 1588년 7월 5일에 답장을 보냈다. 펠리페 2세의 지시는 매우 명확했다. "이번 사건 때문에 계획을 중단할 의도는 없으며, 어떤 경우에도 이미 시작된 임무를 계속 진행할 것이오. 이 어려움 때문에 원정을 포기해서는 안 되오."

    시도니아 공작은 함대에 성격이 다른 배들이 섞여 있는 것을 문제 삼았다. 130척의 함선 중 28척만이 전용 군함이었고, 나머지는 병력과 보급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개조된 화물선과 바지선이었다. 이 배들은 애초에 바다가 아닌 연안 지역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져서 폭풍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실종된 상태였다. 왕은 임무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공작에게 실종자들을 찾지 말라고 명령했고, 나머지만으로도 항해를 완벽하게 마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가장 쓸모없는 배 12척에서 15척을 남겨두고 그 배에 실린 짐을 다른 배로 옮기면 될 것이오."

    항해가 지연되면서 원정대의 물품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다. 무적함대는 2개월분의 식량과 음료를 싣고 항해를 시작했지만, 일부 선박에서 물과 식량이 바닥났다. 펠리페 2세는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신선한 빵, 고기, 생선을 제공하시오. 예비비를 사용하면 됩니다. 내가 다음 명령을 내리는 즉시 항해를 시작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명령했다. 평화 회담은 이미 무산되었고, 다음 날 시도니아 공작은 마지못해 왕에게 복종하며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영국해협의 악천후, 네덜란드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페인 지원군과의 통신 불량, 칼레 외곽에 정박해 있던 스페인 함대를 겨냥한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경의 발화 사건, 북해의 폭풍 등 여러 요인이 얽혀 무적함대는 결국 스페인 왕실의 국제적 망신거리가 되고 말았다.

    영국의 드레이크와 존 호킨스 경은 거대한 스페인 갤리온선보다 작지만 빠른 전함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잉글랜드군의 방화선(fireship) 사용은 침략군이 배에 타기만을 기다리던 스페인 함대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펠리페 2세는 고집스럽게 1596년과 1597년에 두 척의 더 작은 함대를 보냈지만, 두 척 모두 중간에 폭풍을 만나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마침내 잉글랜드가 승리하면서 잉글랜드 해군이 스페인 해군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이 인정되었고, 북유럽에서 가톨릭의 정치적 영향력은 완전히 약화되었다. 무적함대의 3분의 1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난파되었다. 코네마라(아일랜드 서해 지역-옮긴이) 지역의 유명한 야생마는 이때 해안으로 헤엄쳐온 스페인 기병이 타던 말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보낸 편지
    그대가 28일에 보낸 편지를 어제 받았소. 답장을 하기에 앞서, 지난 26일 편지와 1일자 편지에서 밝혔듯이 이번 사건 때문에 계획을 중단할 의도는 없으며, 어떤 경우에도 이미 시작된 임무를 계속 진행할 것이오. 이 어려움 때문에 원정을 포기해서는 안 되오. 함대를 다시 정비하고 흩어진 주요 병력이 다시 결집하면 작전을 진행할 것이오.

    이미 말한 것처럼 내 의도는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명확하게 말했소. 다만 두 번째로 보낸 편지에서 한 명령, 즉 함대가 10일 이내에 출항하는 것은 실종된 함선이 합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며 최대한 빨리 함선을 수리하고 남겨둘 함선의 무기, 병력, 식량을 출항할 함선에 실어야 하오. 여기서 남겨둘 함선이란 수리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함선으로, 그 배만 놔두고 배에 실었던 모든 물품은 다른 배에 옮겨 실어야 하오.

    그래도 여기서 내 뜻을 분명히 반복해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에 따라 전쟁위원회는 시간을 벌기 위해 가장 쓸모없는 배 12척에서 15척을 남겨두고 그 배에 실린 짐을 다른 배로 옮기면 될 것이오. 물론 나머지 실종된 함대가 모두 합류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오.

    이제 그대가 소집한 협의회 보고서와 의견을 첨부한 그대의 편지에 대해 말하겠소. 무적함대가 코루냐를 떠나 해안을 따라 실종된 배를 수색해야 한다는 의견은 어떤 경우에도 채택해서는 안 되오. 실종된 함선은 코루냐에서 그대와 합류해야 하며, 모든 선박 혹은 충분한 수의 함선이 집결되면 원정을 계속해야 하오. 이런 취지로 보낸 명령을 승인하겠소.


    1793년 1월 23일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 식물학자에게 미국 북서쪽 탐험을 의뢰하다
    토머스 제퍼슨이 꿈꾸었던 미국은 13개 식민지의 연합, 그 이상이었다. 신생 국가 초창기에 제퍼슨은 태평양 연안으로 가는 경로를 찾기 위해 서부 탐사를 적극 지원했다. 그리고 프랑스 식물학자 앙드레 미쇼(Andre Michaux)가 이 일을 수행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앙드레 미쇼는 두 세계 사이에 갇힌 인물이었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프랑스 농업에 유용하게 사용할 만한 미국 식물들을 연구하라는 임무를 맡기기 위해 앙드레 미쇼를 고용했다. 그러나 미쇼가 신대륙에 있는 동안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루이 16세는 단두대로 보내졌다. 미쇼가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역시 목숨을 잃게 될까?

    미쇼는 북미의 생물 다양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약 6만 그루의 나무를 비롯한 식물과 동물을 프랑스로 보냈다. 반대로 유럽의 새로운 종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급여 지급이 중단되자, 생계를 이어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미쇼는 1743년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미국철학협회"로 눈을 돌렸다. 인류의 과학 지식을 확장하는 데 전념했던 이 조직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토머스 제퍼슨도 이 협회의 회원이었다. 미쇼는 제퍼슨이 추진했던 서부 탐험 계획이 무산된 것을 알고 있었다. 미쇼는 지금까지 밀린 급여에 해당하는 선금을 받는 조건으로 비슷한 탐험을 수행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탐험 조건을 명시한 제퍼슨의 편지는 1979년 미국철학협회 기록 보관실에서 다시 발견되기 전까지 거의 200년 동안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편지는 탐험에 대한 제퍼슨의 비전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그의 비전까지 잘 보여준다. 이 신념은 이후 독립선언서 작성의 기반이 되었다.

    미쇼는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을 따라가며 항해 가능한 수로와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수로 사이에 고도가 낮은 연결점을 찾아야 했다. 그곳에서 다른 유럽인을 만나 보고서를 보낸 다음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협회 회원들에게 여정 중에 관찰한 모든 이야기를 전하고 그들의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러나 미쇼는 이 연구 결과를 직접 출판할 권리는 끝까지 지켜냈다.

    제퍼슨이 미쇼에게 부여한 과학 임무는 매우 광범위했다. 미쇼는 유용한 동물, 식물, 광물 자원의 위치를 기록하고, 현지 주민을 관찰해 인류학적 기록을 작성해야 했다. 제퍼슨은 지나치게 구체적인 지시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매머드"와 라마를 발견하면, 주의 깊게 관찰해 "북쪽으로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알아보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출발 직전, 미쇼는 프랑스에 들어선 새 정권이 이제 고인이 된 루이 16세와 같은 조건으로 자신을 고용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프랑스 공화정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고 싶었던 미쇼는 새로운 주미 프랑스 대사가 비밀리에 추진한 스페인령 루이지애나 탈환 계획에 가담했다. 그러나 대사는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루이지애나 탈환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미쇼 역시 미시시피강 서쪽을 탐사하지 못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1800년에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되찾았지만, 1803년에 제퍼슨이 다시 협상을 통해 루이지애나를 매수했다. 180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퍼슨은 "루이스 클라크 원정대(Corps of Discovery)"라고 불리는 정예 부대를 결성해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에게 자신이 늘 꿈꿔왔던 서부 탐험 임무를 다시 맡겼다.

    1840년 5월 1일
    최초의 우표가 편지 발송 방식을 변화시키다
    2,500년 편지의 역사에서 우표를 사용한 기간은 2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로랜드 힐(Rowland Hill)이 우표를 발명하면서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통신 혁명을 일으켰다.

    영국의 중앙우체국(General Post Office, GPO)은 1660년 찰스 2세 통치 기간에 설립되었지만, 로열 메일(Royal Mail)의 역사는 1516년 헨리 8세가 우체국 마스터라고 불리는(이후 우체국장) 직위를 만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열 메일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왕실에서만 사용되던 서비스였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좌가 통합된 후,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 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두 나라 사이에 로열 메일 서비스를 만들었다.

    찰스 1세는 처음으로 대중이 로열 메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그의 아들 찰스 2세는 GPO를 통해 전국에 우편망을 구축했다. 1784년 우편 마차가 장거리 우편물을 배달하기 시작했고, 1830년에 최초의 우편 열차가 도입되었다.

    이로써 편지는 점점 대중화되었지만, 여전히 발신자는 어떠한 요금도 부담하지 않았다. GPO가 편지의 무게와 운반 거리에 따라 개별적으로 가격을 책정해 수신자에게 요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편 요금은 대체로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몇몇 인색한 발신자들은 우편물 겉면에 수신자가 식별할 수 있는 코드를 남겼다. 이 방식으로 수신자는 우편물 수령을 거부해 요금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1839년, 단기간 해결책으로 "균일한 4펜스 우편(Uniform Fourpenny Post)"이 도입되었다. 이는 무게 15그램 편지 기준으로 거리에 상관없이 4펜스의 선불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미리 요금을 내지 않은 편지에는 비용이 두 배로 청구되었다. 그 결과 로열 메일을 통해 운송되는 우편물 양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1839년 11월에서 1840년 2월 사이에 그 양이 두 배로 늘어났다.

    선불 편지에는 손이나 고무도장을 이용해 ‘4’라고 표시했는데 이 표시는 남용과 위조에 취약했다. 1840년 1월에는 요금이 1페니로 인하되었고, 5월에는 위조를 방지하고 무임 발송을 막기 위해 검은색으로 인쇄된 라벨인 ‘페니 블랙(Penny black)’이 도입되었다. 이 페니 블랙은 세계 최초의 공공 우편용 접착식 우표였다.

    페니 블랙과 함께 ‘2페니 블루’도 발행되었다. 이 우표들은 국내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영제국’이라는 글자 없이 인쇄되었다. 영국은 지금도 국가 이름 없이 우표를 발행하는 유일한 국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모든 영국 우표에는 통치 중인 군주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발송된 우표에는 빨간 잉크로 소인을 찍었지만, 우표의 검은 부분에는 빨간 잉크로 찍은 소인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빨간 잉크를 제거하고 이를 재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1841년 2월 페니 블랙은 페니 레드로 대체되었고, 페니 레드에는 훨씬 더 잘 보이고 오래가는 검은색 잉크로 소인을 찍었다. 페니 블랙은 짧은 기간 사용되었지만, 인쇄된 우표는 약 6,900만 장에 이른다. 한 장에 240개가 인쇄되었고, 이를 가위로 잘라 쓰는 형태였다. 우표 사이에 있는 천공은 1850년에야 도입되었다.

    1893년 9월 4일
    베아트릭스 포터가 다섯 살 노엘 무어를 위해 편지에 그림을 그리다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와 그녀의 형제 버트럼은 런던 남서부 집에서 여러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으며 고립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베아트릭스가 성공적인 아동문학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가정교사인 앤 무어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앤의 아들 노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베아트릭스는 다른 아이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고, 어린 시절 대부분을 스코틀랜드의 퍼스셔나 잉글랜드의 레이크 디스트릭트 같은 아름다운 시골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자연스럽게 자연과 시골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이 되었고, 부모님처럼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앤 무어는 가정교사를 넘어 베아트릭스의 오랜 친구가 되었고, 성인이 된 베아트릭스는 앤의 어린 자녀들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다.

    1893년 여름, 앤의 큰아들 노엘이 병에 걸렸다. 베아트릭스는 종종 편지를 보내 노엘을 격려했다. 스코틀랜드 테이강 주변 던켈드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던 베아트릭스는 더 이상 전할 만한 새로운 소식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빨리 낫기를”이라고 말할 새로운 방법도 없었다. 그해 9월 4일에 보낸 편지에서 베아트릭스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피터라는 네 마리 작은 토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베아트릭스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것이 바로 『피터 래빗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피터는 베아트릭스가 기르던 진짜 토끼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베아트릭스는 피터를 자주 그렸다. 그녀의 첫 토끼 이름은 벤저민인데, 벤저민은 나중에 『벤저민 버니 이야기』로 유명해진다. 베아트릭스는 편지를 쓸 때 작고 간략한 삽화를 덧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그해 9월 노엘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야기와 함께 베아트릭스가 그린 독특한 삽화의 첫 번째 버전이 들어 있었다.

    노엘은 분명 이 편지를 받고 기뻐했을 것이다. 앤은 자신의 옛 제자가 쓴 편지에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이 이야기가 좋은 아동 도서가 될 수 있다며 출판을 제안했다. 베아트릭스는 버트럼과 함께 크리스마스카드를 제작한 적이 있어서 출판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그녀는 출판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1901년 사비를 들여 흑백으로 된 초판 250부를 인쇄했다. 그리고 그중 한 권에 다음과 같은 슬픈 소식을 기록했다.

    "1901년 1월 26일,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난 가엾은 피터 래빗을 추억하며... 지적 한계와 털, 귀, 발가락이 지닌 외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결같이 온화했으며, 언제나 다정했습니다. 사랑스러운 동반자이자, 조용한 친구였습니다."

    책은 인기를 얻었고, 곧 추가로 200부가 더 인쇄되었다. 그러자 이전에 출판을 거절했던 프레데릭 워른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다. 워른은 에드워드 리어, 케이트 그린어웨이, 월터 크레인 같은 예술가의 삽화가 담긴 그림책을 출판하던 출판사였다. 워른에서 새롭게 컬러판으로 출판한 『피터 래빗 이야기』는 첫해 2만 부가 팔렸다. 이후 27년에 걸쳐 베아트릭스는 22개의 이야기를 더 쓰게 된다. 여기에는 다람쥐 넛킨과 개구리 제리미 피셔처럼 노엘 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등장한 캐릭터들도 포함되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그동안 얻은 수입으로 그 지역의 여러 농장을 매입해 시골 풍경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오늘날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던켈드에는 베아트릭스의 작품을 전시해둔 박물관이 있으며, 작은 정원에는 그녀가 처음 편지에서 상상했던 생명체들의 조각상도 남아 있다.